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전투는 계속된다
- 칠레 사회당?공산당과 아옌데 인민연합정부
장석준(중앙연수원 교육부장, newer@jinbo.net)
진보정당은 유럽적인 현상인가? 확실히 지금까지 이 연재에서 다룬 정당들은 모두 유럽의 정당들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상황은 바뀐다. 제3세계 곳곳에 진보정치세력들이 등장해 위대한 승리를 이뤄냈다. 그 중에는 유럽과 비슷한 의회 민주주의 아래서 유럽의 진보정당들보다 훨씬 역동적인 실천을 보여준 경우도 있다. 1970~1973년의 칠레 아옌데 정부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칠레 민중들이 보여준 창의성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1973년 9월 11일(이 기이한 우연의 일치!) 이 나라의 대통령궁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군으로부터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칠레라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진보정당들
그림 ) 칠레 노동운동의 아버지 레카바렌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뒤에도 경제적 종속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데스 산맥 서쪽에 길다랗게 늘어져 있는 모습의 이 칠레라는 나라는 그 중에서도 사뭇 극단적인 경우였다. 이 나라는 국부의 대부분을 전적으로 광물 수출에 의존해왔다. 1960년대에 전체 수출액 중 구리가 차지한 비중이 60%에 달했다. 구리의 주요 수입국인 미국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해도 칠레는 커다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따라서 칠레의 노동운동도 북부의 광산지대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광산지역 노동운동의 기반 위에서 칠레 최초의 노동자정당이 건설되었다. 1917년 광산노동조합운동의 전설적 지도자인 에밀리오 레카바렌의 주도로 만들어진 사회주의노동자당이 그것이었다. 이 당은 제3세계의 다른 진보정치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창당할 당시부터 러시아 혁명의 세례를 받았다. 1922년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칠레 공산당(이하 공산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그런데 1933년에 공산당과는 별개로 칠레 사회당(이하 사회당)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사회당이 서유럽 사회민주당들처럼 개혁주의 노선을 내걸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사회당은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공산당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공산당 내에서 트로츠키를 편들다 쫓겨난 사람들이나 레닌의 혁명 노선은 받아들이지만 코민테른의 구속을 받는 건 싫다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게 사회당이었다. 이 때부터 사회당과 공산당이라는 두 정당이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경쟁하며 칠레의 노동자?민중운동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칠레 좌파가 주요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 것은 1938년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중도우파정당인 급진당과 인민전선정부를 구성하면서부터다. 인민전선정부의 성과는 급진당이 독차지했지만, 아무튼 이를 계기로 양대 좌파정당의 득표율은 각각 10% 안팎으로 성장했다.
공산당은 이후 두 차례 비합법 상태에 놓이는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당이 다시 합법성을 쟁취한 1950년대 말이 되면 15~17%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당으로 부상한다. 더 중요한 것은 칠레 노총인 CUT(노동자단일연합)에서 확고한 다수파였다는 점이다. 공산당은 인민연합정부 수립 전까지 약 6만명의 당원을 보유했고, 이 중 25~30%가 열성 당원으로서 총 3,618개(1969년 현재)의 세포에 소속돼 활동했다.
공산당에는 인민전선 시기의 전통이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민족부르주아지와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관념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제도 정치의 틀 안에서 중도우파세력과 협력하여 독점대기업의 국유화와 농지개혁을 이루겠다는 것이 공산당의 전략이었다. 이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그 전 단계를 준비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1951년의 9차 당대회에서 당은 이를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사회당은 1970년 현재 공산당보다 조금 많은 10만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거의 전적으로 북부 광산지대와 일부 산업 도시에 기반하고 있던 공산당과는 달리 사회당은 중간계층과 농촌에서도 일정하게 지지를 얻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당 역시 노동자가 당원 중 65%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정당이었다. 열성 당원들은 공산당의 ‘세포’와 마찬가지로 ‘누클레오스(핵)’라는 이름의 바닥 조직에 소속돼 활동했다.
