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번영의 길로 어떻게 갈 것인가 : 현단계 과제-종석(전통일부 장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2013. 10. 7. 15:23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한반도 평화번영의 길로 어떻게 갈 것인가 : 현단계 과제

이종석(전통일부 장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  webmaster@selfg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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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06  13: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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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한반도평화포럼 공동이사장)
  
   ▲ 발제 : 이종석(전통일부장관 /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 토론 : 백종천(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
  
  ▲ 토론 : 정세현(전 통일부장관/원광대 총장)
  
  ▲ 토론 : 이재정(전 성공회대 총장/ 전 통일부 장관)

한반도 평화번영의 길로 어떻게 갈 것인가 : 현단계 과제

1. 퇴행하는 한반도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실현,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위한 노력에 합의하였다.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으로 명명된 이 합의는 당시의 한반도 정세와 동떨어진 채 양 정상이 단순히 주관적 의지를 밝힌 것이 아니라 참여정부가 추구해온 평화번영정책의 구체적인 결실이자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진전에 부응하여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따라서 6년 전 한반도 정세는 남북이 이미 상당 기간 군사적 충돌을 멈추고 갈등을 완화시킨 바탕 위에서 화해와 공동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북핵문제는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에 기초해서 진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2008년 2월 25일 이후 한반도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달아왔다. 남북관계는 매년 ‘사상 최악’의 상황을 경신하며 퇴행을 거듭해왔으며, 북핵문제는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추가적인 핵실험과 핵보유국 선언 속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가닥조차 잡기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 한반도 평화와 민족 재결합을 향한 시계가 거꾸로 돈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퇴행 상황은 박근혜정부에 들어와서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며 부분적으로는 심화되었다. 북핵문제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응징으로 또 하나의 유엔제재 (2094호 )가 가해지고 있으나, 북한은 이 제재를 비난하며 오히려 핵 능력을 강화시켜오고 있다. 그나마 중국의 외교적 노력으로 북한이 6 자회담 복귀의사를 나타내고 있으나 한국과 미국( 이하 한미)은 핵 포기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6자 회담은 2008년 12월 이후 5년째 중단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는 유엔의 대북제제가 무력화된 상황을 감안하며 지난 5년 간 북핵 개발추진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국제적 기제도 작동 않았다는 뜻이다.

남북관계 역시 우려할만한 퇴행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2013년 봄에는 북핵 위기가 남북 간 대결을 심화시켜 ‘전쟁’을 운운할 정도로 한반도가 불안해졌으며 이는 다시 애꿎은 개성공단의 폐쇄위기로 이어졌다. 비록 5월 이후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개성공단도 정상화과정으로 접어들고 있으나 지난 9월 21일 북한의 일방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 발표에서 보듯이 적대와 불신이 여전히 남북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한마디로 2007년 10월 정세와는 대조적으로 반평화의 정세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2013년 가을의 한반도다. 그러나 이를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위험하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평화 번영을 향한 궤도로 복귀시켜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디서부터 그 길을 찾을 것인가? 이 글에서는 기존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의 대북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분석하고, 정책 대상인 북한의 최근 변화의 양상과 함의를 찾은 뒤, 그 바탕 위에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현 단계에서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서방의 대북정책, 실효성 있나?

현재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 인식 위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추진하는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반도 평화번영을 추동할 수 있다. 이러한 적실성이 있는 대북정책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한미를 중심으로 한 서방의 대북정책이 실효성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실효성이 있다면 발전적으로 지속하면 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 원인을 밝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순리다.

