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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타계,"행동하는 양심" 일생과 어록 --살아있는 성인-세계인의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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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lson Mandela

 

 

'행동하는 양심' 넬슨 만델라 타계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민주화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사진)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

6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만델라의 영혼이 평화로운 휴식에 들어갔다며 그의 타계 소식을 알렸다.

남아공 역사상 첫 번째 흑인 대통령이었던 만델라는 인종차별정책에 항거하다 27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 폐결핵 등을 앓게 됐다.

만델라는 폐 감염증으로 지난 6월 남아공 수도 프리토리아의 메디클리닉 심장병원에 입원해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이후 병세가 호전되며 9월 퇴원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이 외에도 만델라는 수감생활 중 눈, 전립선 등의 질환에 걸려 고통을 받았다.

그는 불의에 저항하는 투사였으며, 두 개의 인종으로 나뉜 남아공을 하나로 합한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격리)에 맞서 격렬히 싸웠다. 만델라는 초기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전개했지만, 남아공 정부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흑인들을 탄압하자 사보타지 등을 벌이며 적극적인 저항의 길을 걸었다. 남아공 정부는 그에게 내란의 혐의를 적용해 그를 체포,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는 정치범으로 27년간의 수감 세월을 저항운동으로 보내면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해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수감시절은 남아공에 사는 흑인들에게 있어서 자유를 찾기 위한 투쟁의 기간이었으며, 남아공 바깥 사람들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었다.

석방된 뒤에 만델라는 분열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어 그가 꿈꿨던 무지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수감시절 남아공을 새로운 나라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라는 것을 깨닫고, 여러 색깔이 함께 어우러진 무기재처럼 남아공의 모든 인종을 끌어안는 조국을 꿈꿨다.

그는 자신을 석방한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흑백 화합의 길을 열었다. 남아공을 다인종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헌법적 기틀을 만든 공로로 만델라와 데클레르크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만델라는 흑백 분열의 갈등을 치유하는 한편으로 흑흑 갈등 해결에도 앞장섰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국민통합 및 화해촉진법을 제정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망각하지 않는 용서'를 실천에 옮겼다.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는 남아공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남아공 경제 부흥을 위해 세계 각국의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투자를 호소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중동 문제 및 에이즈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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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최고의 위인" 넬슨 만델라의 일생

남아공 민주화 투사에서 용서와 화합의 첫 흑인 대통령 대학때 인생행로 바뀌어…

 

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으로 27년 옥살이
남아공 민주화 투사에서 용서와 화합의 첫 흑인 대통령

대학때 인생행로 바뀌어…反아파르트헤이트 투쟁으로 27년 옥살이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김민철 특파원 = 남반구 하늘에 떠 온세상을 은은히 밝히던 큰 별이 끝내 스러졌다.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인권 투사에서 용서와 화해의 정치인으로 거듭난 `우리 시대 최고의 위인'(고든 브라운 전 영국총리)이었다.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27년동안 정치범으로서 옥고를 치르는 등 백인정권의 강고한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 정책에 맞서 현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이끌며 투쟁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더욱 빛났다. 흑인을 탄압하던 백인을 용서와 화합 정신으로 포용해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인종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오늘의 남아공을 건설한 것.

탄압을 받던 피지배 계층이 권력을 장악한 뒤 압제자들을 대거 숙청하지 않고 평화공존을 도모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다.

그는 또 권력욕을 버리고 대통령 자리를 물러난 뒤에도 인류 평화를 위한 외길에 매진함으로써 남아공은 물론 세계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자'의 길을 걸어왔다.

◇ 출생과 성장 = `롤리흘라흘라 만델라'. 1918년 7월18일 남아공 동남부 트란스케이의 시골마을 음베조에서 템부족 추장 가문 후손으로 태어난 만델라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롤리흘라흘라는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는 뜻으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만델라는 후에 기독교 계통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은사로부터 `넬슨'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얻게 된다.

남아공의 제2대 부족인 코사족에 속하는 템부 부족의 마디바 가문 출생인 그는 음베조 마을의 족장이던 아버지 헨리 음가들라 만델라가 9세때인 1927년 사망하자 템부족 왕을 후견인으로 해서 교육을 받게 된다.

