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2016. 6. 27. 11:01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주식회사형 국가에 대한 종합보고서.

‘지옥’이라는 뜻의 영단어 hell과 한반도의 전근대국가인 ‘조선’을 합친 말 ‘헬조선’. 그런데 왜 ‘헬한국’이 아니라 ‘헬조선’인가? 『주식회사 대한민국』는 ‘헬조선’에 대한 분석을 담은 책으로 헬조선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 ‘지옥의 논리’에서 헬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들과 함께 생존이라는 미명 아래 양심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 능력이라는 이도올로기에 갇혀 스스로를 착취하는 모습 등을 살펴본다. 2부 ‘그들이 원하는 세상’에서는 ‘박근혜 시대’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모순과 한계를 집중 분석한다.

3부 ‘씨줄과 날줄: 병영국가, 민족주의, 식민성’에서는 ‘박근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 기저에 깔려 있던 인식들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4부 문제는 국가다’에서는 대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적어도 재분배 기능, 자본에 대한 견제·보완 기능은 갖춘 국가로 나아가자고 외친다.



저자소개

저자 : 박노자
저자 박노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박노자’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었다. 스승 미하일 박 교수의 성을 따르고,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의 ‘노자(露子)’를 이름으로 삼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전근대성을 비판하며 주목받은 그는,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날카로운 칼럼들을 써왔으며, 이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저서로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공저) 《발자국을 포개다》(공저) 《좌파하라》(공저) 《붓다를 죽인 부처》 《씩씩한 남자 만들기》 《박노자의 만감일기》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주)대한민국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법

1부 지옥의 논리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
경제 인종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영어병(病) 백인병(病)
한 대학 강사의 죽음
학피아, 학살의 종범들
양심이 불가능한 사회
‘비정상’의 ‘정상’화
‘능력’이라는 이름의 허구
이민만이 ‘헬’탈출구로 보이는 이유

2부 그들이 원하는 세상
‘종북 사냥’의 속셈은?
양심수와 공포정치
박근혜, 최악의 대통령
통일대박론의 진정한 의미
통일을 가로막는 것들
박근혜 시대의 이데올로기
막후의 지배자가 우려하는 것
유사 파시즘의 등장

3부 씨줄과 날줄: 병영국가, 민족주의, 식민성
박정희 시대, ‘기적’은 없었다
[국제시장], 전체주의 미학의 향연
뉴라이트들의 역사: 출세주의와 굴종의 교과서
‘민족’ 이후의 민족?
친일은 왜 단죄해야 하는가
한국은 여전히 식민지인가
한-미 동맹이라는 덫
아류 제국주의 국가, 대한민국
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진행 중

4부 문제는 국가다
국민의 생존도 보장 못하는 부실 국가
‘폭력’의 기억, 폭력의 망각
주먹이 군림하는 사회
한국적 특색의 신자유주의
‘국익’이라는 합리화
우리에게 과연 인권이 있는가?
분노의 흐름
기업국가 대한민국
무엇을 할 것인가?




