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체구의 김희정 변산공동체학교 대표가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다. 아이들은 그를 ‘아빠 같은 희정 언니’라고 부른다. |
[나는 농부다] 변산공동체학교 김희정 대표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동쪽 내륙으로 다부지게 솟아오른 변산을 뒤에 두고 들어선 마을.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자리잡은 변산공동체학교. 비탈길 옆으로 항아리들이 주욱 늘어선 장독대, 나지막한 집들이 살림살이를 짐작게 한다. 집집마다 땔나무들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고, 처마 밑에는 짚으로 걸어놓은 메줏덩이와 말린 나물들을 넣어둔 망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마루에는 감이나 찐 고구마 따위를 말리는 채반들이 눈에 띈다. 어둑한 저장고로 들어가니 큼지막한 항아리에서 해묵은 효소들이 익어가고, 장항아리와 김칫독이 줄지어 있다. 창고에는 종자로 쓰려고 남겨둔 씨앗들이 그득하다. 지난 1년 농사를 갈무리해서 겨우내 먹고살고 내년 1년 농사를 이어가는 삶의 현장이다.갓난아기를 가진 젊은 부부들이 사는 ‘뉴타운’ 석 채의 집 앞에는 널어놓은 기저귀가 펄럭인다. 마을 곳곳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궁이에서 땔나무로 군불을 지피나 보다. 그렇게 물을 데우고, 방을 덥히고, 고구마를 구우면서 ‘삶’을 맞이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은 지난 3년 동안 방 2칸에 마루와 세면장, 아궁이가 딸린 아담한 흙집 여덟 채를 지었단다. 어울려 농사지으면서 조촐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을 배우며 자라는 모습이다.“다섯 가족과 독신 남녀 어른 20명, 그리고 40명의 학생들이 살고 있어요. 제 앞가림을 하고,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죠.” 변산공동체학교의 현재와 지향을 짚어주는 김희정(46) 대표. 자그마하지만 군살 없이 다부진 체구. 틈만 나면 산으로 달려가 땔나무를 해서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그를 사람들은 ‘백만장작’이라 부르며 부러워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김을 매는 ‘일의 달인’답게 부드러운 인상이다. ‘희정 언니’. 아이들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힘들 때면 다독여주고 품어준 그는 ‘아빠 같은 희정 언니’ ‘제2의 아빠’로 꼽힌다. 권위보다 사랑으로 흔들리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교사. 2008년부터 6년째 대표를 맡고 있는 그에게도 아이들의 존재는 각별하다. “산업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도 않고요. 그것을 넘어서려면 마을공동체를 회복해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이룰 수 있겠어요? 농사짓는 공동체에서 몸을 써서 의식주를 해결할 줄 알고, 함께 어울려 일해야 더 즐겁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느껴본 아이들이 그런 미래를 만들어갈 겁니다.” 공동체학교에서 꿈나무를 키워 위기에 놓인 현대 산업사회에 띄울 수 있는 ‘노아의 방주’를 꾸리는 사람 같다.땅 한 평 없는 빈농의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거들며 자랐다. 고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서울로 돈 벌러 갔다. 87, 88년. 그가 일하던 분식집이 있던 광화문통에서 그는 오랜 군사독재를 끝내려는 시대의 열기를 호흡하며 세상에 대해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틔웠다. 곧바로 귀향한 그는 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 충북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다. 막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대학 시절. 그는 도시의 가혹한 삶의 조건을 처절하게 겪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세상에 대한 의문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졌다. 세상을 뒤바꾸고자 하는 사회변혁운동의 대열에 함께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지금의 사회구조를 뒤바꾸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대학을 마치고 농민운동을 하려고 이런저런 모색을 하던 1996년. 농부가 되려고 교수를 그만둔 대학 시절 은사 윤구병 선생이 변산공동체학교를 막 시작한지라 일손을 거들어주러 갔다가 아예 거기 눌러앉았다.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산업적 삶. 돈에 얽매인 삶을 벗어날 길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 지금까지 18년 동안 거기 몸을 담았다. 그해 결혼한 부인 박선희와 더불어 그는 공동체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이다.앞마당 장독대와 천장에 매달린 메주가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
