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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꾸다 -김판용 시인

정치, 정책/복지정책, 문화 기획

by 소나무맨 2013. 10. 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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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꾸다
[김판용 시인의 여행이야기]화순 운주사
2012년 05월 10일 (목) 김판용 시인 APSUN@sjbnews.com
   
 
  ▲ 조광조와 양팽손을 모신 죽수서원  
 

   
  ▲ 조광조의 유배지에 세워진 비석  
 
시대마다 세상 바꾸려 하고
바뀜을 아쉬워하기도
조선 중기 조광조
세상 바꾸려던 짧은 생 마감

△ 개혁주의자 조광조의 유배지, 능주

세상은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바뀌는 것일까? 시대마다 지사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고, 또 한쪽에서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자신의 삶을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를 바란다. 또 자기가 원할 때쯤 세상이 그대로 서있었으면 마음도 간절했다. 그렇게 볼 때 어느 시대나 태평성대이고, 또 어느 시대나 항시 난세(亂世)일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각자의 생각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무등산 자락의 너릿재 터널을 지나 화순으로 접어들면서 느낀 생각이다.

조광조 유허지가 있는 능주로 간다. 능주는 한때 목사(牧使)가 다스렸던 지체 높은 고을이었다. 인조10년(1632년)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고향이라 하여 능주목으로 승격돼 특별히 대우한 것이다. 조선 중기 세상을 바꾸려 했던 개혁주의자 조광조는 유배를 왔다가 사약을 받고, 서른일곱의 짧고 굵었던 생을 이곳 능주에서 마감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연산군의 폐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력들이 반정을 일으켜 중종을 옹립하였다. 그리고 잘못된 정책을 바꾸려는 유신 정치를 추진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조광조는 유년시절 함경도로 유재와 있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관직에 오르자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해 보려 하였다. 그때 걸림돌이 된 무리가 훈구파였다. 그래서 훈구파들을 제거할 중대한 작업에 착수한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공신 중 작호가 부여된 108명 중 거짓으로 들어난 76명의 공훈을 삭제한 것이다.

   
  ▲ 조광조 유허지 전경  
 
반대파들의 저항은 거셌다. 결국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는다. 기묘사화다. 그때 나온 일화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인데, 반대세력들은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글을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한 다음 임금에게 고하였다. 주(走)와 초(肖)를 합하면 ‘조(趙)’ 되니, 결국 조광조가 역모를 꾸밀 거라는 계략이었다.

이렇게 돼서 조광조가 능주에 온 것이다. 자신이 원하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지나치게 과격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조광조는 귀양 한 달만에 그를 추종했던 70명의 선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만다. 역신(逆臣)의 사체는 거두는 것도 큰 죄였으나, 역시 기묘사화 때 삭직 당했던 능주의 선비 양팽손에 의해서 시체를 수습해 쌍봉사 부근에 매장하였다.

나중에 능주 사람들은 두 선비의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서원을 세웠다. 조광조 유허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죽수서원은 조광조와 양팽손을 모시고 있다. 죽수는 이름은 옛날 능주의 이름이라고 한다. 자기가 옳고, 힘이 있다고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끌고 가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해서는 나중에 큰 화를 입는다. 세상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던 운주사 와불  
 
△ 천불천탑으로의 변혁, 운주사

그렇다면 함께 꿈꾸는 세상은 어떨까? 능주에서 도암으로 길을 잡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신비의 운주사가 있다. 운주사하면 천불천탑을 연상한다. 실제로 1481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과 석탑이 각 일천 기씩 있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석탑과 석불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록에서 이야기하듯 꼭 천개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기록은 30기의 석탑과 213기의 석불이 남아있다고 돼 있으나 현재에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필자가 운주사를 처음 찾았던 1980년대는 탑과 불상이 있던 자리 주변은 온통 논과 밭이었다. 특히 입구에 목화밭이 즐비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일주문이 반듯하고, 각종 당우들이 서있다. 입장료도 만만치 않다. 천민들이 자신들의 낙원을 꿈꾸며 조성했다는 믿음으로 순례자들이 찾았던 그 정신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석탑과 불상에 대한 신비감 때문에 운주사를 찾는다.

   
  ▲ 일어서면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던 운주사 와불 바로 밑에 있는 석불군  
 
   
  ▲ 마치 항아리를 쌓아놓은 것 같은 복발다층탑  
 
지금까지 운주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가 이야기이다. 도선은 우리나라 지형을 떠가는 배(行舟)로 보고 태백산을 뱃머리, 한라산을 배꼬리, 부안 변산을 키, 영남 지리산을 삿대, 능주의 운주를 뱃구레(船腹)로 파악했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그 뱃구레를 눌러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곳에 천 개의 불상과 탑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운주사(運舟寺)가 된다.

