| | | ▲ 사회 : 김영철(동아시아미래재단 대표이사) |
| | | ▲ 발제 : 박순성(동국대 교수) |
| | | ▲ 토론 : 손열(연세대 교수) |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분단체제의 미래 박순성(동국대 교수)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 정세는 2012년 말부터 2013년 8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군사적 긴장의 고조, 안정과 대화의 모색, 남북관계 복원의 계기 형성 등의 국면을 거쳤다. 2013년 8월 말부터 관계 복원을 가속화할 것 같았던 남북한은 9월 말부터 서로 견제하고 압박하는 태도를 다시 보이고 있다. 이처럼 안정적이지 못하고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네 개의 질문이 제기된다.
▶ 질문 1. 최근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은 구조 또는 전략의 전환과 관련되어 있는가?
한반도 정세는 단순히 남북관계만으로 표현되지 않고, 북미관계라는 다른 하나의 주요한 현상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 개국 (나아가 일본, 러시아를 포함한 6 개국) 사이에서 형성되는 양자 및 다자 관계가 한반도 정세를 복합적으로 결정하지만, 한반도 정세의 기본 동향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변화에 좌우된다. 한편 한반도 정세의 조금 더 미묘한 변화와 장기적인 추세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더하여 한중관계와 미중관계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우선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두 축으로 삼아서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파악한다면, 19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는 대체로 단절보다는 접촉이, 충돌보다는 협력이 두드러졌다. 북한핵문제 때문에 곡절과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 대화와 협력을 통해 남북관계가 발전하고 한반도의 평화가 증진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 말부터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명박 정부 5 년은 관계 단절과 무력 충돌이 상호 작용하면서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켰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 전후 시기는 충돌과 단절이 최고조에 달하던 기간이었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2012. 12. 12)와 제3차 핵실험(2013. 2. 12), 그에 각각 대응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한 제재 결의(2087호 2013. 1. 22; 2094호 2013. 3. 7)는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과정이었다. 북한의‘핵 선제타격 권리 행사’주장과 미국의 핵무기 및 스텔스 폭격기. 전투기까지도 동원한 무력시위가 무력 충돌 위기의 질적․양적 수준을 보여주었다. 개성공단은 2013년 4월 9일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후, 5월 3일 남측 인력의 최종적 철수에 따라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2013년 5월 초, 남북관계의 단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였다. 위기와 단절 속에서 남북한, 미국, 중국은 위기 국면을 진정시키고 대화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한-미 정상회담(5.7), 북-중 고위급접촉(5.22~24), 북한의 남북한 당국회담 제안(6.6), 남북한 사이의 국장급 실무접촉(6.9~11), 미-중 정상회담(6.6~8), 한-중 정상회담(6.27~28)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대화 국면이 조성되었다. 남북한은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회담을 7~8월에 걸쳐 개최하였으며, 몇 차례 고비를 넘기고 8월 14일 개성공단 정상화에 합의하였다.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 이후에 남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또한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처럼 남북관계의 복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았던 상황에서, 북한은 9월 21일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하였다. 그런데 북한은 이미 8월 말경에 한국과 미국의 연합군사훈련(UFG, 8.19~30) 중 실시된 B-52H 폭격기 출격에 대해 핵 위협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한 남북한 합의를‘원칙적 승리’라고 평가하는 남한 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9월 말 이산가족 상봉 연기가 발표되었다. 한편 남북관계가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상황 속에서도 개성공단은 9월 16일부터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 사무처도 9월 30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013년 10월 초순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한 성격은 이명박 정부 시기의 단절․충돌 국면에서 박근혜 정부 시기의 새로운 접촉․협력 국면으로 가는 과도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접촉과 협력이 두드러졌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났던 김대중 정부 초기의 불안정한 국면, 심지어 노무현 정부 초기의 불안정한 국면을 생각한다면, 대립․대결 국면에서 대화․협력 국면으로 가는 과정이 순조롭기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북한 내부에서도, 남한 내부에서도 국면 전환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들(예를 들면,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정책경쟁)이 나타날 것이다. 특히 현재의 국면 전환이 남북관계의 구조 차원이나 남북한 정부의 전략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환을 의미한다면, 불안정성 자체는 결코 부정적 현상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1980년대 말에 시작되었다가 2000년대 말에 끝난 남북한 사이의 대화․협력 단계를 복원하기 위한 과도기의 난관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아래에서 두개의 다른 답이 제시된다.)
