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세계경제는 놀랄만한 성장의 역사를 기록해 왔으며,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3~4%대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1950년 4조6,627억 달러 규모였던 전세계 GDP(2002년 불변가격 PPP 기준)는 2006년 37조2천억 달러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성장의 열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같은
기간, 금융산업 역시 괄목할만한 변화를 이뤄 전세계 금융업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규모와 수익률, 효율성 면에서 다양한 신기록을 내놓고 있지만
은행 문턱에서 돌아서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대출금을 제대로 갚지 못한 채 신용 불량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많아지고 있다. 본
서는 이런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뛰어든 한 경제학자의 자서전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쩐의 전쟁
이 책의 저자이자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는 이런 어려움들에 대해 유럽식 복지제도나 영미식 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신선한 접근을 시도했다. 미국 벤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방글라데시 치타공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던 저자는 교과서 속의
경제학이 보여주는 정치성(精緻性)과 현실 경제의 비참함 사이의 간극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인근 마을 42명의 주민들이 27달러의 부채
때문에 평생을 고리대금업자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소액신용융자 사업의
틀을 마련하였고, 이를 ‘그라민 은행’으로 발전시켜 무담보 대출의 전통과 98%에 달하는 높은 원금상환율의 감동적인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라민은행의 성공은 다음의 네 가지 특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째, 진입장벽을 낮추는 무담보 소액신용융자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제도권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요구하는 담보나 보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원금을 갚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의 경우, 신용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며 가난한 사람들도 적절한 형태의 정보와 동기부여만 주어지면 충분히 원금을 상환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난한 고객들에게 무담보
소액신용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라민 은행의 고객에 대한 이런 신뢰는 98%에 달하는 높은 상환율로 보답 받고 있다.
둘째, 연대융자를 통해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유사한 5명이 하나의 팀을 이뤄 대출 신청과 상환 의무를 함께
수행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각 사람들은 혼자 모든 짐을 질 때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과
정보, 신뢰를 서로 공유하고 그룹 내에서 앞서 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극을 얻는다거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상환에 대한 책임감과 빈곤 탈출에
대한 의욕을 더 높일 수 있다.
셋째, 생존 본능이 강한 여성고객의 비중을 확대했다. 대표적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여성은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했으며,
그라민 은행이 생기기 전까지 방글라데시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은 여성의 비율이 1%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자활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지가 강하고 적응 능력이 뛰어나며, 자녀의 미래에 대해서도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여성 고객들을 중심으로 돈을
빌려 주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라민 은행의 고객은 95%가 여성이며, 오늘날 방글라데시 사회에서 경제활동의 주체로써 여성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유연한 융자 조건과 상환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그라민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지만 결코 무이자나 저리로
융자를 해주지는 않는다. 턱없이 낮은 이자율은 융자금에 대한 기대 가치를 낮추는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라민은행은 이자율은 연
20% 정도 수준을 유지하되 융자 조건과 상환 방식을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결코 큰 돈을 빌려주지는 않지만 대나무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재료비, 의복을 만들 재봉틀 구입비 등 고객들의 생산활동에 꼭 필요한 투자비를 지원하고, 상환 옵션을 다양하게 제공함으로써 자활과 빈곤
탈출의 장애물을 없애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새로운 생산의 주체로
돈은 소비를 위해 쓰일 수도 있고 투자를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이것은 그 돈이 근로소득이건 대출금이건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지금까지 많은 금융기관들은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원조나 지원, 소액금융 등은 당연히 소비를 위한 지출에 쓰일 것이라는 ‘상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민은행은 빈곤층을 위한 융자가 소비보다 생산을 위한 투자가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유도함으로써 이런 상식을 깨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냈다.
방글라데시에서 시작해 전세계로 번져가고 있는 그라민은행의 성공 사례는 가난한 자들이 더 이상 성장의 그늘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생산의 한 주체로 자리잡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희망의 등불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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