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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 제3세대 좌파정당들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4. 1. 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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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행
- 제3세대 좌파정당들
장석준(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전 세계 좌파정당의 역사는 이제 150년을 내다보고 있다. 그 백 수십 년을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왔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최근세사 혹은 동시대사라고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설 차례다. 바로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이 시작된 뒤 등장한 젊은 정당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순서인 것이다.  

1, 2세대의 좌파정당들을 되돌아본다

신생 좌파정당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시작되는 좌파정당사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돌이켜 보면 좌파정당들의 출현과 흥망성쇠에는 이제까지 두 번의 커다란 물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독일을 필두로 유럽 각국에 확산된 제1세대 좌파정당의 물결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러시아 10월혁명을 계기로 전 세계를 휩쓴 제2세대 좌파정당의 물결이다. 첫 번째 물결에 속한 정당들은 과거 제2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조직에 속해 있었고, 지금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이라는 그 계승조직에 모여 있다. 두 번째 물결에 속한 정당들은 2차 대전 전까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라는 국제조직의 산하 지부로 존재했고, 대개 Communist Party(공산당)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1세대 좌파정당들이 등장하고 발전해간 시기는 세계 자본주의가 1870년대의 세계불황을 겪으면서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던 때였다. 이 시기는 흔히 ‘벨 에포크(좋은 시절)’라고 불린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경쟁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열어 가는 듯이 보였고, 의회 민주주의도 노동계급의 진출에 따라 그 저변을 넓혀 갔다. 바로 이러한 때에 등장한 1세대 좌파정당들은 당 강령을 통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 정치의 제한된 틀에 적응해갔다. 이 때문에 개혁과 혁명의 문제가 중요한 고민 거리로 등장했고,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조레스 같은 이들이 저마다 이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림 ) 코민테른의 이상을 표현한 오토 그리벨의 그림 <인터내셔널>
그러나 막상 제국주의의 모순이 세계전쟁이라는 형태로 폭발했을 때 1세대 좌파정당들은 이러한 위기에 대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을 제도 정치에 종속시켜왔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 때 구원의 별빛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 즉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에 종속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제압하는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세대 좌파정당의 실천에 실망한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를 모범 삼아 새 세대의 좌파정당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때 비로소 좌파정당이 유럽을 넘어서 세계 각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중국 공산당을 필두로 아시아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혁명을 추구하는 정당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2세대 좌파정당들의 등장 이면에는 1929년 대공황을 정점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의 첨예한 위기 상황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과거의 문제들이 자동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20~1930년대의 위기는 혁명의 확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발전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2세대 좌파정당들의 시각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났다. 20년대 초반 독일 혁명의 무산 이후 서유럽의 2세대 좌파정당들은 한때 심각한 고립 상황에 빠졌다가 다시 대중정치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 계기는 반파시즘 투쟁이었다. 그러나 반파시즘 투쟁을 통해 의회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으로 부상하고 났을 때 2세대 좌파정당들에게 닥친 시험은 과거와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제도 정치와 대중 정치, 개혁과 혁명, 당과 대중운동조직?민중자치기관 사이의 관계, 연합 전술의 문제 등등. 특히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유례없는 장기호황이 계속되자(소위 ‘황금기’) 이러한 문제들은 세기초보다 더욱 첨예하게 제기되었다.