나중에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가문 이름을 따 '마디바'로 부르곤 했다.

만델라는 템부족 왕실이 있는 음케케즈웨니로 옮겨 당시 흑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 대학에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얻어 홀로 된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드려야겠다고 생각하던 만델라는 그러나 대학에서 정학처분을 당하며 인생 행로가 바뀌었다.

6명으로 구성된 학생회의 대표로 선출된 그는 학생회가 대학 당국의 정책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거수기 노릇에 머물수 없다며 학교 측의 뜻을 거스르고 학생회 대표를 사임한 것.

음케케즈웨니로 돌아온 만델라는 템부족 왕이 미리 정해둔 여인과 결혼시키려 하자 이를 피해 무작정 요하네스버그로 상경했다.

◇ 투사가 되다 = 법률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방송통신대학인 남아공대학(UNISA) 학사 과정을 이수했다.

이 과정에서 만델라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등 흑인지식층과 교분을 트면서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눈을 떠 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25세때인 1943년 당시 민주화 투쟁의 중심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했고 이듬해인 1944년에는 ANC 청년조직인 'ANC청년동맹'(ANCYL)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34세때인 1952년에는 변호사 자격을 획득해 또다른 민주화 운동 지도자 고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공 최초의 흑인 법률사무소를 설립했다.

만델라가 ANC의 중심인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것은 1952년의 전국적 저항운동이었다. 그는 당국의 차별적 조치에 맞서 전 국민이 궐기하는 불복종 운동의 동조자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아 전국을 돌며 치밀하게 지지자를 확보, 수 개월에 걸친 저항운동을 벌였으며 처음으로 당국에 체포됐다.

이 저항운동으로 ANC는 소규모 결사조직에서 전국적으로 10만명의 회원을 지닌 강력한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백인정권의 탄압정책은 더욱 강경해져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인근 샤퍼빌에서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9명이 사망하는 '샤퍼빌 대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백인정권은 같은해 4월엔 반(反)공산당법을 발표, ANC를 불법조직으로 규정했다.

이후 만델라는 더 이상 비폭력 저항운동으로선 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ANC 지도부에 무장저항운동을 펼 것을 강력히 주장,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위 시즈웨(민족의 창)'의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 "'검은 뚜껑별꽃'을 잡아라" = 이후 당국의 감시를 피해 1962년 출국,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수개월 간 체류한 뒤 비밀리에 남아공에 귀국했으나 같은해 8월 그를 추적해온 경찰에 체포됐다.

이에 앞서 만델라는 노동자, 운전기사 등으로 변장하며 백인정권의 감시망을 용케 피해다녀 경찰이 그에게 '검은 뚜껑별꽃'이란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내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가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저항운동의 상징적인 연설이기도 하다.

그는 "난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와도 맞서 일생동안 투쟁해왔다.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롭고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을 품고 있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으며 이를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백인 재판부가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훗날 자서전에서 술회한 바 있다.

만델라는 1964년 케이프타운 앞바다에 위치한 로벤섬의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환갑을 지내는 등 18년의 옥고를 치렀다. 죄수번호 46664였다. 64년에 로벤섬에 수감된 466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그는 1982년 케이프타운에 소재한 폴스무어교도소로 이송됐다가 1988년 웨스턴케이프주 팔에 있는 빅터 퍼스터 교도소로 옮겨져 1990년 2월 출감했다. 모두 27년간의 긴 옥살이였다.

백인 정권은 노조의 파업 투쟁 등 국내적 저항과 국제사회의 제재 등 압력에 더 이상 흑인탄압정책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F.W.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를 석방하는 한편 ANC도 합법조직으로 인정했다.

이후 백인정권과 만델라가 이끄는 ANC 등 흑인 정당·단체 등이 협상에 나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 대한 청사진을 그렸다. 이를 통해 1994년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고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만델라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기가 바로 이 때로 1993년이었다. 그는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상을 받았다.

