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 사회사목의 존재와 길을 묻다 1. 정의평화위원회 2018년 새해를 맞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사목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떠한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다른 사목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사목은 정의평화위원회, 민족화해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등 각 ‘위원회’의 이름으로 ‘특수 사목’화 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분야보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 복음화하는 소명에 가장 가까운 사회사목이 과연 특수한 일부의 일인가는 오랜 물음이기도 하다. 촛불혁명 이후 적폐를 청산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각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이 역시 정부나 대통령의 일은 아니다. 적폐청산은 적발과 처벌, 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에서 복음화해야 할 세상 속으로 교회는 어떻게 들어가고, 무엇을 바꿔야 할 것인가. 그리고 교회 스스로는 무엇을 바꿔야 할 것인가. 주교회의 위원회 구성을 중심으로 6개 사회사목 분야를 통해 그 길을 함께 고민해 본다. |
정의와 평화를 위한 사목은 특수 사목이 아니라 사목 그 자체
“교회가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흐르면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역할에 소홀해졌습니다. 본당 사목은 본당의 울타리 안에서 신자 몇 명, 주일미사 참여 몇 명, 교무금 얼마....를 헤아리는 사목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그 숫자에 따라 일희일비 하고 지금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보수적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원인은 사목 자체를 잘못 인식하는 것에 있어요.”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용태 신부는 앞으로 정평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사목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라며, 사목의 개념, 대상, 사목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먼저 그는 본당 사목과 특수 사목을 나누는 것에 대해, 정의평화, 노동, 민족화해 그 모든 것은 사목 그 자체 안에 녹아 있어야 한다며, “특수사목이 아니라 사목이다. 본당 사목과 이른바 특수 사목은 장소만 구분될 뿐이다. ‘사목’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한 사람의 삶을 안방, 직장, 학교의 삶으로 나눌 수 없듯이, 사목은 그냥 사목”이라며, “그런데 본당 사목, 어떤 위원회로 나누면서 단어, 이름에 갇혀 버렸다. 그 때문에 세상과 교회가 괴리되고, 사회교리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사목은 사목이고 교리는 교리”라고 말했다.
성주 소성리 평화미사에 참여한 김용태 신부. (사진 제공 = 대전교구 정평위) |
본당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베이스캠프’
신자 각자가 세상 속 사목자
그는 또 사목의 대상도 다시 규정해야 한다며, “사목 대상자는 본당 신자, 교구 신자만이 아니라 본당이 속한 지역의 모든 주민, 모든 지역민으로 봐야 한다. 사목의 공간, 범주를 성당 안에 있는 사람으로만 보는 것은,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성당’으로 한정하는 것이고, 성당을 또 다른 세상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신부는 본당은 사목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베이스캠프’이고, 그래서 세상으로 나아갔던 이들이 상처받고 힘들고 좌절할 때, 돌아와 쉬어가는 곳이므로 가장 기본적인 것만 갖추면 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은 사목의 우선 대상자지만, 또한 사목자이기도 합니다. 사제직은 세례를 받는 순간 받는 직무이기도 해요. 신자들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하며 살고 있는 사목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교회라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김 신부는 세상을 복음화하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목자’를 ‘사제’로만 한정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고 말했다.
“사제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나?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그는, “이미 세상 속에 있는 신자들이 바로 그곳에서 사목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세상 곳곳에서 이뤄지고 모든 곳이 교회가 된다. 신자들을 사목자로 양성하고 기회를 주고, 그들이 사목을 하다가 힘들면 돌아와 치유 받는 곳이 바로 본당”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 모든 것이 또한 정의평화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고 모든 사회사목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라며, “사목의 패러다임이 그렇게 변화된다면, 굳이 특수사목, 사회사목, 사회교리라는 말이 필요 없다. 구분이 없는 상태,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하느님이 만든 온 세상이 교회다. 가르고 구분하고 한계짓는 것은 사목이 아니”라며, “간장종지에 바다를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종지를 바다에 던지면 종지도 바다가 된다”고 설명했다.
정평위의 현장은 ‘본당’, 교회 안에 있다
“현실적으로 정평위가 해야 할 일은 더 적극적으로 교회부터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복음화죠. 정평위 활동에 대해 주로 현장미사 등을 생각하는데, 사실 정평위의 주요 현장은 교회이고, 사제와 신자가 그 대상입니다. 가장 어렵고, 가장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죠.”
정의평화위원장으로서 김용태 신부가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은 것은 사제, 신자들과의 소통이다.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참여, 연대도 당연하지만 그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회내적 복음화”라며, “정평위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은 정평위의 일을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교리가 모든 신자들의 상식이 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사회복지분과의 일이 아니라 신자 모두의 기본 소명, 감수성의 문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정평위는 너무 특별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김 신부는 교구 평의회에서 정의평화위원회가 하는 일과 지역 현안, 연대의 내용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공유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논산 부창동 성당 사회교리학교 모습. 대전 정평위는 각 본당을 돌면서 사회교리학교를 진행한다. 목표는 모든 성당에서 사회교리학교를 여는 것. (사진 제공 = 대전교구 정평위) |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김 신부는 최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정평위의 입장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먼저 그는 최근 대구대교구와 인천교구 관련 사건과 이에 대한 교회의 태도에 대해, “90퍼센트를 잘 했지만 10퍼센트는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다. 그러나 교회는 100퍼센트를 추구해야 한다”며, “현실적 한계로 온전한 복음화를 하지 못할 뿐, 교회의 메시지는 무조건 100퍼센트여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 ‘그래도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고 말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록 사소한 것으로 교회가 욕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복음은 덜 때리고 덜 훔치라고 하지 않는다. 살리고 내 것을 내주라고 한다. 교회는 남들보다 덜 잘못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교회가 잘못을 반성하고 고백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해성사가 은밀하고 내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간과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참회예절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한다는 것이다. 잘못은 하느님뿐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고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교회의 잘못으로 상처받는 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비밀스럽고 내밀한 것이 되는가”라며, “그런 고백은 하느님이 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형제들에게도, 그 가운데 피해자에게, 세상을 향해 고백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교회의 잘못에 대한 정평위의 역할도 많은 고민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며, “물론 침묵할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말하고 세상을 향해 고해성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또 보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충남 아산 파인텍 노동자들의 굴뚝농성장에서 연대 미사를 봉헌한 대전 정평위. (사진 제공 = 서울대교구 노사위) |
교회는 더 많이 알아야 하고, 알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각 교구 정평위 가운데 지역사회 문제 해결에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곳이다. 얼마 전에는 대전 '도솔산(월평공원)‘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생태환경위와 함께 막았고, 갑천 습지 보존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최근에는 대전 유성 원자력연구원 핵재처리를 막아내고 있다.
지역사회 시민단체와 연대하는 것에 대해 김용태 신부는 교회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며, 지역의 문제는 교회를 포함한 공동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는,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교회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모르고 있던 것들을 알려 주고 교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오히려 도와주고 있다”며, “교회는 사실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많다. 눈앞에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모르고, 그러니 ‘가난’, ‘가난한 사람들’이 추상적이고 막연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의와 평화 역시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교회가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원의 표징으로 온 가난한 아기 예수를 목동들이 가장 먼저 찾아낸 것은 목동들이 가난했고, 가난한 이들을 어디 가면 찾을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하는 이유는 가난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합리화의 이유가 될 수 없어요. 굶고 있는 나자로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부자는 그 책임을 졌습니다. 교회는 알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세속화의 뒤에는 게으름이 있어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