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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진보정당운동사 :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4. 1. 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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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진보정당운동사 :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연구회 함께 만들기
홍성준 | 조회 43 |추천 0 | 2005.11.16. 23:54

역사 속의 진보정당들④: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원조 ‘제3의 길’ - 양차 대전 사이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부장 newer@jinbo.net)

몇 년 전 영국 노동당을 진원지로 해서 ‘제3의 길’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제3의 길’을 처음으로 천명한 진보정당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이 당의 원조(元祖)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사잇길을 추구한다는 현재의 ‘제3의 길’보다는 훨씬 급진적인 것이었다. 레닌주의(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개혁적 사회주의)의 가운뎃길을 추구하겠다는 ‘제3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2차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다.

일급 지식인들을 갖춘 노동자정당

1차 대전 전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지금 같은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중세부터 이어 내려온 합스부르크 황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지금의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폴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림 )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아버지 빅토르 아들러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사회주의운동은 1848년 유럽 혁명의 실패 이후 수십년간 급진파와 온건파 사이의 분열로 고통받았다. 그러다가 1889년에 하인펠트에서 열린 통합대회에서 비로소 노동계급 단일정당으로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하 사민당)이 출범했다. 통합 과정에서는 엥겔스의 협력자 중 한 명인 빅토르 아들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그는 당내에서 마치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벨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마침 1890년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프랑스 등과 마찬가지로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당연히 노동계급의 수가 증가했고, 도시화가 이뤄졌다. 특히 수도 비엔나는 인구 2백만의, 유럽 대륙 중심부의 거대 도시가 되었다. 새로 도시에 유입된 사람들은 대중운동의 형태를 띤 정치 세력들에서 소속감을 찾으려 했고, 이에 따라 사회주의운동, 기독교사회운동, 민족주의운동 등이 급속히 발전했다. (훗날 세계사를 뒤흔드는 아돌프 히틀러도 이러한 시골 출신 비엔나 시민 중 한 명으로 민족주의운동에 접근하게 된다.) 
사민당은 이러한 배경 아래 1900년대 초반까지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당세에 비해 현실 정치력은 미미했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오스트리아에서는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이 1906년 보통선거권 쟁취 총파업 경고가 있고서야 뒤늦게 도입되었다. 다음해인 1907년의 총선에서는 과연 사민당이 87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는 유럽의 다른 주요 국가 노동자정당들에 비해서는 뒤늦은 성과였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다민족국가였다는 점이다. 특히 1890년대부터는 슬라브계 소수 민족들의 민족주의운동이 불붙었다. 제국의회 안에서도 소규모의 민족주의 정치 세력들이 다수 포진해서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다. 이런 의석 분포로는 사민당이 아무리 제1당이라 해도 제휴 대상을 찾아 다수파를 이루기가 힘들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에 비해서 의회 진출 속도가 늦고 원내 정치의 중요성이 덜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민당은 의회 정치에 상대적으로 덜 종속됐다. 이는 제도권 정치에서의 한계가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늦게 출발한 자의 ‘미숙함’과 함께 ‘젊음’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림 ) 월간 <캄프(투쟁)>
오스트리아 사민당에서 또 하나 특기할만한 점은 다른 나라 노동자정당들과는 달리 지식인들이 당운동에 활발히 결합했다는 사실이다. 수도 비엔나는 당시 전위적인 학문?예술 사조로 들끓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청년 지식인들은 쉽게 사회주의운동의 대의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비엔나 대학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학생?교수 자유 조합>이 결성됐고, 여기서 당의 미래 지도자들이 다수 배출됐다. 또한 유럽, 아니 세계 역사상 최초의 ‘맑스주의자’ 교수인 칼 그륀베르크의 영향 아래 일급의 사회과학도들이 당과 노동운동 주위에 포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청년 세대의 대표자들인 칼 렌너,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오토 바우어 등은 1904년에 선보인 이론지 <맑스-슈투디엔(맑스-연구)>, 1907년 창간된 월간 <캄프(투쟁)>, 일간 <아르바이터 차이퉁(노동자 신문)>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맑스주의 학파’라는 하나의 ‘학파’, ‘정치적 경향’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의 교조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1차 대전 직전의 사상계를 주름 잡았다.  
물론 1차 대전은 이들에게도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왔다. V.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민당도 독일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전쟁 지지 입장을 취했고, 렌너 등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  일부도 이에 동조했다. 반면, M. 아들러, 바우어, 힐퍼딩 등은 반전 입장을 취했다. 최초의 맑스주의 ‘학파’는 이렇게 해서 분열되고 말았다.
하지만, 뛰어난 지적 능력을 지닌 지식인들이 대거 노동자정당에 적극 결합했다는 것은 오스트리아 사민당만의 주목할만한 특징이었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에서만 해도 로자 룩셈부르크나 장 조레스 등의 박사 출신 지도자는 여전히 예외적인 사례로 여겨졌던 것이다. 