◇ 용서와 화합으로 무지개 국가 건설 = 만델라는 1991년 ANC 총재로 취임했다. 1994년 4월 27일 흑인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첫 민주적 선거에서 ANC가 다수당으로 승리했다. 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헌법의 간선제 규정에 따라 국회는 다음달인 5월에 만델라를 이 나라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만델라는 취임 연설에서 "자유를 향한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따로 떨어져 행동할 경우 성공할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단합된 국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화해와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자. 모든 사람이 일자리와 빵, 물 그리고 소금을 갖도록 하자. 다시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압제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 재임 기간 만델라는 백인사회에 대한 보복을 취하지 않고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를 위원장으로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출범시켜 피를 흘리지 않고 과거사를 정리했다.

백인정권 당시 경찰, 군 등 안보 기관에 근무하면서 흑인에 대한 테러와 인권탄압을 자행한 가해자가 TRC에 출두해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할 경우 사면하는 대화합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은 극심한 흑백 갈등을 겪지 않고 안정과 평화공존의 걸을 걸었다. 이를 통해 남아공 경제가 다시 성장의 길로 전환했다. 흑인과 백인이 피부 색깔이 다르지만 무지개처럼 조화를 이루는 나라를 지향하게 된 것.

◇ '정신적 대통령' = 만델라는 1999년 5년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헌법 규정상 재임이 가능했지만 단임으로 끝냈다.

그는 퇴임 이후 어린이재단,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및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퇴치 활동과 어린이 교육을 위해 기금마련과 자선활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등 사회에 대한 공헌활동을 지속했다.

지난 2001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쇠약해지면서 2004년 모든 공식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남아공의 정신적 대통령이자 '살아있는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남아공이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을 개최할 당시 한 장면은 남아공 국민의 만델라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그가 과연 월드컵 기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92세의 고령인 그는 당시 폐막식에 부인 그라사 마셸 여사와 함께 골프카트를 타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그라운드를 가로 질러 퇴장하기까지 수만명의 사람들이 '마디바'를 연호하고 부부젤라를 부르면서 그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존경심을 표시했다.

그후 약 1년이 지난 2011년 5월 17일.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만델라 자택을 찾아 1시간 가량 오찬을 함께 했다.

주마 대통령의 만델라 방문은 지방선거를 하루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담긴 행위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당시 제1 야당 민주동맹(DA)의 백인 여성 당수인 헬렌 질레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DA가 만델라의 화합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주마 대통령이 직접 만델라를 만남으로써 ANC야말로 만델라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당이라는 점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델라 전 대통령에게 기대는 형국인 것.

만델라는 월드컵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난 2011년 1월에는 호흡기 질환 증세를 보여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틀만에 퇴원했다.

남아공 정부는 이후 군의관이 이끄는 팀을 보내 만델라와 함께 기거하면서 그를 24시간 돌보도록 했다. 만델라의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국민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지자 그의 건강을 정부가 더욱 세심히 살피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워낙 고령인 만델라는 호흡기 질환 증세로 병원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는 27년의 옥살이 기간 약 13년을 채석장에서 노역했다. 이 때문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그는 2012년 12월 폐 감염증 치료를 받느라 성탄절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고 이듬해인 2013년 3월과 6월에도 폐렴이 재발해 입원 치료를 받았다.

◇ '우리 시대 최고 위인' = 만델라는 국제사회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이 때문에 남아공을 방문하는 유명 인사는 꼭 만델라를 만나고 싶어했다. 수도 프리토리아에서 900㎞ 떨어진 쿠누로 날아가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2012년 8월 남아공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일부 취재진과 수행원을 데리고 쿠누를 방문해 만델라와 면담했다.

2011년 6월에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남아공을 방문하면서 당시 요하네스버그 자택에 거주하는 만델라를 만났다.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는 지난 2006년 11월 남아공의 일간신문 프리토리아 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만델라에 대해 "(우리시대) 생존 인물 중 최고 위인"이라고 말한 뒤 "만델라의 위대함은 증오하기를 거부하고 다인종 국가인 남아공을 탄생시킨 것"이라며 남아공이 유혈사태 없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점을 극찬했다.

유엔은 지난 2009년 11월 만델라가 태어난 7월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만델라가 67년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정신을 기려 이날 만큼은 세계 만인이 하루 중 67분을 할애해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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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 만델라 어록

 넬슨 만델라는 '살아있는 성인'으로 불릴만큼 세계인의 추앙을 받았다.

