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선운동, 그 절반의 성공
- 프랑스 공산당?사회당과 인민전선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1930년대 유럽의 정치 지도는 암담했다. 한때 노동계급의 세력이 막강하고 좌파정당이 정권을 쥐락펴락했던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에 극우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섰다. 파시스트 정권은 노동운동이 수세대에 걸쳐 이뤄놓은 바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흐름은 라인강과 알프스산맥에서 저지되었다. 한때 프랑스에서도 파시즘의 공세가 거셌지만, 프랑스의 두 좌파정당, 사회당과 공산당은 인민전선이라는 새로운 정치 실험을 통해 이를 격퇴해냈다. 이 점은 확실히 독일의 형제당들에 비해 뛰어난 성취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 1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것은 오직 절반만의 성공이었다. ― 과연 프랑스 인민전선의 역사적 성과는 무엇이었고, 그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192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의 조용한 성장
1914년 7월 31일의 장 조레스 암살(?‘혁명적 개혁주의’라는 이상, 혹은 몽상?: 장 조레스와 프랑스 사회당?, <이론과 실천> 2002. 7. 참고) 이후 며칠 안 돼서 프랑스 사회당(SFIO, 정식명칭은 ‘노동자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은 독일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며 전시내각에 합류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혁명적인 지도자라던 쥘 게드가 전쟁내각의 장관이 되는 판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두 번째 겨울을 지나자 프랑스에서도 반전투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SFIO와 CGT(프랑스 노총) 내에서 반전좌파가 등장했다. 1916년부터는 반전파업과 군대 내의 항명폭동이 빈발했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급진적 분위기는 곧바로 SFIO의 당세 신장과 CGT 조합원 증가로 나타났다. 그 중심에는 전쟁을 경험한 젊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1919년 현재 SFIO의 당원 중 3/4이 종전 후 처음 입당한 청년 당원들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선거와 파업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 했다. 하지만 1919년 선거는 이들에게 첫 번째 좌절을 선사했다. 단순 득표로만 보면 SFIO의 득표수가 17%에서 21%로 성장했지만, 보수우파가 도입한 새로운 선거제도 때문에 실제 의석수는 오히려 102석에서 68석으로 줄어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선거제도는 1차 투표에서 지역구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1, 2위만으로 2차 투표를 실시하는 결선투표제였다. 2차 투표에서 우파는 보수주의자부터 급진사회당(프랑스판 자유주의 세력, 과거 급진공화당의 후신, 이하 급진당)까지 연합해서 SFIO 후보에 대항했던 것이다. 두 번째 좌절은 1920년 총파업의 패배였다.
연이은 패배 뒤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코민테른의 혁명 노선이었다. SFIO의 다수 청년 당원들이 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열망했다. 물론 반대파도 있었다. 전시내각에도 참여했던 당내 개혁주의 분파(레옹 블룸, 피에르 르노델)는 코민테른의 노선 자체에 반대했다. 맑스의 외손자인 장 롱게 등이 주도한 중도파는 당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920년 12월 29일 투르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68.7%의 대의원들은 코민테른 가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해 5월에는 프랑스 공산당(PCF, 정식명칭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프랑스지부’)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반면 당대회 소수파는 SFIO라는 옛 당명 아래 잔류했다.
이제 프랑스에는 SFIO와 PCF, 두 개의 좌파정당이 존재하게 되었다. 애초에 당원의 대다수는 PCF에 남았다(11만명). 또한 조레스가 창간한 역사적 신문 <뤼마니테(인류)> 등 중요한 당 기관이 PCF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의원단의 다수(68명 중 55명)는 SFIO를 선택했다. 노동조합운동도 분열됐다. SFIO와 가까워진 기존의 노총 CGT 대신 1922년 PCF계 노총인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창립됐다.
