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판용 시인의 지구촌여행기>
네팔기행 (2) 붓다가 태어난 땅 롬비니 / 문명의 혜택 전혀 없는 자급자족하는 나라
우기엔 보통 40도 웃돌아 야외 활동 꿈도 못꿔… 비로 인해 늪지대 일쑤
큰 도로 제외하고 차도 무용지물…야생동물 많아 안전 확보도 어려워
길을 나선 나그네의 마음은 실로 많은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날씨이다. 날씨는 여행의 환경을 넘어 여행자의 마음까지 지배한다. 날씨가 반드시 맑아야만 좋다거나 흐려서 나쁜 것은 아니다. 여행자의 마음에 내제된 풍경을 충족할 수만 있다면 오스카 와일드가 런던의 안개를 감미롭게 노래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풍요롭게 바꿀 수 있다. 교통수단도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름다운 강변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밋밋한 여행을 향기롭게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랑 함께 하느냐 하는 것이다. 신혼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환상이다. ‘신혼여행’에서 ‘여행’이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과 떠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과의 여행만큼 설레게 하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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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들이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로 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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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 동반자는 내 오랜 친구인 성백선이었다. 학교도서관의 책을 모조리 읽고 졸업하자고 맹세했던 중학교 2학년 때 단짝 친구와 동행이었다. 우리는 젊음의 시절을 엄청 에돌아서 실로 37년만에 같은 상수원의 물을 받아먹는 동향 사람으로 다시 만났고, 우연이 도반이 된 것이다. 여행이 확정되자 그 친구는 네팔에서 인도로 건너가자고 했다. 이유를 묻자 룸비니를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친구에게 룸비니 방문은 성지 순례였다. 그때까지 나도 룸비니가 인도에 있는 줄 알았다.
여정을 확인하던 중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가 인도가 아닌 서네팔에 있음을 알았다. 카트만두에서 룸비니까지 버스로 가려면 꼬박 하루를 가야한다. 그런데 비행기로는 날아가는 시간만 35분정도 소요된다. 네팔은 도로 사정이 워낙 안 좋아서 어디나 시속 30㎞ 넘게 달리기가 어렵다. 그러니 여행에서 돈보다는 인내심이 더 필요한 나라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하늘에서 본 인도와의 접경 서네팔은 드넓게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룸비니 구역의 바이라하와 공항에 내리자 더운 기운이 확 끼친다. 우기에는 보통 40도를 웃돌기에 야외 활동이 어렵다. 또 비로 인해 길이 자주 끊긴다. 그러면 이 지역은 거대한 늪지대가 된다. 큰 도로를 제외하고는 차도 무용지물이다. 모두 걸어서 다녀야 한다.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평야지인 서남 네팔지역도 트레킹 지역이다. 길만 문제가 아니라 야생동물들이 많아서 안전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늪지대에서 뱀은 물론 악어를 만나거나, 원숭이 때를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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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와 접경도시인 바이라하라 거리에선 말 수레를 타고 걷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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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운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저 지독한 가난과 우악한 환경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
석가모니가 이곳에서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더운 곳이라서 그런지 이불도 없고
옷가지도 벽에 걸린 것이 전부처럼 보인다
각국의 문화를 반영한 아름다운 사찰들이
나름대로 위용을 자랑할 뿐 모든게 자연 그대로
국경도시 바이라하라는 네팔의 룸비니와 인도의 바라나시를 잇는 순례 루트로 맨발의 순례자들이 비자 없이 오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룸비니 성지까지는 22㎞로 택시로 한 시간 거리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60년대 농촌 풍경처럼 정겨운 길을 달린다. 어떤 사람이 회초리로 소를 때리기에 물었더니, 암소만 신(神)으로 받들 뿐 수놈은 일소로 쓰기에 마구 대한다고 한다. 단지 소고기를 먹지 않기에 잡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서네팔에서 키우는 까만 물소는 식용으로도 쓰인다고 했다.
룸비니 국제사원 구역에 이르자 석양이다. 우리는 한국사찰인 대성석가사에 짐을 풀고 저녁 공양을 했다. 이곳 사원구역은 불교를 믿는 세계 모든 나라의 사찰이 모여 있는 각국 사찰의 각축장이다. 한국의 대성석가사는 황룡사를 본떴는데 5층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골조만 웅장할 뿐 외장을 하지 않아 몰골이 사납다. 1995년 네팔 정부로부터 99년 동안 연 840달러 조건으로 임차, 이듬해에 착공하여 2006년 골조공사를 완공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공사는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어떻거나 대성석가사는 가난한 여행객들의 오아시스다. 네팔의 주식인 달밧만 먹어서 입맛이 없는데, 이곳에서 된장국과 김치 등을 곁들인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밥값도 받지 않는다. 그전에는 숙박도 무료였지만 지금은 4인 기준으로 하루에 100 루피, 우리 돈으로 1400원 정도를 내야 열쇠를 내준다. 샤워 시설도 있고, 빨래도 할 수 있어 장기간 투숙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숙박이 가능한 것은 템플스테이의 노하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은 물론 서양 사람들도 오래 묵으며 여행을 하거나 쉬었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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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이 2,000년이 넘었다는 무우수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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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잠자는 만물을 깨우는 도량석이 시작되자, 친구는 새벽예불을 하겠노라고 법당으로 향했다. 아마 늘 한다는 108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간단히 메일을 확인한 후 아침 공양을 하고 국제사원구역을 돌았다. 중국의 중화사를 비롯해 일본의 산묘법사, 그리고 독일 사원과 프랑스, 네팔, 미얀마, 태국 등의 사원을 돌았다. 같은 불교지만 각국의 문화를 반영한 아름다운 사찰들이 나름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룸비니는 붓다가 태어난 곳으로 득도한 붓다가야와 최초로 설법을 한 샤르나트, 그리고 입멸한 쿠시나라와 함께 불교 4대 성지로 꼽힌다. 모두 인도 땅에 있지만 룸비니만 네팔에 있다. 그런데 최근 인도에서 새로운 룸비니를 조성 중이라고 한다. 역사나 유적지를 왜곡하려는 일은 비단 일본이나 중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마야부인은 카필라성에서 친정이 있는 콜리아성으로 출산하러 가는 길에 룸비니에 있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태기가 있어 출산했다.