그런가 하면 칠성석이 북두칠성과 닮았다는데서 착안하여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탑과 불상을 제작했다는 설이 제기 되기도 했다. 이른바 하늘의 천문자리를 따라 운주사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운주사(雲住寺)가 된다. 그러나 석탑과 석불이 처음 조성된 자리에서 많이 옮겨져 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운주사만의 특이한 탑과 불상 양식 때문에 고려말에 들어온 몽고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 추정일 뿐 근거는 없다. 그만큼 운주사의 창건 세력이나 석탑과 석불의 배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도대체 이 거대한 불사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뤘는지 알길 이 없는 것이다.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면 거대한 9층석탑이 맞는다. 그리고 양쪽 언덕 밑으로 석불군이 즐비하다. 눈을 들어 보면 오른쪽 능선에도 탑이 솟아 있다. 7층석탑 2기를 지나면 양면의 부처님이 등을 대고 계신 석조불감이다. 감실 안에 부처님은 우리가 보아온 정갈한 분이 아니시다. 투박하고, 또 감실이 좁아서 답답해 보인다.

석조불감을 지나면 호떡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원형다층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눈을 들어 언덕을 보면 아무렇게나 돌을 쌓아 놓은 일명 동냥치탑이라 부르는 거지탑도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제까지 봐왔던 불상이나 석탑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불교미술이나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말을 잃는다. 별로 할 말이 없는 곳이다. 그들의 지식으로 풀 수 없는 세계에 운주사의 석탑과 석등이 서 있다.

경내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복발다층탑이 보인다. 마치 항아리를 얹어 놓은 것 같은 특이한 형태의 탑이다. 오른 쪽으로 돌아 산에 오르면 정상에 공사바위가 있다. 이 공사바위는 실제 이곳의 불사를 지휘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운주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이다. 또 가운데가 오목하게 파여서 있어서 편하게 앉을 수 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이곳에 산불이 나서 주변의 수목들이 모두 타버려서 황량하게 느껴진다. 공사바위에서 왼쪽으로 돌면 명당탑이다. 이 명당탑은 양쪽 골짜기가 모아지는 자리로 여자의 자궁에 해당한다. 이곳에 묘를 쓰면 왕이 나온다고 하여 역신의 자리로 여겼다. 그래서 대개 그런 자리에 절을 세운다. 이곳 운주사에는 탑을 세웠다. 그게 바로 명당탑이다. 명당탑에서 조금 내려갔다가 다시 산으로 오르면 5층석탑과 7층석탑이 나오는데 그 밑에 한 무더기의 불상이 놓여 있다. 가족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다. 부처로서의 위엄은 없지만 정겹다. 그래서 민중을 상징하는 부처로 여겨진 것이리라. 운주사의 백미는 와불(臥佛)이다. 높이 12m, 폭 10m에 이르는 돌부처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그것도 머리를 더 낮게 하고 말이다.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은 운주사의 와불 조성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골짜기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 온다는 것이었다. 도읍지가 바뀌는 세상, 그들이 나라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노비들은 새벽에 깨어 일어나 보성만의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 운주사 감실 안의 부처님  
 
그러나 그들의 뜻은 이루지 했다. 일에 지친 어린 노비가 그만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일을 멈췄는데, 뒤늦게야 닭이 울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초과한 것이다. 마지막 와불만 세우면 그들의 세상이 되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이야기는 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민중의식과 결합돼 무수한 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와불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거대한 일곱 개의 원형 돌이 누워있다. 자세히 보면 북두칠성 모양이다. 그래서 칠성석이라고 부른다. 이 돌들 때문에 운주사를 천문학적 조형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혹자들은 칠성당의 모태를 여기에서 찾으려고도 했다. 칠성석 주변은 돌을 떼어내 불상과 탑을 조성했던 채석장이 보인다.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요헨 힐트만은 운주사에 매료돼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미륵>이라는 책을 썼다. 운주사를 연구한 최초의 책이다. 그런가하면 20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운주사를 찾았다가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고 작품을 쓰기도 했다. 운주사가 인류 보편적 정서를 자극해 영감을 끌어내는 공간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해방 후에는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그리고 광주 5·18 때는 화순군민들이 너릿재를 넘어 광주로 갔다.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힘을 합하고 싶어서이다. 그것은 어쩌면 조광조가 꿈꾸었고, 운주사 불사를 한 이들의 염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 운주사에 와서 변혁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더 이룰 것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꿈이 허황된 것이라고 파악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팍팍한 운주사를 돌았다. 그리고 시 한편 조용히 읊조리며 운주사를 빠져 나왔다. 많이 알려진 <풍경을 달다>라는 정호승의 시이다. “운주사 와불님 뵙고 / 돌아오는 길에 /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 먼데 바람 불어와 / 풍경소리 들리거든 / 보고 싶은 내 마음이 / 찾아간 줄 알아라.”

김판용(시인·황토현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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