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 영국 노동당 신좌파운동
장석준(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맛이 갔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찬성하는 정당은 없었다. 아니,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다. 미국과 함께 이라크 침략에 발벗고 나선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이 바로 그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노동당원들은 자기 당 출신 수상에 맞서 “전쟁 반대”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이런 영국 노동당을 더 이상 ‘좌파’정당이라 할 수 있을까? 도대체 ‘하나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대처의 시장지상주의가 시작된 70년대 말?80년대 초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노동조합이 만든 진보정당
영국은 지난 200년 동안 한 번도 정치적 격변이 없었던 나라다. 토지 귀족과 산업 자본가들 사이의 세력 교체는 의회라는 사교 클럽에서 지루하고 조용하게 이뤄졌다. 의회는 이 나라에서 ‘정치’의 모든 것이었다.
그림 ) 창당 당시 노동당의 포스터: “노동당이 길을 연다”
노동운동도 뭔가 유럽 대륙과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18세기말부터 산업자본주의가 시작된 이 나라에서는 사회주의가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부터 직업별 노동조합이 번성했다. 사회주의 정당이 노동조합보다 먼저 발전하거나 둘이 서로 엇비슷하게 나아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조직은 당이 아니라 우선 노동조합이었다.
1900년 2월에 노동조합과 소규모 좌파 정당?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노동운동의 제도 정치 진출을 추진할 ‘노동자대표위원회’(LRC)를 건설했을 때에도 가장 커다란 동기는 무슨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이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이 LRC가 1906년에 비로소 ‘노동당’이라는 정당으로 탈바꿈한다. 노동자정당의 건설로는 유럽에서 가장 늦은 사례였지만, 어쨌든 어렵사리 당이 건설되기는 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만든 당이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노동자정당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들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노동당에는 당원 제도가 없었다. 지지자들이 개별 입당하는 게 아니라 노동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곧바로 당원으로 인정되었다. 물론 대륙의 좌파정당들에서도 이런 식의 집단가입제도는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의 개별 입당을 독려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이었을 뿐이다.
영국식 집단가입제도 아래서 노동자들은 당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 간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당원이 되어 원내의 당 지도자들을 직접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국식 로비 활동 비슷하게 노조 간부들을 거쳐 자신의 목소리를그림 ) 1984년 광원파업 당시 노동자들의 시위 모습
내야 한다. 즉, 노동조합은 일종의 이익단체 역할을 하고, 당은 원내에서 이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영국 노동당의 당 구조야말로, 노동조합의 과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당의 임무는 이를 의회 내에서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회주의적 정치관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구조 아래서도 급진적 좌파정치가 출현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노동조합 상층간부들조차 급진적 개혁을 지지할 정도로 노동조합운동이 가열된다면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1차 대전 직후 산업별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되자 1918년 당대회에서 노동당은 창당 이후 최대의 탈바꿈을 단행했다. 이 당대회에서 저 유명한 당헌 4조가 채택됐다. 당헌 4조는 노동당의 과제가 “생산수단?분배?교환의 공동 소유, 민중적 경영과 산업?서비스의 통제 체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노동당은 이 때부터 비로소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다. 또한 이 당대회에서는 처음으로 개인입당제도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창당 당시의 구조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당의 주된 기반은 여전히 노동조합의 집단가입이었다. 개별입당 당원은 아무리 많아도 60만 수준에 그친 반면(현재는 20만으로까지 감소), 집단가입한 조합원의 수는 600만을 넘어섰다.
당과 노조 사이의 기이한 분업 관계는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노동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는 1년마다 열리는 당대회였다. 그런데, 당대회에서 노조측 대의원들의 표는 자신이 대표하는 조합원 수에 따라 수십만, 수백만 표로 환산하여 집계됐고, 따라서 이들의 표가 당대회 전체 투표의 90%를 차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의원들의 투표 방향이 대의원의 개인 의사나 조합원들 사이의 토론 및 투표가 아니라 최고지도부의 의중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노동조합 블록투표). 결국 노동당 당대회 결과를 실제 결정하는 것은 소수의 노조 최고위층이었다. 그 성향이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말이다.
