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0. 12:53ㆍ이런저런 이야기/책 속에 길이 있다
대중의 욕망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베스트셀러로 읽는 ‘시대의 키워드’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베스트셀러는 언제나 당대 사람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1945년 해방 이후 지난 70년을 수놓은 베스트셀러들을 분석해도 마찬가지다. 지난 70여년 베스트셀러는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그 흐름이 달라졌다. 그 흐름 변화의 기저에는 1950년의 한국전쟁, 1960년의 4·19혁명, 1972년의 10월유신,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1997년의 외환위기,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출판문화사적 측면에서 돌아보면, 각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도 뽑아낼 수 있다. 우선 광복 이후 해방 공간에서는 민족 문화 재건기, 1950년대는 전후 허무주의, 1960년대는 이데올로기, 1970년대는 산업화, 1980년대는 역사성, 1990년대는 대중 출판, 2000년대는 글로벌 출판, 2010년대는 하이브리드 출판이다.
■해방 ~ 1949년, 민족 문화 재건
광복을 맞이하긴 했지만 남북은 다시 38선을 경계로 갈라졌다. 그 와중에도 일제의 치욕을 겪었던 국민들은 해방 직후 우리의 역사와 글, 문학에 대한 뜨거운 욕구를 분출했다.
대중의 민족 문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출판사의 숫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일제 총독부의 검열과 통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자마자 45개사에 불과하던 출판사 숫자는 1946년에 150개사로 급증한다. 이후 1947년에는 무려 581개사로, 1948년에는 792개사로 수직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출판사 숫자만 급증한 것이 아니다. 책이 출판되면 무조건 잘 팔려나갔다. 마치 오래 굶었던 사람들에게 밥 같은 책을 주는 모양새였다.
특히 우리 글과 우리 역사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한글학회가 1947년 펴낸 <우리말 큰사전>, 조선어학회가 1946년 펴낸 <조선어표준말모음> <조선신문학사조사>(백철·1949)를 비롯해 가톨릭 순교자들을 다룬 <한국 79위 순교복자전>(아드리앵 로네·1946), 석탑을 통해 미학적으로 한국미를 탐색하는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고유섭·1948), 전통 설화를 천착한 <조선민족설화의 연구>(손진태·1947) 등의 사전류나 묵직한 학술서까지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시인 신경림이 “한글을 깨치고서 처음 읽은 책”이라고 밝힌 김성칠의 <조선역사>는 초판을 5만부나 발행했지만 바로 동이 날 정도였다. 이 책이 광복 후 최초의 베스트셀러인 셈이다.
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로는 1946년 ‘문학’지에 발표한 단편소설인 이태준의 <해방 전후>, <내가 넘은 삼팔선>(후지하라 데이·1949),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크리미센코·1948), 최근 복각판이 나오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화제를 모은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1948년 ‘개벽’지에 발표한 소설가 황순원의 단편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 시인 모윤숙의 장편산문집 <렌의 애가>, 시인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의 공동 시집으로 이들 시인을 ‘청록파’라 부르게 된 계기를 만든 <청록집> 등이 있다.
■1950년대, 전후 허무주의
톱질을 하듯이 양쪽의 군대가 밀고 다녀 ‘톱질 전쟁’이라 불리기도 한 한국전쟁은 모두에게 참혹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 전체 인구 3000만명 중 300만명가량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후유증도 엄청났다. 전국 곳곳에 난민은 넘쳐났고 모든 면에서의 결핍도 심각했다.
하지만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와 더불어 한쪽에서는 도시민들의 소비에 대한 욕망도 넘쳐났다. 이때 뜬 인물이 ‘아프레걸’ 오선영이었다. ‘아프레걸’은 전후(戰後)를 뜻하는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 guerre)’와 소녀를 뜻하는 영어 단어 ‘걸(girl)’을 합성한 조어다.
향락과 사치와 퇴폐를 상징하는 ‘아프레걸’ 오선영은 소설가 정비석의 작품 <자유부인>의 주인공이다. <자유부인>은 정숙한 가정주부였던 대학교수 부인 오선영이 남편의 제자인 신춘호와 춤바람이 나면서 가정이 파탄의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이던 황산덕은 <자유부인>을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선 ‘명랑소설’의 효시인 <얄개전>(조운파)이 등장했다. 허무한 마음의 대중은 이 <얄개전>을 통해 잠깐이나마 위로를 받았다. 여러 남자와 아슬아슬한 키스와 애무를 해대는 또 다른 ‘아프레걸’ 제니가 등장하는 <슬픔은 강물처럼>(최희숙), 동서고금의 명언들을 모은 명언집 <마음의 샘터>(최요안), 시인 주요한이 전선 용사들의 ‘군수품’이라고 평가한 애정소설 <청춘극장>(김래성)도 당시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들이다. 이외에 기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지는 조병화의 로맨스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등도 있다.
■1960년대, 이데올로기
오랜 독재의 마침표를 찍은 4·19혁명으로 1960년대의 문이 열리면서 대학생들이 현실 권력의 한 축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1960년대 내내 4·19와 5·16 세력, 즉 학생과 군부세력 간의 투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중은 마음을 둘 데가 없었다. 최인훈의 걸작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북으로 올라가 북한의 정치 체제에 가담해보지만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방황을 하던 그는 결국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행을 택하지만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다. 이명준은 4·19의 빛나는 성과를 5·16 세력에 빼앗겨 좌절하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깊은 허무감을 안겼다.