▶ 질문 2.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작동하고 있는가?
단절․충돌 국면에서 접촉․협력 국면으로의 전환을 대화․협력 단계로의 복귀로 해석하려는 시 도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아마도 다른 해석을 내어놓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의 국면은 단순히 지난 시기, 특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대북포용정책의 시기에 형성된 남북관계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남북관계와 북한의 행동에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재의 불안정성은 신뢰프로세스에 의해 북한 지도부의 근본적 변화와 남북한 사이의 신뢰 형성이 이루어지면 사라질 것이다. 통일부가 8월에 체계화하여 발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설명 책자)에 따르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핵심 명제는‘대화, 약속 이행, 호혜적 교류․협력을 통한 신뢰 축적’과‘신뢰 축적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활용한 대북․외교정책의 효과적 추진, 남북관계 발전, 한반도 평화정착, 통일기반 구축’이다(5쪽).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도‘정책 수단’으로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북한이 평화를 깨는 잘못된 행위를 한다면 반드시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협력의 길로 나오도록”할 수 있다(5쪽). 다시 말해,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면 그러한 선택에 지지와 협력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보상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도 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의 일부분이”기 때문에(29쪽),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남북관계 경색국면에서도 작동한다. 이렇게 정의되고 설명된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북한의 근본적 변화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당연히‘근본적 변화’라는 개념이 상정하고 있는 국가의 정체성이나 행동에 대한 본질론적 관념에 대한 비판은 피하기 힘들다.) 남북한 사이의 신뢰 축적은 언제, 어떻게‘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과거의 대화나 교류․협력은 왜 신뢰 축적으로 이어지지 못했나? 이러한 질문은 여기에서 다루지 않겠다. 우리의 관심은 두 가지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6월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작동 결과인가? 9월 말에 북한이 취한‘잘못된 행동’에 대해 남한 정부는 어떻게 강력히 대응하고 있는가? ‘올바른 선택에 대한 보상, 잘못된 행동에 대한 대가’라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행동 원칙은 ‘즉각적 맞대응’이라는 행동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2012년 말부터 2013년 4월까지 벌어졌던 남북관계의 악화와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는 북한과 남한․미국 사이에 벌어졌던 즉각적 맞대응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맞대응은 어떤 조건에서 상대방의 행동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작동했다고 한다면, 남한의 어떤 맞대응이 북한으로부터 대립․대결의 행동이 아니라 대화․협력의 행동을 끌어내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강경정책과 유화정책의‘균형’과‘통합’이라는 다소 수사적인 답변만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 뒤부터, 남한 정부는 강력하게 북한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 남한은 군사적으로도 북한에 대한 압박을 늦추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다. ‘킬 체인’과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의 조기 구축 강조, 한국군 자체의 군사적 역량 과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의‘사실상 합의’,‘ 맞춤형 억제전략’완성 등을 통해 남한과 미국 정부가 북한 정부에 보내고 있는 메시지로부터, 결코 우리는 한반도 정세의 긍정적 변화와 북한의 행동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은 남한이‘대화 있는 대결’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지 묻고 있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특성과 최근 남북한(과 미국)의 행동은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이 구조나 전략의 전환으로부터 오는 과도기적 현상, 또는 북한이 근본적 변화로 나아가기 전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2012년 말부터 지속되고 있는 군사적 대결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에, 남북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2013년 말의 한반도 정세는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통제하기가 쉽지 않은 위험을 안고 있다. ▶ 질문 3. ‘흔들리는 분단체제’는 여전히 동요하고 있는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나타났던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은, 심지어 북한과 남한․미국 사이에 벌어지는 군사적 갈등은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상황이나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도 반복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불안정한 안정’또는‘안정 속의 불안정’이라는 기묘한 한반도 분단 상황은 분단체제론의 관점에서 한반도 현실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분단체제론은 남한과 북한의 지배세력들이 대립․대결하면서도 교묘하게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체제, 그러한 공생관계로부터 소외되고 고통을 받고 있는 남북한의 민중들, 그리고 그러한 억압체제와 민중들 사이의 대립 등으로 한반도 분단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한반도를 놓고 