노조의 영향력은 당 지도부 구성에서도 나타났다. 노동당의 최고집행기관은 당대회에서 선출하는 27인의 집행위원으로 구성된 ‘전국집행위원회’(NEC)였다. 그런데, 이 중 노동조합 몫으로 12석이 할당되었고, 지구당과 의원단, 그리고 여성 부문으로 각각 5석이 할당되었다. 게다가 여성 부문도 선출권이 노조측 대의원들에게 있었다. 즉, 27인의 전국집행위원 중 모두 17석이 노조 몫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장치들은 겉으로는 노동당의 노동계급 중심성을 보장하는 버팀목들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당을 실제 움직이는 것은 이런 복잡한 장치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의원단이었다. 당대회와 전국집행위원회는 점점 요식 행사나 명예 기관으로 전락했고, 당의 일상활동은 모두 하원의원들이 결정했다. 특히 집권시에는 내각, 그리고 야당으로 있을 경우에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 역할을 했다(물론 모두 하원의원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흔히 ‘당수’로 불리는 당 최고지도자(수상 혹은 차기 수상)는 의원단 내 선거로 뽑혔다.
당의 최고 주주인 노조 상층간부들은 이런 의원단의 영향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를 묵인하거나 조장했다. 이들에게는 소수의 원내 지도자와 거래하는 것만큼 싸게 먹히는 정치활동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노동당은 한 마디로 의원단의 정당, 순수한 의회주의 정당이었고, 의원들과 노조 상층간부들의 정당, 소수 엘리트들의 정당이었다. 정치 활동은 의원들의 활동으로 축소되었고, 당의 원외 부분은 의원들의 선거운동조직으로만 의미를 가졌으며, 대중의 정치행위는 선거운동과 투표행위로 제한되었다. 물론 2차 대전 후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 이런 모습이 나타났지만, 영국만큼 심한 곳은 없었다. 노동당이 진정 당헌 4조의 이상대로 영국 사회를 바꿀 수 있으려면 이 당은 우선 자기 자신부터 바꾸어야만 했다.
노동당 신좌파의 등장, 그리고 토니 벤
그림 ) NHS의 혜택을 받은 첫 번째 환자와 나이 베번 당시 보건부 장관
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분명히 하는 선거공약으로 처음 집권한 것은 1945년 2차 대전 종전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였다. 이 때 등장한 애틀리 정부는 무상공공의료체계인 ‘국민보건서비스’(NHS)를 도입하고, 공공임대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지금도 당시의 개혁 성과는 노동당 지지의 굳건한 지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개혁은 그 정도 수준에서 일단락됐다. 복지제도의 도입과 공공부문의 확장은 우파의 새 경제정책인 케인즈주의가 인정하는 수준을 결코 넘어서지 않았다. 아니, 케인즈주의가 어느새 노동당 자신의 이념이 되어 버렸다. 당내 이데올로그인 토니 크로슬랜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 통제가 아니라 혼합경제와 소득 재분배 정책이 곧 새 시대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50년대 말에 당 지도부는,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헌 4조의 폐기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그림 ) 헤롤드 윌슨
전후 두 번째 노동당 정부(1964~1970)의 수상 헤롤드 윌슨은 이러한 당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당수로 부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윌슨 정부의 성적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윌슨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며 노동조합의 임금인상투쟁에 족쇄를 채우는 노동법 개악을 시도하다가 노조의 불신을 사고 1970년 총선에서 정권을 잃었다.
