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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2차대전 후 이탈리아 공산당과 구조개혁논쟁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4. 1. 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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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2차대전 후 이탈리아 공산당과 구조개혁논쟁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서유럽 세계의 한 복판에서 확고한 반자본주의 강령을 내걸고 수백만의 당원과 전 유권자의 1/3의 지지를 획득한 정당, 이탈리아 공산당. 2차 대전 후 이 당의 성취는 지금의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당시 서유럽 다른 나라들의 좌파들에게도 경이롭게 다가왔다. 그들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성장이 가능했는가?
하지만 이 당은 지금 ‘좌파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바뀌어 있고, 이탈리아 정치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우파의 헤게모니 아래 있다. 이제 우리의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그토록 강한 힘을 갖고도 이탈리아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는가?
  
독일 사회민주당의 고뇌에 다시 맞부닥친 PCI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다. - 이탈리아 헌법 제1조 1항

그림 ) 팔미로 톨리아티
1926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사회당(PSI)과 공산당(PCI)을 불법화하고 난 뒤(?역사의 ‘거름’이 되어야 할 때와 ‘추수’에 나서야 할 때 -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 <이론과 실천> 2002. 10월호), 이탈리아 좌파는 외로운 비합법 투쟁 외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상황은 파시스트 정부가 2차 대전에 참전하고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한 뒤에야 바뀌기 시작했다. 반도의 남부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데 반해 북부에서는 무솔리니 세력이 나치 독일의 힘을 빌어 항복을 거부했다. 그러자 북부 이탈리아 곳곳에서는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바로 이 무장투쟁을 주도한 것이 PCI의 지하 활동가들이었다. PCI는 놀라운 속도로 당세를 신장했다.
PCI를 지지한 노동자?농민들은 혁명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꼈다. 그러나 막상 당 지도부의 생각은 달랐다. A. 그람시의 동지이며 그람시 사후 오랫동안 비합법 상태의 당을 이끌어온 팔미로 톨리아티의 판단에, 지금 이탈리아에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 당면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파시즘의 청산을 중심 과제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노동계급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 세력과 손잡고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바로 이러한 판단에 따라 톨리아티는 1944년 소위 ‘살레르노의 전환’을 단행했다. 파시즘에 반대한다면 (무솔리니를 수상으로 임명한 장본인인) 국왕 세력과도 연합할 수 있다는 결정이었다. 이후 PCI의 행보는 혁명은커녕 체제 내 야당의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굴욕적인 것이었다. 당이 앞장서서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무장을 해제했고, 파시스트들에 대한 숙청을 중단시켰다(당시 상황은 B.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1900년>에 잘 묘사돼 있다). 1946년 왕정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는 차마 ‘민주공화국’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지 못했다. 한 해 뒤에는 미국의 사주를 받은 우파 기독교민주당(DC)에 의해 톨리아티가 임시정부에서 축출되었다. 기나긴 굴종의 뒤에는 총선 참패가 뒤따랐다. 1948년 4월의 첫 총선에서 좌파는 PSI와 PCI 두 당의 득표를 다 합쳐도 31% 밖에 얻지 못했다. DC의 50여년 장기 집권이 시작됐다.  
전후 PCI의 선택을 통해서 이탈리아 노동계급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고, 잃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선 얻은 것부터 보면, 이탈리아 민중은 급진좌파정당의 입김이 작용한, 그래서 제1조에서부터 ‘노동’이라는 말이 나오는 헌법을 얻었다. 그리고 수백만 당원을 확보한(1956년 현재 203만) 대규모 합법 노동자정당(PCI)을 갖게 됐다.
이 당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코민테른 해체 뒤 갈 길을 잃은 서유럽 다른 나라들의 공산당들과는 달리 PCI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맑스, 레닌 외에도 대화할 상대가 있었다. 그것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순교한 그람시의 사상이었다.
그림 ) 마오쩌뚱의 초상화를 들고 밀라노 거리를 행진하는 PCI 아동조직의 어린이들
또한 PCI는,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해가야 한다는 그람시의 사상처럼, 이탈리아 사회의 각 영역에 촘촘히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에게 노동계급정당의 당원이라는 것은 크나큰 영예였다. 국제적 명성을 지닌 이 나라의 영화감독들은 모두 PCI 당원이거나 아니면 PCI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였다.
한창때의 PCI가 이뤄놓은 ‘세상’은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2백여만 당원 중 10% 정도가 열성 당원이었고, 유급상근자만 3000명이었으며, 당원들은 만 개의 현장세포 외에 수많은 지역분회, 특별분회(대도시에서 주로 직종별로 모인 당원 조직)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당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북부 지방을 띠처럼 두른 세 개의 커다란 주(에밀리아-로마냐, 모데냐, 페루지아)에서 만년 여당이었다. ‘붉은 벨트’라 불린 이들 지역에서는 PCI와 연결된 협동조합 기업들이 경제의 주요 부분을 담당했다. 또한 당은 두 개의 이론지(<리나시타(재생)>, <크리티카 맑시스타(맑스주의적 비판)>)와 한 개의 전국적 일간지(<루니타(단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는 급기야 TV채널까지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희망의 크기는 고뇌의 무게 또한 늘려주었다. 당 강령은 여전히 급진적이지만 혁명이 지금 당장 가능하지는 않다면 수백만 당원이 일상적으로 벌여야 할 실천은 무엇인가? 1차 대전 전의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주해야 했던 고민,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서 노동계급 대중정당이 취해야 할 실천 전략의 문제가 PCI에도 어김없이 대두했던 것이다.
1948년 7월 톨리아티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 고민은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였다. 당시 PCI 투사들은 땅 밑에 숨겨놓은 레지스탕스 시절의 무기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하지만 기다리던 당의 명령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전후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나서 10년 넘게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놀라운 ‘경제 기적’을 경험했다. 노동운동은 최악의 침체기를 맞이했고, 노동계급 생활수준의 실질적 향상 없이 고도 성장이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PCI는 PSI와 좌파 공동전선을 추구했으나 두 당의 선거연합으로는 독자 집권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무력 침공한 사태가 벌어지자 PSI마저도 소련을 비판하면서 PCI와 협력을 끊고 DC와 연합하여 중도파 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PCI는 완전히 고립된 셈이었다. 당원 수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고, 대중문화의 확산 속에서 당원들의 당 생활이나 당원 모임도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PCI뿐만 아니라 변화를 갈망하는 이탈리아 민중 모두에게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혁명은 아닌,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개혁도 아닌 - 구조개혁노선

