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당의 조용한 죽음
장석준(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동아시아에는 지금 힘있는 좌파정당이 없다. 20세기에 민족해방투쟁을 이끌었던 당들은 개발독재의 도구가 되어 있거나 역사를 열어나갈 에너지를 상실했다.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러한 지역에서 새로이 당운동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예전에도 이랬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최선두 주자였던 일본에는 유력한 좌파정당이 존재했었다. 바로 일본 사회당이다. 이 당은 한때 자유민주당과 경쟁하며 집권을 넘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군소 야당으로 전락해 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일본 사회당의 영광의 시절
일본에서는 1차 대전 이후부터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좌파정당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힘은 유럽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억압적 정치체제는 한편으로는 공산당 등 급진파를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심하게 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선거권을 도입하여 온건파를 포섭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이 때문에 좌파는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합법좌파정당 중에는 체제에 협조하거나 포섭된 사회민중당, 일본사회당이 있었는가 하면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반대 때문에 소속 국회의원이 암살 당하는 수난까지 겪은 노동자농민당도 있었다.
일본 노동운동의 봄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점령군을 통해 왔다. 미국 점령군은 일본 군국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초기에는 진보적 정책을 폈다. 전쟁 전의 재벌이 해체되고, 토지개혁이 단행됐다.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가 공공연히 정치활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쟁 전 서로 반목하던 비공산당 계열 좌파들은 그들 스스로 공동전선당이라고 칭한 새로운 당을 건설했다(1945. 11. 11). 이것이 바로 일본 사회당의 시작이다.
공동전선당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당에는 전전(戰前) 사회주의운동의 좌?우파가 불안하게 동거하고 있었다. 이들이 불신과 반목 속에서도 서로 합친 것은 미군정을 통해 열린 자유선거의 가능성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서였고, 노동운동에 세력을 뻗치며 급성장하는 듯 보이던 공산당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시작은 좋았다. 창당 1년만에 사회당의 지지율은 41%를 기록했다. 일본의 비무장을 규정한 새 헌법이 통과되고 나서 실시된 1947년의 첫 선거에서 사회당은 143석을 획득,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사회당의 가타야마 테츠 위원장은 보수정당인 민주당, 국민협동당과 연정을 구성했다.
그러나 다음해까지 지속된 짧은 집권의 경험은 사회당의 역사에 상처만을 남겼다. 실력 없는 세력의 집권은 당내 좌?우 대립의 격화와 대중의 실망만 초래했다.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었던 석탄산업 국유화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전쟁 직후 좌파 주도로 상당한 수준의 개혁을 성취한 서유럽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타야마 내각의 실패 후 당 지지율은 19%까지 급락했다. 마침 이 때부터 미국의 정책도 급변한다. 맥아더 사령부는 전범 집단인 보수정당들과 협력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고 노동운동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과거의 적국인 서독과 일본을 냉전의 동맹세력으로 만드는 쪽으로 점령정책의 방향을 틀었다. 이른바 ‘역코스’ 정책의 시작이었다. 그 일환으로 1951년 소련, 중국을 배제한 채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같은 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1954년에는 비무장을 명시한 헌법 9조에도 불구하고 자위대가 창설되었다. 땅 속에 묻힌 줄 알았던 제국주의 국가가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림 ) 사회민주당 의원들의 유사법제 반대 투쟁 결의. 군국주의 반대 투쟁은 이미 4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패전 후 등장한 민주진보세력은 위기감을 느꼈다. 