2세대 좌파정당들이 익숙한 난제에 부딪혀 있을 때 1세대 좌파정당들은 뜻밖의 원군을 만났다. 자본가들이 받아들인 새로운 재정정책, 케인즈주의가 그것이었다. 팽창재정의 가능성이 열리자 비로소 1세대 좌파정당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시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개혁들, 즉 복지국가의 수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직후의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은 전적으로 사적 자본과 타협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리고 의회 민주주의의 제한된 틀을 넘어서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한계들은 1974년 새로운 세계불황을 계기로 자본가들의 정책 기조가 긴축재정으로 돌아서자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경제위기에 대해 탈자본주의 대안사회의 건설로 맞선 1세대 좌파정당 내의 급진적 흐름은 우파가 아니라 자기들 당 안의 주류 세력으로부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후 1세대 좌파정당들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제도 정치의 틀 안에서 신자유주의 우파에게 한 발 한 발 계속 양보하다가 결국 누가 우파고 누가 좌파인지 알 수 없는 상태까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지구의 다른 한편에서는 1917년 혁명으로 시작된 거대한 실험이 무너져 내렸다. 이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더욱 강력한 엔진을 확보하게 되었고, 스탈린주의의 오류들과 운명을 함께 했던 대다수 2세대 좌파정당들은 삽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3세대 좌파정당의 등장 - 독일 녹색당을 중심으로

좌파정당의 또 다른 물결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사회민주주의적 의회 정당과 전위를 자처했던 코민테른형 정당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등장한 제3세대의 좌파정당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최초의 사례는 1959년에 창당한 덴마크의 사회주의민중당(SF)이다. 이 당은 덴마크 공산당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만들었는데, 분당의 계기는 1956년 헝가리혁명이었다. 소련군이 헝가리 노동자들의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이 사건은 서유럽의 2세대 좌파정당들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백만 이상의 당원을 확보했던 이탈리아 공산당마저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회민주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인 좌파 세력을 지칭하는 ‘신좌파(New Left)’라는 말이 처음 생겨났다. 그런데 신좌파가 일부 지식인의 흐름으로 제한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덴마크에서는 곧바로 신좌파의 대중정당으로 사회주의민중당이그림 ) 1기 녹색당 의원들의 모습. 의사당에서 선글라스를 끼거나 청재킷 차림인 것이 인상적이다.
 출현했다. 사회주의민중당은 기존 공산당의 친소노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사회민주주의(덴마크 사회민주당)를 왼쪽으로부터 압박하는 노선을 취했다. 이들은 가장 최근의 총선(2001)에서도 6.4%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등 여전히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1961년에 처음 등장한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익당(SV)이 있다.
하지만 세계 자본주의의 중앙 무대에서 보다 극적인 모습으로 등장한 신좌파 정당의 사례는 1980년 1월에 창당한 독일 녹색당이다. 많은 이들이 독일 녹색당을 단순히 환경이라는 단일 쟁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당으로만 바라보곤 하는데, 이는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적어도 창당 당시 녹색당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애초에 창당의 주요 기반이 된 세력들이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배척 당한 당내 좌파, 마오주의 그룹, 자율주의 그룹 등 60년대 말의 신좌파 학생운동 출신자들이었다는 데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녹색’에는 환경파괴와 핵무장?핵발전에 대한 거부 외에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 대안경제의 수립 같은 좌파의 가치가 녹아 있었다.
서독의 신좌파 그룹들은 70년대 말부터 선거연합을 결성해서 지방선거에 대응하다가 1979년 제1차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대안정치조직-녹색인’이라는 전국조직을 건설했다. 이 때 얻은 득표율이 3.2%이었다. 처음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고, 그래서 이를 발판으로 1980년 1월 녹색당을 정식 창당했다. 하지만 그 해의 총선에서 신생 녹색당이 거둔 득표율은 1.5%에 불과했다. 이는 비례대표 의석을 배정 받을 수 있는 하한선인 5%에 한참 못 미치는 결과였다. 당시 우파 수상 후보가 극우 성향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권을 막기 위해 다수의 유권자들이 사회민주당에 ‘전략적으로 투표’한 것이 녹색당의 주된 패인이었다. 