그림 ) 연설하는 톨리아티
이 무렵 톨리아티가 제시한 해결책은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적 길’, 즉 러시아혁명의 길도 아니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길도 아닌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길을 추구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의 혁명도 아니고 개혁주의자들의 개혁도 아닌, 톨리아티에 따르면 ‘구조개혁’의 길이 그것이었다.
일상 시기에 필요한 노동계급의 실천 전략은 개혁 투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개혁 투쟁의 방향과 내용이다. 톨리아티가 보기에 이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구체적 모순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기생적 독점자본, 남부의 토지소유 모순 같은 후진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파시즘의 온상이었고, 지금도 그 위험이 상존한다. 이런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뜯어고치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구조개혁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농지개혁, 독점대기업?은행?보험회사의 국유화, 국가의 민주적 계획 확대 등이다. 노동계급은 중간계층(특히 농민)과 연합하여 이러한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회의 후진성을 제거하고 경제발전을 앞당겨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이 전제조건이 사회민주당의 개혁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개혁과 구조개혁을 구별시켜주는 핵심이다. 첫째는 개혁의 결과가 단지 이탈리아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계급세력관계를 노동계급과 그 동맹세력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의회를 통해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보다도 대중투쟁의 주도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국유화란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국유화가 실현됨으로써 특정한 자본가 집단과 진보적이지 못한 정치적 집단에게 어느 정도의 이득이 돌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독점자본에 반대하여 취해진 국유화나 그 밖의 다른 조치들이, 노동자와 중간계층에게 유리한 경제정책을 비록 현재의 조건아래서라도 강제하기 위하여, 대다수의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거대한 정치적 대중조직에 의해 중대한 결정으로 채택되고 부단한 활동과 투쟁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전개된다면, 그리고 이러한 활동과 투쟁이 의회를 통하여 정부까지도 반독점 투쟁에 끌어들이게 된다면 사정은 일변하게 될 것이다. - P. 톨리아티, 정운영 편 ?국가독점자본주의이론 연구Ⅳ?, 338쪽에서 재인용(번역 일부 수정).