그림 ) MIR의 기관지
공산당과 또 다른 점은 당내의 이념 분포가 너무도 다양했다는 점이다. 당 안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마오주의자들도 있었고,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노선이나 심지어는 아르헨티나의 페론 노선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중요한 것은 쿠바혁명의 영향이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주도한 쿠바혁명은 민족부르주아지와 협력한다는 우회로가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힘만으로 제국주의에 대항해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칠레에서는 1965년 카스트로주의 노선을 따르는 활동가들이 ‘혁명좌파운동’(MIR)이라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건설했다. 이 조직은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칠레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사회당 안에서도 알타미라노를 중심으로 한 젊은 당원들이 쿠바혁명의 교훈을 적극 수용하면서 당내 좌파를 형성하고 급기야는 1967년 치얀에서 열린 22차 당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했다. 알타미라노가 사무총장으로 당선되고, “혁명적 폭력은 불가피하다”는 문구가 담긴 새 강령이 통과됐다.
인민연합의 등장, 그리고 뜻밖의 승리
2차 대전 후 칠레에서는 과거 중도우파의 대표 주자였던 급진당을 대신하여 기독교민주당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며 급성장했다. 1957년부터 사회당과 공산당은 ‘인민행동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연합을 결성하고 공동의 대통령 후보를 냈으나 우파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회당 상원의원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1964년 대선에서도 우파 공동후보로 나선 기독교민주당의 프레이가 아옌데를 쉽게 따돌렸다.
당시 기독교민주당은 칠레 사회의 고질병인 경제 종속을 완화하고 평균 20% 이상의 상승률을 보이는 고인플레이션을 잠재우며 농지소유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공약했다. 좌파가 물고 늘어지는 칠레 사회의 근본 모순들을 나름대로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프레이 정부는 자신들의 노선을 ‘자유 속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자유 속의 혁명’은 결코 빈말은 아니었다. 프레이 정부는 구리 광산의 주식 51%를 매입해 미국 자본에 대한 대항력을 확보했다. 농지개혁도 추진했고, 농촌에도 노동조합 설립의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기독교민주당을 사면초가 상황에 빠뜨렸다. 1964년 대선에서 프레이를 지지했던 극우 세력은 개혁을 거부하며 국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반대로 노동자?민중은 정부 개혁의 수준과 속도가 불만이었다. 예를 들어 농지개혁은 전체 농지의 15%에 그쳤고, 기독교민주당은 중농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득표 기반으로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일 뿐 빈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단 고삐가 풀린 개혁의 기대감은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 대안은 결국 좌파였다.
1970년 대선을 준비하며 정치권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이 다시 한 번 공동후보를 내리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누가 후보가 될지, 그리고 선거연합이 어디까지 확장될지가 관심 거리였다. 사회당은 중도우파인 급진당이 참여하는 데 반대했지만, 공산당은 급진당뿐만 아니라 기독교민주당과도 가능하면 손을 잡았으면 하는 속내를 드러냈다. 사회당은 노동계급정당만으로 공동전선을 구성하자는 ‘노동자전선’을 주장한 데 반해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세력을 포함하는 ‘민족해방전선’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이 와중에 기독교민주당의 청년 좌파가 개혁 완수를 요구하며 당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좌파정치조직인 ‘인민행동통일운동’(MAPU)을 건설했다.