유기농법으로 자립 기반 일궈내
여남은 식구가 이젠 60여명으로
틈나면 땔감 쌓아 ‘백만장작’ 별칭
아이들에겐 ‘아빠 같은 언니’ 역할
“이 마을 잘 가꾸는 게 사회 기여”그 시절 공동체는 농사로 일상을 꾸리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몸 쓰는 일에는 이골이 난 그의 농사 실력도 도시내기들이랑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유기농 백과사전을 찾아가며 퇴비 만드는 법을 배웠고, 동네 할매 할배에게 언제 무엇을 심는지, 어떻게 심고 가꾸는지를 물어가며 따라했다. 농약, 화학비료, 비닐을 안 쓰고, 에너지와 기계를 멀리하는 농사라 더 어려웠으리라. 여나문 명의 구성원이 지치도록 일을 했어도 거두는 게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풀을 뜯어다가 백초술과 효소를 빚어 내다판 돈으로 버텨낼 수 있었다. 씀씀이가 워낙 간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동체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다음에 온 분들은 그 시절을 상상하기도 힘들 겁니다.” 바지런하고 억척스러운 일꾼인 그마저 그렇게 말할 정도다. 농사 일머리를 꿰고 농사 실력이 좋아져 생산성이 높아지면서야 살림이 폈다. 식구들이 농사지어 먹고살 만큼을 생산해낸 것은 언제일까? “2008년쯤이니까 13~4년 걸린 셈이죠.” 논 8000평, 밭 8000평의 농사가 사시사철 물 흐르듯 진행되고, 60여명의 식구들이 “풍요롭게 먹고사는” 요즘 돌아보면 그 시절이 꿈만 같다. 이제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도 공동체에 들어와 먹고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람들과 사귈 수 있는 생활을 이어가기가 그때만큼 어렵지는 않다.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쇠죽을 끓이려 불을 피우고, 작두로 볏짚을 써는 그. 공동체 살면서 어려움이 없었을까? “힘든 거 별로 없었어요.” 천연덕스럽다.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억척스럽지가 않아서 걱정이죠.” 여전히 딴청을 부리듯 태연한 목소리다. “단 한번도 여기를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 “공동체를 잘 가꾸는 것이 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그의 철석같은 믿음을 확인하고 나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저 개인이 만족하는지보다 공동체 전체가 발전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일이 고되다’던데, ‘사람들이 오래 붙어 있지 못한다’던데 하는 평판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언젠가 헤아려보니까 여기에 1년 이상 머물렀던 사람만 줄잡아 200여명은 되더군요.” 한솥밥을 먹던 이들이 별똥별처럼 떨어져 나갈 때 그도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공동체에 있다 보면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요. 한 사람도 같지 않지요. 시트콤을 보는 것같이 재밌어요.” 타고난 낙천성일까, 아니면 떠남에 이르기까지의 남모를 아픔을 견뎌내기 위해 터득할 수밖에 없었던 초연함일까. 심심찮게 터뜨리는 그의 파안대소에서 만남과 떠남을 허허로이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엿본다. 언젠가 술을 한잔 걸치고 ‘불나비’라는 노래를 부르던 그에게서 느꼈던 ‘어떠한 삶이라도 끌어안고 살아가노라’ 하는 강인한 긍정의 기운은 묵묵히 자연에서 단련된 강인한 농부의 것이려나.그가 공동체 대표를 맡은 뒤로 공동체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시절이 있었다. 뜻을 달리해서 떠난 이도 있고, 몸이 힘들어서 떠난 이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를 풀 수 없어서 떠난 이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니까 더더욱 생각과 감정을 소통하는 데 서투른 지점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은 대표로서의 그가 항시 짚어봐야 할 대목이라는 생각. 이렇게 좋은 공동체가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싶어서다 부안/글·사진 이현숙 텃밭지도사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