그러나 녹색당의 드라마는 오히려 그 다음부터였다. 마침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70년대의 데탕트 분위기를 깨고 제2차 냉전을 개시했다. 미국 정부는 서유럽에 크루즈 미사일과 퍼싱Ⅱ(대륙간 핵탄두)를 대량 배치하기로 결정했고, 당시 서독의 슈미트 사회민주당 정부는 이를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수십만이 운집한 반핵평화 시위가 잇따랐고, 그 대열에는 항상 녹색당이 앞장섰다. 이 분위기는 연방 총선 사이에 열리는 주 선거들에 그대로 반영됐다. 녹색당은 1981년 서베를린 선거에서 7.2%를 얻은 것을 시발로 5% 이상의 득표율을 유지했다. 그리고 드디어 1983년 총선에서 5.6%를 획득, 연방의회에 진출했다. 당은 그 해 11월에 열린 당대회에서 NATO 탈퇴를 결의하는 등 반핵평화운동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원내에 처음 진출한 초창기 녹색당은 의원단 활동과 관련하여 다양한 실험을 벌였다. 단지 녹색당 의원들이 청바지 차림으로 등원했다는 것 그 이상이었다. 우선 중앙 당직과 공직을 철저히 분리했다. 의원들이 당 최고집행기관인 연방간부회의의 성원이 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의원단이 당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이 원내화하고 이념정당의 성격이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원래 4년 임기인 비례대표 의원이 2년만 의원으로 봉사하고 물러나게 하는 순환 임기제를 시도했다. 2년이 지나면 의원직은 비례대표명부의 후순위가 계승하고, 전임 의원들은 이제그림 )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녹색당의 포스터
 당 일선이나 사회운동으로 돌아가 밑에서부터 다시 활동한다. 이는 녹색당 의원들이 의회정당의 직업정치인으로 고착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한편 같은 취지에서, 의원 급여를 노동자 평균임금에 맞춰 그 이상의 세비는 당비로 납부하게 했다. 정부의 국고보조금은 ‘생태 기금’으로 만들어 생태주의 운동의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초창기 녹색당은 의원단에 대한 통제를 통해 의원들이 아닌 당원 대중이 주인 되는 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당이 제도 정치에 흡수되어 사회운동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정치 부대로서 활동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좌파정당이 처음으로 제도 정치의 덫에 빠지고 만 그 나라(독일)에서 이러한 의식적 실험들이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연은 아니었다(이 시기 녹색당은 심지어 ‘반反정당적 정당’을 자처하기도 했다).
녹색당의 또 다른 괄목할 실험은 여성 정치 참여의 의식적 확대였다. 당시 서독의 정당들 중 최초로 비례대표 의원의 50% 이상 여성 할당제를 실시해서 서유럽에서도 가장 선구적으로 ‘여성’ 정당의 면모를 갖춰갔다. 비록 여성 당원은 1/3 수준에서 조금씩 늘어갔지만 여성 의원은 전체 녹색당 의원 중 2/3를 넘었다.
녹색당의 참신한 ‘실험 정치’는 특히 좌파 성향의 젊은 유권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녹색당 지지층의 80%는 이전 사회민주당 지지자였고, 가장 높은 지지 빈도를 보인 연령층은 25세 이하였다. 계층적으로는 사회민주당이 새로운 정치 쟁점들(반핵, 평화, 여성해방 등)에 무감한 데 반발한 사무?기술?전문직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림 ) 한 독일 청바지 회사의 풍자적인 광고 - 청바지가 외친다, “피셔, 나를 잊은 거야?”
그러나 녹색당의 실험은 여기까지였다. 녹색당은 점차 사회민주당과 다르지 않은 의회정당이 되어갔다. 일이 이렇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당 성장의 기반이 된 대중운동, 즉 반핵평화운동의 침체였다. 1983년 가을 크루즈?퍼싱Ⅱ 배치가 최종 결정되자 시위 물결도 수그러들고 말았다. 이후 녹색당은 이 때와 같은, 대규모 사회운동과 당의 결합을 결코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당원은 3만명 수준에서 더 늘지 않았고, 2년 순환 임기제는 곧 연임금지제로 완화되었으며, 요슈카 피셔 같은 야심가가 당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80년대 말까지 당의 주도권을 당내 좌파인 근본주의파(무정부주의 성향)와 생태사회주의파가 쥐었다고는 하지만, 이 사실이 당의 우선회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당내 우파인 생태자유주의파와 현실주의파(피셔가 주도)가 사회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한다는 확실한 전략 방침을 제시한 데 반해, 좌파는 그에 상응하는 전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이 그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이는 독일 녹색당뿐만 아니라 북유럽의 신좌파 정당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왼쪽에서 이를 보완해주는 역할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좀 더 적극적이고 독자적인 활동을 통해 좌파 전체의 대안으로 부상하길 시도할 것인가? 대개의 신좌파 정당들이 ‘결국’ 안주한 것은 전자였다. 독일 녹색당도 사회민주당의 연정 파트너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독일의 코소보 전쟁 참전을 지지하는 요즘 녹색당의 모습은 그 길에서 마주치는 한 풍경일 뿐이다.   

