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에 저항하는 삶의 양식 '자급'

2013. 9. 8. 16:00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착취에 저항하는 삶의 양식 '자급'

                                                    
독일 생태학자 마리아 미즈(왼쪽)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은 “좋은 삶을 살려면 자급 경제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arbeiterfotografie.com, 동연 제공

독일 여성학자의 대안경제모델

의식주 직접 해결 ‘소농’이 핵심

텃밭 등 다양한 도시생활 제안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힐러리에게 암소를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
꿈지모 옮김
동연·1만8000원

한국어판의 부제이고, 독일어판 원서의 주제목이기도 한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라는 표현은 다음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1995년 4월, 당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 농촌 마을 마이샤하티를 방문해 그곳 여성들과 대화를 나눴다. 소액대출(마이크로크레디트)사업으로 유명한 그라민은행의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라민은행이 힘이 됐나요?”

“네, 우리는 지금 직접 버는 수입이 있어요. 소, 닭, 오리 같은 자산도 있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물었다.

“그런데,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나요?”

“아뇨, 저는 암소가 없어요.”

“그럼 소득은 있나요?”

“전에는 있었어요. 하지만 남편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일을 그만뒀어요.”

“애들은 몇이나 되나요?”

“딸 한 명이요.”

마이샤하티의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작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힐러리! 소도 없고,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

이들이 힐러리가 ‘부자’ 나라에서 왔고, 재산도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 일화가 보여주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그것은 더 많은 돈과 상품, 사치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생산하고 재생시키며, 자기 힘으로 서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데”에서 나온다. 그것은 한 마리의 암소, 몇 마리의 닭, 약간의 현금 수입과 땅 같은 실질적인 생계수단이 있어야 현실화된다. 이런 능력을 가짐으로써 마이샤하티 여성들은 미국 대통령의 부인을 ‘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감과 위엄, 평등의식을 얻게 된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는 두 독일 여성학자가 생태여성주의 관점에서 대안 경제모델과 세계관을 제시한 책이다. 그 대안의 열쇳말이 ‘자급’(subsistence)이다. ‘자급자족 경제’라고 할 때 그 자급이다. ‘원시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이들의 일관성 있는 이론과 풍부한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들이 말하는 ‘세계관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은이들은 현재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가 4중의 착취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자본의 착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 제3세계(남반구·개발도상국)에 대한 제1세계(북반구·선진국)의 착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그것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경제’라는 빙산에서 수면 위에 나와 있는 ‘공식’ 경제는 자본과 임금노동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여성의 무보수 가사와 보살핌노동, 제3세계 자급경제의 소농과 장인의 노동, 미성년 노동, 그리고 자연이 수면 아래에서 이를 떠받치고 있다.

이런 체제 안에서 자기 삶이 타인과 자연에 대한 ‘착취’에 기반하지 않기 위해, 또한 착취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개발주의(성장주의)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충족하는 삶의 양식이 바로 ‘자급’이다. 먹을거리, 옷, 집 같은 의식주에 필요한 재화를 스스로 공급하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자급 생산은 삶을 창조, 재창조, 유지하는 데 쓰이며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모든 일을 포함한다. 자급 생산의 목적은 ‘삶’인 반면 상품 생산의 목적은 더 많은 ‘돈’이다”라고 말한다.

이 자급경제의 핵심은 소농경제다. 독일 쇠네펠트 지역에서 작은 땅을 가지고 젖소를 기르며 살아가는 시몬과 로이라는 두 여성 농부와의 인터뷰에서 지은이들이 염두에 두는 이상적 삶을 엿볼 수 있다. “내 손으로 풀을 베고 나서 어린 식물들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보는 게 행복이죠. 정원에 누워서 배 위를 비추는 햇빛을 느끼는 것도 행복이죠.” “제가 이해하는 자유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유, 지금 가서 나무를 베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말하죠.”

지은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당장 시골로 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시에서 이뤄지는 여러 자급활동도 소개한다. 영국의 물물교환 동아리, 캐나다와 스위스 등의 지역화폐운동, 미국의 도시텃밭 가꾸기, 일본 도쿄의 ‘야생농부’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임금노동자 생활을 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활동은 가치 없다는 생각을 고칠 것을 요구하며, 임금노동과 자급 생산을 병행해볼 것을 권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지만, ‘영원한 성장’이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 좌파운동들과 갈라진다. 이들은 보통사람들이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자급정치’의 예로 농촌과의 직거래,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 지역 주말시장, 지역상품 구매하기, 좋은 식품에 대한 정직한 가격 치르기, 유전자 조작 식품 거부하기, 거대 초국적 식량기업 상품 불매, 일과 노동 이슈를 정치가·자본가·노동조합에 맡기지 않기, 정부와 유엔을 믿지 않고 각 나라 민중운동과 직접 네트워크 유지하기, 도시 안에서 경작하기 등을 제시한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