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사회 : 서화숙(한국일보 선임기자) |
| | | ▲ 토론 : 고경빈( 평화재단 이사) |
| | | ▲ 토론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
| | | ▲ 토론 : 유시민 (작가/전 국회의원) |
| | | ▲ 토론 : 이동형(팟캐스트 '이이제이' 진행자) |
남북화해협력과 시민참여 - 서울시민의 역할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지난 몇 년 동안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가 평화번영의 길로 회복될 조짐을 좀처럼 보이고 있지 않다. 북한에 대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불신은 좀처럼 감소하지 않는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과 함께 미국의 핵개발 우려대상 국가였던 이란하고는 대화할 의사를 보이고 있다. 이란에서 선거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중동문제를 풀어가는 하나의 실마리를 이란에서 선거를 통해 등장한 온건정권과 대화에서 찾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는 북한이 핵포기에 대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핵을 개발했고 이란은 아직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란과 북한의 차이로 들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주장이 가지는 논리적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또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중동문제가 우선이므로 북한 문제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대화 재개를 위한 중재외교를 펼치던 중국의 노력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전제조건을 제기하는 미국과 조건 없는 대화를 제기하는 미국과 북한의 입장이 팽팽하기 때문이다. 남북대화도 획기적으로 진전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국제사회와 대화를 위한 모멘텀을 마련하기 위해서 남북대화에 나서고 있고, 한국정부는 남북관계 발전보다는 국내정치적인 효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구조적인 제약은 지속되어왔다. 이러한 결과를 반영하여 시민사회의 통일운동 역시 지난 몇 년 동안 위축되어 왔다. 시민사회의 통일운동은 80년대 말부터 폭발적으로 터져나와서 시민사회 각 부문에서 가장 많은 대중동원력을 가지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통일운동이 생활화 대중화하지 못하고서 이명박 정부 시절 악화된 남북관계의 영향을 받아서 지금은 과거의 영화만을 기록에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글의 취지는 10.4 선언 6주년 토론회에서 통일문제에 대하여 다각도로 진단해보면서 시민 참여 속에서 진행되는 통일운동을 모색해보고자 마련된 “남북화해 협력과 시민참여 -서울시민의 역할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와 목적에 맞게 다양한 토론을 진행하기 위해서 몇 가지 쟁점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분석과 이를 입증할 근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필자의 주장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작성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남북공동번영과 한국의 신성장동력 창출, 역사바로세우기와 21세기 평화복지국가 건설, 전쟁방지, 민주주의 발전, 민족의 재결합이라는 다섯 가지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80년대 말부터 ‘남북의 단결’과 ‘민족의 자주성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어온 통일의 필요성과는 달리 한국의 시각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재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북한의 존재가 우리에게 미치는 의미를 살펴보고 이에 따라 우리가 북한에 어떻게 볼 것인가(북한관)는 관점에서 벗어나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접근법)이라는 차원에서 발상의 전환의 필요성을 제시할 것이다. 통일의 개념에 대해서도 다르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제로 해서 통일과정에서 북한과 다른 모습으로 공존하는 관용의 필요성을 도출할 것이다. 남북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작동하고 있는 분단체제의 모습을 예시하기 위해서 선거와 북풍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시민참여형 통일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전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의들에 따라서 어떤 방향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통일운동을 전개할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통일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시민의 역할을 규정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논의에 바탕을 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서울시민의 사업을 제안 하고자 한다. 여기서 서울시민이란 개인으로서 시민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존재로서의 시민을 뜻한다. 아울러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는 서울시라는 행정단위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시민단체가 될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 어떤 단체가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글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평화의 약속운동’, ‘평화문화와 시민안보를 위한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적으로 제안한 것일 뿐이다. 선언은 그 이후 후속 프로그램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선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프로그램을 논하는 것보다 선언의 방향에 대해 논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글은 10.4 남북정상선언 6주년 토론회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의 방향을 모색해보기 위한 자유로운 토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다. 이글을 바탕으로 이번 토론회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활발한 토론을 통해서 시민사회 통일논의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램이다. 아울러 이글에서 인용한 국민의식조사는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서 2007년부터 해마다 실시하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발제문을 쓰는 과정에서 2013년 국민의식조사가 발표되어 최신 자료를 인용할 수 있었음을 밝힌다. 다만 수도권 지역으로 해서 서울, 경기, 인천을 하나의 권역으로 한 조사여서 서울시민의 여론을 측정할 수 없어서 이 글에서 서울시민의 여론조사를 직접 인용할 수 없었다. 앞으로 2007년 이전의 여론조사 자료도 분석하여 90년대 이후 통일에 대한 국민여론이 변화추이를 분석해본다면 국민 통일의식을 비교 평가하는데 보다 유용할 것이다. 2. 통일은 왜 필요한가?
