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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닮은 사람들, 네팔리 | |||||||||||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나는 하루…그들은‘자연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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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말로 사람을 ‘만체’라고 한다. 그런데 네팔 사람을 단순히 ‘네팔 만체’라고 안하고 ‘네팔리’라고 부른다. 어원을 따지자면 ‘네(Ne)'는 힌두의 성자(聖子)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팔’은 팔보아(Palboa)'의 약자로 ‘돌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네팔이라는 국호는 힌두의 성자가 돌보는 땅이라는 뜻이고, ‘네팔리’ 역시 성자에 의해 보호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을 모시는데 성심을 다하는 사람들, 네팔은 아직도 문명의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자본의 힘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신성함이 살아있는 땅이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네팔 사람들을 만났다. 먼저 네팔 예술인들의 진정성에 놀랐다. 그들은 문학이나 그림, 그리고 음악 앞에 매우 경건해 보였다. 돈을 받고 원고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일부 상업적 작가는 예외겠지만 말이다. 우리를 가장 따뜻하게 맞아주고, 안내해준 이는 화가 비케이 부부였다. 비케이는 룸비니존의 스왈라 마을 사람으로 그림 하나로 카트만두에 진출해 중견 화가로 성장한 사람이다. 역시 화가인 그의 아내와 같은 작업실을 쓰면서 시내 중심가에 화랑까지 갖고 있다. 그는 비록 골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인터넷을 이용해 세계 곳곳의 지인들과 화상 전화로 대화로 나눌 정도로 글로벌한 활동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3년 전에는 한국을 방문해 전시회를 개최한 적도 있어 한국인들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자신의 도록(圖錄)은 물론 홈페이지를 이용해 작품을 홍보하는 솜씨는 프로다웠다. 지난번 룸비니 방문 때 그의 고향집을 방문해 가세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몸이 아프지만 병원에도 못가고 누워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있었던 그의 할아버지는 그 사이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와는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화가 람은 과묵한 사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20대 후반의 나이답지 않게 깊은 예술철학을 발견했다. 그런 만큼 그림에 깊이가 있었다. 네팔 화가들이 보편적으로 히말라야 풍경을 주로 그린데 반해, 람은 네팔 사람들의 곤궁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가끔 여기 저기 사람들을 찾아 스케치를 떠난다.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을 함께 하면서 친절하게 우리를 도와주기도 했었다. 찬드라라는 이름을 가진 서른일곱 살의 네팔 처녀 역시 인도의 유명한 화가다. 인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그림이 소장될 정도로 명성이 있는 그녀는 카트만두 인근 벅터푸르에 아담한 작업실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한국 남성과 결혼하고 싶다는 찬드라의 그림은 모든 물상에 다양한 신들이 숨어있다. 신들의 나라 네팔의 정체성을 그림에 담아내려는 의도가 그대로 엿보였다. 그녀가 보여준 그림들과 직접 끓여 내온 찌아의 향은 지금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네팔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럭스미 쁘라사다 데보코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1909년 카트만두의 딜리바자르에서 태어난 그는 네팔 현대문학의 아버지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작품 <무나 마단(Muna Madan)>은 처음에 소설로 쓰였다가 다시 시로 작업을 됐음에도 온 국민이 애송한다. <무나마단>을 모르면 네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집에 방문했을 때 네팔의 권위적인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그의 아들 뻐드마 데보코타가 우리를 맞았다. 만해문학제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그가 보여준 대문호의 집은 정말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고 같은 방안에 아무렇게나 진열된 책들과 인도의 무저항주의 간디와 함께 활동했던 사진들이 퇴색된 채 우리를 맞고 있었다. 그들의 힘만으로 위대한 문학가의 유산을 지키고 보존하기 버거워 보였다. 우리를 초대해 저녁을 융숭히 대접해준 크리슈나 프라사이는 시인이다. 그의 집은 온통 문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의 이름 크리슈나에서 보듯, 그는 힌두교도로 꽤나 높은 종족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선샤워>라는 자신의 시집을 사인해 선물한다. 시집의 날개를 보니, 우리 고은 시인의 추천의 글이 보인다. 한국에 왔을 때 우리말로 번역된 원고를 보고 써준 모양이다. 글은 이렇다. ‘오자마자 10년 이전의 선험적인 우정이 함께 생겨났다. 대뜸 그는 내 시에 자신의 시를 겹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시는 제목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은 그의 시 중 한편이다. “부유한 나라들은 / 킬로그램 단위로 / 가난한 땅의 사람들을 사들인다. / 돈의 힘, / 인간마저도 몇 개로 쪼갠다.” 자기나라 사람들이 세계 곳곳의 인력으로 팔려나가는 현실이 안타까웠던 시인의 마음이 짙게 묻어난다. 