그림 ) PCF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
1920년대는 PCF에게는 시련의 세월이었다. 20년대의 프랑스 정치를 지배한 보수우파는 PCF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1927년 모로코 개입전쟁 반대 총파업 때에는 PCF의 의원들까지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구속했다. 또한 프랑스에도 예외 없이 강요된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 노선(?독일 노동계급은 왜 나치에 패배했는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공산당?사회민주당?, <이론과 실천> 2003. 2. 참고) 때문에 당세가 급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PCF는 같은 시기의 독일 공산당에 비해 노동자정당으로서 견실한 성장을 보였다. 한때 모든 당원들을 공장세포로 일괄 편제하면서까지(물론 이는 1년만에 철회되었지만) 노동계급의 일상에 밀착된 활동을 강조했다. PCF와 CGTU는 1차 대전을 계기로 프랑스에 등장한 신흥 금속산업의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파리 교외의 노동자 밀집지역과 북부 산업지대에서 당은 확고한 지역 기반을 마련했다. PCF는 이들 지역에서 지자체를 장악해 무료 급식과 무상 보육, 기업에 대한 누진과세 등을 실시했다. 모리스 토레즈 같이 다년간의 노동조합 활동 경험을 지닌 젊은 노동자 출신 지도자도 등장했다. 20년대 말이 되면 총선 득표수도 100만명 선에 이른다. 그러나 결선투표제 때문에 원내 세력은 극히 미약했다(최대 14명).
한편 SFIO의 활동은 어떠했는가? SFIO는 적어도 강령의 측면에서는 PCF와 거의 다를 바 없이 급진적이었다. 국제적으로도 개혁주의적인 제2인터내셔널에 복귀하지 않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만든 2.5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뭇 복잡했다. 당내 우파는 급진당과 중도좌?우파 연정을 이루길 바랬고, 다수 당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좌파는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당내 좌파 중에는 PCF보다 더 극좌적인 부분도 있었다. 결국 SFIO가 선택한 것은 보수우파 정부보다는 중도우파인 급진당 정부를 외곽에서 지지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SFIO는 주로 프랑스 사회에 특징적인 전통적 소규모 산업의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래서 지역적으로는 소도시나 일부 농촌에 기반을 두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PCF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SFIO는 반대로 중간층으로 지지를 넓혀 갔다. 이러한 발전 방향이 당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한다는 점 때문에 SFIO도 ‘사회당 동지회’라는 이름으로 현장 당조직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원 수는 최대 20만명선이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 나라의 사회민주당들에 비하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다. 선거에서 득표수는 공산당보다 조금 많은 150만~200만표 수준이었지만, 결선투표에서 급진당과 암묵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선거연합을 맺곤 했기 때문에 의석수는 훨씬 많았다.
1934년 2월, 반파시즘 노동계급 공동전선을 향하여
프랑스에는 대공황이 다른 유럽 나라들보다 뒤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더 오래 끌었다. 전후 프랑스 자본주의는 금용자본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바로 이 금융계의 큰손들이 금융자산가치를 보장하는 금본위제와 디플레이션 정책을 고집해 경제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금융자본을 직접 대변하는 보수우파뿐만 아니라 소도시와 농촌의 소자산가들에 기반을 둔 급진당 역시도 낡은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종하는 데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통화 안정을 위해서는 예산 균형이 필요하고 균형 예산을 위해서는 정부지출을 삭감해야 한다. 그 다음은? 수요의 더욱 커다란 위축이고, 공황의 심화였다.