제3세계의 3세대 좌파정당 - 브라질 노동자당을 중심으로

독일에서 녹색당이 창당한 바로 그 해(1980) 2월, 브라질에서는 노동자당(PT)이 출범했다. 브라질에서 이 신생 노동계급 대중정당이 등장한 그 때, 서유럽에서는 바야흐로 신우파의 공세가 날을 세우고 있었고 반면 1, 2세대 좌파정당들은 마지막 남은 활력마저 상실해가던 중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당은 사회민주주의 전통과 코민테른(사실은 스탈린주의) 전통에 대해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비판에 동의하는 광범한 좌파의 결집체가 노동자당이었고, 그래서 노동자당의 이념은 느슨하게 ‘민주적 사회주의’라고 정의되었다. 이 점에서 노동자당은 비유럽 세계에 등장한 제3세대 좌파정당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림 ) 노동자당의 시위 모습
녹색당의 창당과 성장의 밑거름이 된 대중운동이 반핵평화운동이었다면, 노동자당에게는 전투적 노동조합운동과 반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이 있었다. 노동자당 창당의 직접적 배경은 1978~79년 2년 동안 계속된 브라질 남부 산업지대의 대중파업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아직 군부독재 치하에 있었으나 70년대의 세계적 불황은 대중들의 불만을 드높여 군부독재를 밑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이미 어용 노동조합에 반대하며 폭발의 조짐을 보이던 노동현장은 1977년 정부가 그 동안 임금인상을 억누르기 위해 인플레이션률을 조작?발표해왔다는 사실이 새나가자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마치 우리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길게 늘여 놓은 것과 같은 2년간의 파업 물결이 계속됐다. 노동자당 창당을 주도한 룰라 등 민주노동조합운동 지도자들은 바로 이 투쟁을 주도하면서 부상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나라와는 달리 브라질에서는 민주화 투쟁 이후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노동자 대투쟁이 있고 나서 민주화 투쟁이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일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브라질의 노동운동 세력은 이후 민주화 투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전위 투사’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국가보안법으로 투옥되기까지 한 룰라 같은 현장 출신 지도자들이 있었다.
물론 반군부독재 민주화 과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존재했다는 사실은 노동자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분열주의’라고 매도하는 소부르주아 정치꾼들의 오만이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군부독재가 계속되던 80년대 초의 브라질이 90년대 초의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도 초창기의 시련을 비껴갈 수는 없었다. 비록 창당 때부터 몇 명의 국회의원들이 입당하고 민주노동조합의 전폭적 지원을 통해 50만 이상의 당원을 확보하긴 했지만, 1982년 첫 총선 결과는 3.1%라는 저조한 것이었다. 8명의 의원이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미 5명의 의원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별로 감동적인 게 못 되었다.
이 때 노동자당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독일 녹색당과 마찬가지로 대중운동의 열기였다. 한편에서는 민주노조 진영이 새로운 노동조합총연맹인 CUT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농민운동 세력들이 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1983년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반군부독재 투쟁에 불이 붙었다는 점이다. 노동자당은그림 ) 참여와 토론에 바탕을 둔 민중교육을 주장한 파울로 프레이리
 이 투쟁에 앞장섰고, 룰라는 그 간판 연사가 되었다. 이 때 비로소 노동자당은 수만이 모인 대중집회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당은 1987년 2월에 소집된 제헌의회에서 새로운 헌법에 민중의 진보적 목소리(군부의 정치개입 금지, 노동권의 완전한 보장, 농지 개혁, 외채 문제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등)를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수야당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노동자당은 이렇게 막 부상하던 대중운동들에 기반해 성장했고 처음부터 자신을 “민중운동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무엇보다 당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서 당의 기초조직인 누끌레오(‘핵심’이라는 뜻)의 의사가 실질적으로 존중받는 전통으로 나타났다. 누끌레오는 코민테른형 정당들의 ‘세포’ 조직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과거의 세포 조직과는 다르다. 스탈린주의 당에서 세포의 역할이 흔히 당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국한됐던 데 반해, 누끌레오들은 토론을 통해 당의 중요한 전략적 결정이나 후보자 선택을 좌우하는 역할을 한다. 아래로부터의 토론과 의사결정이라는 점이 훨씬 강조된 것이다. 이는 1, 2세대 좌파정당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뿐만 아니라 브라질 민중운동의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함께 진리를 찾아간다는 P. 프레이리의 민중교육 사상, 민중들 스스로 의식화를 이루도록 하는 해방신학 기초공동체운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노동자당의 이 최상의 측면은 지자체 수준에서 시도한 참여민주주의의 실험들에서 빛을 발했다.