세력경쟁을 벌리는 강대국들 사이의 대립-의존 체제와 결합되어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에 미․소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외부에서 유지되던 강대국들 사이의 대립-의존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남북한의 외교적 자율성이 강화되고,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은 남북관계 개선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남한의 민주화세력은 북한과 통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남한의 시민사회는 1990년대 초반 북한의 경제위기를 계기로 삼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라는 범국민적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반공주의와 분단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다. 마침내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남북관계 확대․심화는 분단체제를 본격적으로 흔들기 시작하였다. 분단체제의 동요는 그 자체로 남한 사회 내부에서 세력들 사이의, 사회집단들 사이의, 가치지향들 사이의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정치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또 민주적 정치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북․통일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은 정쟁의 원천이자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2008년 이후부터 남북관계가 점차 충돌과 단절의 국면으로 빠져들면서 더 심화 되었다. 분단체제의 동요가 남남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정도로까지 진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남남갈등의 격화와 남북관계의 악화는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새로운 조건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흔들리기 시작했던 분단체제가 다시 안정화되고 공고화되기 시작하는 경향은 최근 여러 차원에서 나타나고 있다. NLL 논란, 통합진보당 일부 세력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부여와 그에 따른 구속․기소, 진보세력에 대한 무차별적인 이념 공세, 이념적 낙인과 프레임을 동원한 사회적 소통과 토론의 무력화 등은 남한 내부에서 분단체제의 작동 논리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북한 정권의 군사주의노선이 남북관계의 악화를 설명하는 유력한 요인이 됨으로써, 분단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은 남한 사회에서 점차 위축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국력 신장이 동북아질서 변화의 핵심 요소로 등장함으로써, 한반도-동북아에서 남방 삼각관계와 북방 삼각관계의 새로운 대립이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 질문 4.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기본 개념도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남북간 신뢰 형성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신뢰 형성과 남북관계 발전, 한반도 평화정착, 통일기반 구축이 선순환되도록 정책을 추진해 나”가려고 한다(6쪽). 또한“과거 대북정책의 장점을 수용”한다는 원칙에 따라, “비핵화의 진전 없이 남북관계의 발전만을 추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동시에 남북관계의 모든 사안들을 핵문제와 연계시켜서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26-8쪽). 이러한 측면은 분명히 한반도신뢰프로세스가 가지고 있는 유연성과 통합성을 잘 보여준다. 과연 이러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장점이 현실에서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한반도 분단체제의 재-안정화 경향이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갈등구조와 결합된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제대로 작동하지도 못하고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서 강조하는“국민과의 신뢰, 남북간 신뢰, 국제사회와의 신뢰(5쪽)”모두는 분단체제가 다시 강화되면서 이미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분단체제 하에서 작동해야 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정치․사회․문화적 국내 환경, 외교․안보 차원의 조건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며, 또한 이러한 환경과 조건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통일부의 해석에 따르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서“‘균형’은 단순히 강경과 유화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27쪽). 아마도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포용정책과 강경정책의 장단점을 화학적으로 잘 조합한 제3의 정책’또는‘현실성을 강화한 포용정책 2.0’으로 해석하는 것이고(능동적 신뢰 구축), 다른 하나는‘표용정책과 강경정책의 산술적 평균 또는 기계적 중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소극적 신뢰 구축). 이러한‘강한 해석’과‘약한 해석’중에서, 통일부는‘강한 해석’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추진되어온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중에서‘약한 해석’이 현실에 더 가깝다. 아마도 이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의 담당자들이 중도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고, 대화파라기보다는 안보파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대북정책들의 진정한 균형과 통합은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게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이다. 지금까지의 평가가 옳다면,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성공을 위해서는 몇 가지 전환이 필요하다. 먼저, 남한 정부는 다면적 병행전략을 기본 노선으로 설정하고, 현재의 경색 국면을 돌파하기 위한 유연하고 대범한 정책수단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유연할 때 더 유연”해야만 한다(27쪽).