이 시기에는 자궁암으로 죽어가는 32세 여인의 회고담 형식을 띤 연애소설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박계형), 초등학교 5학년생 이윤복의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자기 구원’이라는 새 여성상을 제시한 애정소설 <석녀>(정연희),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대하역사소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유주현)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70년대, 산업화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김지하의 <오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는 18년 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결국 막을 내렸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 위기’를 핑계로 내세워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대학까지 병영화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국가 위기’가 아니라 ‘정권 위기’일 뿐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본격적으로 산업사회로 접어드는 이 시기에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한편으로는 부랑 노동자의 삶을 담아낸 황석영의 <객지>, 도시 빈민 가족의 일상적 삶과 부조리적 사회상을 그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곡마단의 비애를 그린 <부초>(한수산) 등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들 작품은 급격한 고도성장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한국 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그늘도 있었다.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여공, 식모, 버스 차장 등이 넘쳐났는데도 불구하고 <별들의 고향>(최인호)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조선작), <겨울여자>(조해일) 등의 주인공들이 인기를 끌었다. 여성 상품화 현상을 ‘호스티스’라는 사회적 존재에 초점을 맞춘 이들 소설을 대학생들은 ‘창녀’라는 군상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적 고발로 여겼다.
■1980년대, 역사성
1980년 광주의 ‘살육’과 현대판 홍길동인 장총찬이 온갖 사회악에 대항하며 악의 무리에 맞서는 소설 <인간시장>(김홍신)으로 1980년대는 시작되었다. 1980년대는 이념의 시대이자 불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출판문화사적으로는 대하소설의 시대이자 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제5공화국 정권은 스포츠, 스크린, 섹스라는 이른바 ‘3S 정책’으로 국민을 호도하려 했다.
하지만 대중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읽고자 노력했다. 사회 변혁에 대한 철학적 논리화를 시도한 <철학에세이>(조성오)는 인문서 최초로 밀리언셀러에 올랐다.
이 시대에 활짝 핀 대하소설들은 소설을 넘어 대중에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만든 ‘역사교과서’ 역할을 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들도 대중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정치사회적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들부터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시까지 다양했다. <노동의 새벽>(박노해)과 <타는 목마름으로>(김지하) 등의 이념시나 민중시로 뜨거워진 대중의 가슴을 식혀준 것은 시인 서정윤의 <홀로서기>나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해인 수녀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의 서정시였다.
■1990년대, 대중 출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마자 시작된 1990년대가 만들어낸 최고의 상품은 ‘개인’이었다.
1990년대의 문을 연 <(나에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부터 1999년 최고의 화제가 된 탤런트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까지 책 제목에 ‘나’가 넘친 것이다. 이 시대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의 수위가 점차 고조된 때였다.
또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등 자기계발서나 다름없는 역사 인물 소설 트로이카가 1990년대 대중 출판의 문을 활짝 열었지만, 1995년에 아마존닷컴이 문을 열고, 윈도95가 출시되며,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세계화와 정보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출판문화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즉 <컴퓨터 길라잡이>(임채성 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한호림),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같은 실용서와 자기계발서가 상한가를 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 열풍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해 국내 답사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를 비롯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일본은 없다>(전여옥),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등 어떻게 보면 민족주의를 자극한다고도 할 수 있는 책들이 동반해서 인기를 끌었다.
여성들이 사랑(결혼)보다는 일에 더욱 무게 중심을 옮겨가면서 여성의 홀로서기, 주체성 등을 강조하는 책들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혼자 눈뜨는 아침>(이경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시대 또 다른 베스트셀러들로는 한국형 판타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퇴마록>(이우혁)과 <드래곤 라자>(이영도)를 비롯해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석용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잭 캔필드 외), <오체불만족>(오토다케 히로타다) 등이 있다.
■2000년대, 글로벌 출판의 시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외환위기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한국인들은 2003년의 ‘카드대란’,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대형 위기를 다시 두 차례나 맞이해야 했다.
거대한 경제적 위기가 일상적 삶의 부분부분까지 침투하면서 개인의 고독감도 깊어만 갔다. 벤처 열풍이 불던 2000년 초반에는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를 읽어 부족한 역량만 갖추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화>(틱낫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다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켄 플래차드 외), <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긍정의 힘>(조엘 오스틴) 등 자기계발서들의 인기가 그야말로 폭발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배려>(한상복) 등의 성공 우화가 인기를 끈 2006년 이후 독자들은 ‘성공’에서 ‘행복’으로 말을 갈아탔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 줘잉)를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것처럼, 제한된 여건 속에서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행복이었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두 주인공도 그랬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가시고기>(조창인), <국화꽃 향기>(김하인),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등 이 시기에 밀리언셀러가 된 소설들은 대체로 극도로 축소된 인간관계만을 다루며 개인의 안위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하이브리드 출판의 시대
한마디로 이명박 정권은 너무 부도덕했다.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기 시작하던 2010년 정권의 도덕성을 묻는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끝을 모르는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대중들은 ‘셀프 힐링’의 깊은 늪으로 더욱 빠져들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의 인기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 스님)로 이어지면서 멘토가 어깨를 두드리며 던져주는 한 줄의 ‘위로’에 공감을 했다.
끝 모르는 위기감 속에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미움 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 외)의 인기를 <자존감 수업>(윤홍균)이 이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포기할 것이 없는 ‘N포세대’는 이제 욕먹을 각오를 하거나 자존감을 지키는 것에서 겨우 삶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젊은 세대는 웹툰이나 웹소설로 몰려가고 있다. 다른 미디어와 결합된 ‘연계형 책’들이 지금 베스트셀러 목록의 60% 이상을 차지하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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