서방의 대북정책이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더 따져보지 않아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었다. 한미의 대북정책 목표라 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은 지난 5년 간 극도로 위협받아왔고 유엔의 고강도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공동번영 대신에 갈등과 대결로 점철되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가 뜻을 한데 모아 추진하고 있는 유엔의 대북제재 정책이 역설적으로 서방 대북정책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유엔안보리 대북제제 결의 2094호의 이행에 맞추어졌다. 이 제재는 중국이 적극 호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것처럼 여겨졌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 북한은 유엔의 전방위 대북제재 속에서도 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평양을 방문한 관찰자들은 북한이 제재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보다는 북한 주민의 생활이 전보다 비교적 나아졌으며 북한이 경제발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해 중국의 시진핑 지도부가 과거와 달리 강력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대북제재 2094호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현실의 통계는 이를 무색케 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대북제재 동참에도 불구하고 올 상반기 북한과 중국 간의 교역량은 지난해에 이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였다. 중국 상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6월까지 북한과 중국 간 교역액이 31억 3천5백만 달러로 집계됐는데, 이는 지난 해 상반기보다 25% 증가한 새로운 기록이다. 유엔의 대북제제가 원칙적으로 일반적인 상거래나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북중 간 일반 상거래 물품을 군사전용(軍事轉用) 물자로 해석하지 않는 한 양국 간 교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북 핵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북한이 유엔의 제재에 고통을 받아 굴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북한은 3차례 핵실험을 했으며 그때마다 유엔은 북한에 대해 압박수위를 높였으나 북한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특히 2009년 5월에 발생한 2차 북 핵 실험 이후 유엔은 북한과의 대화를 끊고 대북제제 1874호를 발효했으나 북한의 굴복 대신에 오히려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로 강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유엔의 대북제재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북핵문제를 대하는 미국의 태도가 비합리적이며 대북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의 대북제재 동참이 서방의 기대와는 달리 명확히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의 북 핵 정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미국정부가 과거와 달리 자신의 대북 영향력이 매우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혹은 정치적 이유에서 허장성세를 하며 효과적인 대북정책 구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 요컨대 미국은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북한과 치열하게 다투는 대립적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북한의 운명을 손에 쥔 갑 (甲)과 같은 존재인양 행동한다. 이는 미국이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힌 북한에 대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복귀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데서 잘 드러난다.

미국이 북한의 6자회담 복귀에 대해 심사위원석에 앉아 ‘예스’ 와 ‘노’를 판정할 수 있는 경우는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지 않으면 미국이 북한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줄 능력이 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의미 있는 영향을 줄만한 경제적 제재조치 수단을 이미 소진했으며, 자신의 강력한 수단인 군사적 조치는 한반도 전쟁의 위험성 때문에 원천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미국이 믿는 남아있는 수단은 유엔의 대북제재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인데, 이것도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결국 미국은 오랜 세월동안 북한과의 적대 관계 속에서 다양한 압박과 제재 수단을 대부분 소진해왔기 때문에 북한에게 치명적인 불이익을 줄만한 영향력을 현재는 거의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 주도의 대북압박이 시행되면, 북한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개발 강화로 맞받아쳐왔다. 미국과 한국정부의 반대로 북한의 6 자회담 복귀가 미뤄지고 있는 지금도 북한은 얌전히 복귀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핵능력을 강화시키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6 자회담이 지체되는 만큼 누구의 제약이나 눈총도 받지 않고 2009년 5월 이후 지난 4년 간 핵 능력을 강화시켜 왔다. 결국 미국은 북한에 대해 몸에 닿지 않는 회초리를 휘두르며, 한편으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막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북 핵 능력을 강화시키는 역설을 스스로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의 대북제재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북한-중국 관계(이하 북중관계)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 영향력의 크기는 유엔 대북제재 결의 1874 호 발효 이후 양국 간의 교역 추세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대북제재 1874 호가 가동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중 교역은 3년 간 (2010년-2012년) 225% 증가하여 60억 달러를 넘어섰다.(6 억 8천만 달러 →60억 3천만 달러) 이는 대북제재 전인 2008년 북한의 대외교역 총액 (56 억 3천만 달러) 보다도 더 큰 규모다. 북중 간에는 전통적으로 밀무역이 성행해왔으며 과거에는 그 규모가 정상교역보다도 더 컸다. 현재의 밀무역 수준을 정상교역의 반 정도로 추정한다면 북중 교역 총액은 90억 달러 정도가 되며, 이 경우 북한의 실질적인 1인당 국민소득을 600달러 정도로 추정하면 북한 국민총소득(GNI)의 60% 이상이 북·중 교역에 의존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많은 이들이 시진핑 지도부에서는 중국의 대북정책이 크게 바뀌리라고 전망하지만 2009년 여름 이후 지속되어온 중국의 대북전략 기조는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중요한 국가이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은 개혁개방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유일체제보다 민주화된 북한 체제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