“유럽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 혁명 없다”

그러나, 전쟁의 계속적인 지지 여부로 당이 결국 다수파 사회민주당(전쟁을 지지한 당내 우파), 독립사회민주당(전쟁 중지를 요구한 당내 좌파)으로 양분되고 만 독일 사회민주당과는 달리 오스트리아 사민당 내의 의견 대립은 분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내 우파가 항상 당권을 쥐었던 독일의 경우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에서는 전쟁 말기인 1917년 바우어가 주도하는 반전 좌파가 당권을 장악했다. 여기에는 V. 아들러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아들러(그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막역한 친구로서, 아인슈타인을 사회주의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했다)의 역할이 컸다.
그림 ) 당좌파 지도자 오토 바우어
1916년그림 ) 당우파 지도자 칼 렌너
 10월 21일, 그는 전쟁의 즉각적인 중지를 부르짖으며 수상인 슈튀르크 백작을 암살했다. 테러는 사회주의운동에서는 정당화되기 힘든 투쟁 방식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F. 아들러의 행동은 전쟁에 지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17년 5월에 열린 재판은 “우리의 프리드리히를 구출하자”는 비엔나 시민들의 함성에 파묻혔고, 황제는 결국 대사면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반전운동의 도덕적 권위를 업고 F. 아들러와 바우어(그는 러시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 러시아혁명을 실제 목격했다)가 주도하는 좌파가 즉각적 종전(終戰)을 주장하며 그 해 가을 당권을 장악했다.
바우어 등의 좌파가 새로운 당(공산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의 좌익화를 지향하고, 렌너 등의 우파도 좌익화된 당을 떠나기보다는 소수파로 잔존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는 하인펠트 당대회 이후 오스트리아 노동운동 내에 강력한 전통으로 이어져온 ‘노동계급 단일정당’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우어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통일’의 사상이다. 이는 노동계급 단일정당의 이념이다.” 그는 이러한 선택이 “공산주의자가 특수한 당을 건설하기보다는 당대의 노동자정당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공산당 선언?의 정신을 올바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들만의 특수한 당을 건설하게 함으로써 유럽 노동운동을 분열시킨 코민테른의 방침은 ?공산당 선언?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1918년, 반전 분위기는 혁명운동으로 고조됐다. 100만 노동자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노동자평의회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총파업의 요구사항은, 즉각적?전면적 강화, F. 아들러의 석방, 그리고 혁명 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 사이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회담에 노동자대표를 파견할 것 등이었다.
결국 가을에 접어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다. 제국 곳곳에서 각 민족이 저마다 임시정부를 건설했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에서는 10월 30일에 좌파인 사회민주노동당, 우파인 기독교사회당, 범게르만당, 3당의 주도로 임시국민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11월 12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공이었다.  
바로 그 때 독일에서도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3월에는 과거 한 나라였던 헝가리에서 러시아와 같은 소비에트(노동자?병사평의회) 권력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혁명은 독일 혁명하고도 다르고, 헝가리 혁명하고도 달랐다. 무엇이 다르고, 왜 달랐는가?
우선 독일에서는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주도 아래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고는 하지만, 부르주아?지주 계급의 헤게모니가 그대로 유지됐고, 군대의 극우적 성격도 변함이 없었다. 다수파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병사평의회를 공화국 헌법이 통과되기 전까지의 과도 기관으로만 보고 곧 해산해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극우 장군들과 결탁해서, 혁명을 보다 진전시킬 것을 주장하는 과거의 동지들인 독립사회민주당?공산당(1918년 12월,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이 독립사회민주당에서 다시 탈당해 따로 독일 공산당을 건설했다)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이 때문에 이후 독일 최초의 공화국(흔히 ‘바이마르 공화국’이라 불린다)의 주도권은 줄곧 우파가 쥐게 되었고, 그 최종 귀결은 나치 정권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가 붕괴 일보 직전에 놓였다. 특히 주요 산업 기지가 슬라브어권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들이 따로 독립해나가자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는 제국이 찢겨나가면서 기존 군대도 철저히 해체됐다. 귀족계급 출신 장교들 대신에 병사평의회 집행위원회가 군을 장악했다. 그리고, ‘반전의 상징’ F. 아들러의 후광을 배경으로 좌파 주도의 당이 노동계급을 하나로 단결시켰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공산당이 별다른 힘을 얻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사민당은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노동자?병사평의회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했다. 독일과는 다른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신흥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적어도 초기에는 좌파의 주도 아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스트리아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할 것을 내건 러시아 혁명이나 헝가리 혁명의 길을 밟은 것은 아니었다. 바우어는 혁명을 민주공화국의 수립에서 그쳐야 할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내의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열이었다. 비엔나와 저지대 오스트리아는 혁명 세력이 다수를 이루었지만, 알프스 산간의 농촌 지역은 우파인 기독교사회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쉽게 농촌 수구 세력에게 포위될 수 있다는 게 바우어 등의 염려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새로 등장한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유럽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소국(小國)이라는 것이었다.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연합국이 무력으로 개입할 이유가 충분했고, 소국이어서 식량 및 자원 공급만 끊겨도 쉽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바우어의 해결책은 일단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이 ‘자제(自制)’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공화국 체제 안에서 급진개혁을 추진해나가는 게 최상책이다, 연합국 내의 사회주의 혁명 없이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영국과 미국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유럽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50만에 달했던 농촌 노동자들을 통해 농촌 수구 세력을 내부로부터 약화시키는 방법은 없었을까? 그리고 이미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개입에서 실패를 맛보았고 자신들도 국내에서 혁명의 위기를 느끼던 연합국 정부들이 과연 오스트리아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을까? 역사가들은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하지만, 아무튼 당시의 사민당은 이러한 길 ― ‘혁명의 잠정 중단’을 선택했다.
    