톨리아티에 따르면 구조개혁은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실천이다. 이 점에서 구조개혁론은, 우선 반파시즘 민주화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전후 PCI의 입장의 연속선 위에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주도적 역할과 대중투쟁을 강조하는 대목은 이제까지의 입장과는 좀 다른 것이었다. 이는, PCI가 DC에서 PSI에 이르는 ‘반(反)공산당 대연합’을 통해 제도 권력에서 완전 배제된 상황에서 이제는 작업장과 거리의 투쟁을 통해 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톨리아티는 구조개혁론을 새로운 전략 노선으로 제출하고 50년대 후반 내내 이를 중심으로 당을 재편해갔다. 그래서 톨리아티가 숨을 거둔 1964년 즈음에는 이 노선이 당의 공식 입장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하지만 벌써 이 때에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현실이 애초에 구조개혁노선이 제출되던 당시의 상황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탈리아 자본주의는 이미 과거의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72년까지 이탈리아는 134%의 1인당 GNP 성장을 보여주었다. 영원히 버림받은 땅으로 여겨진 남부에서조차 상황이 바뀌었다. DC 정부는 남부에 막대한 국가보조금을 쏟아 부어 자본가들을 육성했다. 마피아가 주된 수혜자가 되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공장들이 건설됐고 남부도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가 늘어나고 농민은 사라져갔다. 남부 농촌의 젊은이들은 북부로 이주하여 미숙련 노동자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발전은 이미 과거의 슬로건이었고,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계급동맹이라는 것도 고색창연하게만 들렸다. PCI의 구조개혁론은 이제 스스로를 개혁해야만 했다. 

구조개혁론을 둘러싼 대격돌 - 11차 당대회
그림 )  PCI 간부회의 모습 - 책상에 앉은 사람이 롱고이고, 맨 왼쪽에 앉은 사람이 아멘돌라,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잉그라오.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당 사무총장이 된 인물은 톨리아티의 반파시즘투쟁 동료였던 루이지 롱고였지만, 그는 사실 징검다리 비슷한 존재였다. 실제 차기 당 지도자로 유력시된 인물은 조르지오 아멘돌라와 피에트로 잉그라오,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당의 전략 노선에 대해 각기 상반된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
남부 나폴리 출신인 아멘돌라는 농민들의 토지개혁운동을 지도하던 우락부락한 인상의 투사였다. 그는 전후 당의 공식 입장을 계승하고 이를 더욱 첨예화하려 했다. 그는 남부가 여전히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후진성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보았고, 노동계급과 농민 등 중간계층 사이의 계급동맹을 중요시했다.  
반면 <루니타> 편집장 출신인 잉그라오는 이탈리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탈리아가 이미 선진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로 곧장 나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급동맹보다는 다양한 노동자층을 규합하여 계급통일을 이루는 것을 더 중요시했고, 구조개혁의 과제도 이제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경제구조의 변화라고 보았다.
톨리아티 사후 첫 번째 당대회인 1966년의 11차 당대회를 준비하면서 둘 사이의 입장 차이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당대회에 제출할 총노선 작성의 책임자로 아멘돌라가 지명되자 잉그라오는 독자적인 문서를 작성해 유포하겠다고 선언했다. 잉그라오의 선언은 당대회 직전의 중앙위원회에서 일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결국 그의 문서는 공식 문서와 함께 각 지부에 회람되고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당시의 논쟁을 가상의 대화로 정리해보자.

아멘돌라: 당신은 구조개혁노선을 폐기하려 하는가?

잉그라오: 아니다. 난 다만 변화된 현실에 맞춰 이를 발전시키려 할뿐이다. 이제는 노동계급이 경제개발이나 반파시즘 민주화에 앞장서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게 개혁 투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림 ) 조르지오 아멘돌라
그림 ) 피에트로 잉그라오

아멘돌라: 노동자 통제권의 확보라고?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주장해온 민주적 계획의 확대와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잉그라오: 기존의 경제 계획은 국가가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직접 산업 투자 활동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회복지도 국가가 일방적으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소비영역을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곳곳에 대중적?자주적 권력의 구심들(노동조합이나 좌파 지자체)을 건설하고 그 네트웍을 이뤄야 한다.    