사회당은 “소련과 일본을 포함한 전면강화조약의 체결, 대외중립, 미군기지 반대”라는 평화3원칙을 주창했다. 당장 과제는 호시탐탐 헌법 9조의 개정을 노리는 우파세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사회당보다도 총평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총평, 즉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원래 공산당 주도의 노동조합운동을 깨기 위해 미군정이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여 만든 총연맹 조직이었다. 그러나 총평의 주도권을 쥔 세력은 비록 공산당의 노조운동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사회당 좌파를 지지한 원칙 있는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사회당의 평화3원칙에 “일체의 무장 반대”라는 내용을 더해 평화4원칙을 천명하고, 사회당도 보다 확실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당 내 좌?우파의 긴장을 부채질했다. 사태는 결국 분당으로 치달았다. 창당한 지 6년만인 1951년, 당은 좌파 사회당과 우파 사회당으로 양분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동 공세에 대한 투쟁은 계속됐다. 특히 1955년 중의원(일본의 하원) 선거는 기념할만하다. 이 선거에서 좌?우 사회당의 의석수가 1/3을 넘음으로써 보수세력은 2/3를 넘어야 의회를 통과할 수 있는 헌법 개정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의 성과는 사회당의 재통합 열기를 고조시켰다. 그 해 10월 13일 좌?우 사회당은 다시 하나의 사회당으로 통합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좌파가 확실히 당내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이었다. 한편 이러한 사회주의 세력의 대통합은 자본가 측을 자극했다. 일본경영자단체연합의 압력 속에 보수 양대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한 달 뒤 합당을 성사시켰다. 바로 자유민주당의 시작이었다.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 체제를 흔히 ‘55년 체제’라 부른다. 그리고 일본의 전후 정치는 55년 체제의 지속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양당제가 아니었다. 자민당 창당 직후 벌인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은 48%의 지지를 얻었고 사회당은 31%를 기록했다. 이 격차는 이후 결코 극복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여당과 야당이 늘 정해져 있는 양당제였고, 따라서 ‘2당제’라기보다는 ‘1.5당제’라고나 해야 맞았다.
그러나 원내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사회당은 꽤 효과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이끌던 자민당 정부의 반동 정책들에 대해 사회당은 공산당, 총평, 평화운동 세력 등과 손잡고 대중투쟁으로 맞섰다. 그 절정은 1960년의 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투쟁이었다. 이 때 사회당은 ‘안보조약개정 저지 국민회의’를 조직하여 1959년부터 2년간 거리의 대결을 벌였다. 조약 개정이 2주일 앞으로 다가온 1960년 6월 6일 사회당 의원들은 전원 사직서를 냈다. 곧이어 총평이 총파업을 벌여 600여만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6월 19일에는 국회 앞에 300만의 군중이 운집했고, 일부 학생 대오는 국회 안에까지 진입했다.
비록 안보조약은 미국과 일본 정부의 합의에 따라 자동 개정되었지만, 이 때문에 기시 내각은 퇴진해야 했다. 자민당은 노골적인 재군비 정책을 일단 뒤로 미뤄야만 했다. 일본 사회에는 제국주의의 부활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확실한 1/3이 존재한다는 게 드러났다. 이들의 존재 덕분에 동아시아의 악몽, 즉 일본 군국주의의 재등장은 적어도 몇 십 년간 지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이는 불안한 승리였을 뿐이다.
태생적 약점 - 총평 정당, 관공노 정당
“5만 당원으로 천만 표를 모으는 불가사의한 당”. 한 정치학자는 사회당을 이렇게 묘사했다. 실제로 사회당 당원 수는 원내에 다수 의석을 확보한 좌파대중정당 치고는 너무나 적었다. 1969년 당원 재등록 기간 중에 확인된 당원 수는 고작 3만명이었다. 이 중 5천명 가량이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당에는 간부만 있고 당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굳이 유럽의 좌파정당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보수정당인 자민당의 당원 수가 500만이었고(진성당원이라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공산당이 49만이었다. 사회당은 1970년대부터 줄곧 ‘백만 당원 확보운동’을 벌였지만, 1989년의 12만5천명이 최대치였다.