자유를 향한 열정, 고난 속에도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는 그의 생전 어록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만델라가 설립한 '넬슨 만델라기념센터'의 셀로 하탕 이사장 등이 펴낸 만델라 어록집(Nelson Mandela By Himself)에 따르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의 주요 발언을 정리한다.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의 투쟁은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아프리카인이 직접 겪은 고통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 아프리카인들의 투쟁에 나 자신을 바쳐왔다. 나는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 맞서 싸웠고 또한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고 이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이상을 위해 나는 죽을 준비가 돼 있다." (1964년 4월20일. 내란 혐의 리보니아 재판 최후 진술에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새로 태어난 자유에 영광과 희망을 돌린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범법자 신세였던 우리는 오늘 우리의 땅에 세계 각국을 초청하는 귀중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정의와 평화, 인간의 고귀함을 위한 공동의 승리를 쟁취한 우리 국민과 함께 자리하기 위해 찾아온 국제사회의 귀빈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결국 정치적 해방을 이뤄냈다. 우리는 아직도 빈곤과 박탈, 성차별 등 여러 차별에 묶여 있는 우리 국민을 해방시킬 것임을 맹세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사람에 의해 사람이 억압받는 일이 결코, 결코,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자유가 흘러넘치도록 하자. 아프리카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1994년 5월 10일 남아공 초대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 연설에서.)

▲"친구들, 동지 그리고 남아공 국민 여러분,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자유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린다. 나는 여기 여러분 앞에 선지자가 아니라 여러분의 천한 종으로 서 있다. 당신들의 지칠 줄 모르고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내가 오늘 여기 서 있게 됐다. 그러므로 난 남은 내 인생을 여러분의 손에 맡긴다." (1990년2월11일 27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석방돼 케이프타운 시청 발코니에서 한 연설)

▲"난 말을 결코 가볍게 하지 않는다. 27년간의 옥살이가 내게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독의 침묵을 통해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고 말이 얼마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2000년 7월 14일, 만델라 어록집)

▲비판적이고 독립적이며 탐사적인 보도는 민주주의의 활력소다. 언론은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언론은 정부 관리에 맞설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언론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언론은 헌법의 보호를 누려야 한다. 그래야 언론이 시민으로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1994년 2월 14일, 만델라 어록집)

▲"지도자로서, 난 과거 음케케즈웨니궁에서 당시 섭정왕이 보여준 원칙을 항상 따라왔다. 난 회의에서 의견을 피력하기 전에 참석자들이 각자 무슨 견해를 가졌는지 들으려 항상 노력해왔다." (1994년.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

▲진정한 지도자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특히 민감하고 복잡한 문제를 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긴장된 상황이 되면 일반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이 세를 불리고 감정이 이성적인 생각을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2000년 1월 16일. 만델라 어록집)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 마쳤다면 그는 평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다. 난 그런 노력을 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잠잘 수 있을 것이다." (1996년. 만델라 어록집)

minchol@yna.co.kr


minchol@yna.co.kr

"증오를 내려놓으세요"

Nelson Mandela 1918~2013

만델라 남아공 첫 흑인 대통령 서거… 화합·용서로 350년 黑白갈등 끝내
조선일보 | 프리토리아 | 입력 2013.12.07 03:20
세계인의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가 자유를 향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프리카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95)가 서거한 5일(이하 현지 시각), 전 세계가 머리를 숙여 그를 추모했다. 여기에는 흑백(黑白)과 좌우(左右),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었다. 인권을 위해 바친 그의 희생에 어쩌면 인류 전체가 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델라는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줬다. 만델라는 남아공 백인 지배층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 차별 정책)에 맞서다 1964년 반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 문을 나서며 그는 "증오를 털어버리지 않고서는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한들 영혼은 여전히 갇혀 있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자신을 탄압한 백인들에게 내민 화해와 용서의 손길은 남아공의 인종 갈등을 치유하는 힘의 원천이 됐다.

그는 1990년 사면 후 백인 대통령 데클레르크와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는 협상에 성공해 약 350년에 걸친 인종 분규를 종식했다. 그 공로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76세 때인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평등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돼 5년간 재임했다.