즉, 북한에 대한 중국의 근본적인 이익은 북한에서 공산당 독재가 유지되고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북한정권의 교체와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된 북한을 바라는 서방의 이해와 배치된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의 핵 실험에 대해 반대하고 이를 응징하려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동참하지만 그 제재가 북한체제를 붕괴시킬 만큼 강하게 추진되는 것에는 사실상 반대한다. 그리고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제재능력을 가진 나라는 중국뿐이기에 실질적인 대북제재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행보를 보여 왔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 특유의 이중전략을 볼 수 있다. 중국지도부가 안고 있는 고민은 중국이 이미 G2로 불릴 만큼 국제사회를 선도해야 할 지도적 국가가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많은 나라들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 중국이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제재결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왜 중국이 불량국가 북한을 편드느냐’며 강력히 항의한다. 중국은 이러한 국제적 추세에 부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고려하며 제재문제를 풀어가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북한 도발 규탄행위에 적극 참가하며 때때로 대북 제재 제스처를 보이는 한편 일상적인 교역을 중심으로 북중 경제협력을 진행해 나감으로써 제재로 인한 북한체제의 불안정을 방지하는 이중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북제재 2094호가 발효된 가운데서도 중국 측이 수억 달러를 투자해서 중국 단둥(丹東)시와 평안북도 용천군을 잇는 신압록강대교를 2014년 말 완공 목표로 한창 건설 중이라는 사실이 중국의 이러한 이중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진핑 시대에도 북한에 대한 이중전략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국은 북한에 대한 보다 증대된 영향력과 남북 간 외교경쟁을 활용하여 북한지도부에게 핵도발의 자제와 대외관계 개선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으며, 이것이 북한의 ‘대외협력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과 일정 정도 맞아 떨어지면서 현재 한반도 정세변화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3. 북한의 전략변화와 열리는 기회의 창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은 정부 출범 전야에 3 차 핵실험을 겪으면서 사실상 북핵문제에 종속되어 버렸다. 그 결과 북핵으로 인한 위기가 남북대결로 쉽게 비화되어 ‘북핵 위기 → 남북관계 악화 → 북핵 논의 지연’이라는 악순환 사이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래 박근혜정부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가동시켜 남북관계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발전시킬 구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이 3차 핵 실험을 감행하자 이 구상은 포기되고 ‘북한의 못된 버릇을 고쳐서 남북관계를 바로 잡겠다’는 취지 아래 대북정책에 능력과 대화상식에서 벗어난 훈계적(訓戒的) 성격을 강하게 가미시킴으로써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그 결과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한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한국경제의 북방으로의 진출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모순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못된 버릇’을 고치겠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훈계 정책’이 허무한 주관주의를 넘어 성공하려면 역시 북한에 대해 남한이 확실한 지렛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미 5.24 조치의 실패가 말해주듯이 북중 경협이 확장되는 한 네거티브 측면에서 한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다.

혹자는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해서 북한이 보인 저자세를 예로 들어 우리 정부의 강경한 ‘원칙론’이 효과를 보았다고 말할지 모르나 솔직히 그것은 북한이 박근혜정부의 정책에 호응했기보다 자신이 내놓은 경제발전 전략을 추구할 수 있는 국제환경 조성을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북한 지도부는 외국자본의 유치를 통한 경제발전을 핵심발전 전략으로 삼고 있는 데, 북한이 스스로 무모하게 폐쇄 위기로 몰아간 개성공단이 실제로 폐쇄될 경우, 중국을 비롯한 해외자본이 ‘투자 불안정성’을 이유로 북한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상황을 막아보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사실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를 개선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키는 데 역대 어느 정부 보다도 한국 정부가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비록 자신은 ‘북한 혐오증 ’에 빠져 북한과의 대화를 회의시(懷疑視) 하고 북핵문제를 그럭저럭 끌고가기 (muddling through) 로 일관하고 있으나 동맹인 한국정부의 충고에 대해서는 어느 정부보다 귀가 열려있다.

