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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 좋았던 그 동네, 이젠 모든 게 다 바랬다--골목이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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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살아(사라)지다
색(色) 좋았던 그 동네, 이젠 모든 게 다 바랬다

용동

황당한 연계일 수도 있다. 술-권번-요정-여인숙-산부인과. 용동은 유난히 이와 관련된 집들이 많았다. 100여년 전 용동권번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골목마다 꽃 분내가 짙게 흘러나왔다. 니나노 장단 가락이 흘러나오던 용동골목은 이제 인기척조차 없다. 목로주점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아 노가리 굽는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젊은 연인들이 통행금지 핑계 삼아 하룻밤 사랑을 나누던 여인숙은 장기 투숙하는 날품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노래와 웃음을 팔아 치마 속에 넣어뒀던 쌈지 돈을 독립자금으로 선뜻 내어놓았던 용동 기생의 흔적은 돌계단에 새겨진 글 한 줄이 전부다.



권번(券番)은 사어(死語)다. 이제는 쓰지 않는 단어다. 용동에는 ‘권번’이란 공간이 있었다. 사시사철 분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의 신신예식장 부근이다. 권번은 기생을 손님의 요청에 따라 전용 인력거에 태워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책임지고 수금하는 역할을 하는 등 매니저 역할을 담당했다. 인물, 태도, 노래와 춤 등의 심사를 통해 여자 아이들을 모집해 기생으로 양성하는 일도 했다. 용동권번은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邵城)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고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적혀있다.
인천에 쌀 거래를 하는 미두장이 번성하면서 돈 많은 미곡상, 물산객주들이 몰려들자 요정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용동권번 주변에는 일월관, 용금루, 화월관, 조선각 등이 성업을 이뤘다. 1931년 통계를 보면 인천에는 일본 요리집 8개소, 한국 요리집 3개소, 일본 예기 33명, 한국 기생 77명이었다.
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이 있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가 된 이화자가 용동권번 출신이며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그리고 일본인보다도 일본노래를 잘 불러 일본요정으로 단골출장을 다닌 이화중선과 '아리랑'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도 이곳 출신이다. 용동 기생 박미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인천항에 입항한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 일 넘기게 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전한다. 훗날 영화계의 스타 계보에 올랐던 복혜숙도 한때 용동권번의 기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까지 한 인텔리 여배우로 토월회 활동 때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공연에 나섰다가 흥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며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서울로 떠나면서 그를 남겨놓으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