아멘돌라: 그렇다면 동지는 당이 집권하지 않고서도 그러한 대중운동만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잉그라오: 당이 제도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대중운동을 통한 풀뿌리 권력의 형성과 함께 해야 한다. 구조개혁은 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실 그 주인공은 노동자 대중 자신이다. 당이 구조개혁의 추진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도 그 주역이 될 수 있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제도권 활동과 대중투쟁, 당 활동과 노동조합 활동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하나로 결합되어야 한다.

아멘돌라: 동지의 입장은 극히 위험스럽다. 지금 당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PSI가 DC와 연합하여 우리 당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있는 현 상황을 하루빨리 타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PSI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PSI와 PCI 양대 좌파정당을 통합하여 단일한 노동계급정당을 건설하자는 합당 제안을 내놓기까지 했다. 동지는 당이 정작 필요로 하는 이러한 노력을 교란하고 있다.

잉그라오: DC와 야합하고 있는 PSI 전체와는 결코 통합할 수 없다. 중도파 연립내각에 반대하는 PSI의 좌파와만 통합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중요한 것은 정당간의 상층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정치 지형을 그저 승인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오히려 현재의 정치 지형을 깨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DC와의 관계를 고민하기보다는 가톨릭 신앙 때문에 DC를 지지하고 있는 유권자들을 설득하여 DC의 기반을 아래로부터 허물어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지부들이 이런 논쟁에 휩싸였다. ‘잉그라오 좌파’라고 불린 잉그라오 문서의 지지자들(반면에 아멘돌라의 지지자들은 ‘아멘돌라 우파’라고 불렸다)은 대개 전통적 산업지역이나 최근 급격하게 산업화를 경험한 지역의 지부들에서 호응을 얻었다. 잉그라오 좌파의 대다수는 노동현장 활동가들이거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일상 활동(현장 투쟁 등)과 당 강령 정신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바로 70여년 전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고민했던 그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잉그라오 좌파가 불러일으킨 당 혁신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당대회 자체는 그들의 패배로 끝났다. 잉그라오 문서의 지지자는 당원의 15-20% 정도였고, 총 113개 지부 중 오직 17개 지부에서만 다수파 입장으로 채택되었다. 레지스탕스 시기부터 당원이었던 많은 고참 당원들은 논쟁 자체를 회피했고, 대의원 중 가장 많은 수는 특별한 입장이 없는 ‘중도파’들이었다. 당은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인했다.
당시 잉그라오 좌파가 단기간에 좀 더 효과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데는 독자적인 분파 기관지 발간을 금지하는 당 규율 탓이 컸다. 비록 잉그라오 문서를 회람하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매체 없이 각 지역의 비슷한 입장의 당원들 사이에 의견을 교환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다.   