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보수적인 대북관, 원칙주의 경향의 정책기조, 맞대응전술 등을 고수한다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남북한이 관계 악화의 늪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의 적극적 해석에 기초한 남한 정부의 선제적 조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조치가 북한 내부의 대화파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남북대화의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단호할 때는 더욱 단호하게 접근하”는 방법(26쪽)은 남북관계가 일정 정도 궤도에 올라섰을 때, 단호함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을 때에 사용해도 결코 늦지 않다. 다음으로, 한반도 분단체제가 동북아에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질서와 결합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의 질서를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고 대북․통일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최근 몇 년간의 변화를 보면, 남북관계 개선과 지역국가들 사이의 경제관계 심화에 따라 한반도-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안정성이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사이에서 또 지역국가들 사이에서 점차 갈등과 분쟁이 심화되고 있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에서 강조하는‘아시아패러독스’). 중국과 미국의 국력 변화에 따라 지역 차원에서 두 강대국 사이에 힘의 균형이 점차 이루어지고 있지만,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협력과 갈등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여전히 중국이 말하는 신형대국관계는 모호하고,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군사적 경향이 강하다. 결국 두 강대국의 한반도-동북아 지역에 대한 전략적 목표가 수렴하지 못함에 따라, 지역정치에 대한 두 강대국의 지도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문제는 현재 남한 정부의 군사․안보정책이 한미동맹 강화와 군비 증강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끝으로, 한반도문제를 한반도 비핵화, 또는 북한의 비핵화라는 오래된, 물론 여전히 매우 중대한, 목표를 중심에 놓고 파악하는 관점을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문제를 비핵화문제로 좁혀 버리면, 한반도 정세 안정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당면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구상이 나올 수 없다. 역설적으로,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는 새로운 정책구상의 관점에서는 일종의 인식론적 장애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북한핵문제와 남북관계 발전을 일정 정도 분리하려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비핵화 진전과 정치․경제․외교적 조치들을 연결시키려는 관점은 남아 있다(18쪽). 이제는 비핵화를 중장기 정책구상의 핵심 목표의 하나로 설정하면서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더 포괄적인 정책구상을 세울 필요가 있다. 한반도-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이라는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정책구상이 필요하다. 북한 핵문제는 단순히 핵무기의 비확산이나 반확산의 관점에서 해결될 수 없다. 한반도-동북아 지역의 군사적 밀집도가 매우 높은 상태에서, 단순히 군사․안보 차원에서만 북한핵문제를 다루면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남북한 사이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상호 불신과 적대감이 고조되어 있다면, 비핵화 요구는 일종의 압박으로 인식될 뿐이다. 북한핵문제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며, 또 한반도-동북아 지역 차원의 안보협력이라는 관점에서 북한핵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북한핵문제를 한반도문제, 동북아문제의 구성요소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시켜 바라볼 때, 북한핵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통해서 한반도-동북아 평화․협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동북아 평화․협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북한의 비핵화, 한반도-동북아의 비핵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는 결국 남한이 마련해야 하며, 또 실제로 마련할 수 있다. 한반도-동북아 질서 재편에서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역할이 의외로 제한적이라면, 또 러시아나 일본 모두 외교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또 북한이 여전히 체제생존을 위한 군사주의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남한이 나설 수밖에 없다.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북정책은 남한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북한핵문제와 관련한 남한 정부의 역할과 성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통해 한반도-동북아 질서를 흔들고 있다면, 반대로 남한은 남북관계 개선․관리와 균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대미 외교를 통해 북한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평화적이고 협력적인 한반도-동북아 질서 형성의 단초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한 정부는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기를 원하며, 북한의 붕괴나 체제전환을 통한 흡수통일을 결코 원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제는 흡수통일이라는 허깨비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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