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참여예산제가 바로 그것이다. 1989년 대선에서 룰라가 대선 결선 투표까지 진출한 이후 노동자당은 남부의 산업 도시들에서 상당수의 시장을 배출했다. 그러나 노동자당 시장들은 대개 보수파 다수의 시의회의 비토로 인해 당이 내건 진보적 공약들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당 시장들이 다음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리고 노동자당 자체도 잇따른 대선 패배와 신자유주의 공세의 본격화로 90년대 내내 침체 상황에 내몰려야 했다. 바로 이 때 돌파구를 열어준 것이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서 추진된 참여예산제 실험이었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노동자당 시정부는 보수적 시의회의 반발을 의회 바깥에 민중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이 직접 총회를 열어 대표자를 뽑고 요구를 제출해 시 예산을 짜게 한 것이다. 이는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기존의 관료기구를 해체하고 민중자치기관이 진출하도록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참여예산제의 성공 덕분에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서는 노동자당이 연속 집권했고 결국은 시의회의 구성도 진보파 다수로 바뀌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산안 작성에 대한 민중의 참여가 거듭되면 될수록 다양한 주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는 점이다. 당의 활동과 국가권력 장악을 사회운동이 발전하고 대중이 직접 권력의 주인이 되는 계기로 삼는다는 창당 정신은 이제 공문구만이 아니게 되었다. 즉, 의회주의나 스탈린주의가 아닌 또 다른 정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포르투 알레그레를 비롯해 노동자당이 집권한 브라질의 많은 도시들에서는 민중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사회복지와 공공부문이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작년 대선에서 노동자당은 드디어 룰라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비록 취임 후 6개월간 룰라 정부의 행보를 놓고 기대와 실망이 엇갈리고 있지만,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이 다음과 같은 자신들의 초심을 잃지 않는 한, 기대의 끈을 놓아버릴 일은 아니다. 

  나는 진리의 소유자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생각을 토론에 붙이고자 한다. 그래야 사회와 그리고 특히 노동자계급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 룰라, 1985년,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147쪽에서 재인용.
 
그림 ) 2002년 대선 룰라 후보 포스터
이쯤에서 한 가지 더 지적해야 할 것은 노동자당이 직면한 전략 문제는 독일 녹색당의 그것과는 좀 달랐다는 점이다. 브라질에서는 좌파정당의 전통이 워낙 취약했기 때문에 노동자당이 쉽게 좌파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녹색당이 직면한 것과 같은 선택, 즉 연정의 하위 파트너냐 외로운 야당이냐의 갈림길에 직면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는 대통령 중심제의 특성도 작용했다. 미국식의 대통령 중심제는 일반적으로 좌파정당에게는 이롭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옌데나 룰라 같은 확실한 대중지도자가 존재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대통령 선거라는 공간을 민중 동원의 계기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의미에서 대중정치의 측면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전략적 선택이라는 시험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을 목표로 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중간계층과의 연합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처럼 중간계층이 신자유주의의 국가경쟁력 이데올로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대에 이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우파에 대한 실질적인 양보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고 집권 자체를 거부할 것인가?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이 직면한 근본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는 노동자당과 비슷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조직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브라질의 옆 나라인 우루과이의 확대전선(FA)이다. 확대전선은 아래에서 설명할 스페인의 통합좌파처럼 여러 개의 좌파 정당?조직들이 결집한 공동전선이면서 그 자체 하나의 정당처럼 활동하는 특이한 정치조직이다. 확대전선 역시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 가능성에 도전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고취하고 있다.
또한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과거에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물론 혁명으로 집권하기까지 했었다),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등이 이제는 합법대중정당으로서 대중투쟁과 결합된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다.