그림 ) 카스트로와 아옌데
설왕설래그림 ) 체 게바라와 아옌데
끝에 1969년 10월 오른쪽으로는 급진당으로부터 왼쪽으로는 공산당, 사회당, MAPU에 이르는 ‘인민연합’이 구성됐다. 비록 급진당이 참여하긴 했지만 인민연합은 과거의 인민전선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인민연합의 주도권은 공산당?사회당?CUT 등 노동계급 세력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인민연합에 합류하길 거부한 MIR조차도 바깥에서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이런 점은 ?인민연합 기본강령?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본강령?은 경제를 ‘사회적 부문 / 사적 부문 / 혼합 부문’의 세 부문으로 개편하고 253개 주요 대기업을 사회적 부문으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즉, 이들 기업을 국유화하고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임 기독교민주당 정부가 중도에 그친 농지개혁과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완수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과거의 인민전선에 비하면 확실히 훨씬 급진적인 내용이었다. ?기본강령?에는 이외에도 국가권력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신헌법을 제정하고, 사법부 등을 개혁하겠다는 내용도 명시되어 있었다.
인민연합의 공동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은 공산당이 급진당 출신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는 의사를 내비치는 바람에 난항을 보였다. 그러나 1970년 1월 결국 대다수의 예상대로 사회당의 아옌데가 후보로 합의되었다. 6년 전에도 대통령 후보였던 아옌데는 의사 출신으로 사회당의 창당 멤버였다. 비록 사회당 당원이긴 했지만 그는 당 노선과는 상관없이 ‘아옌데 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지만, 노선 면에서는 자기 당의 사무총장보다는 공산당과 더 가까웠다. 그는 한 마디로 원칙 있는 사회주의자, 그 중에서도 ‘선거’ 사회주의자였다.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는, 결과부터 말하면, 아옌데와 인민연합의 승리였다. 사실 아옌데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36%로, 1964년에 얻은 39%보다 오히려 줄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각각 따로 후보를 내면서 우파 표가 둘로 양분되는 바람에 좌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9월의 승리는 ‘불안한’ 승리였다.
더군다나 칠레 헌법에 따르면 대선에서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상하 양원 합동 총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게 돼 있었다. 최대 득표자의 손을 들어주는 게 당연한 관행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주가가 2주일만에 50% 폭락하고, 자본의 해외 유출이 시작됐다. 아옌데 정부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참모총장이 누군가에게 암살 당했다. 의회의 결정이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기독교민주당 우파는 대통령이 기존의 모든 헌법?법률 조항을 존중해야 한다는 ‘헌정보장법’이라는 억지 법안을 들이밀어 아옌데의 서명을 받아내고 나서야 인민연합정부의 출범에 동의해주었다.
하지만 전투는 오히려 이제부터였다.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국민당과 기독교민주당은 인민연합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지니고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좌파는 자신의 약속을 이행해야 했다.
다가오는 대결의 순간
그림 ) 연설하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인민연합정부의 약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칠레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971년 현재 30.6%에 불과했다(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미만이라고 해서 30%를 높은 조직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는 25인 이하 사업장의 피고용자가 전체 제조업 노동자 중 1/4 이상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25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노동조합(산업별)에 가입할 수 없다고 못 박은 노동법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록 조직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정부를 확고히 지지했지만, 미조직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민중들 내부에는 좌파 지지의 사각 지대가 존재했다. 우선 농촌 지역의 인민연합 지지율이 도시에 비해 떨어졌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지지도가 낮았다. 대선에서 남성은 46%가 인민연합에 투표한 반면 여성은 그 절반인 26%만이 인민연합을 지지했다.
또 다른 불안 요인은 대선 직후 인민연합의 지역조직인 인민연합위원회들이 해체됐다는 점이다. 선거운동이 끝나자마자 각 정당은 독자 활동으로 돌아갔고, 인민연합의 지역위원회들은 해산하거나 형해화되었다. 이제 인민연합이란 중앙의 연립정부와 각각의 정당들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는 정부를 아래로부터 조직적으로 통제할 통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좌파정당들이 서로 반목할 경우 이를 조정할 기구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아옌데 정부의 첫 1년간은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새 정부는 구리 광산을 완전히 국유화했고, 농지개혁의 대상을 200에이커 이상의 토지 소유자로까지 확대했다. 구리 광산 국유화에 대해서는 원내의 보수정당들마저 선선히 동의해주었다. 정부는 또한 노동자들의 기본 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반면 물가는 동결했다. 중간계급에게는 신용대부를 확대했고, 의료시설 확충 등 복지 증대에 나섰다. 그 결과 대중의 구매력이 확대되고, 소비 경기가 살아났다. 1년간 GNP가 8.5%나 성장했다.
