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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교육’ 현장을 가다](2)미국-뉴스쿨大 은퇴자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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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맨 2013. 9. 1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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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교육’ 현장을 가다](2)미국-뉴스쿨大 은퇴자교육원

 

-백발의 대학생들 “공부가 여생을 바꿨어요”-

뉴욕 맨해튼에 있는 뉴스쿨대학교. 개강을 맞은 9월19일 오전, 강의실로 올라가는 젊은 학생들 틈에 머리 희끗희끗하고, 지팡이를 짚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걸음이 좀 더딜 뿐, 캐주얼 복장에 책을 옆에 끼고 얘기꽃을 피우며 걷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학생이다. 이들도 강의를 듣기 위해 등교한 것이다. 뉴스쿨대학교 은퇴자교육원(IRP)의 10시 수업이 시작됐다. 동화 수업이다. 두명의 강사와 20여명의 학생. 학생도 강사도 모두 지긋한 나이의 은퇴자들이다. 연령대는 50대에서 90대까지.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뉴스쿨 대학교의 은퇴자교육원의 9월19일 ‘동화’ 강의에 참가한 학생들이 그림형제의 동화 ‘빨간두건 소녀’를 즉석에서 번안해 공연하고 있다. 뉴욕/손제민기자

 
“동화가 당신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자기소개를 겸해 얘기해 볼까요?” 강사인 아이비 베르추크(74)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학생들은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얘기를 꺼냈다.

“동화는 커서도 세상을 보는 눈이었어요.” “페미니즘 동화를 좋아했어요. 인생에 대한 매우 다른 관점을 갖는 계기가 됐거든요.” “어릴 적 추억은 많이 없지만, 지금은 손녀를 위해 열심히 읽고 있어요.” “그림형제의 민족주의적인 동화를 왜 그렇게 좋아했나 몰라요.”

분위기는 페미니즘 동화와 그림동화의 민족주의에 대한 토론으로 흘렀다. 또 다른 강사인 하워드 메니코프(60)의 의도다. 동화에서 여성이 어떻게 형상화됐는가, 디즈니 만화가 어떻게 동화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동화 ‘잭과 콩나무’에서 도둑질을 막으려 했던 거인은 왜 죽어야 했는가 등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 학교의 모든 강의는 ‘동료학습’ 방식이다. 강사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강사(teacher)’가 아니라 ‘조정자(coordinator)’라고 표현한다. 학생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어서 강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공부는 함께 해나간다. 그래도 대부분 강사들은 그 분야의 직업 경험이나 석사학위 이상을 갖고 있다.

강의 후반부에 메니코프가 즉흥극을 제안했다. 늑대가 소녀를 유인해 할머니를 잡아먹은 뒤 소녀까지 잡아먹으려다 나무꾼에게 혼쭐이 난다는 내용의 동화 ‘빨간두건 소녀’를 번안하는 것이다. ‘나무꾼이 채식주의자라면’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었다면’ 등의 지시문이 주어졌다. 즐겁게 웃으며 즉흥극에 참여하면서도 학생들에게는 ‘동화는 독자와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것’이라는 강의주제가 머릿속에 남았다. 시간을 넘겼지만 즉흥극에서의 느낌을 교환하느라 강의는 끝날 줄 몰랐다.

그 시간 다른 강의실에서는 ‘우리 아버지들의 세계’ ‘엘링턴:재즈의 왕자’ ‘미국 보수주의의 재탄생’ ‘이슬람 이해하기’ 등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1시간가량의 점심시간. 은퇴자 학생들은 카페테리아 식당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사고가 발생했다. 학생들 틈에 식판을 든 채 줄을 서 있던 에드나 스타인버그(80)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졌다. 뜨거운 음식을 온몸에 뒤집어 썼다. 앞뒤에 서 있던 젊은 학생들이 달려들어 당황해하는 그를 부축해준다. “할머니, 괜찮아요.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진 거예요. 할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자칫 구경거리로 몰려 부끄러움에 위축될 뻔했던 스타인버그는 ‘체면을 크게 구기지 않고’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했다.

‘역병: 질병이 역사에 미친 영향’이라는 오후 수업에는 오전에 학생으로 앉았던 버나드 패스터낵(75)이 강사로 나섰다. 앞선 강의의 강사들은 학생석에 앉았다. 패스터낵은 “이 수업은 강의보다 토론이 중요하다. 각자 아는 것을 조금만 보태도 우리는 한 사람의 뛰어난 강사를 모신 것보다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병리학과 역사를 연결시키는 쉽지 않은 과목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겠다는 열의로 가득 찬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뉴스쿨 IRP는 1962년 미국 최초로 설립된 성인학습기관이다. 당시 향학열에 불타는 151명의 퇴직교사들은 마땅한 교육기관을 찾지 못하자 각자 전공을 살려 동료학습 방식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경제학자 소어스틴 베블런, 철학자 존 듀이 등 진보적 학자들이 설립한 이 대학의 건학 이념이 성인을 대상으로 대학 수준의 평생교육을 하는 것이었던 만큼 이들은 이 곳에 안착했다. 이 모델은 이후 미국 전역에 확산돼 400여개의 미 평생교육기관들이 이 모델을 따르고 있다.

IRP 행정팀장 마이클 마코위츠는 “이 모델은 캠퍼스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연간 780달러를 내면 학기당 12주 코스의 IRP 강의를 4개까지 들을 수 있고, 모든 교내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다른 기관과 구별되는 이 학교만의 특징은 수업 외에 자치활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120여명의 학생들은 모두 커리큘럼선정위, 소식지편집위, 학생회 등에 소속돼 활동한다. 수업을 개설하고 강의를 맡는 것 모두 자발적으로 이뤄진다. 대학측은 공간과 기자재, 자료 등을 지원해줄 뿐이다. 미술, 연극, 역사, 문학, 철학, 정치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 38개 강의가 개설돼 있다. 학기마다 새로운 강의가 4~5개씩 개설된다는 점이 놀랍다. 학생들이 스스로 새 분야를 개척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 이 학교 최고령 학생은 104세였다.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등교했으며, 편안하게 세상을 떴다고 한다. 지금 최고령은 92세이다.

〈뉴욕|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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