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현대사 변곡점마다 분열
‘보스 정치’에 맹목적 추종
▲ 여당은 특정 인맥 보위 역할
공천권 목맨 ‘권력의 시녀’로
▲ 우리 몸에 각인 ‘파벌 DNA’
냉정히 반성하는 게 출발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3월 발표한 ‘사회통합 및 국민행복 인식조사’에서 13개 기관·단체 가운데 신뢰도가 가장 낮은 곳은 입법부(국회)로 나타났다. 국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7.4%에 그쳤고,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6.7%로 압도적이었다. 이례적이거나 놀라운 수치도 아니다. 광복 이후 70년 동안 쌓여온 ‘정치 불신·혐오’가 수치로 나온 것일 뿐이다.
이 같은 광범위한 ‘정치 불신’의 중요한 배경으로 꼽히는 것이 ‘정파 간 싸움’ ‘파벌 간 내분’ 등이다. 한마디로 “국민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 권력 획득·유지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꼴이 보기 싫다”는 반응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야당 파벌 ‘각목 난투’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린 1976년 5월25일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 시민회관 앞에서 정치깡패들과 당원들이 각목으로 난투극을 벌이고 있다. 신민당 비주류가 폭력배를 동원해 주류를 쫓아낸 이 전당대회는 야당 분열의 대표적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계파 다툼의 야당 60년
새정치민주연합은 1955년 이승만 정부에서 탄생한 민주당을 시초로 삼고 있다. 2015년까지 ‘정통 야당 60년사’는 민주화를 일군 자랑스러운 역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치병이라고 할 만한 파벌 투쟁사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현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한 ‘친노’와 ‘비노’의 계파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만 사사건건 대립하고 반목했던 야당 내부 갈등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제1공화국과 4·19를 전후한 신파·구파의 갈등과 분당, ‘사쿠라 대 선명 야당’ 논쟁, 깡패까지 동원된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 상도동계-동교동계, 난닝구-백바지 논쟁 등 계파 대립과 이합집산의 역사가 야당사 그 자체다.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야 했던 야당에 강력한 ‘대항적 파벌’이 필요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 신군부의 권력 장악 등 민주주의를 가로막았던 현대사 주요 변곡점에 ‘야권 분열’이 하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파 보스로 지칭되는 특정인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우리 정당은 ‘공적 정당’이 아닌 ‘사당(私黨)의 연합체’로서, 왕조시대 파당·붕당·도당과 별반 차이가 없는 상태에 머물러왔다.
■ 정권 유지의 도구, 여당
집권여당은 민의를 수렴해야 하는 정당의 본래적 역할·기능과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특정 파벌·소수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뒤 이를 뒷받침하고 보위하는 역할이었다. 파벌이 권력을 창출한 이후 친위세력을 모아 당이 조직됐고, 청와대는 정치자금·공천권을 쥐고 주류·비주류를 쥐락펴락해 왔다.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유정회,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이런 양상이 반복되면서 여당은 ‘권력의 시녀’로 여겨졌다. 육사와 서울대 법대 출신 파벌로 채워져 ‘육법당’이라는 오명도 들었다.
지난 정부에서부터 여당은 기존 ‘1극 체제’에서 친이계·친박계로 나뉘어지며 다소 다른 양상도 보였다. 하지만 이 또한 ‘사당화’라는 점에서 파벌정치 폐단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군부 파벌 ‘국가 접수’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26일 서울지방법원의 12·12 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손을 잡고 피고인석에 서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DNA에 각인된 파벌
5·16과 12·12에서 5·17까지 군사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현대사는 소수 군벌세력이 국가를 통째로 접수한 슬픈 초상이다. ‘신군부’ ‘하나회’라는 똘똘 뭉친 군벌이 승리한 역사는 국민들 DNA에 뿌리 깊이 박혔다. ‘윗물’에서만 무리짓기에 열중했던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의 해체와 함께 일반 국민들도 생활 각 영역에서 학연·혈연·지연 등을 기반으로 한 향우회·동창회·친목회 등을 우후죽순 만들어 내며 ‘파벌 형성’에 매달려왔다.
‘잘난 사람들’끼리 만드는 우월적 파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타적 가치 독점에 맞서기 위한 대항적 파벌들도 사회 곳곳에서 형성됐다. 강한 내부 결속력과 단결력 때문에 이른바 ‘대한민국 3대 마피아’라고 일컬어지는 ‘고대 교우회’ ‘호남 향우회’ ‘해병 전우회’는 각각 서울대·영남·육군으로 대표됐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파벌의 성격이 강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저서 <한국의 파벌>에서 “파벌이 건전한 경쟁으로 이어질 때 그 사회에 의욕과 발전의 활력소가 된다”면서도 “집단의 이익만 좇을 때에는 파벌 때문에 사회 전체가 흔들리고 권력·정치구조는 책략과 보수·반동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정권을 쥔 극소수 집단이 각종 비리를 저지른 제5공화국 사례를 목격했다. 정권 교체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사례가 되풀이됐다. ‘내 식구’의 비리는 정권이 ‘남의 식구’에 넘어가면 어김없이 파헤쳐졌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파벌이 존재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다만 광복 후 70년 동안 만들어온 파벌사회는 계급 투쟁 양상도 두드러지지 못했다. 왕조시대 문벌주의, 즉 집안끼리 경쟁하는 수준에 그쳤다. 스포츠·예술 분야에서도 잊을 만하면 터져나온 파벌주의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근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자조감을 안겨줬다.
광복 후 70년 동안 우리는 전력질주해 왔다. 빠른 변화에 몸은 미처 적응하지 못했다. 공적인 가치는 사적인 관계와 이익을 우선하는 문화에 뒤로 밀려나 있었다. 파벌에 의한 정실(情實)인사는 ‘공적 조직’을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 존재로 격하시켰다. 파벌·학벌·족벌·재벌 등이 사회 중심에 계속 존재하는 한 정치사에서 일찌감치 봐왔던 ‘사적 이익을 위한 무한투쟁’은 계속 목격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파벌정치와 우리 곁의 파벌주의가 결국 같은 뿌리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70년 적폐’를 걷어내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