기원전 249년 인도 마우리아제국 아쇼카왕은 제위 20년을 기념해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독실한 신도였던 그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킨 대표적인 제왕이기도 하다. 성원구역의 핵심인 마야사원 옆에 커다란 돌기둥이 서있다. 바로 아쇼카왕이 세운 것이다. 이 돌기둥에는 다섯줄의 기록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고 한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쇼카왕은 왕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여기가 부처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했다. 위대한 분의 탄생지임을 기려 이 지역은 조세를 감면하고 생산물의 8분의 1만 징수케 한다.”
그러나 이 돌기둥은 14세기 이슬람의 침공으로 매장되고 말았다. 따라서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도 미지에 놓여 있었다. 1896년 <대당서역기>의 기록을 토대로 조사하던 중 독일의 고고학자 포이러(Feuhrer)에 의해 이 돌기둥이 발굴되고, 이곳 룸비니도 세상에 빛을 본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대부분인 네팔인들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1956년 마헨드라왕은 10만 루피를 복원기금으로 조성해 재건에 착수했다. 또 유엔에 룸비니개발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건의해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성원 구역은 하얀색의 마야사원을 중심으로 마야부인이 붓다를 낳기 전에 목욕했고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목욕을 시켰다는 성스러운 연못 푸스카르니(Puskarni)가 바로 앞에 있다. 또 주변에는 옛 성터였던 벽돌이 산재해 있고, 뒤에는 수령이 2000년이 넘는다는 무수 나무가 우람하게 서있다. 마야사원을 둘러본 수행자들은 나무 아래에서 소지를 올리고 향을 피워 기원을 한다. 세계 불교의 최고 성지인 만큼 참배객들이 많다. 그들은 신발도 신지 않고 멀리서 성스러운 땅 룸비니까지 온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오체투지로 자신을 낮추고 낮춰 이 나무 아래 이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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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네팔스왈라마을의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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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 우리를 안내했던 네팔의 화가 비케이의 고향이 바로 룸비니 근처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비케이는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적이 있는 역량 있는 화가인데 룸비니는 물론 자기 고향 수왈라마을까지 우리를 안내해줬다. 그의 마을로 가는 큰길에는 망고나무 가로수가 우거져 있고, 그 밑으로 흰소 두 마리가 끄는 달구지와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염소들이 쉬지 않고 지나간다.
가다가 길이 끊겨서 한참을 돌아 그의 마을에 도착했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꽤 반듯했다. 카트만두에서 그림을 팔아 부모님께 지어 드린 집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보자 눈물부터 보였고, 가축우리처럼 생긴 곳에서 병약한 그의 할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혼자 몸을 가누기 어려운데 병원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을에 온 최초의 외국인인 우리에게 점심을 차려온다. 점심이래야 접시에 밥과 나물, 그리고 녹두죽이 함께 나오는 달밧이 전부이다. 그마나 이 집은 대처에 나간 아들 덕에 수저가 있어서 다행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손으로 먹어야 한다.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둘러 봤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바로 안방 앞에 있다. 가축 분뇨 냄새가 지독하다. 우리 앞에 길 건너 집으로 뱀이 나간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뱀이 수시로 다니는 모양이다.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뱀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냥 뱀이 들어오는 위치만 확인할 뿐이다. 뱀도 자연의 일부라면 저들에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충격적인 것은 그런 엽기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집안에 가재도구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든 아궁이와 그릇을 올려놓을 구멍만이 있는 부엌에는 논에서 흙을 가져다 만든 그릇들이 보인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쌀을 보관 하는 것인데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집 앞에는 진흙으로 만든 비둘기 집들이 있다. 그렇게 집을 만들어 놓으면 비둘기가 들어와 사는데 그걸 잡아서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없다. 더운 곳이라서 그런지 이불도 없고, 옷가지도 벽에 걸린 것이 전부처럼 보인다.
‘아직도 민무늬토기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친구와 나는 배낭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모두 꺼냈다. 히말라야 트레킹할 때 쓸 비상식량과 의약품들이었다. 나는 치약까지 내주고 이후 얻어서 썼다. 면도기를 주고 일주일간 텁수룩한 수염으로 지냈다. 안주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이곳에서 석가모니는 탄생했을까? 문득 ‘슬픔만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했던 일본의 여행 작가 후지와라 신야의 말이 생각났다. 21세기에도 문명의 혜택이 전혀 없이 오직 자급자족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누워서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저 지독한 가난과 우악한 환경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 그들 곁에 신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