통일을 지금 당장 하나가 되는 것,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도 있는 것, 이런 의미에 입각한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남한과 북한 가운데 어느 한편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추구하면 할수록 상대방의 반발은 거세지고 통일은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의 개념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한다. 하나가 되는 것만이 통일이 아니다. 평화공존의 상태도 통일이다. 통일을 긴 과정으로 본다면 평화공존은 통일의 초기단계이고, 통일의 부분집합이다. 평화공존이란 '통일민족 국가 수립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인 특수상태' 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남북 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선언에서 남북이 약속한 것처럼 상호존중하고 화해하며, 침략을 하지 않고 군축을 하고,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교류 협력해야 한다. 즉 남북의 약속만 이행해도 이것이 통일의 첫 단계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통일에 대한 혼란이나 부담의 지불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평화공존의 과정에서 분단의 비용을 줄이면 평화공존을 유지하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의 과정으로서 통일을 전제로 해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몇 가지 차원에서 제시할 수 있다. <표1>과 같이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의식조사에서는 우리 국민들은 같은 민족, 전쟁위협 해소, 선진국으로 도약, 이산가족 해소, 북한주민 삶 개선 이렇게 다섯 가지 항목을 순서대로 통일의 필요성으로 꼽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와 다르게 남북공동번영과 한국경제 신성장동력 확보, 역사발전과 21세기 평화복지국가 건설, 전쟁위협제거, 민주주의 발전, 민족주의 이렇게 다섯 가지를 통일의 필요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통일은 남과 북의 공동번영을 이끄는 것이다. 국제적인 저성장의 덫에 걸려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통일은 ‘엘도라도’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통일을 남북경제협력을 통해서 밥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북한을 통한 중국과 러시아라는 북방 대륙으로 진출은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이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남북경제협력은 실제로 ‘한국의 경제 살리기’와 이를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다. ‘신성장동력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엘도라도’로 가는 관문이다. 개성공단이 중국이나 베트남, 태국에 비해 경쟁력에서 월등히 앞서므로 중소기업의 활로라는 점은 명확하다. 부산항에서 나진항을 통해서 시베리아철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하는 것은 물류비용을 대폭 절감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대륙의 꿈을 심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자원개발은 우리 경제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서해의 남포와 동해의 안변에 조선소를 건립했다면 조선업에서 우리의 국제경쟁력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은 북한의 잠수함 기지인 장전항을 개방하게 만들었고, 개성공단 건설은 수도권을 기습공격 할 수 있게 개성남쪽에 배치된 북한군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렇게 평화를 만드는 일을 돈으로 산다고 한다면 억만금을 퍼주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또 10.4 선언에 따라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건설했다면 연평도 포격사건 같은 것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남북 사이의 화약고인 서해 5도 일대를 평화지대로 만드는 일은 이미 착수되었을 것이다. 남북한이 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북한지역을 연결하면 북한 전체를 에워싸게 된다. 동쪽으로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나진선봉과 안변, 금강산, 장전항까지, 서쪽에서는 해주를 포함한 서해5도 일대에서부터 대동강 하류로 평양의 입구인 남포를 거쳐서 압록강하구인 신의주까지, 그리고 북쪽 백두산 공항까지 이렇게 북한 전지역을 둘러 싼 남북경제협력지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허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를 제외한 이 모습은 마치 한반도에 모자를 씌운 모습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가 남북경협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두려워한다면 오히려 북한이 두려워해야할 노릇이다.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정치군사 상황과 경제를 철저하게 분리해서 어떠한 정치군사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북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게 제도화해야할 것이다. 사실 통일의 필요성을 말하기 이전에 통일에 대해 염려하는 의견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림2>와 <그림3>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20-30대는 50대 이상보다 통일에 대해서 더 무관심 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통일이 되면 북한을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하는데 통일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즉 “통일은 내 것을 잃게 하는 것인데, 내가 가진 것을 잃으면서 까지 통일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적 동기가 1차적으로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짓는 작용을 하므로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지적할 수 없다. 과거에 통일을 목놓아 외쳤던 사람들도 통일을 통해서 뭔가 더 나은 상태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공동생존과 공동번영을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 여전히 통일의 중요한 논거가 되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둘째, 통일은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라는 우리의 굴절된 근현대사에서 벗어나 21세기 복지국가, 평화국가의 초석을 놓는 일이다. 19세기말 갑오농민전쟁이 있어나고 서양의 새로운 문명과 사상이 유입되면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해가 싹트고,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요소가 자라나고, 부르조아적인 사회운동이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그러나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적 과제가 청, 일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이후 우리는 50여 년 동안 어두운 역사를 보내야 했다.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으로 35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는 미소 냉전대결의 하위구조에 편입되어 분단이 심화되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심화된 남북의 분단으로 한반도에는 분단체제가 수립되어서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오고 있다. 서구와 같이 시민혁명을 거쳐서 근대국가가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지배와 분단체제를 겪었다. 근현대 우리역사는 이렇게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분단체제로 점철되었다. 1945년 이후 분단체제가 형성되면서 남한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분단체제의 변화에 의해서 그 성격이 결정 지워졌다. 70년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엄청난 힘으로도 이미 고착된 분단질서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1945년 이후 형성된 분단체제가 70-80년대에는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통일은 일제 식민지지배와 분단체제로 점철되어 우리의 근현대사를 민족공동번영의 시대, 평화복지국가의 시대로 전환시켜내는 민족사의 사건이다. 21 세기는 통일의 집을 짓는 시기가 될 것이고, 통일의 집에서 민족의 번영을 도모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일의 과정은 역사의 발전과 같은 긴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통일의 초석을 놓는 작업을 해야 21세기의 통일과정을 거쳐서 궁극적으로 통일국가의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셋째, 통일은 기형적인 분단 상태가 만들어낸 전쟁위협과 군사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하다. 