그 덕분인지 1971년 4월의 지자체 선거에서는 인민연합이 무려 50.9%의 지지를 얻는 대승을 거두었다. 인민연합 내 좌파는 이 승리를 공세의 기회로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보수정당 의원들의 거듭된 반대로 국유화 정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데, 행정부의 권한 강화 여부를 국민투표로 묻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작 반격에 나선 것은 압도적인 패배에 경악한 기득권층이었다. 우선 구리 광산의 국유화에 발끈한 미국이 경제 봉쇄에 나섰다. 미국은 구리를 투매하여 국제 구리 가격을 하락시켰다. 당연히 칠레의 무역수지가 악화됐다. 그리고 미국의 정보요원들이 야당과 군부, 재계 인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바로 이 무렵(1971년 중순)부터,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의 목가적 풍경은 사라졌다. 기독교민주당 내에서는 전직 대통령 프레이가 이끄는 우파가 득세했다. 이에 반발한 좌파의 일부는 탈당하여 ‘기독교좌파운동’(MIC)이라는 새 정치조직을 만들고 인민연합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로써 기독교민주당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9월에는 자본가들을 대표하는 경제단체장들이 회합을 갖고 행동계획을 마련했다. 신규 자본 투자를 중단하고, 암시장에 돈을 풀어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자는 게 그 주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다음해 미국에서 폭로된 국제전신전화회사(ITT)의 비밀권고안과도 일치한다. ITT는 칠레 자본가들에게 생산파업을 선동하고, 은행의 신규대부 중지를 촉구했다. 물가가 오르고, 시장에 상품이 마르기 시작했다. 연말부터 갑자기 인플레이션의 행진이 재개되었다.
사실 아옌데 정부의 첫 1년 동안 가장 혜택을 입은 것은 노동자도 아니고 농민도 아닌, 도시 중간계층, 특히 자영업자들이었다. 수백만 규모로 두텁게 존재하던 이들은 정부의 신용대부 확대 정책과 소비열풍으로 짭짤한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경제적 유인책만으로 이들이 인민연합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이를 오판했다. 보수정당과 자본가, 미국이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자 도시 중간계층은 재빨리 말을 바꿔 탔다. 보수세력의 주위에 중간계층 조직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0월 자본가 파업, 그리고 ... 민중이 일어나다
운명의 장난은 아옌데로 하여금 낡아빠진 부르주아의 법률을 총을 들고 지키게 하는 기묘한 처지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나중에 자기를 비난하고 살인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는 대법원을 옹호했고, 자기를 위법이라고 선언하고 권력 찬탈자에게 기꺼이 자리를 양보하는 의회를 옹호했으며, 자기가 총검을 쓰지 않고 끝장내려고 했던 썩은 체제를 옹호했고, 영혼을 파시즘에 팔아먹은 야당의 자유를 옹호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총을 들고 싸우는 처지에 빠져버렸던 것이죠.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콜롬비아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칠레의 모든 기록?, 269쪽.