우리의 70년대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 그리고 중동의 건설 노동자 말이다. 이쯤 되자, 자연스럽게 한국에 왔다간 노동자들의 삶과 그 가족들의 일상이 궁금했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머니라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한국에서 5년 간 노동자로 일하고 돌아간 사람이다. 귀국해 카트만두에 3층짜리 집을 짓고 형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돈을 벌어 예쁘고 착한 아내와 결혼도 했고, 둘을 빼닮은 딸도 얻었다. 최근에 한국에 가려는 예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잘 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기름에 부쳐낸 ‘뗄로띠’라는 빵과 감자요리인 ‘알루썹지’, 그리고 쌀을 쪄 말린 ‘찌우라’를 점심으로 내놓는다. 정성이 담긴 음식이라 그런지 맛이 있었다. 히말라야로 가는 중간 기착지 포카라에서 피자집을 운영하는 비제이 역시 한국에서 노동자로 있다 간 사람이다. 그는 돌아가 한국의 경영기법 중에 하나인 오토바이를 이용해 피자를 배달을 함으로써 대박이 났다고 자랑한다. 분점까지 냈다니 그의 사업 수완은 대단해 보인다. ‘한국에서 일할 때 사장님이 너무 잘해줬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어눌한 한국말이 더 솔직하고 정감 있게 다가왔다. 히말라야의 사람들은 같은 네팔인들 중에서도 자연에 순응하면서, 또 자연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특히 안나프르나 지역은 무스탕 왕국의 영역으로 독특한 문화를 자랑하고 있었다. 좀솜에서 만난 자매는 아이를 데리고 공사판에 돌을 나르고 있었다. 힘들지 않느냐는 말에 일 안하고 있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 일을 안 하면 안 먹어야 맞다. 그런데 일 안하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이런 세상을 안다면 매우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이다. 해발 3800미터의 묵디나트를 가는데 한 무리의 여행객을 만났다. 안나푸르나 반대쪽의 만항에서 왔다고 했다. 무스탕 구경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는데 16일째 여행이란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팔팔했다. 서두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 역시 다른 네팔인들처럼 차도 없이 오르지 걸어서 여행을 한다. 힘들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그리고 어두워지면 잔다. 그들의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러니 일정 때문에 서두르는 우리와 달리 부럽도록 여유 있고 힘차 보였다. 여행은 저래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보고 느끼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 말이다. 흔들림 없이 가는 그들이 히말라야를 가로지르는 야크처럼 힘차보였다. 좀솜 호텔에서다.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반가워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어디냐고 물어서 전주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 동생이 전주 일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한다고 더 반긴다. 더비라는 여자가 사는 공항 앞 안나푸르나식당을 찾았다. 전주의 동생 샨띠에게 전해줄 게 있으면 기꺼이 심부름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불빛 아래서 어머니가 짐을 싸고 있었다. 말린 살구와 호도, 치즈 그리고 콩 한주먹…… 이국에 있는 딸에게 보내는 선물의 전부다. ‘저건 한국에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옆구리를 나는 살짝 찔렀다. 어디 없다고 보내고, 있다고 안 보낼 물건이던가? 저게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우리의 고향 어머니도 그렇지 않던가? 돌아오는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짐이 많아서 늦게 내렸는데 군인 같은 단체가 우르르 쏟아져 도열을 한다. 그들이 입은 군청색 남방에 새겨진 태극기와 네팔국기가 돋보였다.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긴장된 상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어려운 한국어 시험을 통과하고, 큰돈을 들여 온 저들이 머니라이나 비제이처럼 코리안 드림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짐을 찾는데 입국 절차가 안 끝난 탓인지 낡은 가방들이 계속 벨트를 맴돌았다. 안녕과 풍요를 상징하는 노란색 목도리 모양의 ‘따까’를 두른 네팔 노동자들의 가방들이다. 귀국 10여일이 지난 후 히말라야의 아가씨 샨띠를 만났다. 그녀는 의외로 밝고, 영특해 보였다.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를 하면서 월급은 모두 저축하고, 통역 등 아르바이트로 생활한다고 했다. 우리의 24살 청춘과 비교가 되는 삶이다. 저들이 처한 운명이 저렇게 만든 것이리라. 그녀에게 어머니가 주신 선물을 내밀었다. 그 나라가 이룬 역사적 유물이나 문화, 또는 처한 자연 풍경만이 여행의 주제는 아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여행이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라면 마땅히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번 네팔 여행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 역시, 네팔리들의 진지하고 다양한 삶이었다. 신이란 사람에 의해 인식된 절대적 존재가 아니던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내는 네팔리들은 그런 의미에서 신과 닮았다. 비록 돈이 없어서 세계 각국을 노동자로 떠돌지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저들의 신성은 변하지 않을 듯했다. 우뚝 솟아 영혼처럼 빛나는 하얀 히말라야처럼 영원히……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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