좌파정치의 재구성과 신생 좌파정당들 

독일 녹색당 이후에도 유럽 곳곳에서는 제3세대 좌파정당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급진좌파정당들이 계속 등장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 사이에는 주로 유럽 공산당들의 변신이 이 흐름을 주도했다. 유럽 공산당들은 한편으로는 스탈린주의와 보다 분명히 선을 그을 필요성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우경화되어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내버린 좌파 정치공간을 진공으로 남겨두면 안 된다는 절박한 과제에 마주했다. 유럽 공산당들은 하나 둘씩 당명을 바꾸고 새로운 실험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스페인의 통합좌파(IU)다. 1986년 3월, 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며 당시 여당이었던 사회주의노동당(PSOE)은 NATO 가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PSOE는 NATO 가입을 적극 추진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주요 정치세력들 중 유일하게 반대 입장이었던 스페인 공산당은 PSOE 탈당파 등 광범한 진보세력을 규합해서 ‘시민 강령’이라는 이름 아래 공동행동을 벌였다. 결국 NATO 가입안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예상외로 반대표가 39.9%나 나왔다. 스페인 공산당은 이 성과를 3개월 뒤의 총선으로 이어가기 위해서 ‘시민 강령’을 좀 더 안정적인 정치조직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통합좌파다.
통합좌파는 고전적인 용어로 말하면 공동전선 조직이다. 공산당은 자체 당 조직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몇 개의 소규모 좌파정당들이 조직적으로 결합해 있다. 하지만 통합좌파는 그 자체 하나의 정당 조직이기도 하다. 개인 가입 당원들이 있고, 정기적인 대의원대회도 갖는다. 그리고 선거뿐만 아니라 일상 활동에서도 통합좌파라는 이름을 내세운다. 이런 과도적 조직 형태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고, 지지율은 5%에서 10% 사이를 오간다.
통합좌파와 같은 기이한 조직 형태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민주주의의 왼쪽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세력이 긴급히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코민테른 식의 사상적 통일성을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통합좌파에는 공산당 외에도 좌파 사회민주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 지역분리주의 좌파, 생태주의자, 여성주의자 등 다양한 경향들이 결합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은 이제 더 이상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사회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스웨덴 공산당은 좌파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환경, 여성 등의 쟁점을 부각시켰다. 핀란드 공산당은 좌파연합이라는 공동전선형 정치조직으로 전환했다. 네덜란드 공산당은 1989년 다른 진보세력들과 함께 녹색좌파(GL)라는, 생태주의 성향이 강한 새 정치조직을 띄웠다.       
그림 ) 재건당의 포스터 - 부의 재분배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극적인 두 사례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우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되는 와중에 구 동독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은 민주사회주의당(PDS)으로 전환했다. 이는 한국의 보수정당 식의 간판 바꿔 달기만은 아니었다. 새 당의 주도권을 쥔 것은 구 동독의 관료층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관료들에 저항했던 ‘진짜’ 맑스주의자들이었다. PDS가 일단 명맥을 유지한 것은 구 동독 지역의 소외 계층이 이 당을 동독인의 이해를 대변할 정당으로 보고 지지했기 때문이지만, 차츰 구 서독 지역의 진보 세력들도 이 당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독 출신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녹색당의 우경화에 실망한 이들이 이 당에 접근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1991년 공산당이 좌파민주당(PDS)이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변신하자 이에 반대한 당내 좌파가 따로 공산주의재건당(PRC, 이하 재건당)을 차렸다. 창당 세력 중에는 과거 공산당 내의 스탈린주의 분파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 축은 이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잉그라오 좌파나 60년대 신좌파의 후예들이었다. 점차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당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공산당의 오랜 숙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까지 당에 결합하기에 이르렀다.