기득권 세력은 제도권 투쟁과 대중 투쟁의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의회와 대법원?심계원(칠레판 헌법재판소)은 정부가 사회 부문에 편입시킨 기업에 대해 매번 원소유자 반환 결정을 내렸다. 1971년 12월에는 한 무리의 주부들이 유명한 ‘냄비 시위’를 벌였다. 쫙 빼 입은 여성들이 냄비를 두드려대며 “힘들어 못 살겠다”고 외쳤다. 사실 그들은 냄비라곤 이 때 처음 만져보았을 상류층 부인네들이었다. 이와 함께, 무시무시한 제복을 입은 ‘조국과 자유’라는 파시스트 테러 단체도 거리에 등장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인민연합 내의 노선 대립이 치열해졌다. 사회당은 이미 1971년 1월의 23차 당대회에서 각 지역에 인민연합위원회를 복구하고 이를 민중권력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을 결의했다. 사회당과 MAPU 등 인민연합 좌파는 수구세력의 사보타지에 맞서 민중자치기관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지역 대중조직들을 기반으로 ‘가격 및 공급위원회(JAPs)’를 만들어 상품의 유통과 판매를 담당하게 했고, 자본가들이 고의로 가동을 중단시킨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생산통제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반면 공산당과 아옌데 대통령은 기독교민주당과 군부를 끌어들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데 골몰했다. 그러자면 기독교민주당의 입맛에 맞게 개혁의 수위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아옌데 대통령은 인민연합 내의 의견 조율을 위해 두 차례 비밀정책회의를 주선했다. 그러나 회의는 항상 서로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을 놓고서도, 인민연합 우파는 전년도의 지나친 임금 상승에서 원인을 찾고, 이에 따라 임금 상승에 걸맞는 생산성 향상에서 대안을 찾았다. 반면 인민연합 좌파는 기득권 세력이 자본 파업과 암시장 거래를 통해 의도적으로 경제난을 조성한 것이며, 따라서 대안은 민중의 직접 통제를 확대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우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6월부터 기독교민주당의 입각을 요구하는 지루한 협상이 시작됐다. 7월에 공산당의 미야스가 MAPU의 부스코빅을 대신해 경제장관으로 입각했고, 곧바로 ‘신경제정책’을 발표했다. 그 핵심은 기독교민주당이 용납해줄만한 수준(91개)으로 사회화 대상을 축소하고, 중소기업의 국유화를 금지하며, 노동자들에게 생산 증대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정부는 긴축재정으로 돌아섰다.
즉각 노동자의 반발이 나타났다. 7월 14일 섬유노동조합은 회의를 열어 섬유산업 전체의 사회화와 실질적 노동자 통제를 정부에 요구했다. 이보다 조금 전에 산티아고 근교에서는 노동자와 빈농이 연대하여 공장과 토지를 점거한 뒤 공동의 투쟁조직을 건설했다. 이 조직은 ‘산업코르돈(코르돈은 조정위원회라는 뜻)’이라 불렸다. 7월 27일 사회당 좌파와 MIR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민중자치조직의 대표들을 모아 콘셉시온에서 대회를 열었다. 대회 참가자들은 생산 증대 이전에 노동자 통제부터 보장할 것, JAPs 등 지역 민중권력을 강화할 것 등을 요구하고, 모든 민중자치조직들을 규합해 ‘민중의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아옌데는 이 대회를 격렬히 비난하고 정부와의 관계를 부인했다.
그 해 가을, 수구 세력은 인민연합과 기독교민주당 사이의 협상 가능성을 최종 분쇄하기 위해 결정적 승부수를 던졌다. 정부의 국영운송기업 설립안 반대를 명분으로 5만명의 트럭 운송업자들이 10월 1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칠레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트럭 운송의 중단은 상품 유통의 마비를 의미했다. 12일부터는 자본가들과 중간계층 대부분이 파업에 동참했다. 사장이 공장에 나타나지 않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파업 지도부는 CIA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바로 이 때였다, 민중의 위대한 창조성이 역사의 무거운 지층을 뚫고 분출한 것은. 지역의 노동조합, JAPs, 빈민조직, 학생조직, 인민연합 소속 정당, 좌파 지자체가 힙을 합쳐 ‘자치지도부’를 결성하고 상품 공급을 담당했다. 투기꾼과 모리배 없이도 시장은 돌아갔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계기로, 그 동안 인민연합에 대해 심드렁했던 주부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기그림 ) 아직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피노체트와 함께 선 아옌데
시작했다.