남북관계에서도 박근혜정부가 훈계나 교시적 태도가 아니라 균형적이며 상호 소통의 대화방식으로 능동적인 대북 자세를 보인다면 북한이 자기 필요에 따라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 증진에 적극 나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김정은 정권은 경제발전을 자신의 정통성확보를 위한 제1의 핵심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과학 기술을 경제에 접목시켜 빠른 경제발전을 실현 하겠다는 ‘단번도약’을 외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외국자본의 유치를 전제로 하는 경제특구 개발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며, 이 프로젝트를 실현시키기 위해 기존의 정치, 안보 분야의 웬만한 주장까지도 변경하거나 스스로 억제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제 지향적으로 변화하는 북한의 이러한 모습은 남북대결의 상징인 NLL 수역 인근에서도 나타났다. 북한이 남한의 연평도를 마주한 NLL에 가장 인접한 최전방 지역이며 북한 최남단 지역인 강령반도에 위치한 황해남도 강령군을 해외투자 유치를 통해 발전시킬 경제특구로 지정한 것이다. 북한의 이 조치는 강령반도가 남북 대결이 가장 첨예한 NLL수역 내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이며 의미심장하다. 당장 이 특구계획이 실행되면 북한 최남단 해군기지인 등산곶이 폐쇄될 가능성이 높으며 강령군에서 불과 수 Km 떨어진 사곶에 위치한 8전대도 기존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 특구 계획이 남북합의로 NLL 인근을 평화수역화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구상이라는 점이다. NLL을 지금의 분쟁수역으로 방치하고는 이 특구 계획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이 사실을 모르고 강령군 경제특구를 지정했을 리 만무하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강령군 경제특구를 “전세계경제의 일체화와 세계평화발전의 높이에 입각해서” 만들겠다고 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전세계경제의 일체화에 입각해서’는 세계가 상호의존의 시장경제체제가 되었으며 북한도 경제발전을 위해 이 체제로 편입하겠다는 뜻이다.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리고 ‘세계평화발전의 높이에 입각해서’는 군사적 대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는 추세에 맞추겠다는 뜻으로 보이며, 이는 강령군이 남북분쟁 수역인 NLL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는 것이지만, 서해 NLL을 두고 남북이 첨예하게 대결하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강령군 경제특구 구상은 공허하고 한낱 장밋빛 청사진에 불과하다. 남북관계가 호전되지 않는 한 강령군 경제특구 건설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를 알면서 북한이 왜 이 특구를 지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관적인 추정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추정보다 북한의 강령군 경제특구 지정이 남북관계에 던지는 함의를 찾는 일일 것이다. 그 함의를 나름대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NLL을 현재의 적대적 대결 수역으로 남겨놓은 채 강령군 경제특구 추진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이 특구계획 대로라면 북한의 NLL 전략의 수정과 황해남도 일대 북한 해군전력의 재배치가 불가피하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지도부가 NLL의 평화 수역화 및 서해해상경계선 획정과 관련하여 남한과 협상할 용의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북한은 NLL 수호에 대한 남측의 의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존처럼 NLL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 보다는 타협점을 모색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남측이 지혜롭게 협상전략을 구사하면 북한은 그동안 남측이 주장한 남북기본합의서에 기초한 NLL 문제 해결(즉 ‘남북은 NLL을 해상군사분계선으로 인정하고 그 위에 필요한 협의를 해나가며,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NLL 을 준수해야 한다’)에 동의해 올 가능성이 어느 때 보다도 높다고 본다. 요컨대 강령군 경제특구는 NLL 에서 남북의 군사적 대결을 항구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남북합의를 추진할 호조건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북한의 강령군 경제 특구 추진은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합의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동안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에 대한 비관적 평가는 북한이 NLL을 인정하지 않고 NLL 인근 지역을 첨예한 안보지역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NLL 수역을 안정시킬 의향이 있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가 추진될 수 있는 양호한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다. 더욱이 강령군 경제특구는 서방 및 남한과의 협력을 전제하고 있는 계획이기 때문에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유기적 연계가 가능한 구상이다.