헬조선, 이민 외에 답은 없는가?
악질기업 (주)대한민국에서 불안정한 피고용자로 살아가는 당신에게


오늘날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키워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헬조선’이다. ‘지옥’이라는 뜻의 영단어 hell과 한반도의 전근대국가인 ‘조선’을 합친 말이다. 그런데 왜 ‘헬한국’이 아니고 ‘헬조선’인가? ‘금수저, 흙수저’와 같이 계층 자체가 고착화돼 마치 조선 때와 같은 ‘신분세습’ 사회가 된 것 아니냐는 통찰이 깔려 있을 것이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장 잘 설명하는 정서다.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근본적인 성찰을 이어온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의 신간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바로 이와 같은 ‘헬조선’에 대한 분석이다. 헬조선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럼에도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기업국가 대한민국’이 만들어내는 현대판 계급사회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가 꼽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본의 탐욕을 견제하고 사회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스스로 ‘기업국가’화되어 자본의 이익 보호에 집중하고 사회적 약자의 연대는 막아선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주식회사에 견주어본다면 상황은 더욱 명확해진다. (주)대한민국의 주주는 누구인가? “경영 참여는 꿈도 못 꾸고, 하라는 대로 잔업과 특근을 하느라 일주일 실질노동시간이 50~60시간이나 되는, 40대 이상 되면 근골격계 질환이나 신경질환을 앓게 되는 대한민국의 ‘피곤한 노동자’들은 과연 ‘주주’인가?”(11쪽)
대기업의 대주주나 임원, 고급공무원, 혹은 땅부자 등 고액재산보유자들이야말로 (주)대한민국의 진짜 주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들은 서로 겹치거나 혼맥 등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기까지 해서 매우 공고하고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러기에 (주)대한민국은 기업 중에서도 악질기업이 되기 쉽다. 오로지 주주들의 배당금 극대화만을 위해 분투할 뿐, 피고용자에 대해서는 그저 주주 배당금 극대화의 ‘재료’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하도급중소기업으로,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경제구조를 보자. 재벌들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직접 고용을 하며, 대부분은 각종 하도급·영세업체에 고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거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의료·교육 등 본인의 생존과 자녀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부터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꾸려나가기 힘들다. 실업수당,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적 임금들은 그 지급 기간이 짧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생활이 불가능한 작은 액수다. 결국 정규직 직장이 없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비정규직 양산은 현대판 천민계급 만들기와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생존 전사’가 될 것인가, 자율적 개인이 될 것인가

결국 생존에 대한 불안을 조장하며 끊임없이 착취를 이어가는 것이 헬조선의 모습이다. 하여 우리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로 살아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걸러지지 않고 어떻게든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서 매일같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계획한 공부에 매진하라던 한 사교육 기업의 광고 문구는 우리 사회가 ‘생존 전사’를 키워내는 데 얼마나 “총동원”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사’가 되기 위해서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동원’되며 이 시스템의 유지에 기여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성장 신화’일 것이다. 여태까지의 성장 속에서 어느 정도 생계 안정을 이룩한 부모 세대가 있고, 그 지원으로 실업자가 돼도 당장 굶어죽을 일은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편으론 ‘헬조선 지옥도’를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경제성장과 각자의 노력이 결국 문제를 풀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하지만 성장은 둔화되고, 재벌경제가 아무리 수출을 잘해도 다수의 삶이 나빠지기만 하는 경험은 늘어나기만 한다.
‘헬조선’의 피해자들이 연대해서 이 사회를 바꾸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다. 생존 공포라는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 요구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공포에 빠져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만을 꿈꾸는 사람은, 사회적 부조리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사회의 ‘주류’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항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에서 세 번의 큰 전환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첫 전환은 1960년대 초반의 개발주의적 권위주의 국가로의 전환이었다. 노동자들은 그저 성장에 필요한 ‘재료’일 뿐이었지만 ‘성장 덕에’ 아사지경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점에 감지덕지해야 했다. 두 번째 전환은 198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제도적 민주주의의 도입이었다. 1987년 이후,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느낀 정권들은 기초적인 일부 사회보장제도들을 제한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1997~1998년 대한민국은 세 번째 대전환을 맞이했다. 신자유주의적 ‘주식회사형’ 국가로의 전환이었다. 이 책은 바로 이 주식회사형 국가에 대한 종합보고서 성격을 띤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1부 지옥의 논리’는 ‘헬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들을 살펴본다. 경제력을 중심으로 차별하고 서열화하는 모습, ‘생존’이라는 미명 아래 양심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 ‘능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스스로를 착취하는 모습 등을 살펴본다. ‘2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박근혜 시대’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모순과 한계를 집중 분석하고, ‘3부 씨줄과 날줄: 병영국가, 민족주의, 식민성’에서는 ‘박근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 기저에 깔려 있던 인식들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4부 문제는 국가다’에서는 대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적어도 재분배 기능, 자본에 대한 견제·보완 기능은 갖춘 국가로 나아가자고 외친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10쪽) 하지만 여기서의 정치란 단순히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본적 구조와 그 구조를 유지하려는 지배계층의 힘, 그리고 그에 맞서는 피해대중들의 저항력. 이 두 거대한 힘이 서로 맞서 그 사이에서 어떠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고, 특히 최근의 진보정치 약화는 바로 이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해답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공통의 책임의식을 공유하는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연대만이 살릴 수 있을 것이다”(33쪽)라고.