그러나 이 뼈아픈 경험은 노동당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TGWU(운송?일반노조) 같은 거대 노동조합에 좌파 지도부가 등장하여 노동당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또한 60년대 말 신좌파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 당원들이 지구당 활동가로 유입되었다. 이런 압력에 대해 윌슨 정부의 각료였던 중진의원 한 명이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토니 벤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전국집행위원으로서 산하 국내정책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이 위원회를 좌파 지식인들의 활기찬 토론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1973년 전국집행위원회는 일련의 급진적 정책들을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차기 노동당 정부는 은행, 보험회사 등 주요 금융기관을 국공유화한다. 국가가 소유하고 노?사?정이 이사회를 맡는 국영지주회사 ‘국민기업위원회’(NEB)를 설립하여 25대 대기업의 소유?경영권을 장악한다. 또한 정부와 기업 사이에 계획 협약을 맺어 기업으로 하여금 정부의 경제 계획에 따르게 하고 노동현장의 민주화를 압박한다. 흔히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ic Strategy, AES)이라고 불린 이들 정책은 한 마디로, 그 동안 노동당이 먼 미래의 과제로 미뤄온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숙제를 차기 정부의 정책으로 구체화한 것이었다.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를 내건 급진적 선거공약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1974년 2월의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다시 수상이 된 윌슨 당수는 벤을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벤은 이 직책을 당의 선거공약을 진지하게 실천할 기회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윌슨과 대다수 각료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수 언론이 벤을 빗발치듯 비난했지만, 내각의 동지들은 그를 옹호하기는커녕 언론의 공격에 맞장구쳤다. 벤이 이에 반발하자 수상은 ‘당의 단합’을 내세우며 그를 산업부 장관에서 해임했다. 집권 전에는 당을 급진화하는 데 한 몫 했던 좌파 노조 간부들조차 이를 묵인했다.
하지만 벤의 고투와 AES의 좌절은 오히려 제2차 윌슨 정부에 실망한 많은 당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구심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토니 벤과 AES를 중심으로 당내 좌파가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실 벤은 ‘급진좌파’라는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윌슨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촉망받던 화면발 잘 받는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고난이 그를 바꾸기 시작했다. 벤이 이미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활약하고 있던 1960년에 상원의원이던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런데 영국의 법률상 상원의원직은 장자에게 계승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원의원직을 그만두고 상원에 들어가야 했다. 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3년간 투쟁한 끝에 드디어 법 자체를 바꾸고 하원의원으로 다시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국의 의회민주주의에 대해 커다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고색 창연한 관행을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노동당에 대해서도 비판적 안목을 갖게 되었다. 영국사회의 절름발이 민주주의는 혹시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당 안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한 정치 엘리트의 출세가도는 전혀 다른 방향, 전혀 다른 풍경의 길로 바뀌었던 것이다.
방향을 잃은 당과 당 혁신운동의 등장
그림 ) 짐 캘러헌
1976년 가을 거대한 폭풍이 영국을 덮쳤다. 정부 재정지출 과다로 외환위기가 벌어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자체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IMF의 대주주인 미국 정부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나왔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IMF 출범 후 처음으로 우방국(그것도 소위 ‘혈맹’이라는 나라의) 정부에 구제금융의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팽창재정정책의 포기와 금리 인상이었다. 영국의 금융자본은 이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역사의 장막을 뚫고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윌슨의 뒤를 이어 짐 캘러헌이 수상을 맡고 있던 노동당 정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벤의 국내정책위원회는 자본 이동의 통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대안을 제출하고, 구제금융 조건의 거부를 호소했다. 그러나 재무부 장관 데니스 힐리는 IMF의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40억 파운드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금리를 15%로 인상하고, 대공황 이후 최대 규모로 정부예산을 삭감했다. 이로써 케인즈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대처 정부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노동당은 방향을 상실했다. 지난 30년간 안주해온 전후 체제를 계속 끌고 갈 수는 없게 되었다. 좌파는 이미 대안을 제시했다. AES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격변 이전에 당의 격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의회주의와 케인즈주의를 두 축으로 하여 계급타협 체제를 고수하던 당내 우파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대안이었다. 이들은 당내 좌파의 도전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뿐이었다.
그 나마 비전 있는 우파 의원들이 찾은 유일한 해결책은 영국 경제를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하루빨리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당내 좌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 유럽 경제통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전적으로 유럽 각국의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1979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하고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 등장한 대처 정부는 과거의 보수당 정부들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자본가들을 편들고 노동운동의 성과들을 하나하나 회수했다. 그러나 이 소용돌이 속에서는 또 다른 움직임도 무르익고 있었다. 그것은 조직적인 당 혁신운동의 등장이었다.