남아공 국민은 만델라가 지난 6월 폐 감염증이 재발해 사경을 헤매면서 이별을 준비해왔다. 지난 9월 퇴원해 요하네스버그의 자택에서 치료를 받아온 만델라는 5일 오후 8시 50분쯤 숨을 거뒀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오는 10일 영결식을 가진 뒤 15일에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만델라는 자신의 장례를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당부했지만, 국민의 상실감을 고려한 조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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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 넬슨 만델라 이야기 

2009/07/22 15:18

 

복사 http://blog.naver.com/dourei/110057539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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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그는 누구인가?

인권과 평화, 용서와 화해의 상징인 만델라의 삶은 곧 남아공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그의 유일한 자서전인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은 만델라가 어떻게 '투사'에서 성자로, 세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위대한 인간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지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한 인간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치열한 싸움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그 긴 여정을 통해 한 사람이 어떻게 성숙되고 완성되어 가는지를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구성이 치밀하고 잘 씌어진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만델라의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뛰어난 문학작품이자, 굴곡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대사를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넬슨 만델라 지음 / 김대중(15대 대통령) 옮김 / 964쪽

  Long Walk To Freedom:The Autobiography of Nelson

  Mandela

 

 

 

 

 

  “『만델라 자서전』을 통해 드러난 만델라는······ 전설적인 우상이기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람이다.”

   -「뉴욕 타임스 북리뷰」

 

  “만델라의 생애는 20세기의 매우 주목할 만한 삶 가운데 하나이다.”-「워싱턴 포스트 북월드」

 

  “인간을 위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하나의 교본이다.”-「보스턴 글로브」

 

  “지적이고 그리고 겸손하다.······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책이다.”-「시카고 트리뷴」

 

 

만델라는 어떻게 <만델라>가 되었나?

 

남아공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흑인들의 꿈과 희망이 되었던 사람,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27년 간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마침내 그 고난을 극복하고 불굴의 인간정신의 승리를 보여주었던 투사, 자신을 박해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여 남아프리카에서 잔인무도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종식시키는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 이런 만델라를 가리켜 오늘의 세계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진정한 영웅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지난날의 자유의 투사에서 오늘의 성자로 바뀌어가고 있는 만델라, 이 책은 한 인간의 드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치열한 싸움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그 긴 여정을 통해 한 사람이 어떻게 성숙되고 완성되어 가는가를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구성이 치밀하고 잘 씌어진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만델라의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뛰어난 문학작품이자, 굴곡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대사를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가 들려주는 진실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나? 이 나라의 흑인 어린이는 흑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 전용 버스로 집에 돌아오고, 흑인 거주지역에서만 살아야 하며 ,흑인 전용 학교에만 다녀야 한다. 커서도 흑인들만 다니는 직장에만 취직할 수 있고, 흑인 거주 지역 내에서만 집을 빌릴 수 있으며, 흑인 전용 기차만 탈 수 있다. 밤낮을 불문하고 통행증을 제시하기 위해 수시로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며, 통행증을 보여주지 못하면 경찰서에 연행된다. 한 가족인데도 피부색에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집단구역법(Group Areas Act)에 따라 서로 다른 지역에 헤어져 살아만 하기도 했다. 백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상륙한 이래 약 340년 동안에 걸쳐 흑인들은 가혹한 억압체제 속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해왔으며, 이런 잔인무도한 체제에 저항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아 살해당하거나 실종되는 참상을 겪었다.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나치의 홀로코스트 다음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반인륜 범죄체제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에 맞서 만델라가 왜, 어떻게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여 악으로 가득 찬 체제를 무너뜨렸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만델라는 소수의 백인이 대다수 흑인들의 인권을 짓밟고 고문하고 투옥하고 살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인간파괴는 억압받는 흑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탄압하는 백인들의 영혼도 똑같이 파괴하고 타락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일어나 싸웠고, 그러다가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만델라는 이 책에서 도피생활에서 겪었던 두려움, 오랜 감옥생활의 고통, 죽음의 공포, 가족과 동지의 고난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안타까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진실하면서도 감동적인 필체로 전해주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 깨달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부당한 힘에 의해 때때로 좌절하고 패배를 당할는지 모르지만 인간은 스스로 좌절하지 않는 한 결코 패배자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전해 준다. 패배가 지닌 숭고한 의미도 말해주고 있다. 감옥은 그에게 큰 고통을 주었지만, 만델라는 그런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졌고, 관용과 용서로 자신의 적들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크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왔다. 시련 속에서 높이 들어올려진 그의 영혼, 그의 인간의 크기와 진정성, 그리고 그가 내민 용서와 화해의 손길이 이르는 곳마다 백인세력의 와해를 가져오는 극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폭력보다는 비폭력의 힘이, 사랑과 용서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증언해 준다.