책속으로 추가

생존 공포라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 사람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져라” 하고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가혹할는지도 모른다. 생존공포증은 엄연히 ‘병리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유발된 병리적 상황이다. 생존공포에 빠져 그저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만을 꿈꾸는 사람은 사회적 부조리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율적 개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주류’가 간절히 열망하는 사항이다. _33쪽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사실상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 수익은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_78쪽

남한 지배층은 사실 내부 동질성이 강한 하나의 배타적 집단이다. 주요 재벌과 관벌(전직 국무총리, 외교부 장관 등), 그리고 언론재벌·재벌언론들을 보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벼슬을 하거나 기업을 경영했던 그 조상들이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저들은 혼맥으로 철저히 이중삼중 연결돼 있으며, 서울의 몇 군데 특정 동네에서 살며, 자녀들을 같은 학교나 같은 대학에 보낸다. 이들이 한국을 배타적으로 소유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 서열 상위 1%가 개인 소유의 땅 50%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주식부자 1%가 시가총액의 63%를 소유하는 사회가 바로 대한민국 아닌가?
문제는 한국을 저들 소유의 개인회사처럼 여기고 있는 저 관리자들의 ‘이너 서클’이, 그 무엇도 누구와 나누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저들의 지배는 철저히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다. 저들이 소유하는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경영 참여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노조 대표자 몇 명이 이사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저들이 가져가는 배당금이 크게 줄어들 일도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이 원칙상 저들의 권력을 나눌 생각이 없는 것이다. _120~121쪽

‘민족 배신’보다는, 국내외적 권력형 폭력에의 가담이야말로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폭력 사회에서 정상 사회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친일파가 초기부터 사실상 권력을 그대로 승계해온 대한민국의 명백한 특징은, 식민지적 폭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오히려 확산된 것이었다.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무조건 고문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친일 경찰 출신들이나, 중국 등지에서 현지인을 학살하는 일에 익숙해진 일군 장교 출신들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테두리 안에서도 자국민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광복 100주년이 돼도 계속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절대적 보호 아래서 반공의 ‘보루’가 되어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파들이 구사해온 식민지적 대민 통치 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_175쪽

세월호를 침몰하도록 한 것은 국가와 자본이라고 하지만,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분명히 ‘국가’다. 고물 선박 구입과 과적 운항 등을 저지른 것은 자본이었지만, 규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본도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폭리를 노리는 행위를 할 것이다.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생리다. 자본의 이윤 추구 본능을 공공이익을 위해 견제하고,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에 피해자들을 구제하고,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국가만이 할 수 있다. 세월호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한민국이 그중에서 어떤 것도 못한다는 점이었다. _205쪽

한국 군대는 군사기관인 동시에 종속적 신자유주의를 지탱해주는 유순한 ‘인력’의 양성기관이다. 꽃다운 나이에 연애나 즐기고 취업 준비나 해야 하는 청년들을 사회와 격리시켜 반복적인 복종 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실 개개인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가혹한 처사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맞다, 바깥 사회까지 군사화시켜야 병영 속에 갇히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일반 사회 전체에서 ‘군기 잡는’ 분위기는 박근혜 정권 이전에도 있어왔지만 안보주의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힘입어 강화됐다. 초등학생부터 초로의 직장인까지 신자유주의 시대판 새마을운동이라고 할 각종의 ‘극기훈련’을 종종 받게 해 ‘한시적 유사 군인’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병영을 방불케 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_229~230쪽