경영진이 무단 결근한 300개 이상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현장을 장악하고 생산을 재개했다. 산업코르돈의 결성 움직임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자본가들이 없는 공장에서도 98%의 산업 시설이 가동 됐다.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공장은 생산성도 다른 곳보다 높았다. 외국계 기업인 네슬레사에서는 노동자들이 기술자들과 힘을 합쳐 저소득층을 위한 저렴한 식료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의 파업에 맞서 병원 노동자들이 산업코르돈 보건위원회를 구성하고 병원 문을 다시 열었다.
가진 자들의 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들의 도발은 오히려 ‘단결하고 결의에 찬 새로운 민중’만을 낳았다. 아직 군을 장악하고 있던 입헌파 장성, 특히 프라츠 참모총장이 정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커다란 힘이 되었다. 11월 5일 파업 지도부는 정부와 타협했고, 그 직후 군장성들이 입각한 비상정부가 구성됐다.
하지만 인민연합정부는 다시 한 번 공세의 좋은 기회를 흘려 보냈다. 10월의 민중 공세는 정부의 굳건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을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자치지도부의 배급 활동을 중단시켰다.
산업코르돈, 민중권력의 중핵
1973년 1월, 정부는 다시 한번 사회화 정책의 제한을 천명함으로써 야당을 안심시키려 했다(미야스 계획). 이는 작년 가을 이후 한때 주춤했던 산업코르돈의 활동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의 발표에 발끈한 각 지역의 산업코르돈은 광역별로 산업코르돈지방조정위원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럼 여기서 산업코르돈이 어떤 조직인지 좀 더 자세히 펼쳐보자. 산업코르돈은 한 지역의 공장 대표들로 구성된 연대조직이다. 각 사업장에서 노동자 총회를 통해 2~3인의 공장 대표를 선출하고, 이들이 지역별로 모여 산업코르돈의 지도부를 구성한다. 총회에는 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금속노조 소속이든 사무노조 소속이든 모두 참여한다.
초기부터 산업코르돈이 과연 노동조합과 무엇이 다른지 논쟁이 있었다. 공산당이 주도하던 CUT는 산업코르돈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 사회당과 MIR은 산업코르돈을 중요시했다.
산업코르돈과 기존의 노동조합 사이의 첫 번째 차이점은, 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산업코르돈이 직종이나 노동조합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전체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산업코르돈은 25인 이하 사업장에서도 건설되어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또한 산업코르돈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익 향상을 추구하는 노동조합과는 달리 직접적인 정치적 목적을 추구했다. 사회적 소유의 확대와 노동자 통제의 강화를 요구했고, 생산 활동의 자주관리와 지역 민중과의 연대에 전념했다. 따라서 조직의 주요 단위도 기업별이나 산업별이 아니라 지역별이었다.
말하자면 산업코르돈은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민중권력기관의 훌륭한 사례였다. 파리 코뮌이나 러시아의 소비에트,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런데 민중권력기관의 등장은 결코 기존의 제도 정치에 부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산업코르돈은 1973년 3월로 예정된 총선에도 정력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MAPU의 선거운동 슬로건은 상징적이었다. “이 정부는 얼간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정부다.” 한편 기득권 세력도 총선을 인민연합정부를 합법적 방식으로 무너뜨릴 최후의 기회로 보고 사력을 다했다.
투표함을 열어보니, 인민연합이 총 44%를 획득해 비록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대선 때보다 득표율을 8%나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대단한 승리였다. 의회 민주주의 국가 어디에도 단독으로 45% 가까이 획득하는 정치세력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기존 사회 체제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말이다! 민중의 공세야말로 득표율 신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수구 세력의 수중에는 이제 비합법적 수단이라는 카드만이 남았다. 그들은 이것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6월 29일 첫 번째 쿠데타가 시도되었다. 프라츠 참모총장의 용의주도한 지휘로 쿠데타는 진압됐지만, 이번에도 기득권 세력의 도발은 민중의 새로운 공세를 낳았다.