‘완만한 혁명’ -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오스트리아적 길?
 
다음 해 2월에 실시된 첫 총선에서 사민당은 국민의회의 159석 중 69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사민당 주도 아래 좌우연정이 수립되었다. 렌너가 초대 수상이 되었고(그는 2차 대전 후의 제2공화국에서도 오스트리아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다), 바우어가 외무상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사민당원인 율리우스 도이치가 국방상이 되어 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사민당 주도의 정부는 소국으로서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편으로 독일과의 통일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민당은 바우어가 “완만한 혁명”이라고 부른 장도(長途)에 나섰다. 바우어는 볼셰비키가 수립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러시아 상황에서는 필요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이는 10월혁명을 원천 부정한 서유럽의 다른 사회민주당들과는 분명 구별되는 태도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이론가들은 서유럽의 상황과 러시아의 상황은 다르다는 전제 아래, 서유럽 노동계급이 러시아혁명과 같은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일단 의회민주주의가 수립되고 나면,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내부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수립해나가는 ‘완만한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다른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의회 등의 기성 제도정치에 대중의 열망을 가둬두려는 시도였을지 모른다. 실제로 코민테른의 혁명가들은 그렇게 보았다. 하지만, 바우어 등이 ‘완만한 혁명’을 주장하면서 <의회>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획과 사회적 소유에 기반한 대안 사회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계획적인 조직 활동>이 노동 현장과 지역 사회에서 점차, 그리고 굳건히 자리잡아나가야만 한다는 것이 또 다른 논거였다. 러시아의 경우, 법령을 통해 급작스레 도입된 ‘사회주의’가 ‘건설’보다는 ‘혼란’을 낳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정작 사회주의의 주인공이어야 할 노동자?농민이 그것에 낯설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 있다.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추구한 ‘완만한 혁명’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건들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림 ) 초대 국방상이며 사민당 군사전문가였던 율리우스 도이치
첫째로 이는 군대에 대한 민중적 통제를 전제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초기에 국방군은 사민당원?공산당원 하사들, 그리고 이 하사들 중에서 진급한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 내에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있었다.
둘째, 이는 말 그대로 ‘부단한(중단 없는)’ 개혁을 요구했다. 사민당은 좌우연정 기간 동안 8시간 노동제, 법정 공휴일제, 국가 예산을 통한 실업구제제도, 대공장에서의 의무고용제도, 물가연동임금제 등을 실현시켰다. 그리고 중앙정부에서 물러난 뒤에도 비엔나시 등의 지방정부를 통해 계속 진보적인 보건??냅??주택정책을 추진했다.    
셋째, 기성 제도권을 넘어서는 민중권력기관의 존재가 또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사민당은 비록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의회나 지자체 등의 기성권력기관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제한하긴 했지만, 어쨌든 노동자평의회가 지방 행정, 공장 경영참가, 노동자 교육 등에서 계속 일정한 역할을 맡게 했다.