 

이 책은 우리의 과거사 정리 및 역사바로세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델라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부록에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망각에 맞선 기억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진실을 밝히는 조건으로 범죄자들을 사면한’ 이 위원회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났으며 어떻게 활동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리하여 그것이 왜 세계적인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야만적인 범죄의 실상도 눈에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어 우리를 전율케 한다. TRC에 접수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인권유린 사건은(1960~94년)약 2만 1,300건에 이르렀고, 이들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 수는 약 305만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면을 청구한 범죄자들은 약 7천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0분의 1인 7백 명이 청문회에 나와 진실을 밝혀야만 했다.

 

 

만델라의 생애,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1918년 트란스케이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만델라. 그는 자신이 용감한 템부족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며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생 시절 그의 생각과 시야는 자신의 고향과 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준 백인들에게 고마워하며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공무원이나 통역관이 되는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흑인 젊은이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소년 시절의 자유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리고 젊은 시절 이미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는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와 자매들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만델라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만나게 되었고,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의 말처럼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치화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동지들과 함께 1944년 ANC 청년동맹을 창설하고, 인종차별적인 법안들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과 흑인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1947년 ANC 트란스발 지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면서부터 AN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때 남아프리카는 국민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더욱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1952년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프리카에서는 최초로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흑인들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또한 ANC의 저항운동을 이끌면서 ANC 내부에서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을 주장하던 그에게 1960년 70여 명이 살해당하는 샤프빌 대학살 사건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델라는 투쟁 방식을 비폭력 저항운동에서 무장폭력 저항운동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56년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1961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지하생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만델라는 폭력저항 단체인 ‘민족의 창(MK)’을 창설하고 무력투쟁을 추구하는 투사가 되었다.

 

“나의 사명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모두를 해방시키는 것”

 

지하생활을 계속하던 1962년 8월, 만델라는 차를 타고 가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전설적인 ‘검은 별봄맞이꽃’이 드디어 잡힌 것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명 ‘리보니아 재판’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형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절박함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만델라는 1964년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27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인종차별적인 요소들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범아프리카회의(PAC)를 비롯한 모든 저항단체들의 단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종종 탈출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냈다.

 

로벤 섬, 폴스무어 등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보낸 27년간의 감옥 생활은 만델라와 남아공 정부 모두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델라는 백인 정부와 대화를 시작해 많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백인 정부의 상황도 그리 낙관적이지 못했다. 국제적으로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만델라의 위상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감옥에 있는 만델라는 이제 남아공 인권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인내를 갖고 백인 정부와 대화한 끝에 만델라는 마침내 자기보다 먼저 많은 동지들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1990년 2월 11일 자신도 약 1만 일 동안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석방된다. 백인 정권은 만델라의 높아진 위상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방된 후에도 인종차별을 없애고 흑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던 만델라는 19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1994년, 마침내 340여 년 간의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는 남아프리카 최초로 흑인이 참여하는 총선거가 실시되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만델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위대한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임을 배웠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두려움을 느꼈으나, 용기라는 가면 속에 두려움을 감췄다. 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만델라는 모든 인간의 깊은 마음 속에는 자비와 관용이 있다는 점을 늘 잊지 않았다. “피부 색깔이나 가정 배경과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증오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마음에서 사랑은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본성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착함이란 가려 있으나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그리고 그는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델라는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은 사람은 증오의 포로가 되어 편견과 편협심의 창살에 갇혀 있게 된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   『만델라 자서전』에 대한 국제적인 찬사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통해 드러난 만델라는······ 전설적인 우상이기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사람이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감탄할 만한 책이다.······ (남아프리카의) 극악무도한 체제의 실상을 날카롭게 기록해 주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한 인간 정신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증언해 주고 있다.······ 만델라의 생애는 20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삶 가운데 하나이다.” -「워싱턴 포스트 북 월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우리를 압도한다. 몇 안 되는 정치적 자서전 가운데 하나로,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기막히게 재미있는 책이다.” -「로스앤젤레스 북 리뷰」