1973년 1월에 블라디미르 더러를 중심으로 한 200명 가량의 지구당 활동가들이 ‘노동당민주화운동’(CLPD)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CLPD에 모인 활동가들은 영국 같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고착된 나라에서는 추상적인 사회주의의 선전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었다. 어쨌든 급진적 개혁을 공약한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 이 정부가 자신의 개혁을 진지하게 추구하다가 자본주의의 한계와 부딪힐 때에만 운동의 도약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선 급진적 개혁 정부가 출범하도록 만드는 게 급선무다. 그런데 노동당은 거듭 이런 약속을 위반했다. 지난 두 차례의 노동당 정부는 영국판 아옌데 정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 원인은 당대회 결정 사항들을 쉽게 무시하고 뒤집는 의원단의 독재에 있다. 우선 이것을 깨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CLPD의 기본 구상이었다.
CLPD는 몇 가지 당면 혁신 과제를 추린 뒤, 당대회 전에 이를 활동가들에게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토론을 조직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당대회에 안건으로 제출했다. 당의 기존 하원의원들에 대해서도 임기 중에 반드시 지구당 내 재신임 투표를 실시하여, 한 번 의원이 되면 계속 해먹는다는 풍토를 깨자. 의원단 내 선거가 아니라 당대회 대의원 투표로 당수를 뽑자. 전국집행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내각 혹은 그림자 내각이 당 정책을 좌우하는 관행을 바로잡자. 이런 것들이 CLPD의 핵심적인 당 혁신 요구였다. 한 마디로 의원단 중심의 당을 풀뿌리 대중의 당으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CLPD가 특히 중요시한 것은 하원의원에 대한 의무적 재신임 투표안이었다. 지구당 활동가들은 내각에서 AES를 반대하고 무력화하는 데 앞장선 당내 우파 의원들을 심판하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려 했다. 하지만 당헌 개정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1970년대 내내 노조 블록투표는 대개 개혁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다. 수십 년의 역사를 지닌 당을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편 1978년에는 또 다른 당 혁신운동 기구가 출범했다. 역시 지구당 활동가들의 조직인 ‘노동당조정위원회’(LCC)가 그것이었다. 이 조직은 당내 민주화에 치중한 CLPD와는 달리 AES를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교육?홍보하는 데 앞장섰다. 그 전까지 노동당은 당대회에서 채택된 공식 정책인 AES를 대중에게 제대로 알리는 작업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격돌
시간은 걸렸지만, CLPD의 당 혁신안에 대한 지지는 점점 확산되어갔다. 그 성과로, 1979년 당대회에서 400만표 대 300만표로 하원의원에 대한 의무적 재신임 투표안이 통과되었다. 5년간의 노고 끝에 얻은 성과였다. 윌슨-캘러헌 정부의 경험에 대한 환멸 때문에 TGWU, 전국공공노조(NUPE) 같은 거대 노조의 블록투표가 혁신 세력 쪽으로 움직인 결과였다.
CLPD와 LCC는 다음 해 당대회를 준비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풀뿌리운동위원회’(RFMC)를 결성했다. 노동당 신좌파(벤의 이름을 따서 ‘벤 좌파’라고도 불렸다)의 대표조직이 등장한 것이다. RFMC의 압력 속에 80년 10월의 블랙풀 대회는 또 다른 당헌 개정안을 채택했다. 그것은 당대회에서 대의원들로 선거인단을 구성하여 당수와 부당수를 선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림 ) 마이클 풋
하지만 구체적인 선거인단 구성 방식은 다음해 1월에 열릴 임시당대회로 위임되었다. 여기에는 당 지도부의 책략이 숨어 있었다. 지난 총선에 패배한 캘러헌 당수는 어차피 사임해야 했는데, 새 방식으로 당수를 선출할 경우 벤이 당수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캘러헌은 당대회가 끝나자마자 당수직을 사임하여 임시당대회가 열리기 전에 기존의 의원단 호선 방식으로 차기 당수가 선출되도록 만들었다.
이 선거에서 <트리뷴> 그룹의 마이클 풋이 당수로 선출되었다. <트리뷴> 그룹은 당헌 4조의 고수를 주장하는 당내 좌파 의원들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벤 좌파와는 달리 의원단 중심의 당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다(그래서 벤 좌파와 구별하여 ‘구좌파’라 불렸다). 풋이 당수로 당선되자 좌파 활동가들은 이를 당의 급진화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결과로 보고 환영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다. 풋과 <트리뷴> 그룹은 풀뿌리 대중정당의 시도에 대해 의원단 중심의 정당을 지키려던 광범한 연합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아무튼 이 때는 노동당 신좌파의 최전성기였다. CLPD의 회원은 1200명으로 늘었고, LCC는 800명으로 성장했다. 전국적으로 유급 상근 활동가가 70여명밖에 되지 않는 당에서 이는 대단한 숫자였다. 그리고 CLPD를 지지하는 산별노조 지역지부도 112개로 증가했다.