하지만, 한계들도 존재했다. 군대의 민중적 성격은 이후 우파 정권이 등장하면서 체계적인 좌파 숙청을 통해 변질되고 말았다. 급진개혁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가장 높은 수준의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우어의 주도 아래 ‘사회화위원회’가 만들어져 공동 소유?이윤 분배 등을 추진했고, 헝가리 혁명이 진행되던 1919년 당시에는 혁명의 공포 때문에 우파조차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1920년 3월에 헝가리 혁명이 진압되자마자 우파는 사회화위원회를 무력화시켜버렸다. 노동자평의회는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이 계속 축소되다가 선진노동자 투쟁조직인 ‘공화국 방어동맹(이하 방어동맹)’으로 재편되었다.   
아무튼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이러한 독특한 노선은 당시부터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사민당 자신이 1920년에 제2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모두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국제조직인 ‘2.5 인터내셔널’(사무총장: F. 아들러)을 조직하기도 했다(이는 1923년에 제2인터내셔널과 재통합한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다른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보다도 훨씬 더 격렬하게 오스트리아 사민당 지도자들을 비난했던 것도 결국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아예 포기한 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혁명이라는 이상을 놓고 코민테른과 자웅을 겨루는 ‘가장 밉살스러운’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정부가 애초에 F. 아들러를 일방적으로 붉은 군대 명예사령관, 소비에트 명예의장으로 위촉했다가 거절당하자 가혹한 비판으로 입장을 바꾸었던 일화는 이러한 애증관계를 잘 보여준다.  

승리의 준비인가, 후퇴의 변명인가 - 린츠 강령

좌우연정은 1920년 6월에 깨어졌다. 그 해 10월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기독교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여 우파연정이 등장했다. 부르주아 세력은 공화국 초기에 상실한 그들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복고(復古)’ 작업에 착수했다.  
사민당은 이 상황을 ‘완만한 혁명’의 재개를 위한 잠정적인 계급타협 국면으로 보았다. 당이 아직 권력을 쥐고 있는 비엔나 등의 지방정부에서 개혁을 계속 추진함으로써 다시금 대중의 지지를 넓히고 이를 통해 중앙권력을 되찾겠다는 것이 사민당의 복안이었다. 실제로 비엔나에서 사민당이 거둔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 등등의 말들이 널리 회자되었다.

행정면에서 비엔나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움직이는 도시일 것이다. 준엄하면서도 교묘한 세제(지방세 강화-인용자주)에 의해서 비엔나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유례없는 온정적 개혁을 실시하기 위한 재원을 조달했다. 그들은 건강진단소, 목욕탕, 체육관, 결핵요양소, 학교, 유치원 및 거대하고도 채광이 잘 되는 주택을 지었다. 그 주택들은 호화스럽다고는 할 수 없어도 외관이 수려하고 청결했으며 6만 세대―사회민주노동당원의 가족들―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빈민굴을 일소하였고 결핵발병율을 격감시켰으며 여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징수하여 그것을 마땅히 빈민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비엔나 사회민주노동당의 업적은 전후 유럽 각국을 망라하여 가장 위대한 사회적 위업이었다.
- John Gunther, Inside Europe, A. 스터름달,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212쪽에서 재인용.