남북의 병력은 약200만 가량 된다. 미국은 130만이다. 누가 한국군이 미국군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하나의 기형적인 분단 상태의 사례이다. ‘대포가 쌓이면 터진다’는 서양속담이 있듯이 과도한 군사밀집상태는 그 자체로서 군사충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정전상태는 전쟁위기를 일상적이고 반복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통일은 전쟁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며 나아가 동북아 평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주변국가들의 개입으로 확대될 수 있는 한국전쟁의 재발을 예방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아시아에서 강대국들의 힘의 완충지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문제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세계 4대 강대국이 개입해 왔다. 한반도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유일하게 4 대 강대국을 마주 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4 대강대국들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온 것이다 . 따라서 한반도에서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이들 4대 강대국들의 힘의 완충지대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통일은 남북한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계급균열, 세대간 균열, 종교적 균열 그리고 여타의 균열보다 지역주의적 균열이 가장 뚜렷한 사회적 균열구조로 등장하여서 정당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분단에 따른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통제 때문에 다른 종류의 균열구조(특히 계급균열)가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억제당했다. 이런 상태에서 지역감정은 지역적 기반을 가진 정당들에 의해서 투표 동원을 이용되었다. 한국정치에서 지역주의도 분단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분단이 남한사회의 정치적 민주화에 질곡으로 작용하는 요인이었다. 통일은 시민권의 기초인 단결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필요하다. 한국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선진국에 비해서 과도하게 비판받는다. 분단이 시민의 기본권리 행사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통일과 민주주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분단이 말들어낸 기형적인 의식구조이다. 다섯째, 통일은 본래 하나의 민족이었던 우리민족이 두개로 갈라진 상태를 극복하여 통일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즉 통일은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통일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족의 자주독립이 가능하다. 3.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북한관’에서 ‘대북 접근법’으로 발상전환
흔히 정책을 평가할 때 그 정책이 ‘강하냐’‘연하냐’에 의거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과연 이것이 ‘현명한’정책인지 ‘어리석은’정책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기준은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는 대치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해야하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잘 설명해준다. 남북관계는 ‘통일을 함께 할 동반자’라는 측면과 ‘정치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이중적 상황에 놓여 있다. 남북관계의 이중성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현실에 기초하면서 민족사의 과제를 추구하는 합리성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정치군사적 대치를 해소해면서 민족 공동의 이익을 확대시키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추구해나가야만 남북관계의 이중성의 간극은 좁혀질 것이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2013년 통일의식조사 발표에 따르면 북한을 경계와 적대의 대상으로 여기는 국민들이 2012년에 비해 늘어났다. 2013년 상반기 북한의 말폭탄 공세와 위협 때문일 것이다. 북한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식이 늘어날수록 남북관계의 이중성은 커진다. 남북관계의 이중성이 갖는 모순은 강경책이나 온건책의 선택만으로는 해소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정책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정책에 대한 평가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끼 든 사람이 바늘 든 사람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남북의 군사대결은 마치 남북이 유리그릇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불안한 상황이다. 북이 바늘로 찌른다고 도끼를 들고 상대하면 유리그릇을 깨뜨리게 되어 자칫 공멸의 길로 떨어질 수 있다. 남북의 우발적 대결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운명공동체와도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북한의 위기는 반드시 남한의 위기로 이어진다. 우리가 북한을 공격해서 북한이 궁지에 몰릴 경우에는 북한의 반작용에 의해서 우리도 위협에 처하게 된다. 북한의 상황을 무시하고 방치하더라도 남한만 번영한다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인식(북한관)과 대북한 정책(북한 접근법)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진정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원한다면 북한 체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더라도, 북한과 대화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데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북한 인식과 북한과 대화하는 법을 분리하는 것이 민족화해와 공동번영을 추구 하는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북한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바로 그 북한 체제와 화해하고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북관계의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푸는 해법이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은 끊임없이 정규전, 비정규전을 대비한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은 실전을 대비하는 것이고, 연습은 우발적인 사건을 매개로 실전으로 비화할 수 있다. 언제든지 현실화 될 수 있는 남북의 정규부대와 비정규부대의 충돌을 막는 것은 당면한 과제이다. 남북대치라는 현실에서 북한이 남한에 가하는 위협을 ‘무찌르자 공산당’ 식으로 대하는 것은 순진하고 무책임하다. 북한은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았는 너’ 와 같은 존재이다. 결코 남남으로 살 수 없는 관계이다. 그동안 한국정치에서 북한 변수가 차지했던 비중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남북이 서로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상호 접근법)는 상호인정과 존중, 내정 불간섭, 비방과 중상 금지이다. 이는 1991년에 채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이미 합의한 사항이다. 남과 북 가운데 어느 한쪽이 이런 태도를 어길 때 이를 비판하는 것이 올바르다. 북한이 이런 합의를 어길 때 비판하는 것은 북한체제에 대한 인식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북한이 남한에 대한 태도(대남 접근법)를 지적하는 차원에서 화해와 공존을 위해 필요한 조치가 된다. 