당 재정은 더 취약했다. 적은 당원 중에서 당비 내는 당원이 불과 10%였다. 1988년 현재 사회당의 정치자금 수입은 약 47억 엔으로 공산당의 262억 엔, 자민당의 222억 엔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회당이 존립하고 또한 제1야당으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단 하나, 바로 총평이었다. 총평은 선거 기간 중에 사회당의 자금과 조직 동원을 떠맡았다. 대신 사회당 국회의원의 대부분은 총평 간부 출신이었다. 총평, 그 중에서도 공무원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조직인 관공노(총평 조합원의 60%)가 적극적이었다. 관공노 소속 조합원은 전체 조직 노동자의 10%, 전체 노동자의 3.4%에 불과했지만, 선거운동 할 때는 가장 효과적으로 당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사회당은 어떤 면에서 관공노의 정치위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좌파정당이 노동조합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가 문제다. 이 점에서 일본 사회당은 영국 노동당보다 더 부정적인 사례였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비록 당에 개별 입당해서 적극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집단입당제도를 통해 적어도 당대회 때만큼은 대의원도 뽑고 당대회 결정 사항에 관심을 갖는 등 당의 일원임을 느꼈다. 그러나 일본의 노동자들은 당에 개별 입당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집단입당제도가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총평의 간부들만이 사회당에 입당하고 당과 관계를 맺었다. 비록 총평 간부들이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고는 해도 이렇게 의원과 의원 지망자, 노조 간부들로만 이뤄진 좌파정당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발전하기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일본의 노조는 산별이 아닌 기업별이었다. 일본 노조운동은 조직률이 50%를 넘던 전쟁 직후의 전성기에 산별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 자본가들은 연공서열임금제, 종신고용제, 생산성 향상 운동 등을 도입하여 노동자들을 회사에 종속시키려 했다. 불행히도 이 시도들은 먹혀들었다. 자동차산업노조 같이 그나마 존재하던 소산별노조도 해산하고 말았다.
총평은 기업별 노조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조 쪽의그림 ) ‘좌절금지’라는 신사회당의 포스터. 얼마나 좌절하고 있으면 이런 포스터가 다 나왔을까?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총평을 만든 활동가들이 주로 기업별 노조들의 지역본부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이 기반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총평 지역본부는 지역정치투쟁의 거점 역할을 하는 등 나름대로 긍정적 기능을 했으나, 그렇다고 이것이 기업을 뛰어넘은 단결을 장기간 보장해줄 수는 없었다.
기업별 노조 체제는 일본 노동운동을 불구 상태에 빠뜨렸다. 춘투(春鬪) 과정에서 아무래도 대기업 노동조합이 주된 역할을 하다보니 대기업 노조가 전체 노동운동을 좌지우지하게 됐다. 대기업 노조만 ‘맛이 가면’ 전체 노동운동이 ‘맛이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영세산업의 미조직 노동자들은 영원히 노동조합의 조직 대상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이 모두는 물론 사회당에게도 재앙이었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점점 사회당에서 벗어나 자민당 정부와 직거래하려 들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당은 관공노만의 노동자정당이 되어갔다. 그리고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 ‘남의 당’이었다. 이런 사회당을 국민들이 수권능력을 갖춘 당이라고 볼 리 만무했다. 사회당은 언제인가부터 자민당의 지나친 횡포를 견제할 수단일 뿐이었다.
물론 사회당도 이를 뼈저리게 인식했다. 1963년 중의원 선거 패배 직후, 당시 서기장(사무총장)이었던 나리타 토모미는 사회당이 극복해야 할 3대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원들의 일상 활동 부재, 의원 정당 체질, 노동조합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당은 일상 활동을 강화하고 의원 정당 체질을 극복한다면서 더욱 더 총평에만 의존하려 들었다.
다른 길, 즉 현장 노동자에 직접 당을 뿌리 내리는 일은 제대로 시도되지 못했다. 현장에는 사회당원협의회라는 조직이 있긴 했지만 이는 총평 주류 세력의 노동조합 활동가조직이었을 뿐 현장 내에서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았다. 결국 노동계급과 연계하는 가장 편한 길, 즉 총평 간부들과 당의 유착은 사회주의운동이 노동대중에 뿌리내리는 데 가장 험난한 길이었음이 드러났다.