“아옌데, 아옌데, 민중이 동지를 지킨다”고 외치며 수많은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7월까지 산업코르돈이 총 60여개로 늘어났고, 전체 산업노동자의 약 50%를 포괄했다. 공장마다 ‘공장방위대’를 구성해 쿠데타 음모에 대항할 준비에 나섰다. 이제는 공산당도, CUT도 산업코르돈을 인정하고 이에 적극 가담했다. 그 동안 기독교민주당을 지지하던 노동자들도 곳곳에서 인민연합의 깃발에 합류했다.
민중은 패배하지 않았다, 민중의 대통령은 항복하지 않았다
시적인 라틴 사람이여! 당신은 결코
우리의 낡은 교과서 안으로 빠져들진 않느니, 약속들로 결박돼
안데스 고지 목초지의 가난한 자들에게 서약했지,
산티아고의 군중, 금속 노동자의 굳은 악수,
진지한 시골 여교사, 그들은 당신의 얼굴을 찾았소:
그들은 자기들의 문서를 들고 왔고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 서명했소.
- E. P. 톰슨, ?살바도르 아옌데 찬가?(1973년 9월 11일 직후 지은 시) 중에서
그림 ) 기관총을 든 아옌데의 최후의 모습
바로 이 때가 인민연합정부의 마지막 기회였다. 정부는 군부 내 숙청을 단행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돌아갔다. 장성회의에서 프라츠 장군(그는 나중에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암살 당한다)이 불신임되고, 피노체트가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선임되었다. 아옌데는 마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넋 나간 사람처럼 이를 그대로 승인해주었다.
새로운 군 지도부는 공장방위대의 불법무장을 해제한다면서 공장을 침탈하고 투사들을 투옥하기 시작했다. CIA와 해군 제독들 사이의 쿠데타 음모를 고발한 해군 사병들이 군 당국에 불법 감금돼 고문을 당했다. 한때 ‘자유 속의 혁명’을 주장하던 ‘민족부르주아지의 당’(기독교민주당)은 이제 쿠데타 지지로 당론을 모았다. 쿠데타는 이미 이 때 거의 성공한 것이었다.
정부는 9월에 정부의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 국민투표를 며칠 앞둔 9월 11일 새벽, 피노체트 장군이 지휘하는 육?해?공군이 대통령궁을 공격했다. 피노체트는 전화를 걸어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했지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아옌데는 최후의 항전을 결의하는 라디오 연설을 마친 뒤, MIR에서 파견한 경호원들과 함께 직접 기관총(카스트로가 선물한)을 들었다. ‘대통령 동지’는 그렇게 산화해갔다, 쿠데타 며칠 동안 학살당하거나 ‘실종’된 10만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아옌데 ― 비록 그의 오류와 실책은 가볍지 않았지만, 그는 적어도 민중에게 부끄러운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림 ) 칠레의 민중은 굴복하지 않았다
칠레의 경험은 세계 진보세력에게 지나간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어려운,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고민거리들을 숙제로 던져준다.
우선 기존 국가기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칠레 좌파는 가장 중요한 국가기구인 군대에 대해 아무런 정책도 갖고 있지 못했다. 공산당과 아옌데는 평화적 이행을 주장하면서도 군부 내 입헌파를 제대로 엄호조차 하지 못했다. 군부 전체를 마치 하나의 정치세력이라도 되는 양 활용하거나 타협하려고만 했다. 이는 군부의 위상만 비정상적으로 높여줄 따름이었다. 반면 사회당이나 MIR는 폭력적 충돌의 가능성을 주장하면서도, 하사관이나 사병들을 조직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못했다.