프랑스 사회는 금새 몇 년 전의 독일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당파와 같은 전통적 극우파 외에도 ‘불의 십자가’라는 현대적인 극우대중정치조직이 등장하여 불안에 사로잡힌 중간계층을 유혹했다. 1933년 말에 벌어진 유대인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의 의문의 자살 사건이 빌미를 제공했다. 이 사건에는 급진당의 고위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극우파는 이를 의회정치를 전복하고 파시스트 체제를 수립할 호기로 보았다. 급진당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이 처리된 1934년 2월 6일 극우단체들의 폭동이 벌어졌다. 쿠데타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노동자들은 이미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험을 통해 파시스트 정부의 수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았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명령이랄 것도 없이 스스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극우파와 싸우기 시작했다. 2월 6일 당일에도 2만5천의 노동자들이 극우파 시위대와 맞붙었다. 2월 12일에는 CGT와 CGTU가 함께 24시간 총파업을 벌였다. 450만 노동자가 작업장을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거리에 나선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공동전선을 부르짖었다. 반면 두 좌파정당의 행보는 이보다 느렸다. 상황을 주도한 것은 당이 아니라 대중이었다.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반파쇼 투쟁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시위 운동이 일상화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가두 시위 속에서 대혁명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땅 밑 저 깊은 곳에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림 ) 코민테른에서 반파시즘 공동전선으로 노선 전환을 주도한 G. 디미트로프
사실 PCF는 1930년에 토레즈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서서히 사회파시즘 노선을 폐기하고 반파시즘 공동전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확대 등 일상 요구 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극좌 분파를 숙청하고, 1932년 암스테르담 반전국제대회, 1933년 플레이엘 홀의 반파쇼유럽대회 등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쟁점으로 PCF 평당원과 SFIO 평당원 사이의 교류를 추진했다(암스테르담-플레이엘 운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사태 직후 PCF는 SFIO와의 공동행동에 그리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아직 코민테른의 최종 재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독일의 비극을 낳은 자신의 오류(사회파시즘론)를 자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 때에 이르러서는 완고한 스탈린 지도부로서도 히틀러의 독일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를 동맹국으로 필요로 하던 형편이었다. 프랑스에서 어떻게든 파시스트의 집권을 막는 것은 소련 국가의 외교?국방 차원에서도 꼭 필요한 과제였다. 결국 7월의 코민테른 13차 집행위원회 간부회의에서 불가리아 출신의 새로운 지도자 G. 디미트로프의 주도로 공동전선 전술이 채택됐다.
일단 코민테른의 승인이 떨어지자 PCF는 반파시즘 공동전선의 사도로 나섰다. PCF가 자신감에 넘쳐 공동전선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2월부터의 노동계급 공동행동은 PCF에 너무도 뚜렷한 성과들을 안겨 주었다. 당원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신입당원 중 다수는 노동자들이었고, 당 세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파리의 공장세포가 96개에서 122개로 증가했다.
1934년 7월 27일, SFIO와 PCF는 역사적인 행동통일협정에 서명했다. 행동통일협정에는 모든 파시스트 단체의 무장해제 및 해산, 그리고 하원의 즉각 해산과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쟁취가 명시되었다.
노동계급 공동전선에서 인민전선으로
하지만 PCF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PCF는 훨씬 더 나아갔다. 파시즘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통일뿐만 아니라 중간층의 지지가 필요하고 따라서 SFIO뿐만 아니라 급진당까지 포함하는 공동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의 공동전선 전술은 어디까지나 노동계급 정당들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급진당은 비록 중간층에 기반을 두고 있고 대혁명의 민주적 전통을 중요시한다고는 하나 분명히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최우선시하는 보수정당이었다.
1934년 10월 9일, 토레즈는 처음으로 급진당과의 협력을 주장하면서 ‘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한 인민전선’을 제시했다. 공동전선이 아니라 인민전선, 즉 노동계급의 통일이 아니라 중간층을 중요한 성원으로 포함한 계급연합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인민전선 노선이 프랑스의 사회변혁보다는 친소정권의 수립을 더 중요시한 스탈린 지도부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0월에 프랑스를 방문한 코민테른 밀사 P. 톨리아티(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는 급진당과의 제휴를 말렸다. 그러나 토레즈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게 말해도 이미 너무 늦었소. 나는 오늘밤 급진당 당대회에 참석해서 인민전선 구호를 소리 높여 외칠 것이오!” 이것이 토레즈의 답변이었다.