구조개혁의 주역은 당에서 평의회 노동조합으로
그림 ) 로싸나 로싼다
그림 ) 루이지 핀토르
그림 ) 루치아나 카스텔리나
그림 ) 루치오 마그리

11차 당대회에서 당을 새롭게 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바로 한 해 뒤인 1967년부터 이탈리아의 대학가는 베트남 전쟁 반대와 교육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점거 시위로 격동했다. 이것은 이후 10년 동안 계속되는 이탈리아 사회의 지각 변동의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변화의 주역이 되어야 할 그 당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PCI는 오히려 당내에서 시대의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온 당원들을 당에서 쫓아냈다. 잉그라오 좌파의 일부는 기존 활동 방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1969년 초부터 <일 마니페스토(선언)>라는 분파 기관지를 발행했다. 당 지도부는 그 해 10월 이 잡지의 폐간 명령을 내렸고 이에 <일 마니페스토> 그룹이 항명하자 한 달 뒤 이들을 모두 출당시켜 버렸다. 5명의 의원을 비롯, 루치오 마그리, 루이지 핀토르, 로싸나 로싼다, 루치아나 카스텔리나 등 촉망받는 당의 차세대 지도자들이 당 바깥에서 활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잉그라오는 침묵했다.
그림 ) 공장점거 파업 모습
<일그림 ) 브루노 트렌틴
 마니페스토> 그룹의 숙청이 벌어지던 바로 이 때 이탈리아는 전후 서유럽 최대의 파업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1968년부터 학생운동의 분출에 고무된 젊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파업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1969년 3월에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1919-20년의 투쟁이 벌어졌던 그 피아트 공장!)에서 50일간의 파업투쟁이 벌어지면서 온 나라는 한 해 동안 550만명이 쟁의에 참여하는 대중파업 상황에 휩싸였다(이탈리아판 87년 노동자대투쟁). 노동자들의 요구는 15-17%의 일괄 임금인상, 주 40시간 노동, 현장 노동자들의 대표자로서 평의원의 활동을 보장할 것 등이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임금이나 복지, 물가연동임금제 등 모든 영역에서 모든 직종의 노동자들이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철저한 평등주의였다. 이는 오랫동안 차별 대우를 받아온 남부 출신 미숙련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 상황에서 지도력과 창의성을 보여준 것은 PCI가 아니라 노동조합이었다. PCI계 노총인 CGIL, 그 중에서도 잉그라오 좌파의 브루노 트렌틴이 이끌던 금속노조 FLM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은 우선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총파업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았다. 그리고 개혁 투쟁을 당면 실천 전략으로 잡았다. 보수파가 다수인 의회를 거치지 않고 노동조합이 정부와 직접 교섭해서 개혁을 쟁취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현장의 노동자 권력 확대뿐만 아니라 광범한 사회 개혁까지 포함된다. 트렌틴은 이런 식으로 당면 투쟁과 장기적 사회변혁이라는 목표를 서로 결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바로 11차 당대회에서 잉그라오 좌파가 제출한 문제의식과 잇닿는 것이었다.
실제로 CGIL은 1969년 가을 대중파업의 열기를 사회개혁투쟁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노동법 개정부터 연금개혁까지 길다란 사회개혁의 목록을 내건 11월 19일의 총파업에는 무려 2천만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뜨거운 가을’). 자본가들은 압도되어 버렸다. 1970년 서유럽에서 이제까지 존재한 노동법 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새 노동법이 통과됐다. FLM은 자본가들이 남부지방에 더 많은 산업 투자를 한다는 것을 단체협상안의 한 조항으로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노동자들이 산업 투자를 직접 통제한다는 잉그라오 좌파의 구상은 결코 몽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의 구조 자체도 크게 변화했다. 1919-20년에 등장했던 공장평의회가 다시 등장했다(77년 현재 3만2천개의 평의회 존재). 파업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평의원들을 선출했고 이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두터운 활동가층으로 부상했다. 노동조합 특히 FLM은 이를 산별노조의 공식 체계로 수용했다. 그래서 ‘평의회 노조’라는 특이한 노동조합 구조가 등장했다. 이는 서유럽의 일반적인 산업별노조에, 우리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경험한 전투적 기업별노조의 역동적 대의원구조가 더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교섭은 중앙에서 이뤄지지만, 투쟁의 결정권은 각 사업장의 현장 노동자들이 쥐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당은 구조개혁을 약속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눈앞에 펼쳐 보인 것은 당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운동이었다.