지워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돌에 새긴 글자는 몇 백 년은 거뜬히 갈 것이다. 신신예식장에서 용동 칼국수집 동네로 내려가는 골목길의 돌계단에는 ‘龍洞券番, 昭和 四年 六月 修築’이란 글자가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돼 있다. 2011년 동사무소는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깔끔하게’ 발라 벌렸다. 과거의 기생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의 요청이었는지 아니면 생각 없는 관공서의 행위였는지 알 수는 없다. 지역 문화 단체로부터 한 소리 듣자, 며칠 후 글자를 가린 시멘트를 벗겨내 ‘龍洞券番’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유흥 의식은 우리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들은 도시를 만들면서 반드시 신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며 이어 바로 옆에 유곽이나 권번 따위를 설치했다. 그들에게 유흥업소는 도시 건설의 필수 인프라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업소를 개축하고는 다리 하나 놓은 것처럼 떠들썩하게 기념해서 동네 길목 돌층계에 버젓이 ‘용동권번’이라는 이름을 조각했을 것이다.
한술 더 떠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기 까지 했다. 계단에 새겨진 ‘소화 4년’은 1929년이다. 이와 다른 건축 행사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1925년 11월 용동권번의 성공적인 개축을 맞아 크게 잔치를 벌인 기사가 1925년 11월 18일자 시대일보에 게재되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인천부 용리에 있는 용동권번은 개축 기금을 마련키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지난 여름에 연예회(공연)를 열어 부내의 유지들의 기부를 받기도 했다. 마침내 2층 양옥 및 확대한 건물을 신축하였는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5일부터 17일 까지 3일간 낙성연을 벌였다. 첫날은 신문기자들을 초대했고 나머지 이틀은 부내 유지들을 초빙했다. 부윤(현 시장)도 개축에 대한 축사를 전했다.”
권번 홍보도 드러내놓고 했다. 일본어 선전문구와 함께 기생명단을 적어 내걸기 까지 했다. 당시 소성권번의 홍보 문구를 보자. “예도(藝道) 발달의 중임을 맡고 수련을 거듭하기를 그 몇 성상(星霜)이던가. 이제 예도의 자신이 가슴에 가득 찬, 꽃 같은 기생(妓生)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무렵 기생들은 신여성의 부류로 속하면서 신문물의 도입과 소비를 이끌어가기도 했다. 신여성들의 호칭인 모던걸(modern girl)은 모단(毛斷·머리카락을 자른)걸로도 불렸다. 실제로 여성 단발은 1920년대 들어 기생들에 의해 주도됐다. 머리는 앞서 나가는 여인들이었지만 몸은 늘 권번에 구속돼 있었다. 1926년엔 인천의 기생이 극장에서 영화 해설을 하는 젊은 변사(辯士)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가 포주에게 다시 붙잡히자 1926년 5월 9일자 조선일보는 사회면 기사에서 “불상한 어린 양(羊)과 가티, 참아 떠러지지 안는 발을 띠워 다시 부자유한 농조(籠鳥·새장 속의 새)의 생활을 면치 못하게 되엿다”며 안타까워했다.




기생들은 요정에서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이벤트 행사 도우미로도 활동했다.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 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평양명기 앵금’ ‘인천기생 초선’하는 식으로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더 나아가 기차 칸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승객 유인에 한 몫 했다. 오늘날 나이트클럽의 ‘여성 무료입장’의 원조격이다.
그들은 신여성답게 현실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은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노래와 웃음을 팔아 치마 속에 넣어뒀던 쌈지 돈을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선뜻 내어놓은 것이다. 또한 1925년 7월 엄청난 비가 부천군 일대(현재의 인천시 남구 일대)에 쏟아져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용동권번의 모든 기생들은 많은 식료품을 가지고 부천군 일대를 순회하며 이재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46년 4월 15일 인천권번 대표 김본건은 광복 후 중국에서 귀환한 전재민 동포들이 있는 수용소를 방문해 기생들이 모은 구호금 1만원을 전달했고 동명학원에도 1만원을 기부했다. 이밖에 영화보통학교 운동장 확장 비용도 마련하는 등 사회참여도가 높았다. 40년대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이 가열되고 쌀 배급에 이어 술도 제한적으로 공급되면서 요정들이 하나둘 간판을 내렸고 이에 따라 권번도 문을 닫았다.

