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샌더스, 코빈
경향신문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입력 15.09.30. 20:48 (수정 15.10.01. 09:37)
몇몇 늙은이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뛰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 꼴이 하도 기막혀서, 미치지 않으려면 세속과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이승을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그런 (시건방진, 그러나 절박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뜻밖에도 프란치스코 교황, 버니 샌더스, 제러미 코빈이라는 세계변혁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말하는 ‘지도자’들이 잇따라 출현하여 지금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재작년 취임 직후 발표한 <복음의 기쁨>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임을 천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새로운 독재’ 때문에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다수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고, 이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자고 호소했다. 그 교황이 최근에는 현재 인류사회의 가장 긴급한 문제인 기후변화에 대한 신속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회칙>을 발표했다.
아직도 환경위기나 기후변화를 무시하고 있는 권력엘리트들은 논외로 하고, 많은 환경운동가, 양식 있는 시민들의 기후변화 대응 자세도 대부분은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기술개발에 기대를 걸거나 리사이클링, 자연에너지 개발, 유기농 식품 권장, 유해산업 시설에 대한 반대운동 등등, 이슈별 운동에 참여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인간사회와 지구를 파괴하는 보다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요인, 즉 경제와 정치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노력이 될 뿐이다. “지금 세계에는 환경위기 같은 것은 없다, 문제는 정치의 위기이다.” 이것은 지난 봄 퇴임한 (누구보다 환경위기를 우려했던)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했던 유명한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결국 이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불가피하게 오늘날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온 주역들, 즉 기득권층, 부유층, 지배층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결코 ‘좌파’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익한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지만, 지금 좌우파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논리의 야만성과 파괴성에 어떻게 둔감할 수 있겠는가?
노동자 해고의 자유화, 규제 완화, 민영화, ‘자유’무역 확대 등등을 통해서 대기업을 먼저 살리고, 부자가 더 부자가 되게 하면 가난한 자들도 언젠가는 덩달아 잘살게 될 것이라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허망함은 그 정체가 이미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확연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무엇 때문인지 세계의 대다수 지도자, 심지어 야당 정치가들도 이 엉터리 경제논리의 진실을 명확히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방기하거나 극도로 꺼려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 것일까?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도 엄청난 위기상황에 빠져 있는 오늘날, 이 세계의 가장 큰 불운은 정치든 종교든 이른바 지도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왜소하고 비겁한 인격, 편협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이라는 사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타났고, 이어서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새로운’ 지도자가 미국과 영국에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여 지금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라고 하지만, 미국 민주당 차기 대통령 예비후보로 등장한 버니 샌더스나 영국 노동당의 (노동당 주류 엘리트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새 리더로 선출된 제러미 코빈은 40년 이상의 오랜 정치 경력자들이다. 그들은 80년대 초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정부가 주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특히 구소련 붕괴 이후) 세계를 압도함에 따라 극심한 불평등, 인권유린, 야만적인 전쟁, 민주주의의 파괴, 자연환경의 황폐화가 확산·심화되는 과정을 생생히 목격하고, 외롭게 저항해왔다.
그들은 초지일관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회정의의 실현, 약자와 생명과 자연을 보호하는 게 정치의 본분이라는 신념을 충실히 지켜왔다. 당연히 그들의 정치행로는 부도덕한 시스템에 투항해버린 대다수 ‘야당’ 정치가들의 기회주의적 행태와는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오랜 세월 고립된 채 변두리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결국 이제는 자본주의시스템이 수명을 다했다는 것, 특히 신자유주의 논리의 귀결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지금 다수 시민들 사이에 광범하게 공유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따져보면, 교황이나 샌더스, 혹은 코빈의 메시지는 별로 새로운 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경제는 사회적 공통자본(공공재)을 고르게 나누는 일이어야 하고, 정치란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상식’의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그 상식이 이제 세계의 ‘중심부’에서 어쨌든 강력한 발언력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발언이 왜 하필 연로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부활했을까?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오랫동안의 체험을 통해 이 세상의 비참과 고통은 어떤 불가항력의 논리가 아니라 실은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자의적인 결정이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싸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가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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