 

“정말로 놀라운 자서전이다. 날카롭고 지적이고 그리고 겸손하다.······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유익한 책이다.” -「시카고 트리뷴」

 

“인간을 위한 하나의 교본.······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보스턴 글로브」

 

“만델라의 삶과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 준 이 책을 읽다 보면 ‘관용’, ‘불굴의 정신’, ‘인내’와 같은 말들이 계속 울림을 전해온다. 그토록 오래 기다릴 수 있었던 사람,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던 사람, 그 사람에게 찬사를 보낸다. 만세, 만델라, 만세!” -「글로브 앤드 메일」

 

“남아프리카의 최근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한 폭의 태피스트리이다. 첫 페이지부터 독자들을 사로잡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줄 만큼 정직한 책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정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위대함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에 정말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런던)」

 

“20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만델라의 감동적인 생애의 연대기.”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행동으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작품.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진짜 영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영웅의 한 표본이다.” -「커큐스」

 

“이렇게 솔직하게 책을 쓴 것은 보기 드물고 감동적인 일이다.” -「이코노미스트」

 

“이 책은 넬슨 만델라의 비범한 삶을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런던 선데이 타임스」

 

"진짜 보석. 가치를 만들어 낸 놀라운 여정.” -「포틀랜드 오레고니언」

 

“이 책은 당신이 읽어야만 할 도서목록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세계는 영웅과 역할 모델에 굶주려 있다. 여기 우리가 발견해 낸 사람이 있다.” -「에드먼튼 저널」

 

“만델라의 매혹적인 여정을 따라가며 이 책을 읽다보면 불굴의 인간 정신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우아한 방식으로, 그리고 예리한 통찰을 통해 그 불굴의 정신이 지닌 의미를 강력하게 전해준다.” -「샌 디에고 유니언-트리뷴」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우리 인류의 한 시금석이 된 보기 드문 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의 한 조건이 되었다.” -「뉴욕 선데이 뉴스데이」

 

“이 유려한 회고록을 통해 우리는 만델라의 당당한 품위와 그의 인생 및 자유를 위한 투쟁에 대한 지혜로운 성찰을 만나게 된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한 인생과 대의에 대한 진지한 기록.······ 그의 나라에서 워싱턴과 링컨과 간디를 합쳐 놓은 인물이 된 사람에 대한 놀라운 발견.” -「몬트리얼 가제트」

 

“이 회고록은 내용이 풍부하고 강력하며 사려 깊다. 그리고 세계적인 무대에 서 있는 동시대의 정치인들이 쓴 어떤 회고록 못지않게 유익하다.” -「북 페이지」

 

차례

 

    감사의 글

1. 시골의 어린 시절

2. 요하네스버그

3. 자유투사의 탄생

4. 투쟁은 나의 삶

5. 반역죄

6. 검은 별봄맞이꽃

7. 리보니아

8. 로벤 섬: 암흑의 나날들

9. 로벤 섬: 희망의 시작

10. 적과의 대화

11. 자유

     부록: 그 후의 이야기들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지은이 /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1918. 7. 18~ )

 

넬슨 만델라는 1918년 트란스케이의 수도 움타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달으면서, 1944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청년동맹을 설립하는 등 흑인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2년에는 남아공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흑인들의 희망이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대항해 싸우던 만델라는 1956년 반역죄로 기소되지만 1961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0년 70여 명이 숨지는 ‘샤프빌 대학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만델라는 비폭력 노선을 포기하고 폭력 무장투쟁으로 돌아섰으며, 1962년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수감 중이던 1964년 6월에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약 27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백인 정부는 흑인들의 굽힘 없는 투쟁과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하여 1990년 2월 만델라를 석방했다. 석방 후에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남아공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공적으로 1993년 드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4월에는 남아공에서 최초로 흑인이 참여하는 자유 총선거를 통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과거 청산을 위해 그가 만든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전세계에 하나의 모델이 되어 용서와 화해의 참뜻을 깊이 새겨주었다.