재건당에서 특기할 것은 1998년의 역사적 선택이다. 그 전 해까지 이 당은 PDS가 주도하는 중도좌파 정부를 내각 바깥에서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중도좌파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 아래 번번이 긴축 예산을 제출했다. 재건당으로서는 지지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하지만 재건당이 비판적 지지를 철회한다면 중도좌파 정부가 붕괴하고 극우 성향의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다. 재건당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독일 녹색당처럼 주류 좌파정당의 하위 파트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비록 광야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좌파의 원칙을 명확히 할 것인가? 98년 재건당 지도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 해 연말의 예산안 심사에서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그림 ) 수만명이 운집한 재건당의 반전집회
이 때 당내 스탈린주의 분파는 중도좌파 정부를 구해야 한다며 당을 뛰쳐나갔지만, 이것이 오히려 당의 장기적 발전에 좋은 출발점을 마련해주었다. 재건당은 의회 안의 압박 전술에 매몰되기보다는 사회운동을 부활시키고 제도 정치와 대중운동 사이의 연계를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선거에서는 중도좌파에 대해 독자성을 분명히 했다. 중도좌파가 집권에 실패하면 그 욕이 다 재건당으로 떨어졌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다. 현재 재건당은 우파연합과 좌파연합 사이의 각축 속에서도 5% 이상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으며 11명의 의원(그 중에는 노동현장에서 바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들도 있다)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당의 존재를 가장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유럽사회포럼의 거리 토론회나 총파업, 반전 시위 현장이다.
9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형태의 좌파정당 창당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종파주의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이다. 이들은 좌파정치의 전통을 거리와 현장으로부터 복구한다는 원칙을 한층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점에서 1998년 재건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며, 비교적 일찍 등장한 신좌파 정당들의 ‘변질’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70년대부터 활동해왔지만 최근 들어서 주목받기 시작한 네덜란드의 사회주의당(SP)이 대표적인 예다(이 당의 주류는 트로츠키주의 계열이 아니라 과거 마오주의자들이지만). 사회주의당은 녹색좌파가 채워주지 못하는 대중의 갈증에 부응해왔으며, 급기야 작년 총선에서는 녹색좌파의 지지율을 넘어섰다.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이나 포르투갈의 좌파블럭(BE)도 젊고 활기찬 좌파정당의 좋은 사례다.
비록 아직은 소규모의 신생 정치세력들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게는 마치 100년 전에 1세대 좌파정당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이상과 생명력이 살아 있다. 재건당의 사무총장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이들 정당의 시대정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대안좌파의 유일한 기준은 전쟁에 대한 근본적 반대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총체적인 기각이다. 대안좌파는 우선적으로, 대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운동들과 교류한다. 대안좌파의 존재 이유는 집단적 행동을 또 다시 유효하게 만듦으로써 정치 자체를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정치를 개혁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는 당과는 다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조직들이 당과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변혁을 지향하는 대안좌파는 참여와 다원주의, 차이의 존중과 자주관리의 방향으로 스스로 변혁해야 한다. - F. 베르티노티, ?공산주의의 재건과 대안좌파의 건설?,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 운동?, 공감, 2003. 70쪽. 번역을 일부 수정, 강조는 인용자의 것)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진실을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 사이에는 교과서 중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권위를 유지하는 그런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세대 정당들이 우리의 교과서인가?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서유럽이 아닌 지역에서 성공한 사례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같은 과거 영국 식민지들 정도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 코민테른의 교과서는 살아 있는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오직 이념적 통일성을 무기로 하는 집단이 그러한 이념의 선전만으로 대중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례 역시 없다. 이것이 역사 속의 좌파정당들을 살펴보고 난 뒤의 결론이다.
확실한 것은 오직 각각의 시대에 가장 진지한 실험 정신을 보여준 세력만이 역사에 족적을 남길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것뿐이다. 운동의 뿌리로부터 유리되지 않으며 그 자신 하나의 운동이 될 줄 알았던 당들만이 민중의 행복과 기억 속에 거할 수 있다.
그리고 확실한 게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아무도 아직 이 이야기의 끝은 모른다는 것이다.


* 참고할만한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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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연, ?서유럽의 신사회운동과 녹색당의 형성: 독일, 스웨덴, 영국을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석사논문, 1999.
- M. 로위, ?민주화와 민중정당: 브라질 노동자당(PT)의 경우?, 한국정치연구회 이론분과 편, ?반파시즘 민주혁명론?, 이성과현실, 1989.
- 박노자, ?노르웨이의 신좌파 - 사회주의좌익당(SV)?, <이론과 실천> 2002년 9월호.
- M. 스페어, ?녹색혁명가 페트라 켈리?, 환경운동연합 옮김, 나남,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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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 파킨,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페트라 켈리 전기), 김재희 옮김, 양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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