PCF가 이런 정세판단을 한 데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당시 급진당 내에서는 ‘청년터키파’라 불린 젊은 개혁파가 부상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시즘에 대한 유화책과 디플레이션 정책에 반대하고, 전후의 케인즈주의를 연상시키는 수정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지지했다. 이들이 급진당의 중심으로 떠오른다면 진보적 경제정책도 충분히 합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다음해 5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좌파 공동전선과 급진당은 곳곳에서 암묵적인 선거연합을 맺어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상징적인 성과는 전통적으로 보수우파의 아성이었던 파리의 대학가 라탱구에서 반파쇼 투쟁위원회 활동가인 폴 리베 교수가 당선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우파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었던 지식인?대학생들이 좌파로 대거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방선거 한 달 뒤인 6월에 드디어 급진당?SFIO?PCF 사이에 3자합의가 이뤄졌다. 7월 14일 대혁명 기념 시위에서 급진당 내 청년터키파가 깃발을 들고 좌파의 시위에 합류했다. 역사는 이 날을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한 달 뒤인 8월에는 코민테른이 7차 세계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확정했다. 코민테른은 이와 함께 그 동안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었던 노동조합운동의 통일과 노동계급 단일정당의 건설까지 주창하고 나섰다.
하지만 인민전선의 앞날에 장밋빛 미래만이 약속된 게 아니라는 것이 인민전선의 선거강령 작성 과정에서 드러났다. 급진당은 파시스트 단체들을 해산하고 민주공화제를 지키는 것 외의 진보적 정책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반면 SFIO는 사회주의적 구조개혁을 주장했다. 오히려 PCF가 더 온건하고 실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PCF는 모든 전술 목표를 파시즘의 저지에 맞추면서 SFIO 좌파가 주장하는 급진적 경제개혁에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3당은 논란에 논란을 거듭하다가 1936년 1월 12일에 어렵사리 선거강령에 합의했다.
선거강령의 핵심은 SFIO?PCF 행동통일협정의 제1항이기도 했던 ‘파시스트 단체들의 무장해제 및 해산’이었다. 경제 부분에서는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수요를 촉진하고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금융자본을 제어하기 위한 프랑스 은행의 국유화와 자본 유출 통제도 적어도 문서 위에는 존재했다.
인민전선의 승리와 공장점거 파업
1936년 4월의 총선은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방송 연설이 도입된 선거였다. 이는 라디오 방송을 국정 홍보 수단으로 사용한 미국의 루즈벨트 민주당 정부의 영향이었다. 프랑스의 각 가정에 PCF 사무총장 토레즈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파시즘의 뒤에는 금융계와 산업계를 좌지우지하는 200대 가문이 있습니다. 200대 가문을 타도합시다!”
그림 ) SFIO 지도자 레옹 블룸
5월 3일, 2차 투표까지 거친 선거의 최종 결과는 인민전선측의 승리였다. 인민전선이 367석을 획득해 원내 다수파가 됐다. 전체적으로 급진당 왼쪽의 표는 단지 30만 정도만 늘었으나, 개혁 성향 유권자 내부의 좌선회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 동안 급진당을 지지한 유권자의 상당수가 SFIO로 이동하고, 노동계급의 표는 PCF로 집중됐다. 그 결과 196만표를 얻은 SFIO의 의석은 97석에서 146석으로 증가하고, 150만표를 얻은 PCF의 의석은 10석에서 72석으로 증가한 반면, 142만표를 얻은 급진당은 158석에서 116석으로 42석이나 상실했다.
가장 주목받은 승자는 PCF였다. 토레즈가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고, 좌파의 전통이 약한 남프랑스에까지 당선자를 배출했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PCF의 원내 진출을 가로막은 결선투표에서의 반PCF 선거연합이 와해된 것이 성공의 주 요인이었다. PCF의 당원 수는 1931년의 3만명에서 1937년에는 34만명으로까지 급증했다. PCF는 프랑스 사회의 주요 대중정치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지지율 10%에도 미치지 못하던 군소정당이 상황을 주도해 정치판 자체를 바꿔놓은 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성과였다.
개표 다음날 SFIO의 레옹 블룸이 사회당 주도의 조각을 선언했다. 토레즈는 PCF의 입각을 주장했다. 그러나 PCF의 다른 지도자들은 입각에는 반대했다. 특히 코민테른이 이를그림 ) 공장점거 노동자들
반대했다. PCF의 입각이 급진당의 보수적인 부분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새 정부 출범은 6월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 전까지는 과도정부가 행정을 맡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또 다른 지각변동이 시작됐다. 5월 11일, 지방도시 르 아브르의 브레게 비행기 공장에서 미국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파업을 본받은 파업투쟁이 시작됐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경찰이 당장 출동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다, 정권이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몸으로 변화를 실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문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을 되찾을 기회!