물론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역대정부가 주장해온 튼튼한 안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 통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 통일개념의 전환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은연중에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민족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통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아무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민족동질성의 회복은 곧바로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통일은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반은 맞지만 결코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완전히 맞지 않는 개념이 자칫하면 시행착오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통일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놓쳐서는 안 될 것은 통일은 하나로 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통일은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민족동질성에 기초하되 남북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통일과정에서 더 중요하다. 통일을 과정으로 바라보지 않을 경우에는 급격한 체제통합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급격한 체제통합이 가져올 후유증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통일을 논의하지 말자는 데로 이른다.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이끌기 위해서는 상호 이해의 과정, 신뢰구축의 과정, 화해협력의 과정, 군사 협력의 과정, 정부간 대화를 통한 통일추진기구 수립 등을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든 과정의 중심은 6.15 공동 선언과 10.4 선언을 비롯한 남북의 합의 이행이다. 7.4 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 정신과 내용도 뒤 두 선언에 녹아있다. 박정희정권부터 남북이 합의한 것들을 이행하는 것이 통일을 점진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이다. 이제 이런 과정 자체가 통일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따라서 ‘언제 통일이 될 것이냐’는 질문은 막연한 질문이다. ‘언제 통일과정으로 들어갈 것이냐’는 질문이 필요하다. 아래 <표3>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6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체로 20년 이내에 통일이 될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20년 전의 여론조사에서도 대체로 통일은 20년 후에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것은 통일은 당장 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20년 이내가 바로 가깝지고 않고 먼 미래도 아닌 시기를 상징하는 시점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통일을 어느 시점에서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 과정으로서 통일을 준비하는 것이 가깝지고 않고 멀지도 않은 시기에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단계에서 추구해야 할 통일은 '통일과정의 초기 단계로서 공존' 이라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남북의 공존도 통일이고, 현 시기에 추구해야할 통일 상태는 공존이며, 이 상태가 역동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통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을 미룰 필요도 없고, 통일 때문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염려해서 통일을 부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통일과정에서 모아진 민족적 열망을 통일공동체 건설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통일을 역사발전의 긴 과정으로 이해하고, 현 시기에서는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사실상의 통일이란 남북이 통일을 추구하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통일의 개념과 과정을 도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실상의 통일과 체제통합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의 통일이한 정치적 화해와 평화정착 그리고 경제적 협력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상의 통일을 추진하면서 장기적인 차원에서 사회경제적인 통합을 준비하는 것이 통일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통일을 긴 과정으로 바라본다면 통일은 ‘슬로우(slow) 통일’이 된다. 민간차원의 남북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키고 정상회담을 정례화하면서 당국간 대화와 협력을 지속해나간다면 이것이 통일의 시작이다. 슬로우 통일과정에서 평화를 구축하고 평화를 연습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해서 자기를 교정하는 기회를 만들게 된다. 남과 북의 성찰적 자기 교정이 없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통일을 ’모든 통일은 선이다‘라는 이름으로 환영할 수 없다. 사실상의 통일을 통해 남북한의 적대적인 대결을 완화시키고 평화공존의 단계로 진입한 이후, 남북의 사회경제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남북의 첨예한 대결상황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경로이다. 물론 현재의 정치조건에서 이러한 경로의 현실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통일의 주체적인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통일과정을 합리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주요한 힘이 바로 시민들이 참여하는 통일운동이다. 이러한 인식은 현 상황을 통일시기로 진입하는 단계로 이해하는 역동적인 역사인식이 가능해지며, 평화공존의 단계가 분단의 한 형태가 아닌 통일시대로 진입하는 초기상태라고 통일지향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통일에 대한 논의는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한다. 이는 통일의 개념이나 유형 논의가 남북한의 체제경쟁이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 또는 20세기적인 체제인식에서 벗어나서, 21세기의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민족의 번영을 도모하고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5. 다른 모습을 가지고 얼마만큼 공존할 수 있는가?
통일을 과정으로 이해해야 준비 없는 통일을 예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일준비는 공존을 연습하는 것이다. 공존을 위해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익혀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같은가’, ‘공유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 보다는 ‘얼마만큼 그들과 다르게 공존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관용이란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다. 관용은 ‘반대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하는 행위’이다. 관용의 교육은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같은가 또는 공유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얼마만큼 그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채 서로 공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관용은 ‘자신과 적대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이고, 관용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름’은 ‘틀림’과 다른 개념이다. 다름을 인정할 비로소 공존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북한동포들과 같은 민족이기는 하지만 다른 제도에서 살았다는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그것이 평화적인 통일을 준비하는 길이고,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북한을 대하는 태도를 탄력적으로 만드는 길이다. 한편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남남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견해의 차이에 대한 불관용에서 비롯되는 것만이 아니다. 통일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불충분한데서 비롯되는 바도 크다. 따라서 통일의 개념을 정립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남남대화가 될 수 있다. 통일논의를 통해서 우리 사회내부의 의사소통구조를 만들어 공통성을 찾으려는 ‘남남대화 ’ 가 필요하다. 남남대화를 통해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자세를 키우면 사회적 합의를 위한 기반은 그 만큼 튼튼해질 것이다. 6 . 북풍은 선거 때마다 불어야 하는가?