기생집이나 요정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서민들은 값 싼 선술집이나 목로집을 이용했다. 목로집은 온돌 부뚜막과 나무로 만든 긴 탁자가 있는 술집으로 따뜻하게 데운 약주와 함께 인천 앞바다에서 잡아온 생선과 찌개를 안주로 팔았다. 이 목로집은 인천에서 처음 생긴 뒤 서울로 퍼져나 ‘목로주점’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용동에서 영업을 한 ‘안흥관’과 ‘청대문집’ 등 목로집들은 광복 후에도 한동안 술꾼들로 문턱이 닳도록 장사가 잘됐다.
1970년대 들어 이 동네에는 용동큰우물 옆 막다른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주촌집을 비롯해 노가리집, 영주집 등 저렴한 술집들이 많았다. 용동 골목에서는 한때 ‘동그랑땡’이라는, 지금으로 말하면 모듬전이 인기 안주였다. 70년대 중반 로젠켈라(후에 장미회관)라는 세련된 맥주집이 등장했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키가 아주 작은 아저씨가 항상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했고 안에는 현란한 조명 아래 미니스커트를 유니폼으로 입고 가슴에 명찰을 단 웨이트레스들이 써빙했던 술집이다. 술값이 만만치 낳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출입했던 곳이다. 이후 목로집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마음과 마음’ 등 같은 7080세대의 생맥주집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80년대 들어 용동 골목에는 후에 ‘칼국수거리’라는 팻말이 세워질 만큼 칼국수집들이 전성기를 맞이한 적이 있다. 아마 주객들이 값싸고 시원한 바지락 국물로 해장을 한 탓일 것이다. 새집칼국수, 큰우물칼국수, 황고집칼국수집, 원조칼국시 등 골목 안은 늘 국수 냄새로 진동했다. 이 거리에 칼국수집의 터줏대감인 초가집이 있다. 초가집칼국수 집 주인 신경현(81) 할머니가 칼국수를 삶은 지 58년. 할머니는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솜씨 그대로 날콩가루를 넣고 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바지락으로 국물맛을 내고 애호박, 파, 마늘을 넣고 끓이는 칼국수 국물의 맛은 잡맛 없이 그야말로 시원하고 깔끔하다.
신 할머니가 시어머니가 하던 초가집을 이어받은 것은 46세 때였다. 갑작스런 시어머니의 와병으로 부산에서 극장매점을 운영하던 일을 접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시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며느리에게 칼국수 반죽하고, 만두 빚고, 김치 만드는 일을 전수했다.
“처음에 이 집터 일대는 다 흙이었어요. 흙바닥에서 국수를 밀고, 연탄에 풀무질을 해가며 끓였어요. 구들장에 앉아 먹었지만 손님들이 미어터져 골목 밖으로 줄을 섰죠.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기와집이 지금의 4층을 올릴 만큼 돈도 좀 벌었죠.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가스비도 힘들 만큼 많이 달라졌어요.”

용동큰우물 기와지붕 건설 준공식(1967년)
칼국수로 따듯하게 배를 채우고 커다란 우물가에 다가섰다. 1백년 이상, 아니 아득한 그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동큰우물이다. 이 우물은 주변 지형을 볼 때 마치 사람의 사타구니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물이 풍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큰우물’이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아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1960년대까지 만해도 율목동, 신흥동, 내동, 창영동 주민들이 이 우물을 길어다 먹었다. 물이 달고, 끝맛이 시원해 옛날 우물 주변에 있던 대화양조장, 영화양조장 등 5개의 양조장들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마차를 동원해 물을 날라다 술을 빚었다. 인천시가 60년대 중반 큰 우물 바로 옆에 담배 가게를 내주는 조건으로 가게 주인한테 우물 관리를 하도록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67년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지붕의 6각 정자로 우물을 에워 쌓다. 이때 인천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서예가였던 동정(東庭) 박세림의 작품 '龍洞 큰우물' 현판을 걸었다.
최근 용동큰우물 주변은 주촌 등 골목에 있던 목로집들이 다 헐리고 작은 공원으로 정비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우현(又玄) 고유섭을 만난다. 그곳은 그의 탯줄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유섭은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 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1운동 때에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아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이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외로움과 우울함을 시, 시조, 수필 등으로 표출하였으며 때로는 어디론가 홀로 떠나 스케치를 하면서 문학청년으로 변해갔다. 경성제국대학 예과과정에 입학한 후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이 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한 사람은 광복 때까지 그가 유일하였다. 1930년 졸업과 동시에 연구실의 조교로 남았다. 1929년 12월 5일자 그의 일기를 보면, ‘조수 1년 안에 서양미술사를 하나 쓰고 2년 안에 경주 불국사연구와 불교미술사를 연구하자’라고 다짐한 내용이 보인다.
1934년 고유섭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되었다. 허리춤에 도시락을 달고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개성을 비롯한 전국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맨 걸음으로 다니거나 먼지 나는 길을 달구지를 타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마음 한켠에 지식인으로서 울분과 고통이 내재돼 있던 그는 간간이 술로 이를 달랬다. 고유섭은 1940년 과로로 쓰러졌고 이후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결국 간경화증으로 1944년 6월 26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고 개성 수철동 묘지에 묻혔다.