5월 24일 파리코뮌기념일에 파리에서는 60만 노동자가 집결했다. 소식은 시위 노동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PCF의 공장세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 활동가들은 자발적으로 파업 선동에 나섰다. 이웃 공장의 정보를 듣기 위해 노동자들은 좌파 지자체 사무실을 찾았다. 5월 26일 파리 근교에서는 처음으로 뉴폴 비행기 공장에서 공장점거파업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프랑스 산업의 중추인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3만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작업장을 점거했다. 6월 첫째주까지 파업 대오는 수백만으로 늘어났고, 금속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무직?서비스직 노동자들까지 동참했다.
그림 ) 인민전선운동을 기념하는 CD 재킷 - 작업장에서 춤추는 여성 노동자들
처음에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정치적이거나 혁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주요 내용은 단체협상 인정, 직장위원(shop stewards, 산업별 노조의 작업장별 대표) 선출 인정, 최저 임금 보장, 잔업 거부, 작업 속도 완화, 40시간 노동, 유급 휴가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단체협상의 인정이었다. 프랑스 자본가들은 그 때까지도 산업별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점령한 작업장의 모습 또한 비장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장의 삭막함은 갑자기 축제의 떠들썩함으로 바뀌었다. 좌파 지자체가 제공하는 무료 급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면 아마추어 합주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남녀 노동자들은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서로를 다시 알게 되었다. 공장점거의 며칠 동안 프랑스 노동계급의 문화가 연대와 축제의 문화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은 혁명 그 자체는 아니지만 분명 혁명적 사회운동이었다. 당시 파업에 동참한 시몬 베이유는 이렇게 찬미했다.
파업은 그 자체 기쁨이다 ... 활짝 웃는 규찰대의 허락을 받아 공장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라 ... 기계의 무자비한 소음 대신 음악 소리, 노래와 웃음소리를 듣는 것을 기뻐하라 ...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신의 사장 앞을 지나가는 것을 기뻐하라 ... 유사 이래 처음으로,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이들 기계 주변에는 침묵, 강제, 복종과는 전혀 다른 기억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에 어떤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기억들, 이 모든 금속 위에 인간의 약간의 온기를 남겨줄 기억들.
바로 이 와중에 블룸 인민전선 내각이 출범했다(6. 4). 이 날 열린 파리의 파업대표자회의에서 파업대표들은 처음으로 정치총파업을 꺼냈다. 일부는 1920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의 자동차 노동자들이 했던 것처럼 자주관리로 생산활동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6월 5일 블룸 정부의 개입이 시작됐다. 파리의 마티뇽 호텔에서 단체교섭 인정, 단결권의 확대, 직장위원 선출 인정, 7~15%의 임금인상 등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협상이 타결됐다(마티뇽 협정). 유급휴가와 40시간 노동은 입법안으로 상정됐다. 의회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이 법안들을 처리했다. 의회 내의 보수파조차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모두 이 타협안에 쉽게 만족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고, 농성 중인 노동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일었다. 정부 내에서 급진당 장관들은 군대의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후로 나선 것은 PCF였다. 6월 11일 집회에서 토레즈는 “파업을 끝내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외쳤다. PCF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격론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이 호소는 파업의 종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6월 12일 금속노조와 자본가들 사이에 협상이 체결됐고, 다음날 르노의 2만 노동자는 블룸과 토레즈의 사진, 당 깃발을 들고 공장에서 나와 노동자 주거지역을 행진했다. 그 여름 동안, 새로 CGTU와 통합한 CGT의 조합원은 100만에서 500만으로 늘어났다.