무산된 기회1 - 구조개혁 논쟁
안보투쟁과 함께 밝아온 60년대의 벽두에 자민당의 책략가인 이시다 히로히데는 자민당에게는 참으로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현재의 노조 조직률로 보았을 때 10년 후에는 사회당이 자민당을 앞서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시다는 ‘당근과 채찍’으로 노동운동을 밑으로부터 허물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시 사퇴로 새로 등장한 자민당의 이케다 내각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 내각은 ‘소득배증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1955년 이후의 초고속 성장을 이어서 10년간 연평균 9%의 성장을 유지하고, 사회보장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자민당이 이제 노골적인 군국주의 부활보다는 독점 자본 육성에 주력하면서 노동운동을 무장해제 시키겠다는 신호였다.
사회당 쪽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좌파에서도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었다. 1958년부터 사회당과 공산당의 일부 이론가들이 공동연구모임을 만들어 이탈리아 공산당의 노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P. 톨리아티의 구조개혁 노선(?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2차 대전 후 이탈리아 공산당과 구조개혁논쟁?, <이론과 실천> 2003년 4월호 참고)을 받아들였다. 혁명의 때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발전의 성과를 노동계급의 것으로 만드는 구조개혁투쟁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주체적 역량에 따라 경제성장의 열매는 독점자본가의 것이 될 수도 있고 노동자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구조개혁론이 처음 공식 노선으로 언급된 것은 안보투쟁 이후 열린 첫 당대회인 1960년 10월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 대회 전날 아사누마 이데지로 당 위원장이 안보투쟁의 보복을 노린 한 극우 청년에 의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당대회는 강행됐다. 당 개혁을 부르짖어 젊은 당원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에다 사부로 서기장은 대회 석상에서 “생활향상, 반(反)독점, 평화중립”을 3대 축으로 하는 구조개혁 노선을 주창했다.
생활향상, 반독점, 중립의 축은 뗄 수 없는 구조개혁의 축이다. 이러한 3개의 체계화된 요구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의 태내에서 실시할 수 있는 변혁이며, 또한 일본의 보수정당이 스스로 문제삼을 수 없는 독점적 경제구조에 대한 국민에 의한 제한의 문제이다. 따라서 이들의 요구는 우리가 정권에 참여하기 전에라도 보수정권에 대하여 정책전환의 요구로서 강대한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촉구해야 하는 변혁이다. - 에다 사부로, ?총선거와 당의 승리와 전진을 위하여?(1960), 한석종의 논문에서 재인용.
에다 서기장이 제시한 구조개혁의 구체적인 정책들은 복지제도의 확충, 완전고용,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단축, 대외무역의 통제 등이었다. 그 핵심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자본주의가 상승 일로에 있는 사회에 적합한 사회주의운동의 전략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당의 구조개혁론은 아직 다분히 선언적인 것이었다. 구조개혁 노선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와 그보다 급진적인 비전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다. 에다 자신이 그랬다. 그는 1962년 당의 격주간지 <사회신보>에 “미국의 높은 평균 생활수준, 소련의 철저한 사회보장, 영국의 의회제 민주주의, 일본의 호헌평화”가 인류의 4대 성취라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다. 이러한 도발적 친미 발언은 그 동안 구조개혁론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던 좌파 활동가들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 해 11월에 열린 사회당 22차 당대회는 에다를 성토하는 자리가 되었고, 결국 그는 서기장직을 사퇴했다.
이와 함께 구조개혁론의 당내 확산도 중단됐다. 일상 실천 방침이 논의되기보다는 구조개혁론을 지지하냐 반대하냐 여부를 놓고 분파투쟁만 격화됐다. 분파투쟁은 점점 사상투쟁이 아닌 당 요직 쟁취 투쟁으로 비화됐다.
구조개혁론이 한 발 물러선 틈에 당의 이념노선을 좌우한 것은 사회주의협회였다. 사회주의협회는 원래 사회당을 지지하는 단순한 맑스주의 연구집단이었다. 그러나 구조개혁론 반대의 선봉에 서면서 당내 활동가집단으로 나섰다. 이들은 1964년 당대회에서 채택된 ?일본에서 사회주의의 길?(이하 ?길?)이라는 강령적 문서를 기초했다. 재료는 낡은 교조주의였다.