동인천에서 배다리로 가는 오른편에는 청과물시장이 있다. 세칭 ‘깡’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이란 아름으로 문을 열었다. 송림동, 숭의동, 용현동 등지의 과수원 농장에서 수확한 과일을 이곳에 내다 팔기 시작하면서 길 주변에 많은 청과물 가게가 들어섰다. 특히 여름이 되면 멀리 서울 오류동에서 달기로 소문난 오릿골 채미(참외)나 재래종인 청채미 등 많은 참외가 마차로 실려와 길거리 빈터에 무더기로 쌓인 채 팔렸다. 이로 인해, 이 시장은 참외전거리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사람들은 흔히 ‘채미전거리’로 부르곤 했다.
지난 82년 6월 동인천역과 숭의동 간 2㎞ 가량의 도로 확장으로 철로변의 가게들이 철거되면서 시장은 점차 위축되었다. 이어 98년 9월 인천시가 주차장 마련을 위해 청과물시장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다수 상인들은 송림동 동부시장과 숭의철교 인근 청과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참외전거리에 작은 역 하나가 있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지금의 원예농협 앞에 축현역이 있었다. 축현(杻峴)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1908년 승객과 화물이 증가하면서 감당할 수 없어 현재의 동인천역 자리로 옮겨갔다. 1926년 축현역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자 시민을 대상으로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천역과 동인천역이 1,2위였다. 축현역은 상인천역으로 바꾸었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지은 역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서울에서 오는 사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동인천역으로 또 바꿨다. 그 순간 인천의 동서남북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옛 축현역 앞은 원래 습지였다. 이를 살려 역 앞에 500여 평의 큰 연못을 만들었다. 1924년 12월 인천기독교청년회는 꽁꽁 언 이 연못을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회원제로 운영했다. 그 전까지는 웃터골이라고 불린 산근정공설운동장(현 제물포고)을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했었다.

〈 그때, 이곳 전동 〉
대한천일은행 지점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은 구한말 대한제국 관료층과 상업자본가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민족은행이다. 현재 우리은행(상업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광무 3) 1월에 설립되었다. 용동에 있는 우리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5월10일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지점이다. 이를 알리는 동판이 은행 출입구 옆에 박혀있다.

인천흥업주식회사

용동 152-6번지에 위치한 2층 건물로 건축연도는 1910년대라는 설과 건축양식이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인천미두취인소 등과 비슷한 것을 보아 193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정면 출입구 위에 ‘인천흥업주식회사’라는 간판이 있으나, 현재는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흥업은 일종의 대부업체이다.

강조합
현재의 채미전 거리 초입에 있는 성환상회 자리에 죽산 조봉암이 운영하였던 비강조합이 있었다. 비강조합은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다. 그 옆에 인천 좌익의 핵심 박남칠이 운영하던 인천미곡상조합(현재 농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미곡상조합은 사무장 이승엽의 탁월한 조직 활동으로 인해 크게 성장하였고 그것을 근간으로 광복 후 인천미곡상이 중심이 되어 건준인천지부가 신속하게 설립되었다.

이길여산부인과

이길여 박사는 친구와 함께 1958년 5월 용동에 ‘이길여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병원은 적산가옥 2층 10평 남짓한 목조건물이었다. 가천재단사(史)에 따르면 ‘산부인과 개원은 선진의학을 공부하기 위한 유학비 마련의 목적도 있었지만 어렵고 힘든 환자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글,사진 유동현 (굿모닝인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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