인민전선정부의 좌절 - 두 가지 암초
그러나 승리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첫 번째 암초는 스페인 내전 문제였다. 당시 프랑스의 이웃 나라인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와 같은 형태의 인민전선 정부(공화파, 사회당, 공산당, 무정부주의 연합)가 들어섰다. 그런데 1936년 7월 이 합법정부를 전복하려는 프랑코 장군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것이 내전으로 발전했다.
인민전선 내에서는 당연히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일었다. 특히 스페인의 동지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프랑코의 반군에게 무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블룸은 동맹국인 영국의 눈치를 보았다. 당시 영국의 여당은 보수당이었다. 보수당 정부는 프랑스가 스페인 내전에 어떤 식으로든 참전하면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 관계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영국과의 동맹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유일한 방안으로 믿고 있던 블룸은 이 협박에 굴복했다. 급진당측의 압력도 한 몫 했다. 7월 25일, 인민전선정부는 스페인 무기 수출 금지를 선포했다. 7월 31일 장 조레스 추모대회에서 노동자들은 블룸의 면전에 대고 “스페인에 비행기를!”이라고 외쳤다. 뜻 있는 노동자들은 처음 얻은 여름 유급휴가를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국제여단 활동에 바쳤다.
또 하나의 암초는 자본 해외 유출 사태였다. 과거에도 프랑스의 금융자본가들은 맘에 들지 않는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저항하곤 했었다. 비록 인민전선 선거강령에 자본 유출 통제가 명시돼 있었지만, 블룸은 정부의 한 쪽 부분인 급진당의 반대 때문에 이를 단행하지 못했다.
무역수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프랑화 평가절하를 실시했으나 이는 6월 투쟁의 성과로 얻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효과를 감소시키는 역할만을 했다. 애초에 블룸 정부는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해 물가연동임금제의 도입을 추진했으나 이는 상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좌파 다수의 하원 결정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 상원은 급진당 우파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블룸 정부와 노동자들 사이의 반목만이 심화되었다. 10월에는 공장점거파업을 벌이는 노동자들에 대해 최초로 경찰력이 동원됐다.
1937년 1월, 블룸은 잠정적으로 개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한 마디로 자본 유출 사태에 대한 항복이었다. PCF는 이에 반대해 대안경제정책을 주장했다. 그 핵심 내용은 독점기업의 국유화와 강력한 자본 이동 통제였다. 애초에 인민전선 선거강령을 작성할 당시 SFIO측의 구조개혁노선에 대해 급진당에 대한 고려 때문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은 PCF였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을 포괄하려 했던 PCF의 인민전선노선의 모순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림 ) 반파시스트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와 그의 어린 딸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1937년 초부터는 ‘불의 십자가’가 프랑스사회당(여기서 ‘사회’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이라는 합법정당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3월 16일 파리 외곽의 클리시에서 이 프랑스사회당 시위대와 클리시 인민전선위원회 소속 노동자들이 충돌했고 경찰 발포로 6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다. 이틀 뒤 숨진 노동자들을 기리는 장례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장례의 대상은 숨진 노동자들만은 아니었다. 인민전선정부에 건 희망과 기대 또한 관 위에 누워 있었다.
결국 6월, 자본 유출이 6백억 프랑에 달하자 블룸은 정부에 강력한 외환통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원이 거부하고 나섰다. 6월 20일 블룸은 수상직에서 사임했다.
그 이후에도 인민전선 자체는 유지됐다. 하지만 급진당이 주도하게 된 새 정부는 어떠한 진보적 성격도 없었다. 1938년 3월 잠시 제2차 블룸 내각이 시도된 적이 있으나 이는 1년도 아니고 단지 3주간의 실험으로 끝났다. 당시 블룸은 1년 전의 과오에 대한 반성에 따라 강력한 경제개입정책을 제시했지만, 이 때는 이미 이러한 개혁을 지탱해줄 노동계급의 힘이 꺾이고 난 다음이었다. 부르주아 세력이 다시 헤게모니를 되찾았고, 이들은 공공연히 “블룸보다는 히틀러가 낫다”며 1940년의 패전을 준비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통해 다시 수많은 노동자?민중의 피를 흩뿌리고 나서야 되돌릴 수 있었던 나치 독일에 대한 자발적 굴복을.