?길?은 사회당의 집권 가능성을 오직 일본 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일본 자본주의가 한창 성장 가도를 달리던 당시 상황에서 사회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회복지의 확충인가? ?길?은 이를 단호히 부인했다. 복지제도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노동계급 포섭 수단일 뿐이다. 그럼 남는 것은 무엇인가? 1970년으로 예정된 미일안보조약의 재개정을 저지하여 일본 사회가 반동화하는 것을 막는 것뿐이다.
1968년 드디어 일본의 국민소득은 서독을 능가하여 세계 제2위가 되었다. 대중은 이제 외교문제가 아니라 물가, 복지, 공해 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자민당은 바로 이 때 사회복지 확장에 선수를 쳤다. 반면 사회당은 70년 안보투쟁만 바라보았다. 결국 복지의 확대 과정은 노동계급 형성의 계기가 되기는커녕 자민당의 수혜층?지지층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사회당은 항상 전투적 야당이었다. ?길?은 대중투쟁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사회당 의원들은 의장석을 점거하고 자민당 의원들과 난투극을 벌이는 데 이골이 났다. 그러나 과장된 원내 활동은 사회당이 진정한 대중정치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다. 대중운동의 바람은 중앙정치의 바깥에서 불어왔다.
1963년 지방선거에서 78명의 좌파 시장(‘혁신 시장’이라 불림)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는 그 동안 지역 수준의 공동전선 활동으로 다져진 각지의 진보 역량이 복지, 공해 등의 새로운 쟁점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힘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시민운동이 공동후보를 냈고 자민당을 이겼다. 좌파 시장들은 전국혁신시장회를 결성했고, 언론은 이들을 ‘제3당’이라고까지 불렀다. 1967년에 실시된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좌파 공동후보인 미노베가 도쿄 시장으로 당선됐다. 1973년 지방선거에서는 좌파 시장이 이끄는 도시가 전체 도시 인구의 43.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전국 지자체의 1/4이 전국혁신시장회에 가입했다. 중앙의 우파정부에 대해 지방의 좌파정부가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다.
물론 좌파 지자체는 가능성보다는 한계가 많은 것이었다. 아무리 시장이 좌파라고 해도 시의회는 여전히 풀뿌리 보수세력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지만 혁신자치체운동은 중앙정치에서 실현되지 못한 구조개혁론의 문제의식이 우회적으로 시도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혁신자치체들은 사회당이 놓치고 있던 복지나 환경 문제를 끌어안았다. 실제로 사회당과 공산당 양쪽으로부터 배척 당한 구조개혁론자들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반면 지방선거의 쾌조와는 정반대로 사회당은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의석이 140석에서 90석으로 급락하는 참패를 겪었다. 이시다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사회당은 60년대의 10년을 허비해버렸던 것이다.
무산된 기회2 - 반자민당 연립정부의 시도
하지만 사회당의 운이 벌써 다 한 것은 아니었다. 1972년 중의원 선거는 예상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자민당이 패배하고, 사회당 의석이 다시 100석 이상으로 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군소 야당들의 약진이었다. 1960년에 사회당 우파의 일부가 탈당해 만든 민주사회당(이하 민사당), 불교 단체가 만든 중도 성향의 공명당, 그리고 공산당이 자민당과 사회당 사이에 80석 이상의 넓은 중간지대를 만들었다. 특히 공산당은 60년대부터 온건한 의회주의를 천명한 탓인지 10% 이상을 득표하고 38석을 획득했다. 공산당은 조직 노동운동의 지지를 받지 못한 한계를 자체 조직 확대와 지역 시민운동에 대한 접근으로 돌파했다. 아무튼 혁신자치체운동의 열기가 중앙정치에까지 불어닥친 게 격변의 주 요인이었다는 평가였다.