이제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대응이다. 북한의 경제지향적인 변화를 적극 활용하여 NLL을 평화 수역화하고 비무장지대에 ‘세계평화공원’을 조성하며 남북경제협력을 통해 어려움에 처한 한국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창출할 것인지 아니면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훈계적 대북정책을 고수하고 북핵문제에 남북관계를 종속시켜 갈 것인지는 박근혜정부의 판단에 달렸다고 본다.


4. 현 단계 해법 : 3단계 북핵 전략과 남북정상회담

앞에서의 분석에 바탕을 두고 현재 교착 혹은 악화 국면에 있는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의 궤도를 한반도 평화번영의 길로 복귀시키기 위한 대안을 나름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핵 문제의 경우, ‘6자회담 재개 및 지속 가동 → 북핵 동결 → 북핵 완전 폐기’의 3단계를 9.19 공동성명에 기초해서 ‘행동 대 행동의 원칙’아래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 이렇게 3단계 프로세스를 제안하는 이유는 ⓐ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에 대한 경제적 압박으로 핵 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망해지고 ⓑ 북한의 핵보유 의지는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강해져 일거에 북핵 포기를 실현하기 더욱 어려워졌으나 ⓒ 김정은 정권이 경제발전을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국가발전의 핵심전략으로 삼음으로써 장기적으로 핵 포기와 북한의 정상국가화(체제 안전 및 관계정상화, 경제발전 실현)를 교환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 보유 의지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북한은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최근 그 의지가 훨씬 강해졌다. 북한은 이미 2002년 1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나 9.19 공동성명 직후 이 성명을 유린하는 ‘BDA 사건’등을 겪으면서 핵보유 의지를 키워왔다. 여기에 2003년 영국의 주선 아래 미국의 요구로 체제안전 담보 및 경제제재 해제를 조건으로 핵을 포기했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가 2011년 NATO군의 공습을 받으며 몰락한 것이 북한의 핵보유 의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북한정권은 2012년 4월 스스로가 핵보유국임을 헌법에 명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단순히 문서상의 합의만으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행동 대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 북한 핵을 동결하고 북핵의 완전폐기를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시점과 일치시켜 놓은 뒤, 그 사이 일련의 북핵 폐기 과정을 북미 및 북일관계 정상화, 북한의 경제 발전 전략에 대한 서방 및 중국의 적극 협조, 북한을 포함하는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 구성, 평화체제 구축 협의 및 평화협정을 위한 한반도 안보환경의 개선 등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과정을 통해 북한정권이 자신의 체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남한 및 서방과 신뢰를 쌓는 것이 핵 포기의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라고 본다.

이처럼 북핵 동결 후 북핵 폐기로 가는 과정을 나눈 데는 북한정권이 제1의 국가핵심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는 경제발전전략이 서방의 협력 없이는 쉽사리 달성되기 어려우며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그럭저럭 버텨가는 북한을 굴복시키지는 못해도 경제적으로 ‘단번도약'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들의 전략에는 치명적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북핵문제를 둘러싼 서방과의 긴장을 해소하고 서방과 관계를 개선해야 중국 민간 기업들이 북한에 적극 투자할 것이며, 나아가 서방기업들이 북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 정권의 ‘단번도약’ 전략은 핵을 가지고 국제사회와 대립하는 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김정은 정권 역시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6자회담 재개와 대외관계 개선 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단번 도약’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대외관계의 시행착오로 ‘단번도약 ’에 흥미를 잃고 다시 핵 개발에 집착하며 그럭저럭 버티기 태세로 복귀하지 않도록 현재의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북핵 동결이라는 과도기를 거쳐서 북핵 폐기로 가자는 데는 현재 북한 핵은 핵무기화 단계에 있으나 아직 군사적으로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세 차례의 핵개발을 통해서 ‘핵 보유’를 강조하며 대내적으로 정치적 효과를 얻고 있으며, 안보면에서 일정한 자신감을 갖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실전배치가 가능한 군사적 실용화 단계까지는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북핵 동결은 북한에게는 ‘핵보유 상태’에서 핵 동결이라고 대내적으로 선전할 수 있으며, 서방으로서는 실질적인 핵능력 강화 과정을 차단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한편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와 지속적인 가동을 북핵 해법 1단계로 설정한 것은 6자회담의 가동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6자회담을 실패한 회담으로 규정하고 북핵 해결을 위해 대체 기구를 모색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주장이다. 6자 회담은 6개국이 갖은 어려움 속에서 출범시켜 가동해 온 동북아 최초의 안보대화기구로서 역사적인 9.19 공동성명을 산출했다. 현 갈등국면에서도 북한과 미국 모두 이 공동성명에 대해 존중의사를 천명하고 있다. 즉 갈등하는 북핵문제에서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접점이 바로 6자회담의 또 다른 표현인 9.19 공동성명이다.