그러나 신좌파의 급속한 성장은 우파 의원들과 노조 간부들의 반격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이 젠킨스를 중심으로 하는 당내 우파 의원 28명이 1981년 4월 노동당을 탈당해 ‘사회민주당’(SDP)을 창당했다. SDP는 계급타협 노선의 고수와 즉각적인 EEC 가입을 내세우며 노동당 표를 잠식하려 했다(현재는 ‘자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당에 잔류한 우파 의원 150명도 벤 좌파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당연대캠페인’이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노조운동 내에서는 우파 간부들이 ‘노동당 승리를 위한 노조간부조직’(TULV)을 결성해 노조 블록투표를 관리하려 애썼다.
예고된 대로 임시당대회에서 당수 선출 선거인단의 구성 방식이 확정됐다. 노조에 40%가 할당되고, 지구당과 의원단에 각각 30%가 할당됐다. 당수는 이미 선출되었기 때문에 부당수를 새로운 방식으로 선출해야 했다. 사실 부당수직 자체는 별다른 실권이 없는 자리였지만, 벤은 당헌 개정의 의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 당내 우파에서는 힐리가 나섰다. 외환위기 당시 IMF 권고안을 놓고 격돌했던 장본인들이 다시 대결하게 된 것이다.
노동당의 오랜 역사에서 이렇게 평당원들이 대거 참여하는 경선이 이뤄진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두 진영 모두 다 사뭇 비장하게 싸움에 나설만한 이유가 있었다. 벤은 당시 와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돌며 유세를 벌였다. 특히 일반 조합원을 대상으로 선거운동을 벌여 노동현장에서 정치적 관심에 불을 붙였다. 당시 벤 좌파가 부당수 경선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는지는 다음의 성명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NATO와 워싱턴에까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노동운동을 민주화하려는 우리의 투쟁은 노동운동이 보다 강력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투쟁과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다. - RFMC 성명서
그림 ) 데니스 힐리
그러나그림 ) 토니 벤
힐리 진영도 벼랑 끝에서 싸우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들은 보수 언론에 끊임없이 정보를 흘려 벤 진영에 대한 마녀사냥을 벌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내 우파와 보수 언론들은 벤 진영 내부의 일부 종파주의적 세력의 행태를 벤 좌파 전체의 이미지로 만들어 덧씌웠다. 당내 우파에게는, 그렇게 해서 이미지를 실추하게 되는 것이 당내 좌파뿐만 아니라 당 전체라는 점은 안중에도 없었다.
1981년 5월의 지방선거에서 노동당 좌파가 대거 지자체에 진출하여 런던광역시 등에서 ‘도시 사회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벤 진영에게 희망의 조짐이었다. 그 해 9월 27일에 열린 80차 당대회에서 결과가 드러났다. 최종 표결 결과는 힐리의 당선이었다. 그러나 힐리는 50.4%를 얻고 벤은 49.5%를 얻어 둘의 차이는 0.9%에 불과했다. 내용적으로는 벤의 승리였다. 벤은 지구당 부문에서 80% 이상을 득표한 것은 물론 노조 부문과 의원단 부문에서도 각각 40%와 30%를 차지했다. 노조 부문을 보면 전통적 방식대로 상층간부들이 블록투표를 결정한 경우에는 힐리에게 패했지만, NUPE와 같이 자체 투표를 통해 입장을 정한 경우에는 승리했다. 0.9%의 표차는 구좌파인 <트리뷴> 그룹의 의원 18명이 투표에 불참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힐리의 당선이 결정된 순간, 그의 정책보좌관인 질스 래디스는 “힐리가 노동당을 구원했다”고 외쳤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좌파의 전진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닥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모두들 부당수 경선에 정신을 판 사이에 TULV 소속 노조 간부들이 조용히 전국집행위원회의 다수를 장악했다는 사실이었다.