총선 후 너나 할 것 없이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비자민당 좌파연립정부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회당으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길?조차도 이러한 정부의 구성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내에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사회당은 1974년 36차 당대회에서 연립정부의 구상을 담은 ?국민통일강령?을 제시했고, 공산당, 공명당, 민사당도 잇따라 혁신연립정부 구상을 내놓았다.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때마침 자민당 다나카 전 수상의 록히드 뇌물 수수 사건이 터져 역사의 바람이 더욱더 사회당 쪽으로 방향을 트는 듯이 보였다. 자민당은 처음으로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무소속을 영입해서야 겨우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림 ) 70년대 일본 공산당을 이끌며 ‘인민적 의회주의’를 주장한 후와 데스조
하지만 이 때 사회당의 연정 구상은 벽에 부딪혔다. 사회당의 입장은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을 총결집해 비자민당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는데, 공명당, 민사당이 공산당을 포함한 연정을 극렬 반대했던 것이다. 사회당으로서는 안보투쟁과 혁신자치체운동의 동지인 공산당을 버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집권 기회를 날려 버릴 수도 없었다. 결국 당론은 사회당?공명당?민사당만의 연정 쪽으로 선회했는데, 이 때쯤에는 이미 자민당이 정치개혁을 선수치면서(예비경선 등) 재기의 몸부림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기회주의적인 민사당이 자민당과 협력하기 시작했다. 결국 좌파 주도의 정권교체 가능성은 불발로 끝났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비록 민사당, 공명당이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당이 밑으로부터 압력을 행사해 공산당과의 연정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회당이 할 수 없는 게 바로 이러한 방식의 정치였다.
그림 ) 신좌파 소종파 중 하나인 혁명적 공산주의동맹(혁마르파)의 시위 모습
권력장악이 일정에 올라 있을 당시, 사회당은 당 역사상 최대의 내부 분란으로 시끄러웠다. 사회주의협회 활동가들이 과도하게 당조직을 장악하자 이념의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모든 비협회 세력들이 연합해 숙정운동을 벌였다(77년 항쟁). 결과는 협회파 활동가들의 항복이었다. 사회주의협회는 다시 연구집단으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사실 사회주의협회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들만이 당원과 노조원을 교육하고, 활동가를 양성하며, 정력적으로 잡지를 발행했기 때문이었다. 당이 못하는 것을 그들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들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잉그라오 좌파나 영국 노동당의 벤 좌파에서 나타난 급진성과 현대성의 창조적 결합을 보여주지 못했다. 서유럽과 달리 60년대 신좌파 학생운동 세대가 제도 정치에 진출하지 않고 소종파집단으로 전락해갔다는 점도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조로(早老) 현상을 낳은 중요한 요인이었다.
사회당의 운신의 폭이 좁았던 또 다른 이유는 총평계 노동운동의 위기였다. 1974년 세계불황(제1차 석유위기)이 일본에도 어김없이 닥치자 총평은 야심찬 투쟁에 나섰다. 총평은 24.5%의 물가 급등에 저항해 ‘국민춘투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대기업 노조 중심으로 정체되어 가는 춘투 분위기를 일신해서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국민춘투의 주된 요구는 최저임금제 확대, 연금제도 개선, 각종 복지수당의 확대, 공무원?공공부문 노동자의 파업권 보장 등이었다. 이 시도는 70년대 초반 서유럽 노동운동의 급진화와 비슷한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민당 정부는 이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총평을 대화 상대에서 배제하고, 고용보험법 등 복지제도를 알아서 강화해주는 한편, 관공노의 파업은 철저히 탄압했다. 1975년 파업권 쟁취를 내건 관공노의 총파업이 실패하자 총평의 지도력도 땅에 떨어졌다. 이것은 곧 사회당의 저변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70년대의 ‘기회’는 결국 ‘위기’의 다른 쪽 얼굴이었다.
