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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획일과 편견 깨는 ‘생활속 진보’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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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획일과 편견 깨는 ‘생활속 진보’ 절실

올해 50세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기르던 콧수염을 1년전 말끔히 깎았다. 지난달 좌담을 위해 경향신문사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물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수염을 기르면 반사회적이라는 인상이 강한가 봐요. ‘교수라는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냥 밀어 버렸어요.”

조교수는 가끔 개량 한복을 입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잘 입지 않는다. 수염 깎은 것과 비슷한 이유다. 함께 좌담에 참여한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43·여)이 조교수의 말에 맞장구쳤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한때 즐겨 입던 개량 한복을 요즘은 다들 거의 입지 않아요. 고집스럽다는 인상을 준다는 이유죠. 시민운동 한다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고집 세다는 인상을 주는데 개량 한복까지 입으면 최악이라는 얘기죠. 그래서인지 종로나 인사동 쪽에 있던 개량 한복 집이 거의 망했다네요.”

이화외고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미국인 영어강사 파이퍼 칼슨(34·여)은 어느 날 수강생들과 군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어떤 경우에 병역 면제를 받느냐는 칼슨의 물음에 한 학생이 “문신을 새기면 군대에 안간다”고 답했다. 칼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문신이 어때서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 것도 표현의 자유 아닌가요?”

“한국 정서에 안맞는다” “저 사람 너무 튄다”는 말은 ‘모난 돌이 정 맞기 쉬운’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일상생활을 획일적으로 규율하는 무서운 질서이자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는 “일상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양성을 제약하는 획일주의를 깰 필요가 있다”며 “한국사회도 생활 세계에서의 진보, 미시적 진보로 진보의 범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때가 왔다”고 말했다. 남과 조금만 달라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는 한, 그런 심리적 억압을 당연시하는 한 결코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삶은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진보는 주장이나 선언이 아니라 체화된 일상적 습관이어야 한다. 경향신문 취재진이 지난 4개월간 ‘진보개혁의 위기’ 시리즈 취재 도중 ‘진보진영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일반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돌아온 대답은 “언행일치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성인 군자(聖人 君子)’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외치는 가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진보성향의 계간지를 내는 모 출판사에서 일했던 윤모씨(43·여)는 몇년 전 그 직장을 그만뒀다. 윤씨가 진보를 표방하는 그 계간지의 방향성이 좋아 옮긴 지 2년 만이었다.

“밖에서 알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그곳 역시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었죠. 여성이 생리휴가를 갖는다든지, 강한 주장을 하는 모습을 봐 주질 못해요.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나왔지요.”

시민단체에서 진보성향의 교수들과 함께 일했던 서울대 대학원생 오모씨(30·여)는 “진보운동을 하는 지식인들은 왜 하나같이 둥글둥글한 사람이 없고 모난 성격만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씨는 “그들이 불의에 항거해 몸을 내던지며 우리 사회를 바꿔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성격으로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항상 불만에 가득 차서 욕지거리만 해대는 모습에서 이 분들이 과연 언제 대안이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조희연 교수가 포기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의 말이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더군요.”

〈손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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