6자회담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하여 만들어진 기제다. 따라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는 북한이 핵 포기 협상을 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6 자회담 복귀에 전제조건을 걸 이유가 없다. 북한의 진정성은 6자회담에서 따지면 될 일이다. 사실 미국은 2 010 년 초만 해도 북한의 조건 없는 6자회담 복귀를 요구하였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 6 자회담에 복귀하면 북한에 대한 제재나 압박 분위기만 약화되고 회담은 공전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즉 , 북한의 ‘술책’에 말려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6 자회담 복귀여부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대북제재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 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혹자는 ‘대화를 위한 대화는 북 핵 능력만 고도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북한과 대화하지 않고 압박하는 동안 북 핵이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고도화되었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지난 2009년 5월 이후 북한에 대해 고강도 제재를 하는 동안 북한은 가장 빠르고 강하게 핵을 강화시켰다. 당시 북한은 추가적 핵실험뿐만 아니라 농축 우라늄 공장까지 본격적으로 가동하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도 미국이 9.19 공동성명 발표와 거의 동시에 방코 델타 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을 단행하고 대북 금융제재를 가하면서 핵문제가 표류하고 6자회담이 무산되자 북한이 이에 핵실험 카드로 대항하면서 발생하였다. 사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대화를 위한 대화조차도 대화를 아예 하지 않은 것보다는 북 핵을 억제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6자회담을 하게 되면 서로 견제하고 의심하는 것이 공론화되기 때문에 북한이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갈등과 불신이 교차하는 현 단계 남북관계를 푸는 길은 정상회담이라고 본다. 천안함 사태, 5.24 조치, 금강산 관광중단 사태 등 이명박 정부에서 발생한 남북관계가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을 지배하고 있으며 북핵 우선론의 사고가 정책담당자들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낮은 단계의 실무회담을 통해 남북관계의 전기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는 박근혜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 남북 간 현안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고 북핵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민족의 미래에 대해 대화해야 한다. 최고지도자 간 솔직한 의견교환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면, 아마 박근혜정부는 남북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제사회에서 현재의 변방적 위치에서 벗어나 북핵문제와 한방도 평화를 추동하는 주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서 그동안 자신이 주장했던 논리와 중국에 대한 기대가 합리적이며 정확한 것이었는지 성찰하며 북핵 정책을 재검토해야하며 한국정부는 훈계적 대북정책이 지닌 한계를 깨달아야 한다. 사실 그동안 많은 비합리적 요소들이 한국과 서방의 대북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쳐왔다. 북한에 대해서는 냉철한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강경 주장이 더 먹혀들고 정책으로 쉽게 선택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의 저변에는 미국, 한국 등 서방 전반에 퍼져있는 북한에 대한 혐오정서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립된 대북정책 결과 서방은 북한 핵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시켜왔으며 남북관계도 별다른 소득 없이 갈등과 대결의 질곡에 빠져버렸다. 이제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때다. 그리고 그 진단과 처방을 위해서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한미를 중심으로 한 서방이 지닌 자원과 수단, 한계는 무엇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이를 정확히 알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유효한 대북정책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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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전통일부 장관,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