무덤을 향해
1980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예상을 깨고 대승을 거두었다. 곧이어 등장한 나카소네 정부는 팽창재정을 통해 노동대중을 포섭하려던 기존의 일본형 케인즈주의를 신자유주의적 긴축재정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그 대신 군국주의 열풍을 조장하고, 전투적 노조운동의 해체를 꾀했다. 1987년 ‘국철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철도 사유화가 단행되었는데,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총평의 핵심인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깨려는 것이었다.
같은 해에 민간 대기업 노조의 우경화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총연맹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연합)가 800만 조합원을 자랑하며 출범했다. 2년 뒤에는 총평이 결국 해산하고 렌고에 흡수 통합되었다. 렌고의 노선은 총평의 정반대라고 보면 되었다. 노동조합에 의존하던 사회당으로서는 이제 렌고에 맞춰 자신도 오른쪽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조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사회당 지지율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총평이 해산하기 전에 이미 총평 조합원의 53.2%만이 사회당을 지지했고, 민간부문 노조의 제1지지정당은 자민당이었다. 게다가 불황이 지속되자 복지지출도 줄어들고 이에 따라 혁신자치체의 열기도 위력을 상실했다.
그림 ) 도이 다카코
사회당 당세의 추락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중선거구제 아래서 복수후보를 출마시킨 선거구가 1986년에 이르면 15개에 그쳤다. 이는 사회당이 이미 집권이나 의석 확대를 자포자기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80년대 들어서는 3, 4위로 당선된 의원들이 1, 2위로 당선된 의원들보다 훨씬 많아졌다.
사회당의 자구 노력은 ?길?을 폐기하고 새로운 강령적 문서 ?신선언?을 채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986). ?신선언?은 60년대 구조개혁론의 뒤늦은 인정이었다. 사회당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분명히 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경제의 사회화’를 명시하는 등 아직은 급진적인 면도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로 당시 프랑스 사회당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가깝다는 평가였다. 이와 함께 위원장도 시민운동 출신의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로 바뀌어 과거의 이미지를 탈피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1989년 참의원(상원) 선거와 1990년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이 오랜만에 약진하는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회당의 득표율이 다시 20%를 넘어섰다. 도이 위원장의 인기는 ‘마돈나 열풍’이라는 바람을 일으켰다. 자신감을 얻은 도이 주도의 사회당은 자위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군비축소를 주장하는 등의 현실적 정책을 내걸고 다시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이 때의 약진은 자민당의 실정으로 인한 반사이익의 성격이 강했다. 리쿠르트 사건 등 자민당의 부패사건이 속출하고, 재정 건전화 명목으로 소비세가 도입되고, 미국의 압력으로 농산물 수입 개방을 추진하자, 자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자영업자와 농민들이 일시적으로 자민당에 등을 돌린 것이었다.
오히려 사회당의 약진은 당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당에 표를 빼앗긴 민사당과 공명당이 자민당과 유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보수세력 주도의 정계개편에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렌고는 이를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다. 렌고의 야마기시 위원장은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 세력의 총결집”을 주장하며 노골적으로 좌파정당인 사회당을 해체하고 중도정당을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야마기시 위원장과 연합한 당내 우파는 이미 당규율과 상관없이 자민당과 일상적으로 거래?합작했다. 92년 참의원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물러난 도이의 뒤를 이어 위원장이 된 다나베 마코토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일본신당, 신생당 등 보수계열 신당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93년 7월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 붕괴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회당의 의석은 136석에서 70석으로 절반이 줄었다. 당의 오른쪽에서나 왼쪽에서나 똑같이 대규모 이탈이 나타났다. 렌고 소속 노조 지도부는 사회당이 너무 왼쪽에 있다며 사회당이 아닌 보수 신당들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반면 기존 사회당 지지자 중에서 38.9%만이 사회당을 지지하고 나머지는 대거 이탈했는데, 이 중에는 좌파 성향 유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당은 좌?우 어느 쪽도 확실히 만족시켜줄 수 없는 당이 되었던 것이다.