씻을 수 없는 오류 - 역사적 타협

물론 노동조합의 대정부 직접교섭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정부가 바뀌어야 했다. PCI 주도의 좌파정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PCI는 이러한 희망과 기대를 최악의 시나리오로 발전시켰다. 사실 당은 이탈리아 사회의 급진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당에서 쫓겨난 <일 마니페스토> 그룹 등 신좌파 정파들이 선거에 적극 뛰어들었지만,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대중들조차 투표는 PCI에 했다.
성과는 우선 지방정부에서 나타났다. 1970년부터 광역단위에서도 지방자치가 실시되자 PCI는 광역지자체의 장악을 통해 우회적으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1975년 지방선거에서 PCI는 33%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공산당 시장’을 맞이하게 됐다. 이탈리아 인구의 60%가 PCI 지자체에 속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림 ) 엔리코 베를링게르
영광의 정점은 1976년 총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PCI는 비록 DC의 38.7% 득표에는 뒤졌지만 34.5%라는, 당 역사상 최대의 득표를 기록했다. 선거권을 18세까지로 낮춘 선거법 개정 덕분에 1975년 지방선거에서부터 새로 유권자로 등장한 500만에 달하는 젊은 세대가 이러한 승리를 만들어준 주역이었다. PCI의 선거상의 성과는 분명 1967년부터 계속된 대중의 급진화의 결과였다.  
변화를 추구하는 당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대중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어야 했다. 그러나 11차 당대회 이후 사무총장이 된 엔리코 베를링게르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PSI와 협력하는 것도 힘들고 당 독자적으로 과반수의 득표를 할 수도 없다면 DC와 좌우합작을 이루는 것이 당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혹은 가장 편한?) 길이라고 보았다. 노동자투쟁에 맞불을 놓기 위해 1969년부터 시작된 네오 파시스트들의 폭탄 테러가 이러한 선택의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인민전선, 즉 부르주아 정당까지 포함하는 민주세력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73년에 칠레의 아옌데 민중연합정부가 군사쿠데타로 무너지자 이것도 좋은 변명거리가 되었다. 쿠데타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의회 내에서 50%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당시 이탈리아 의회 내에서 과반수가 되려면 DC와 손잡는 수밖에 없었다. 마피아와 거래하고 가톨릭교회의 낡은 교리(이혼 금지 등)를 고집하는 그 당과 말이다.   
1973년 9월 PCI는 이러한 전략 방침을 ‘역사적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선언했다. 애초에는 네오 파시스트의 공세가 이 노선의 근거로 제시됐지만, 1974년 전 세계적으로 경제불황이 닥치자 이제는 이것이 합작의 명분이 되었다. 경제위기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경제의 새로운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앞장서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DC의 디플레이션 정책에 협조해줘야 한다, 좌파정당 지도자의 입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PCI는 IMF가 권고하는 긴축정책의 전도사가 되었다.
‘역사적 타협’의 깃발 아래 PCI는 1976년 총선 직후 등장한 DC 주도의 ‘국민연대’ 정부에서 그림자 여당이 되었다. DC의 반대로 내각에 장관 한 자리 따지도 못하면서 정부의 모든 결정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것도 권력이라면 권력인가. 아무튼 이 시절 PCI는 여당 대접을 받았고, 잉그라오가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그림 ) 70년대 여성운동 시위 모습
그러나 사무총장의 복에 겨운 미소 뒤에서 이 거대한 당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첫째, PCI가 앞장서서 동조한 긴축정책은 지난 10년 동안 노동계급이 쟁취한 개혁의 성과를 무색하게 만들고 노동운동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렸다. 1977년에 아멘돌라 우파의 이론적 대변자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주도로 작성?공표된 중기적 전술 목표는 구조‘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계급의 권익과는 상반되는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구조조정 계획만이 언급돼 있었던 것이다. 당 원로인 움베르토 테라치니(그람시의 동료)는 부유세의 강화와 복지의 확대를 주장하며 이 안을 통박했다. 아무튼 이러한 노동운동의 후퇴와 사기 저하는 곧바로 PCI의 기층 토대의 붕괴로 나타났다.
둘째, DC의 기반이 돼온 낡은 가톨릭 문화가 해체되고 있었지만 PCI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7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여성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여성운동은 이혼과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여성 억압적 현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는 가톨릭 문화의 잔재로부터 벗어나려는 사회 전반의 욕구와 일치했다. 1974년에 실시된 이혼법안 국민투표에서 60%의 국민이 이혼의 합법화에 찬성했다. 하지만 PCI는 DC와의 협력관계 때문에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지 못했다. 중간계층과 연대하기 위해 DC와 협력한다면서 사실은 탈가톨릭화를 지향하는 중간계층과 아래로부터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셋째, 가장 강력한 야당이 야당의 역할을 포기한 가운데, DC의 독주와 전횡이 계속되고 정치판은 파행으로 치달았다. 부패는 더욱 심각해졌고, 국가기구 내에 극우 세력이 활개쳤다. PCI에게는 ‘공범’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원내 90%가 단합하여 어떠한 의미 있는 개혁도 거부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개혁의 창구는 1970년에 신설된 국민투표제도뿐이었다. 실제로 여성운동이나 신좌파 세력들은 제도권 유력정당들의 무시 속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이혼과 낙태의 합법화를 이뤄냈다. 그도 아니면 남는 길은 극우와 극좌의 절망적인 테러리즘에 동참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대다수 당원들이 ‘역사적 타협’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당원 중 2/3는 이를 위기 상황에 필요한 비상 수단 정도로 생각했다. 빨리 전투적 야당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결국 1979년 1월 ‘역사적 타협’ 노선은 폐기됐다. 하지만 그것이 남긴 상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한 거대한 정당의 안락사

