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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멕시코 방문 사흘째, 빅토르 마누엘 레이냐 스타디움에서 멕시코 신자들을 만나신 교황님의 연설문 전문입니다

숲에 관하여/숲, 평화, 생명, 종교

by 소나무맨 2016. 2. 19.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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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연민과 동정을 알지 못하는 화장한 얼굴보다 희생으로 인해 고단해 보이는 얼굴을 지닌 가정을 더 좋아합니다."

2월 15일 멕시코 방문 사흘째, 빅토르 마누엘 레이냐 스타디움에서 멕시코 신자들을 만나신 교황님의 연설문 전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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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치아파스에 올 수 있게 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이땅을 밟고 이 땅 위에 서서, 가정의 분위기와 내집의 분위기를 풍겨주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대하는 이 장소에 있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맥동하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자신들의 가정과 삶의 문을 열어보이면서 증언을 들려 주신 가정과 친구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빵을 나누고 양분을 섭취하며 일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수고의 땀을 나누는 식탁에 우리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기쁨의 빵, 희망의 빵, 고난 앞에서 그리고 실망과 실패 앞에서 보이는 꿈과 땀의 빵입니다. 우리를 여러분들의 가족으로, 여러분들의 식탁으로, 여러분들의 집으로 들여보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누엘 형제, 형제의 증언 특히 형제의 모범에 감사를 드립니다. 형제가 사용한 부모에게 말한 후 취한 태도로써 “용기를 준다”라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형제는 삶에 용기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에게 용기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항상 하시려고 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용기를 주시고, 우리가 계속 유지하고 도전하는, 집과 가정을 아는 삶을 꿈꾸고 건설하는 이유를 제공하시려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생각하신 것이고, 이를 위해 선조들의 시대부터 싸우셨습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되어지던 순간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젊은 쌍에게 용기를 주셨고, 모두 다 끝나버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와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일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나를 내리시어 용기를 북돋으셨습니다. 때가 차자 당신 아드님을 선물로 주시면서 인류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는 여러 순간과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세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러지 않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분입니다. 왜! 그분의 이름은 사랑이고, 그분의 이름은 무상의 선물고, 그분의 이름은 헌신이며, 그분의 이름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온능력과 명쾌함으로 당신 아드님, 하느님 나라가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삶을 바친 예수님을 를 알게 하셨습니다. 하늘을 열 수 있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열 수 있는, 우리의 손을 펼 수 있는 활력이 움직이게 하고 우리에게 새 지평을 보여주는 새로운 법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정의 맛을 지녔고 나누는 삶의 맛을 지닌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할 때 가능한 곳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전망, 우리의 행태, 많은 경우 잔치 포도주에 취한 것같은 우리의 감각 등을 전환시키실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고치실 수 있고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고 자꾸 자꾸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실 분입니다. 그분은 항상 모든 것이 새롭게 되게 하실 분입니다.

마누엘 형제님, 형제는 내게 어려운 순간을 맞아 용기를 잃고 있는 모든 청소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패기가 없고, 힘이 없고, 의욕을 잃고 있습니다. 잘 말씀했듯이, 그런 모습들은 종종 혼자라고 느끼기에, 그 누구에게도 말할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이런 감상은 베아트리스가 한 증언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잘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불확실성과 외로움으로 인해 싸움이 항상 어려웠습니다.”라고 베아트리스가 말했습니다. 곤궁이나 부족, 흔히 최소한의 필수불가결한 것조차 없을 때 앞으로 나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특히 돌봐야 할 어린 아이들이 있는 경우 우리의 의욕은 꺾이고 심한 걱정으로 빠져듭니다. 곤궁은 위장을 위협하는 것을 끝나지 않고 (이미 많은 이들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영혼까지 위협하고 우리의 의욕을 꺾으며 힘이 빠지게 하고,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사탕발림의 길이나 대안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드는 매우 위험한 곤궁이 있습니다. 고독과 고립으로부터 나오는 곤궁입니다. 고립은 항상 사악한 권고자입니다. 두 단어는 자주 의식없이 사용하기도 하는데 같은 표현입니다. 혼자 있음은 용기를 주는 것과는 멀리 떨어진 것으로 마치도 나방처럼 영혼을 좀먹는 것입니다.

수많은 표면적인 해결책으로 우리를 나약하게 하는 이 곤궁과 고립에 대항하는 방식은 여러 차원으로 제공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모든 가정과 모든 사람이 학습과 품위로운 일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것을 보호하고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와 도움을 체험하면서 느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려 한 함베르토와 클라우디아의 증언이 강조한 것입니다. 법과 개인의 투신은 곤궁의 가시철망을 끊기 위한 절단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이 약화되고 논의의 중심이 되는 여러 상황들을 보고 또 살고 있습니다. 가정이 어느 정도 지난 유행이고 고립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시스템을 우대하는 현대화의 저항 아래 있는 우리 사회 안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러 사람들이 여기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종종 고통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러나 제가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여러 번 언급했던 것을 가정에도 적용하여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폐쇄와 안일의 병에 걸리 사회보다 매일 사랑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상처입은 가정을 더 좋아합니다. 저는 나르시즘에 걸렸고 사치와 안락에 사로잡힌 사회보다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려는 가정을 더 좋아합니다. 저는 동정과 연민을 알지 못하는 화장한 얼굴보다 희생으로 인해 고단해 보이는 얼굴을 지닌 가정을 더 좋아합니다.

제게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청을 하셨는데 지금 바로 여러분들과 함께 그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멕시코 국민 여러분, 여러분들은 ‘더’ 특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머니, 이 땅을 방문하길 원하셨던 과달루페의 성모님이 계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전구를 통해 불확실과 고독에 패배하지 않을 가정의 꿈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미래를 보호하시기 위해 항상 깨어 계시며, 당신 아드님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자세를 항상 갖추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기도합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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