노동당 ‘신’좌파의 너무도 이른 쇠퇴
나의 신념은 지금 존재하는 권력의 세 중심, 즉 자본 소유권, 노동 조직, 투표함, 이 셋 중에서 첫 번째 것이 두 번째, 세 번째 것, 즉 투표함과 노동의 주도권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45년도 노동당 선거공약에서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당면 현실 과제였다. - 토니 벤(1990)
AES와 벤 좌파의 등장은 영국만의 유별난 현상은 아니었다. 1974년 세계불황은 서유럽 곳곳에 전후 계급타협 정치의 위기와 주류 좌파 내부의 각성을 낳았다. 스웨덴에서는 AES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본 소유의 사회화를 추구한 임노동자기금안이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주 35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과 투자 활동의 통제를 내걸고 싸웠다. 50년대에 강령에서 ‘소유의 사회화’를 삭제한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이를 강령과 정책에 재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은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를 천명한 ‘공동강령’에 합의했다.
영국의 신진 좌파의 경우에 독특했던 점은 사회화 조치와 같은 구조개혁을 실제 관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또 다른 차원을 직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존 국가기구를 철저히 변혁하지 않고서는 급진적 개혁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벤 좌파는 이를 ‘제도정치 <안에서> 제도권력에 <대항하는>’(in and against) 전략이라고 정리했다.
수상이 바뀌고 새 내각이 들어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존의 의회 구조를 철저히 뜯어고치고, 정부의 정보들을 공개하며, 현장과 지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고양시켜야 한다. 즉 기존의 의회민주주의를 넘어서 나아가야 한다. 벤 좌파는 ‘사회민주주의’와 구별하여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세웠는데, 여기서 ‘민주적’이란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대중 참여 민주주의(국가기구의 변형, 노동자 통제 등)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영감의 핵심에 바로 토니 벤 자신이 있었다. 그가 국가기구의 민주화를 말할 때 이는 내각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살아있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AES의 창안자들뿐만 아니라 CLPD와 LCC의 주요 지도자들과 당 밖의 좌파 지식인들까지 ‘일요모임’이라는 정책모임으로 묶어 하나의 유파를 만들어냈다. 그의 관심망에는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당시 막 부상하던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 등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진정한 전도사였다. <뉴 소셜리스트(새 사회주의자)> 같은 벤 좌파의 기관지나 제도 언론에서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청중이 모인 곳에서라면 항상 그의 목소리, 대처 정부의 시장지상주의 공세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은 “있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신좌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켄 리빙스턴(현 런던시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이 열광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나 토니를 만날 수 있었다. 라디오, 텔레비전, 책, 그리고 영국 전역의 대중 집회에서 말이다. 수백, 때로는 수천의 청중들이 그의 분석과 설명, 전망을 경청했고, 사회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렇다. 그 수많은 청중들은 정말로 그러한 확신을 얻었다. - 켄 리빙스턴
하지만 영국의 급진좌파에게는 풀기 힘든 커다란 딜레마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동당의 태생적 한계, 즉 노조 블록투표 문제였다. 집단가입과 블록투표는 그나마 노동당의 노동계급 중심성을 보장해주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노조 상층간부들은 벤 좌파의 당 혁신 대의에 쉽게 동의하지 않거나 등을 돌리곤 했다. 그렇다고 블록투표 자체를 공격한다면 이는 당을 탈노동계급화하려는 당내 우파에게 동조해주는 꼴이 된다. 이도 저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안은 당이 노동계급 대중에게 직접 뿌리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벤 좌파는 그 동안 지방의원 선거구별로 존재하던 지역분회에 더해 직장분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직장분회 건설 방침은 1980년 당대회에서 통과되었다. 벤 좌파는 직장분회를 활성화하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전까지의 과도기 동안에는 노조 내의 토론과 투표를 권장하여 블록투표를 민주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당을 혁신한다는 장기적 과업을 과연 중단 없이 지속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벤 자신이 “기나긴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 편이 아니었다. 벤 좌파의 급작스런 쇠퇴는 1983년 6월 총선의 참담한 패배와 함께 찾아왔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SDP의 득표보다 불과 2%가 많은 27.6%만을 얻었다. 당내 우파와 보수언론은 패인이 당내 좌파의 지나친 영향력으로 선거공약이 너무 과격해진 탓이라고 평가했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이런 주장은 1974년에는 어떻게 해서 비슷한 공약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더군다나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는 노동당보다 더 급진적인 공약으로 사회당의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실제로 노동당은 차기 선거공약이 이미 확정된 1981년 무렵까지도 지지도 조사에서 대처의 보수당을 10%나 앞서며 50%의 지지율을 보였었다.