1980년 9월 이탈리아 최대 재벌인 아?疸? 일가는 ‘뜨거운 가을’의 성지인 피아트 공장에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정리해고 반대 파업이 벌어졌고, 베를링게르가 피아트 공장 정문 앞에서 공장점거를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PCI는 ‘역사적 타협’ 노선을 확실히 청산한 것처럼 보였다. 1980년 10월에는 일부러 살레르노에 당 간부들이 모여서 당의 재급진화를 선언하는 제스처를 취하기까지 했다(‘제2차 살레르노의 전환’). 10여년 전에 쫓겨난 <일 마니페스토> 그룹의 일부를 다시 받아들이고, 여성운동?환경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며, 미국의 대륙간 탄도 유럽 배치에 반대하는 반핵평화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림 ) 행진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그러나 피아트 정리해고를 기점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공세는 이탈리아 노동운동을 장기간의 침체 상태에 빠뜨렸다. 이런 상황은 1987년 총선에서 PCI의 득표율이 26.4%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년 뒤에는 동유럽이 무너졌다. 이제 당내 다수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사회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 데서 대안을 찾았다. 1991년 PCI는 70년간 견지해온 당명을 버리고 ‘좌파민주당’(PDS)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기존 정치 지형을 흔들고 재편하는 “계획적이고 지속적인 야당정치”(T. 압세)에 나서기보다는 기존의 세력관계 속에서 상층연합으로 권력에 다가가려던 전략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런 식의 선거정치에서 벽에 부딪힐 경우 결국 가장 현명한 선택은 급진적 개혁의 포기이고 당 강령의 폐기인 것이다. 이는 1950년대에 서독 사회민주당이 취한 선택이기도 하다(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
하지만 그람시로부터 구조개혁론으로 이어지는 독창적 전통은 결코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PDS로 합류하길 거부한 PCI 당원들은 따로 공산주의재건당(PRC)을 건설했다. PRC는 다시 사회운동 속으로 파고 들어가 아래로부터 이탈리아 좌파를 재건하는 길을 택했다. 잉그라오, 마그리, 로싼다, 카스텔리나 등 낯익은 이름들이 바로 이 명단에 속해 있다. 더 중요하게는 수많은 젊은 세대가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PRC는 유럽 급진좌파정당들의 맏형으로서 세계화 반대 운동?반전운동에 앞장서고 있으며, 작년 우파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반대해 벌어진 천만 노동자의 총파업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 급진적 개혁을 약속했던 한 거대한 정당의 역사는 일단 끝을 보고 말았지만, 대안사회를 향한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 참고할만한 글들
- 권형기, ?공산당 조직원리의 변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 C.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김정하 옮김, 개마고원, 2001.중 제10장.
- H. 리히터 외 편, ?유로공산주의?, 일월서각, 1985.
- L. 마이탄 외,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의 현재?, <읽을꺼리> 5호(http://copyle.jinbo.net).
- 박동진, ?이탈리아 좌익민주당과 강령의 특징?, <이론> 14호, 1996년 봄.
- T. 압세, ?이탈리아 공산당 심판?, <읽을꺼리> 5호(http://copyle.jinbo.net).
- A. 오케토, ?이태리 공산당 제 19차 임시대회 오케토 서기장의 보고?, <동향과 전망> 10호, 1990년 겨울.
- 이미숙, ?이탈리아 공산당의 구조개혁론 연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 이병천, 박형준 엮음,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I?, 의암출판, 1992.중 제 1부 “이탈리아 공산당 노선전환 논쟁”.
- 이성형, ?동구의 변화와 유로코뮤니즘: 이탈리아 공산당의 변화?, <서울대 사회과학과 정책연구> 1990. 12. 
- 이혁, ?이탈리아 공산당 연구?, 한국사회연구소 엮음, ?대중정당?, 백산서당, 1989.
- 이혁, ?이탈리아 공산당의 구조개혁론?,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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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영 엮음,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연구 Ⅳ?, 돌베개, 1989.중 제7편.
- 조효래, ?노동조합과 정당: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향과 전망> 9호, 199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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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이탈리아 공산당의 노선 분석?, <경제와 사회> 2호, 1989.
- 홍민희,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환: 좌파민주당으로의 정당조직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 2000.
- 後房雄,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환’과 그람시의 ‘부재’?, <사회평론>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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