인민전선정부 경험에 대한 논란들
인민전선정부의 공과는 아직까지도 프랑스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 대상이다. 블룸 정부의 평가절하 조치 같은 경우는 경제학계의 영원한 논쟁 거리가 되어 있다. 따라서 인민전선정부의 경험에 대해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다. 더구나 1년이라는 기간은 원래 의도한 정책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프랑스가 스웨덴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인민전선운동 자체는 위대한 정치적 경험이었다. 1934년 2월부터 시작된 반파시즘운동은 진정한 대중운동이었다. 이는 프랑스 사회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프랑스 지식인은 좌파적”이라는 말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것도 바로 이 때부터였다. 1936년 6월의 공장점거 대중파업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는 좌파의 집권이 어느 정도나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지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준다. 인민전선정부는 이런 거대한 사회운동을 통해 좌파정당이 집권한 서유럽 최초?최대의 사례였다.
그러나 이렇게 등장한 인민전선정부는 심각한 오류와 한계를 노정했다. 첫째, 사회운동과 제도 정치를 적절히 결합하지 못했다. 파업투쟁의 생명력이 살아 있을 때 개혁을 신속히 추진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산업별 노동조합의 투쟁을 적절히 활용해 뉴딜을 추진한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가 이 점에서 더 능동적이었다.
둘째, 재정팽창 정책, 자본 이동 통제 등 과감한 경제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소위 200대 가문의 자본 파업에 굴복하고 말았다. 블룸 정부의 경제개혁은 뉴딜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은 것은 급진당 우파가 장악하고 있던 상원이었다.
셋째, 스페인 내전에 대한 불간섭 정책 때문에 파시스트 이웃들에 대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세력들을 꺾었다면 2차 대전이 그렇게 진행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스페인 전선에서 쉽게 승리를 거둔 파시스트들은 블룸 정부가 피하려고 했던 그 전쟁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있었다.
결국 이 모든 오류 뒤에는 급진당이라는 잘못된 연합 상대의 문제가 놓여 있다. 급진당의 보수적인 다수파는 경제, 국방 등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 사사건건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SFIO도, PCF도 6월의 파업투쟁이 열어놓은 이전과는 다른 계급세력관계 속에서 이들의 방해를 극복할 새로운 정치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토레즈는 자신의 회고록 ?인민의 아들?에서 인민전선이 3당의 상층연합에 그쳤던 것이 근본 문제였다고 회고한다. 다수 대중이 참여하는 지역 인민전선위원회를 조직하고 강화해야 했으며, 그 전국대회를 소집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도 강조한 대목이고, 트로츠키도 인민전선을 비판하면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바다.
1936년 5월 총선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 강령의 대부분이 사문화되어 버린 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략) 우리들은 하부 집회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참여하는 인민전선의 전국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지 못했다. 전국대회가 있었다면 거기에서 선출된 전국위원회가 강령의 실시를 감시했겠지만 인민전선은 상층에서의 단순한 협정에 머물러 버렸던 것이다. - 모리스 토레즈, ?인민의 아들?, 76쪽.
아무튼 프랑스 인민전선의 경험은 칠레 등의 사례와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좌파정당에게 ‘집권’이란 무엇이고 ‘운동’이란 또 무엇인지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영원한 참조점임에 분명하다.
* 참고할만한 책
- 노서경,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 책세상, 2001.중 제3장.
- A. 스터름달,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황인평(황광우) 옮김, 풀빛, 1983.중 제10, 18장.
- 이용우, ?프랑스 공산당의 변화와 인민전선의 기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3.
- 장석준?김덕련, ?세계를 바꾸는 파업?, 이후, 2001, 65~71쪽.
- M. 토레즈, ?인민의 아들?, 박철호 옮김, 연구사, 1987.
- L.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프랑스 인민전선 비판?, 김명수 옮김, 풀무질, 2001.
-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3?, 동녘, 1989.
- R.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김경근?서이자 옮김, 개마고원, 2001.중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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