한국 역대 선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거를 앞두고 어김없이 ‘북풍’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북풍이란 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에게 안보 불안감을 심어주기 위해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사건을 말한다. 북풍이라는 이름은 1996년 4.11 총선에서 기원한다. 북한은 4.11 총선 직전에 DMZ에서 군사시위를 하였다. 판문점 안에서 북한의 무장시위는 1994년부터 해마다 실시되어진 것이었다. 북한은 당시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잠정협정을 주장하고 있었다. 북한의 DMZ 군사시위는 군사적인 목적이 아니라 정치 외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시위였다. 북한 전문가들이나 언론기관들은 북한의 이러한 목적을 대부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4.11 총선 직전 북한의 군사시위에 대해서도 언론은 대대적으로 확대보도하여 국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이러한 언론보도의 결과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총선에서 수도권서만 최소 10석 이상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30% 정도의 국민들이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가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4.11 총선 이후 유엔군 사령부는 판문점을 제외한 비무장지대 어느 지역에서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내언론의 과장보도를 비판한 것이다. 선거 이후 국방부는 자신들이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를 과장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국방부도 과장보도의 탓을 언론으로 돌린 것이다. 1996년 4.11 총선을 계기로 국민들의 안보위기를 자극하기 위해 북한 문제를 선거에 끌어들이는 것을 북풍이라고 통칭해왔다. 북풍이라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북풍은 오랫동안 한국 선거사에 자리 잡아 왔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북한 평양방송이 김영삼이를 낙선시키고 김일정 추종자들이 섞인 전국연합과 손잡은 모당 후보를 환영했다”며 노골적으로 북풍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범으로 체포된 김현희를 입국시킨 것도 북풍의 일환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오익제 방북 사건과 황장엽 망명 사건을 가지고 북풍을 시도했다. 북풍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선거 때마다 불어왔다. 공안사건이나 북한과 관련된 사건을 그 진실은 거두절미하고 국민들의 안보 위기의식을 부추키는 방향으로 왜곡하는 것이 북풍의 핵심이다. 그동안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북풍은 후보들의 공정경쟁과 국민들의 참정권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위반하는 것이다. 안보불안감 조성이라는 자극적인 행위로 분단극복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는 국민들에게 강하게 스트레스를 주어버렸다. 국민들의 통일열망이 왜곡되었던 이유가 이와 같은 북풍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북풍이 효과를 지니는 것은 분단체제의 특징이다. 남과 북이 분단을 매개로 해서 상호밀접하게 결합되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작동하고 있는 분단체제는 민주주의와 대립 모순되는 관계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NLL 논란이 중요한 이슈가 된 것도 신종북풍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는 분단체제의 작동이다. 하지만 진보적인 인사들 가운데는 대선 국면에서 NLL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적절 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NLL은 새누리당이 주도권을 쥐고 폭로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NLL에 대응하는 것 자체가 새누리당의 프레임에 말려든다는 것이다. 레이코프가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영향이다. 상대가 만든 프레임에 대항하는 것은 상대의 프레임만 더 강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타당성이 있다. 대통령선거라는 정치공간에서 NLL 논쟁이 가지는 성격을 분단체제라는 시각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여당과 야당의 정치공방은 그것이 새누리당의 프레임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분단체제라는 시각에서 볼 때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분단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맞물려서 작동하면서 영향을 심대하게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대선을 비롯한 큰 선거에서 항상 ‘북풍’이나 변종 북풍이 불어왔던 것이다. 선거에서 하는 정치공방을 떠나서 통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분단체제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항상 적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분단 상황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분단과 국내정치의 상호관계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분단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세력이나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분단이나 한국의 현안이나 모두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대상이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상대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통일논의가 초당적으로 진행 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초당적으로 통일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당들은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7 . 통일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할 1) 정부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부당국의 역할은 중요하다. 정부 당국는 통일을 촉진하는 환경을 보장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7.4 남북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대로 과거에 당국 사이의 대화가 결렬되자 남북 당국이 합의한 내용이 실종되었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국 사이의 대화중단은 통일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동안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과 북의 당국은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 공동선언 등 세 차례에 걸쳐서 소중한 합의를 하였다. 