총선 직후 렌고 지도부의 압력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주도하는 최초의 비자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사회당의 영광으로 예고되었던 것이 신세대 보수 정치인의 몫이 된 셈이었다. 이 연정에 사회당도 무라야마 토미이치 신임 위원장이 입각했지만, 연정을 주도한 것은 어디까지나 보수세력이었다. 94년 6월에는 무라야마가 수상이 된 새 연정이 구성되었지만, 이는 50여년 전 가타야마 연정의 재판일 뿐이었다.
같은 해 9월 무라야마 수상은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위대 합헌, 미일안보조약 유지”로 당론 전환을 강행했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유연한 전략의 채택이 아니라 원래의 이념 자체의 포기에 불과했다. 그나마 사회당에 남아 있던 유일한 이념적 정체성이 평화헌법의 수호였는데, 그마저 청산해버렸으니 이제 사회당에는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사회당의 영혼이 사라진 그 곳에 더 이상 대중적 좌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총보수화가 시작된 것이다.
‘좌파 없는’ 동아시아?
그림 ) 사회민주당 로고
부패한 보수일당지배체제인 55년 체제는 붕괴했지만, 이는 좌파의 승리가 아니라 우파의 생명 연장 전략의 결과였다. 지금 일본의 좌파 정치 공간은 초토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1996년 1월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꿨는데, 이 때 좌파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따로 차리고(원내 의석 없음), 48명의 우파 의원은 렌고의 권유에 따라 신생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에 합류했다. 사회민주당은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가 처음 실시된 96년 중의원 선거에서 고작 16명의 당선자를 냈다.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공산당이 13%를 얻은 데 반해 6%만을 얻었다. 사회민주당은 이미 노정치인이 된 도이 다카코 위원장의 인기에 의지해 근근히 버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공산당이 버티고 있다고는 하지만, 공산당은 맑스주의 이념을 고수하면서도 현실 정책으로는 소비세 인하 정도만을 이야기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좌파정당이 되어 있다. 비록 자민당보다 더 많은 4천명의 지방의원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이 당이 이념정당이라기보다는 민원(民願)정당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일본 현실정치의 어느 곳에서도 신자유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참신한 대안을 발견할 수 없다. 80년대의 ?신선언?에도 잔존했던 ‘경제의 사회화’ 등은 이제 더 이상 누구로부터도 들을 수 없게 됐다.
이것이 일본 정치의 현실이고, 또한 동아시아의 좌파세력이 새롭게 출발해야 할 지점이다. 한 마디로 민주노동당은 외롭다. 이 외로움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외로움을 초래한 역사적 이유들을 곱씹어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할만한 자료들
- 강권찬, ?탈냉전기 일본 공산당의 생존전략분석?, 고려대 정치학 석사학위논문, 2000.
- 권순미, ?일본 사회당 실패에 관한 연구?, 고려대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 2002.
- 김의근, ?일본 사회당의 정책결정구조에 관한 연구?,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 박수룡, ?일본 사회당 연구 - 사회당의 발전과 침체원인 분석?, 다솔원, 1995.
- 小山弘健, ?일본 마르크스주의사 개설?, 한상구?조경란 옮김, 이론과실천, 1991.
- 升味準之輔, ?일본의 현대정치(下) - 1955년 이후?, 이경희 옮김, 대광문화사, 1997.
- 오노 코지, ?일본 현대 정치사 1945~1998?, 이기완 옮김, 케이시아카데미, 2003.
- 이상준 편역, ?현대 일본 보수 혁신 대립투쟁사?, 민맥, 1990.
- 이상훈, ?파벌분석을 통한 일본 사회당에 관한 연구?, 한국외국어대 아주지역학 석사학위논문.
- 정영태, ?사민주의적 노동자운동의 전개와 정당의 관계: 일본 총평과 사회당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론> 5호, 1993년 여름.
- 최희식, ?93년 자민당 일당지배체제의 붕괴 과정 연구 - 자민당과 사회당을 중심으로?, 서울대 정치학 석사학위논문, 2000.
- G. 타튼,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운동?, 정광하 외 옮김, 한울, 1997.
- 한석종, ?80년대 일본 사회당의 노선변화와 전망?, 서울대 정치학 석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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