그 결과, 200만의 비엔나 시민 중 50만명이 사민당의 당비 납부 당원이 되었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민당을 지지했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사민당의 상승세가 회복되었다. 당은 다음 총선에서 30만표를 더 얻어 재집권에 성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요소들이 있었다. 우선, 우파 정권의 장기 집권으로 인해 경찰과 군대의 우경화가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국가기구 내의 보수화와 더불어, ‘향토방위단’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이 농촌을 거점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독교사회당 내의 우파와 손잡고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을 본 뜬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국제적으로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남쪽에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는 데 더해, 북쪽에서도 히틀러의 나치당이 성장일로에 있었다.   
1926년 린츠 당대회는 바로 이렇게 기회와 위기가 서로 얽힌 상황에서 사민당의 집권 청사진을 밝히는 장이었다. 여기에서는 바우어의 주도로 ?린츠 강령?이 통과되는데, 이 강령에서 가장 이목을 끈 것은 다음의 언명이었다.
 
만약 부르주아지가 경제 생활의 사보타지와 무장 봉기, 해외 반혁명 세력과의 음모를 통해 노동계급 국가 권력의 과업에 거역한다면, 노동계급은 독재의 수단을 사용하여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할 것이다.
- 린츠 강령, 제3장 “국가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바우어 자신, 대회 석상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를 공격하려 하지 않는 경우에만 민주적 수단으로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를 감히 전복하려 한다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 O. 바우어의 린츠 당대회 연설, P. 브라니츠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Ⅰ)?, 419쪽에서 재인용.  
 
그림 )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오토 바우어
이는 “방어적 폭력” 개념으로 불리었다. 유사시에는 도이치가 지휘하는 선진노동자부대 ‘공화국 방어동맹’이 이러한 방어적 폭력의 기관이 될 것이었다. 
1927년 총선의 승자는 예상대로 사민당이 되었다. 당은 총득표수의 42%를 획득했다. 하지만, 사민당을 제외한 모든 부르주아 정치세력(파시스트 향토방위단을 포함하여)이 총단결했기 때문에 노동운동 진영은 여전히 권력의 바깥에 머물러야 했다.
이런 대치 국면에서 우파는 노동계급의 ‘방어적 폭력’이 과연 얼마나 강력할지 시험해볼 기회만을 노렸다. 그 해 7월, 선제공격의 기회가 왔다. 7월 14일, 3명의 파시스트가 사민당 집회장을 습격하여 1명의 병약자와 1명의 어린이를 살해한 샤텐도르프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자, 비엔나의 노동자 대중은 당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총파업을 개시했다. 수만명의 파업 대오가 보수적인 사법부를 압박하기 위해 대법원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우파 정부는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86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사민당 지도부는 의사당 건물에서 이 참극을 목격했다. 하지만, 방어동맹에는 어떠한 반격의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다. 당 지도부는 오히려 ‘화해 정부’(대연정)을 구성해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전술을 취했다. 우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적 폭력’이 얼마나 ‘방어적’인지를 이미 확인했던 것이다.     
이 1927년 7월의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사회당 우파는 향토방위단과 함께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노골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반면, 노동운동 측은 절정에서 계속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노조원 수는 1920년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고, 잇단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이 계속 우파연합에 의해 정권에서 배제당함으로써 사민당 지지 유권자들도 지지의 열의를 상실해갔다. 사민당은 원내에서도, 긴축 재정을 실시하라는 국제자본의 요구에 손을 들어주는 등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무장반격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방어동맹의 8만 선진노동자들은 D-데이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가운데, 일상 투쟁으로부터 오히려 괴리되는 함정에 빠졌다. 막상 공장과 사무실의 동료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두 집단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패배, 그리고 후일담
그림 ) 1934년 내전 당시의 시가전 모습

1933년 3월 4일, 드디어 돌푸스 수상의 기독교사회당 우파 정부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었다.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과 방어동맹을 불법화했다. 하지만, 원내 1당인 사민당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았다. 친이탈리아 파시스트 세력인 기독교사회당?향토방위단과 친독일 파시스트 세력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이라는 두 개의 파시스트 위협이 공존했다는 사정이 좌파의 저항을 교란시켰다. 보다 극악한 나치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회당의 조치를 묵인할 수도 있다는 게 당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그 해 9월의 당대회는 “파시스트 헌법의 강행, 당 해산, 노동조합 해산, 비엔나 시청 점령 등의 4개 조건” 중 하나가 감행될 때만 무장 반격에 나선다는 결정을 내렸다. 후에 바우어는 이 때의 오류를 통렬하게 자기비판했다. “그 해 3월에 총파업과 원외 투쟁으로 맞섰어야 했다.”
다음해 2월, 프랑스에서마저도 파시스트가 파리의 거리를 점거하자 우파 정부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3월 12일 바우어의 국외 추방령, 방어동맹 간부의 일제 검거령이 내렸다. 총파업이 선포되었고, 각지에서 방어동맹이 산발적으로 봉기했다. 4일간의 내전. 하지만, 극우세력의 도구로 전락한 국방국은 효과적인 지휘체계를 상실한 방어동맹을 철저히 짓밟았다. 120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2만명의 투사가 투옥되었다. 사민당은 불법화되고, 지도자들은 망명했다.  