군대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인민연합 기본강령?은 분명 새로운 헌법의 제정과 사법부 개혁 등을 제시했지만, 개헌 시도는 없었다. 인민연합 측이 의회와 사법부, 심계원의 민주적 개혁을 들고 나왔다면, 이들에게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상황을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헌법을 개정하여 개혁의 기선을 잡은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정권은 아마도 이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노동자계급과 중간계층 사이의 동맹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다. 인민연합정부가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기에 경제가 순조롭던 시기에 이뤄진 개혁 조치들이 무차별 대중에 대한 시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문제였다. 일련의 개혁은 이로부터 이득을 보는 계층?집단을 인민연합정부의 지지자로 조직하는 과정과 함께 해야 했다. 경제적 혜택만 제공된다면 쉽게 정부를 지지하리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인민연합 내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었던 민중권력(혹은 대중권력)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회당의 입장이 옳았다. 대중의 참여와 자치,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민중권력기관의 창조는 대안사회 건설의 핵심 과제다. 칠레의 사례를 보면, 민중자치기관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중간계층과의 동맹도 아래로부터 확대되고 여성들도 급진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산당과 아옌데는 민중권력을 무시함으로써 정부의 가장 확실한 기반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칠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정치학자 랄프 밀리반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부가 가진 것은 단지 하나의 중요한 원천, 즉 정부에 대한 민중의 지지뿐이다. 그러나 선거에서 표방된 이러한 지지는 극히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도 유지되어야 하며 ‘동원’되어야 한다. 정부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당원들에 대해서 그렇게 할 것이며 혹은 하도록 노력할 것임을 의심할 바 없다. 또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계급조직도 일조를 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런 조직에 의해 제공되는 것보다 훨씬 큰 어떤 것, 즉 국가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지면서 전 시민사회를 관통하는 인민참여기관의 유연하고도 복잡한 조직망이다. 이것은 인민참여기관이 정부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준혁명적이고 해야 할 일이 극도로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공격적?방어적이며 일반적으로 지원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이중권력’이라는 [레닌의-인용자]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 R. 밀리반드.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입문?, 정원호 옮김, 풀빛, 1989, 221쪽(번역을 일부 수정)
하지만 숙제는 숙제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차가운 대리석을 뚫고 그토록 간절하게 민중들의 이상과 열정이 분출했다는,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다. 30년 뒤인 2002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유럽사회포럼이 열려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서 유럽의 젊은이들은 마치 최근의 운동가인 양, 한 노래를 합창했다. 스페인어로 된 노래,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인민연합의 노래’였다. “아옌데, 아옌데, 민중의 대통령”을 연호하며 칠레의 민중들이 부르던 그 노래. ― 칠레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참고할만한 자료들:
G. 가르시아 마르케스, ?칠레의 모든 기록?, 조구호 옮김, 크레파스, 2000.
강문구 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사회변혁운동: 칠레혁명과 아옌데노선 연구?, 친구, 1990.
박우득, ?칠레 인민연합시기 산업코르돈의 조직과 활동?, 동아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4.
서병훈, ?다시 시작하는 혁명: 아옌데와 칠레식 사회주의?, 나남, 1991.
P. 오브라이언 편, ?칠레혁명과 인민연합?, 최선우 옮김, 사계절, 1987.
이성형, ?라틴아메리카 자본주의논쟁사?, 까치, 1990.중 제4장.
최향숙, ?칠레인민연합정부 시대의 농지개혁과 농촌사회변화에 대한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지역연구과 석사학위논문.
(영상자료) P. 구스만 감독, 다큐멘타리 <칠레의 전투> 1~4 (인권운동사랑방 배급)
인민전선운동, 그 절반의 성공- 프랑스 공산당?사회당과 인민전선 (0) | 2014.01.30 |
---|---|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 - 2차대전 후 이탈리아 공산당과 구조개혁논쟁 (0) | 2014.01.30 |
패배로 끝난 신자유주의와의 일회전 - 영국 노동당 신좌파운동 (0) | 2014.01.30 |
일본 사회당의 조용한 죽음 (0) | 2014.01.30 |
끝나지 않은 여행 - 제3세대 좌파정당들 (0) | 2014.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