세 차례의 합의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남북 당국사이의 대화 창구를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는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운영한다고 밝히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남북화해공동위원회, 남북군사공동위원회, 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 남북사회문화교류협력공동위원회 등 4개의 공동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6.15 남북공동선언에서도 제5항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안에 당국간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6.15 선언은 남북의 정상이 합의하고 서명했다는 점에서 과거의 두 차례 합의하고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6.15 남북공동 선언에서 당국간 대화를 개최하기로 한 것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라고 밝히고 있다. 10.4 공동선언에서도 정상회담 수시 개최, 국회회담, 총리회담, 국방장관회담, 경제회담, 사회문화 회담, 인도주의 회담 등 각급 당국회담을 약속하였다. 남북당국간 회담이 가지는 의미는 당국간 회담이 통일을 추구해나가는 남북 사이의 협의기구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은 남과 북이 대화와 합의에 의해서 진행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이 합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구는 남북 당국회담의 제도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통일과정에서 정부당국자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므로 ‘당국자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느냐’라는 실제 역할 수행을 중심으로 당국의 역할을 판단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당국의 역할을 인정하고 남북 정부 당국자가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시민이 참여해서 통일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인 시민이 통일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고, 통일과정을 그만큼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이끌어 내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통일을 시민의 이익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추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2)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는 정부, 기업, 민간 등과 함께 남북규류협력사업의 중요한 주체이다.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헌법정신에 따라서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정부뿐만 아니라 지자체, 민간, 기업의 남북교류협력이 활발해져야 한다. 남북관계는 대개 정부간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정부관계는 한국에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서 부침이 있어왔다. 그러나 정부간 대화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지자체, 민간, 기업의 교류협력사업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헌법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에는“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 히 한다고 되어 있다.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서울시가 남북협력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1차적으로 헌법 정신 구현하는 것으로서 헌법적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들의 남북교류는 남북사이의 화해협력을 다지고 신뢰를 구축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의 남북교류는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이뤄진다. 이는 정치적인 환경의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각 분야별로 연계를 강화함으로써 정치군사적인 대화와 협력을 위한 여건조성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들의 교류협력은 불가피하게 중앙정부와 협력 속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서울시가 중앙정부 차원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정치 군사 문제에 대해 북한당국이나 평양시와 교류하거나 협의할 수 없다. 평양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서울시가 비군사적 영역에서 남북교류협력을 추진하는 것은 남북한의 체제가 서로 가까워지고 이러한 노력들이 상대에 대한 수용성을 크게 만들어서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사회심리적인 여건 조성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중앙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의 촉매제로서 기능하므로 중앙정부의 대북정책의 보완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업은 남북협력사업을 통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한다. 경제적인 이익 창출은 통일의 물적 기반조성에 매우 중요하다. 6.15 공동선언이나 10.4 선언에서도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약속했다. 민간의 대북사업은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공적 영역에서 북한과 접촉을 통해서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민간의 사업은 인도지원과 사회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이는 남북 주민들 사이의 사람의 통일을 이루는데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다. 지방자치단체의 대북사업은 정부와 기업, 민간의 특성을 모두 발휘하면서도 지역차원에서 남북 화해협력을 뿌리 깊게 내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당국간 대화가 단절되더라도 지자체, 민간, 기업의 남북사업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한다. 물론 남북 당국의 정책적 입장은 당국간의 대화를 우선시 한다. 하지만 민간, 지자체, 기업의 협력사업이 지속될 때 통일의 기반이 그만큼 조성되는 것이다. 8. 통일 민심과 시민참여
1) 통일 민심 남북관계에 대한 민심은 한결 같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절대로 안되고, 통일은 혼란이 없게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하며, 현 단계에서는 남북이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해서 공존공영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토론회와 청문회 그리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입증된 것이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도 이런 민심에 입각해서 북한을 동반자로 선언한 7.7선언을 발표하고 북한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김영삼 정부는 냉탕온탕을 오락가락 했지만 ‘남북연합’의 과정을 거쳐서 통일에 이르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만들었다. 김영삼 대통령 개인의 성격 때문에 오락가락 했지만 민심을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어서 이런 통일방안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이 더 많았다는 점을 들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민심을 떠난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대북정책에 대한 논란이 이전 정부시절보다 더 많았던 것은 민심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일이다. 