책속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대다수에게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재벌 대(對) 하도급화된 중소기업’이라는 이중적 경제구조 때문이다. 재벌들의 직접 고용은 매우 제한적이며, 대부분은 각종 하도급·영세업체에 고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일하거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청년층의 거의 4분의 1이 자신들을 ‘체감 실업자’로 분류하는 오늘의 이 구조 속에서, ‘머슴’의 자리마저도 점차 더 얻기 어려워지고 있다. _6~7쪽

경영 참여는 꿈도 못 꾸고, 하라는 대로 잔업과 특근을 하느라 일주일 실질노동시간이 50~60시간이나 되는, 40대 이상 되면 근골격계 질환이나 신경질환을 앓게 되는 대한민국의 ‘피곤한 노동자’들은 과연 ‘주주’인가? 사실 주주급이 되자면 대기업의 대주주나 임원, 고급공무원, 혹은 땅부자 등 고액재산보유자가 되어야 할 터인데, 대한민국에서 이 그룹들은 서로 겹치거나 혼맥 등 매우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들이야말로 (주)대한민국의 주주들이다. _11쪽

(주)대한민국의 주된 특징이라면, (정말 악질기업답게!) 오로지 주주들의 배당금 극대화만을 위해 분투한다는 것이다. 피고용자, 즉 (주)대한민국의 주주가 될 가능성이 없는 임금노예들은 그저 주주 배당금 극대화의 ‘재료’쯤으로 여긴다. _11쪽

절망 코드야말로 한국 젊은층의 신조어를 관통한다. 이들 신조어 중에서도 압권은 헬조선, 즉 ‘지옥 같은 한국’이다. 영어인 ‘헬’(Hell=지옥)은 이 신조어의 현대성을 부각하지만, ‘한국’도 아닌 ‘조선’이 등장하면서 이미 신분의 대물림이 거의 제도화된 한국 사회의 퇴행성을 암시한다. 150년 전에 조선의 한양 북촌에서 태어난 권문세가의 자녀들이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듯, 오늘날 ‘강남족’은 거의 자기들만의 세습적 카스트를 이루어 거주지, 통혼권, 학습.유학 루트, 언어(영어 상용 선호), ‘웰빙’ 등의 차원에서 배타적인 세습신분 계층을 형성한 게 아닌가? _22쪽

저과세와 무복지는 결국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과 최저에 가까운 출산율로 이어지고, OECD 회원국 중 최저의 주관적 행복지수로 이어진다. 행복지수가 꼭 주관적 ‘감성’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신체적 체감까지 포함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프랑스인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짧아 OECD 국가에서 최저인데, 잠도 충분히 잘 수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지옥에서 산다”고 하는 게 근거 없다 하기 힘들 것이다. _24쪽

삼성 노동자 중에는 이미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56명에 이르고, 적어도 1명(14년 동안 방독마스크나 보호구 없이 위험물질을 다루었다가 2011년에 사망한 김진기 씨)의 경우에는 산재사망이라는 공식 판정까지도 나와 있지만, 이는 대다수 언론에서 ‘뉴스’도 되지 못하고 ‘주류’ 사회에서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몇 해 전 서울대 학생들이 ‘기업 살인’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리라고 판단되는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의 초빙교수 임용에 반대해 ‘침묵의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금도 버젓이 자행되고 사건화도 잘 되지 않는 기업의 탐욕에 의한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삼성전자의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 ‘을’들의 고통. 질병.사망을 대가로 해서 만들어지는지를 뻔히 알면서, 우리가 수십 명의 노동자를 죽인 이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라도 제대로 해봤는가? 그렇게 죽어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한 개인으로서의 책임을 과연 느끼고 있는가? _30~31쪽

우리는 ‘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들이다. 이북 주민들에게 ‘수령의 전사’가 되는 것이 강요된다면, 우리에게는 사회적으로 ‘생존 전사’가 되는 것이 강요된다. 살아남기 위해서, 부적응자들을 철저하게 걸러내는 사회에 어떻게든 제대로 편입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싸움에서 전우는 없다. 혹시 메가스터디라는 학원 재벌의 이 광고 문구를 기억하는가. _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