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리노공화국 세계문화유산(373), 티타노산

2013. 12. 9. 21:35세계와 여행이야기/산마리노공화국 이야기

 

 

 

세계문화유산(373)/ 산마리노

 

산마리노 역사 지구와 티타노 산

(San Marino Historic Centre and Mount Titano; 2008)

 

 

 

 

 

 

 

 

 

 

 

 

 

 

 

 

 

 

 

 

 

   13세기 탄생한 산마리노 공화국의 도시 국가와 티타노 산을 포함하는 유산 지역이다. 산마리노 역사 지구는 중세 이후로 자유공화국 체제를 유지해 온 증거로 등재되었다. 티타노 산은 전체 지역이 55㏊에 달하며, 이곳의 역사 유적에는 요새의 탑성벽성문보루,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교회당, 14~16세기 양식의 수도원과 19세기의 팔라초 푸블리코(Palazzo Publico), 18세기의 티타노 극장[Titano Theatre]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지금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본래의 기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티타노 산 정상에 자리 잡은 덕분에 산업혁명 이후의 도시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최초의 공동체는 로마제국 후기에 성 마리노[Saint Marino]가 세웠다고 한다. 이 도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초부터이며, 티타노 산의 정상에 작은 수도원이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885년에 일반 신도로 구성된 공동체가 있었고, 951년에 최초의 교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그 시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13세기 중반에 산마리노는 법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도시의 독립을 입증하는 최초 문서의 날짜는 1296년이다. 1295~1302년의 법령에서는 단체와 기관 설립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의 정치 체계에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체제이다. 이때도 도시의 핵심을 이루는 기본 구조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산 정상의 남서쪽 끝자락에 첫 번째 탑[Rocca 또는 Guaita]이 있고, 첫 번째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지역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교회가 있으며, 거기서 서쪽으로 가면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티타노 산기슭에 있는 보르고 마지오레(Borgo Maggiore)라는 분리된 지역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3~14세기 후반에는 두 번째 도시의 성벽이 보다 대규모 지역을 둘러쌌다. 북쪽으로 교회와 시가지 구역이 있다. 이 성벽의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지 않은 부분은 복원이 많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티타노 산 능선에서 더 남쪽 방향으로 또 다른 방어 탑 두 개를 세웠다. 두 번째 탑은 체스타 탑[Cesta 혹은 Fratta], 세 번째 탑은 몬탈레(Montale)이다. 체스타 탑도 마찬가지로 성벽을 둘렀다. 1360년에 도시 성벽 밖에는 중요한 성 프란시스 수도원[Saint Francis’ Convent] 단지가 생겼다.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며, 지금도 남아 있다. 15세기 중반에 3개의 출입구가 달린 세 번째 방어벽을 세우게 된다. 이는 서쪽으로 대단한 규모로 확장한 것을 의미했고, 오늘날 역사지구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성벽은 16세기에 강화되었다. 보루 2개는 1549년과 1559년에 세웠다. 1463년에 산마리노는 예전에 리미니(Rimini)의 통치 아래 있던 많은 영토들을 손에 넣었으며, 그 이후로 공화국의 국경은 더 이상 변화가 없었다. 16세기에 캐퓨친 수도회[Capuchin Fathers] 수도원이 남쪽 성벽 밖에 들어섰고, 콘트라다 오메렐리(Contrada Omerelli) 거리를 따라 성 글라라 수도원[the Convent of Saint Chiara]과 가장 권위 있는 귀족 가문들이 사는 궁전 건물들이 대부분 들어섰다. 이 건축물들은 이 시대 귀족들의 영향력과 부가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1663년의 판화와 1884년의 지적도는 거리의 기본 구조와 성벽의 서쪽 지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건물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세기에 주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남쪽으로 넓어졌다. 19세기에 두 개의 주요 건축물이 더 생겼는데 고대 교회를 대체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1825년에 시작)과 신고딕 양식으로 지은 새로운 팔라초 푸블리코이다. 이는 공화국의 조직 개편과 현대화를 보여 주지만 여전히 중세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후 1862년에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자유와 통치권을 정식으로 승인받았고, 1865년에 최초의 대국민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916년에 ‘문화재 및 예술품 보존을 위한 의회 위원단’이 발족했고, 1919년에 기념물 보호를 위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같은 해에 체스타 탑이 무너졌다. 이후 산마리노 출신의 기술자 지노 자니가 요새를 복원하는 일에 관한 광범위한 보고서를 발간했고, 건축물의 원래 형태를 추정하는 고문서와 출간된 책을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했다. 1925~1940년에 자니는 성 프란시스 성당의 와관과 티타노 극장, 그리고 여러 궁전들과 마찬가지로 세 개의 탑, 많은 건축물들, 성벽을 복원했다. 그는 성 아가타 광장[Piazza Sant'Agata]과 자비병원[Misericordia]을 확장하고 새로운 비아 돈나 펠리치시마(Via Donna Felicissima)도 확장했다. 1935년에 그는 역사 지역 전체에 대한 계획서를 제출했지만 그 중 일부만 진행했다. 현대식 건물은 카사 데 리스파르미오(Cassa de Risparmio) 은행이다. 또 1935년에 자니는 도시 성벽[완충 지역 내] 바깥 남동 지역의 확장 공사를 위한 도시 계획서 초안을 작성했다. 이 초안에는 역사 지역으로 관통하는 새로운 출입구가 들어 있었다. 20세기 후반에는 관광객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를테면 도시 주변의 주차 시설이나 보르고 마지오레와 산마리노를 잇는 공중 케이블 등이다. 강력한 상업 특화 지구가 생겼고, 휘황찬란한 상점들이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높은 성벽에 이르는 새로운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역사 지역 외의 다른 지역에도 유명한 건축가들의 솜씨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곳의 역사 보존은 1916년의 문화재 및 예술품 보존 위원회[the Commission for the Conservation of Monuments, Antiquities and Art Objects]의 발족과 1919년의 관련 법안으로 시작했다. 역사 지구의 복원 사업은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이어져 중세 도시의 특징을 강화하자는 강한 요구가 주를 이루었다. 지금도 역사 지역의 복원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