그의 저서로는 『험난한 자유의 길(No Easy Walk to Freedom)』,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I am Prepared to Die)』 등이 있다.

 

옮긴이 / 김대중(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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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탱크 시각] 주목해야 할 만델라의 정치적 유산 / 이창곤

등록 : 2013.12.08 19:13 수정 : 2013.12.08 19:13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마디바’(존경받는 어른)가 세상을 떠났다. 지구촌이 온통 추모 분위기다. 10일 치러질 영결식엔 국왕·대통령 등 세계 정상만도 수십명이 참석한다. 넬슨 만델라, 그는 왜 이토록 추앙받는가? 그가 지구촌에 남긴 특별한 유산은 무엇인가? 타계 직후 세계 언론은 한편의 대서사시 같은 생애를 조명하며 이 전설적 인물의 위대성을 다투어 설파했다. 나는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정치가’로서 만델라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넬슨 만델라 평전>의 저자인 자크 랑에 따르면, 만델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순수한 열혈 청년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기질적으로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마치 연극인처럼 무대 의상과 장치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예술적 정치가였다는 것이다. 이는 적잖은 일화를 통해 확인되는데, 우선 자크 랑이 언급한 1962년의 일이다. ‘국민의 창’이란 비밀 군대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시도하던 차 체포된 만델라는 법정에 출두하게 됐다. 그는 당시 평소 입던 양복 대신 표범 가죽으로 만든 부족의 전통복을 입고 재판에 임한다. 그의 모습은 ‘백인 법정에 선 아프리카 흑인의 상황’을 극적으로 상징한다. 그날 이후 만델라는 아프리카 흑인의 영웅이 됐다.

2002년 말 국제부 기자로서 취재차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들은 1995년의 일화는 더 강렬하다.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를 폐기하고 대통령이 된 만델라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화해와 흑백 통합이었다. 자신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려고 그가 선택한 곳은 럭비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요하네스버그의 운동장이었다. 럭비는 아프리카너(남아공의 백인)들과 동일시되는 스포츠다. 만델라는 경기 직전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번에도 주무기는 옷차림이었다. 대통령 만델라는 남아공 럭비팀 백인 주장인 프랑수아 피나르 선수의 이름과 번호가 새겨진 셔츠를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이런 모습은 아프리카너들에겐 ‘마법과 경이의 순간’이었다. 당시 백인 관중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넬슨! 넬슨!”이라고 외쳤다. 한 언론인은 이날을 “남아공 (민주화) 이행에서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꼽았다. 두려운 흑인 투사는 어느새 백인들에게도 친숙한 지도자가 됐다. 만델라 자신이 자서전에서 소개한 1993년의 일화도 언급할 만하다. 그해 4월 대중적 지지가 높았던 남아공 좌익 지도자인 크리스 하니가 한 우익 계열 백인에게 총으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백인 정부로부터 권력 이양을 받기 한 해 전 일이었다.

자칫 유혈충돌로 치달을 수 있는 그때, 만델라는 방송에 출연해 연설을 한다. “편견과 증오로 가득한 백인 청년 하나가 우리나라에 와서 매우 사악한 일을 했고, 그래서 온 나라가 파멸의 순간에 서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백인 여인은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암살자를 법이 처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지금은 우리 모두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항해야 할 때입니다.” 만델라는 이 연설에서 암살자의 자동차 번호를 기록해 그를 체포하도록 도운 백인 여성을 부각함으로써 ‘백인 대 흑인’이란 대결적 구도를 ‘모든 남아공 사람 대 우리를 공격한 사람들’로 재구성(애덤 카헤인)했다.

헤닝 마이어 런던정치경제대 방문연구위원은 대의명분에 대한 깊은 헌신(또는 책임의식), 그리고 화해와 통합의 방식에서 보여준 특유의 기질적 힘이란 두 가지 요소를 만델라가 남긴 정치적 유산이라고 말한다.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특히 정치권이 주목해야 할 만델라의 위대한 유산은 ‘전설적 투사 만델라’보다 ‘화합과 포용의 정치가’로서의 현실적 면모와 노련한 리더십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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