결과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사민당도 독일 사민당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 세력에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독일의 동지들과는 달리 오스트리아 사민당이 상당 기간 동안 실질적 개혁 조치를 통해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유지했다는 사실이 잊혀져선 안 된다.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권력을 잡아 최초로 케인즈주의적 개혁(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이었던)을 추진했던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오스트리아의 진정한 ‘비극’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날지 모르겠다. 비슷한 정도의 개혁 노력이 스웨덴에서는 면면한 성과로 남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곧 쓰러지고 만 가장 커다란 요인은 역시 스웨덴은 유럽의 중심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고, 오스트리아는 그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웨덴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강대국의 눈길에서 비껴 설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결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사회주의 사회 질서는 자본주의적 세계 환경에 종속적인 소국 내에서 개별적으로 수립될 수 없”으며 “오직 거대한 단일 지역권”에서만 가능하다는 린츠 강령의 정신 ―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확고한 숙명론이 옳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가?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역사의 ‘또 다른’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볼셰비키나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지도자들이나 모두 “국제 혁명 없이는 일국 혁명도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지녔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나온 결론은 정 반대였다. 볼셰비키는 그래서 일국 혁명을 통해 국제 혁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에 따라 10월혁명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민당은 국제 혁명 전까지는 일국 혁명도 시도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지루한 대치전을 선택했다. 전자가 ‘돈키호테’였던 것일까, 후자가 ‘배신자’였던 것일까? ―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평가가 가능한, 꼭 평가해야 하는 교훈들도 있다. 그 첫째는 사민당이, “계급 협조는 국가 권력을 둘러싼 계급 전쟁의 일시적인 발전 단계일 수 있을 뿐이며 이것 자체가 투쟁의 목표여선 안 된다”는 린츠강령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타협 국면을 더 높은 수준의 공세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결정적인 후퇴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는 모든 진지한 개혁 투쟁이 공히 부닥칠 수 있는 함정이다.
다음으로는 제도권 내 활동과 대중투쟁, 대중권력을 서로 연결시킨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전자에 후자를 종속시켰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에 공감한다고 평가되는 프랑스 공산당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조차도 이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볼셰비즘이나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똑같이 거리를 두고 있으며, 민주화된 대의적 제도들의 측면에 직접민주주의의 사회운동이라는 측면을 통합시키면서 접합시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 경험은 국가장치의 고유한 물질성으로 인해 이들 운동이 스스로를 국가의 행정적 회로 속에 통합?동화시키면서 결국은 국가의 망 속에서 분해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N. 풀란차스, ?자본의 국가?, 박성진 옮김, 백의, 1996, 170쪽.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정당이 취해야 할 정치전략에 대해 어쩌면 코민테른의 단순한 명제들보다도 더 풍부한 영감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해답까지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해외로 망명한 바우어와 도이치는 <혁명적 사회주의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비합법 투쟁을 시작했다. 바우어는 이제 ‘폭력’과 ‘독재’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두 세계 대전 사이에서??와 ?비합법 당?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반파쇼 운동 과정에서 개혁적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코민테른)를 재통일하는 ‘통합 사회주의’를 새로이 구축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필연적으로 닥쳐올 제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 노동계급운동이 다시 ‘통합 사회주의’의 대의 아래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큰 꿈이었다. 하지만, 그는 1938년 망명지에서 숨을 거둬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 결말은 언제나 이래야만 하는 것인가?  

* 참고할만한 책
- P. 브라니츠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Ⅰ)?, 이성백?정승훈 옮김, 중원문화, 1989.
- A. 스터름달,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황인평(황광우) 옮김, 풀빛,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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