노태우, 김영삼 보수정부의 대북정책을 진보세력이 지지해준 반면에,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부의 대북정책을 보수세력들이 정치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정권이 남북관계를 추진하는 것이 국내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터져 나온 평화통일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민심은 분단 이후부터 존재해 왔다. 박정희 정부도 이런 민심 때문에 1970년에 ‘8.15 평화통일선언’을 하고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행여부를 뒤로하고 최소한 정책차원에서는 ‘평화유지’와 ‘교류협력’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대북정책이 1970년 박정희의 8.15 평화통일선언 이후 노무현의 10.4 선언에 이르기까지 일관해서 이어져온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퍼주기’, ‘끌려 다니기’라는 정치논리가 의도하는 바를 충실하게 따라서 남북관계를 파탄냈다. 이명박 정부가 이루어낸 업적 아닌 업적인 ‘남북관계 파탄’은 박정희 정부 이후 이어져온 역대 정부의 대북정책의 맥락을 끊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설사 ‘퍼주기’ 나 ‘끌려 다니기’라는 정치논리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부 극단적인 여론을 제외한다면 남북관계 단절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선동논리에서 합리적인 핵심을 굳이 찾는다면 남북관계를 개선하되 국민감정을 고려해서 ‘일방적’이지 않게 추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여론조사에서 남북관계 단절을 지지하는 여론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민심을 아예 ‘돌다리를 부숴버리는 것’으로 왜곡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2 ) 시민참여 시민참여는 민주주의 공간을 확대시켜서 통일논의와 운동을 촉발시킬 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의 일상화와 생활화를 가능하게 한다. 분단은 사회 제반 영역에서 분단유지적인 장치들을 심어놓았다. 시민참여는 통일운동의 일상화 생활화를 통해서 일상에 녹아 있는 분단의 잔해들을 해소하는 것이다. 분단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통일운동의 생활화는 분단체제를 흔드는 일상적인 통일운동이 된다. 또한 시민참여란 사회제반 영역에서 제기되는 시민적 과제와 통일문제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는 6.15 선언 이후 진행된 민족공동행사에서 부문별상봉 모임을 통해서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공동행사가 개최되지 않으면서 부문별 상봉모임은 열릴 수 없게 되었고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운동에 시민참여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물론 겨레말사전 편찬 사업이 지속되는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통일운동은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사회 각 부문에 녹아 있는 분단의 잔해를 극복하는 것을 시민적 사회개혁과제와 결합시켜야 한다. 분단체제에서 시민참여는 인간안보를 실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냉전과 남북 군사대치라는 상황에 의해서 시민의 권리와 시민적인 삶이 제약받아왔다. 인간안보는 인간의 삶의 질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인간안보에서 개인은 위협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라는 물음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개인의 안보조건에서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분단체제에 의해 제약된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 된다. 한편 시민참여는 ‘과정으로의 통일’을 이끌 수밖에 없고, ‘과정으로서 통일’은 시민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시민의 다양한 권리들을 실현하면서 통일을 이루어간다고 할 때 그 통일은 ‘과정’을 필요로 하고, ‘과정으로서 통일’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부문간의 사회문화교류나 대북인도적 지원이 대표적인 시민참여 과정이었다. 이제는 시민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요구되는 사회적 의제들과 분단극복의 과제로 결합시켜야 한다.
9. 맺음말 :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서울시민의 사업 제안 1) 평화의 약속운동 우리 국민들은 한국정쟁이라는 DNA에 아픔이 새겨질 정도의 비극을 겪었다. 남북의 군사충돌 속에서 북한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을 키워오면서도 다른 한편 남북화해와 협력이 민족의 미래를 평화롭게 가꾸는 길이라는 것을 터득해왔다. “남과 북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통일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성급한 통일보다는 교류협력을 꾸준히 진행하여 평화를 유지하면서 통일연습과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분단체제 속에서 시민들이 체험적으로 익혀온 ‘암묵지’이다. 이제 시민들이 터득하고 있는 ‘암묵지’로 돌아가서 냉전적인 대결에서 벗어나서 21세기 평화와 번영의 기반을 만드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시민사회가 ‘평화의 약속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평화의 약속운동을 위해서는 몇 가지 인식이 전제가 된다. 첫째, 분단현실 직시이다. 북한과 한 핏줄이지만 전쟁을 하고 수많은 충돌을 하면서 불신은 불신대로 자랐다. 진보는 이를 직시해야 한다. 보수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둘째, 북한변화에 대한 직시이다. 북한은 쉽게 제풀에 꺽이거나 조기붕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쉽기 단기간에 변화하지 않는다. 북한조기붕괴론과 북한조기변화론에서 벗어나자. 북한 변화를 추구하되 북한 변화는 서서히 시작하고 변화의 폭은 단계적으로 확산된다는 점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하자. 셋째, 안보와 민주주의이다. 종북 논란은 우리사회 이념갈등의 현주소이다. 보수와 진보의 대화 능력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보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얼마든지 후유증을 두려워하지 않는 찬반 토론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해야 한다. 반면에 진보는 보수가 우려하는 국가 정체성이나 체제 위협에 대해서 공감하면서 사상과 표현이 자유가 국가정체성과 체제를 더 튼튼히 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시민이 주체가 되는 ‘평화의 약속운동’은 통일 환경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추진역량을 확보,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평화의 약속운동’이 추진할 약속은 다음과 같이 모아볼 수 있다. 첫째, 정치권에 대북정책에서 초당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 이를 위해 정치권에서는 박정희 정부 시대의 1970년 평화통일선언, 1972년 7.4 공동성명부터 노태우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 김영삼 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을 존중한다. 