패인은 다른 데 있었다. 첫 번째 타격은 SDP의 창당에서 비롯됐다. 탈당파의 배신이 노동당 표를 갈랐다. 더 큰 타격은 1983년 초의 포클랜드 전쟁으로부터 왔다. 느닷없는 애국주의 열풍으로 역사상 가장 인기 없던 수상(대처)은 국민의 영웅이 됐다. 약 7%의 표가 보수당으로 넘어갔다. 또 다른 중요한 타격은 노동당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바로 힐리-벤 경선 당시 힐리 진영이 획책한 마녀사냥 전술이 당 전체의 이미지를 땅에 떨어뜨린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당수인 풋이 수상감으로 전혀 중량감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83년의 패배는 당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여기에는 벤 좌파의 활동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번 총선에서 최악의 우파 정부(대처 정부)를 격퇴하는 게 모두의 급선무가 되었다. 당 혁신에는 “기나긴 투쟁”이 필요하다는 벤의 호소는 이러한 강박증 앞에서 힘을 잃었다. 더군다나 양당 원내총무들이 의도적으로 벤의 선거구를 분할하는 바람에 벤 자신이 83년 총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벤은 1년 후 보궐선거에서 곧바로 의원에 재선되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지만, 한때 당을 뒤흔들었던 신좌파의 영향력은 해체되고 말았다. 대다수 당원들은 당 지도부의 우회전에 묵묵히 따랐다.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조지 부시의 공화당과 동맹한 유일한 정당,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그것이다.
서유럽 주류 좌파정치의 막다른 골목
노동당은 1995년 임시당대회에서 당헌 4조를 삭제했다. 그 나마 ‘노동’당이라는 이름를 의미 있게 만들었던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의도적으로 축소되어왔다. 현재 당을 주도하는 것은 토니 블레어 류의 몇몇 비디오형 정치인들이다. 이제 이 당이 도대체 보수당이나 자유민주당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기 힘들다.
이것은 영국 노동당만의 현상은 아니다. 70년대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공세에 대해 전투 나팔을 불었던 흐름들이 전후 계급타협의 경계선을 넘어서길 두려워한 노동운동 내부의 관성 때문에 급작스레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나서, 서유럽 주류 좌파정당들(흔히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 불리는) 대부분을 지배해온 것은 시장지상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투항이었다. 이를 정당화하는 논자들은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탈계급화를 지적하면서 더 이상 고전적인 노동계급정당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 부족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계급의 ‘운동’이었다. 즉, 거대 미디어와 문화산업의 시대에 진실과 열정의 힘을 되살려낼 수 있는 에너지였다. 여기서 쟁점은 결코 의회 정치 대 혁명 정치 식의 이분법은 아니다. 대중 정치를 북돋을 수 있는 제도권 내외의 실천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가 고민거리다. 벤 좌파 운동은 신자유주의 공세의 초기에 바로 이 과제에 도전하려 했다.
아니, 그들은 여전히 도전하고 있다. 팔순을 눈앞에 둔 토니 벤은 지금도 반전시위의 맨 앞에 서 있다. 영국의 노동운동은 신노동당 정부의 사유화 공세에 맞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 블레어 노선에 대한 대안을 찾는 시도가 노동당 안팎에서 일고 있다.
하지만 20년 전과 같이 노동당을 안으로부터 혁신하는 데 치중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벤 자신,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100년 전과 같은 ‘노동자대표위원회’를 다시 소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때와는 달리 여성운동, 환경운동, 유색인운동 등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말이다. 이 나라에서 좌파대중정치가 복원되기 위해서는 아마도 20년 전보다 더 큰 단절이, 더 거대한 폭발, 더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하리라는 이야기다. ― 그리고 이것이 꼭 영국인들만의 숙제는 아닐 것이다.
(참고할만한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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