즉 여당과 야당은 모두 박정희 정부 이후 대북정책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역대정부의 대북저책이 화해협력, 평화번영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이를 추진 해가는 과정에서 수단개발과 국민합의를 위해 초당적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다. 여야가 합의하는 대북정책의 초당적 추진 결의로 모아질 수 있다. 초당적 협의를 위해서는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홍보는 ‘현 정부의 대북 정책’ 쪽으로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되며, ‘우리의 대북 정책’ 내지는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대북 정책’에 비중을 두어서 홍보를 해야 한다. 둘째, 남북문제에 대한 보도와 기사에 대해 시민사회와 관련전문가 참여하는 모니터닝을 추진한다. 남북문제를 무책임하게 다룸으로써 초래하는 파급효과와 이로 인해 언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남북문제에 오보를 정례적으로 검증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연구회를 만들어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울러 여론조사의 영향력을 감안하여, 여론조사의 타당성과 의도적인 측면을 사후 검토하는 과정을 도입해야 한다. 정부 정책을 홍보·지지하기 위해 정부관련 단체에서 실행하는 여론조사의 객관성을 검증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런 성향의 여론 조사 결과를 다시 정부 당국에서 원용하는 악순환을 차단해야 한다. 셋째, 전문가와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이념적인 성향과 무관하게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진 인사들에 대해서도 기피하거나 배제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참여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 각계가 참여하는 ‘평화의 약속’을 하고, 또 ‘평화의 약속운동’ 주체가 각 기관과 평화의 약속을 하고, 약속한 내용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이행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다. 2) 서울시민의 ‘평화문화와 시민안보를 위한 선언’ 서울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0km 떨어져 있다는 구조적인 취약요인은 북한발 충격이 발생할 경우 서울이 가정 먼저 영향을 받는다. 필자는 이에 따라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곧 ‘서울 디스카운트’라고 주장한 바 있다. 자치단체인 서울은 중앙정부가 아니기 때문에 군사적 수단이 아닌 다양한 평화적인 수단을 개발하는 것에 의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서울시민들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다. 시민들의 평화를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국가안보가 아닌 ‘시민안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시민안보’란 ‘시민의 불안이나 공포를 예방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가령 10.4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경의선 연결은 서울시민들이 다른 형태의 일상을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시민안보의 개념은 기존의 국가안보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시민이 평화와 통일의 주체로서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서울시민들이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차원에서 분단에서 오는 위협과 일상적인 위협을 포괄적 종합적으로 대처하는 비전을 담은 서울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평화문화와 시민안보를 위한 서울시민선언’(시민안보선언)을 발표할 것을 제안한다. ‘시민안보(Civil Security)’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서울시가 발표가 한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이라는 시정비전을 서울시민들의 안전과 삶의 질 보장이라는 시민안보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국가안보와 다른 차원의 시민안보로 정립하는 출발이 될 수 있다. 시민안보선언은 유엔이 제시한 ‘인간안보’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시 차원에서 시민안보 개념으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는 서울시민들이 시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적인 선도도시로서 서울의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민안보선언 이후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아시아 각국 수도 시민들의 시민안보 선언으로 발전시켜나가면서 ‘시민안보 실현을 위한 아시아 도시 간 시민협력회의’ 등 후속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수도 있다. 유엔과 유네스코가 이미 2000년에 ‘평화문화와 비폭력을 위한 선언 2000(Manifesto 2000 for a Culture of Peace and Nonviolence)’을 발표하였다. 유엔은 ‘평화문화’(Culture of Peace)에 대하여 “개인과 집단, 국가사이에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로서 갈등과 폭력을 극복하는 모든 행위와 태도, 가치관”으로 정의하였다. 유네스코는 평화문화를 “ 권존존중, 폭력거부, 양성평등, 민주주의 옹호, 국가 및 집단 간 소통과 이해를 표현하는 일련의 윤리적이고 심미적인 가치, 습관 및 관습, 타자에 대한 태도, 행동 및 생활양식”으로 정의한다. 유엔이나 유네스코의 평화문화에 대한 개념은 갈등의 평화적해결과 폭력의 거부, 관용과 다양성의 존중 등을 기본 가치로 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문화와 시민안보를 위한 서울시민선언’은 유엔과 유네스코가 정의하는 평화문화의 개념과 인간안보에서 착안한 시민안보 개념을 결합하여 그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기본 내용으로는 서울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평화통일 추구, 서울시민이 처한 다양한 삶의 환경 속에서 시민안보의 필요성, 평화문화 정착 등이 기본 취지가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사회적 안정, 환경권, 경제적 풍요, 문화권, 지속가능한 발전, 등 다양한 개념을 포함할 수 있다. 서울시가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이라는 시정 비전 아래 복지, 경제, 문화, 도시 지속가능성, 시민주권을 5대 목표로 설정했으며, 15개 분야의 285개 사업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이를 시민안보의 내용으로 재구성하여 선언에 포함할 수도 있다. 유엔과 유네스코가 사용하는 개념을 평화문화와 시민안보로 발전적으로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국제적인 보편성도 있다. 세계에서 최초로 ‘시민안보’ 개념을 서울시민들이 선언하여 서울의 도시 브랜드를 시민안보를 추구하는 평화도시로서 자리매김하게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민안보를 위한 세계 도시 간 협력으로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또 평화문화와 시민안보개념에 따라서 서울시가 지방자치단체로서 한계를 넘어서 서울시민의 평화를 위해 남북 교류협력을 추진하는 방안을 개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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