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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5-1. 진보의 확장과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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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개혁의 위기] 5-1. 진보의 확장과 심화

‘진보의 가치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것.’ 지칠 대로 지친 진보운동 진영이 다시 힘을 얻어 한국 사회의 건강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짜야 될 전략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고 차별 받지만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진보운동의 중심으로 나와 진보운동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는 거대담론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생활세계로까지 내려와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억압, 이중적 행태를 깨고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진보운동 진영은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사회 세력간의 대타협을 주도해 진보적 발전의 토대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미국 따라하기, 미국닮기에 골몰했던 한국사회의 좁은 상상력을 벗어나 우리의 터전인 동아시아 지역의 민중과 연대하며 진보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진보진영의 과제이다.

KTX 전 승무원 100여명이 지난 9월 28일 국회 앞에서 포승으로 몸을 묶은 채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해고 KTX 승무원으로 시위대의 일원이던 오미선씨가 지난 7일 서강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장면을 합성했다.

#‘승무원에서 대학강사로’

“여러분들은 졸업 후에 다들 대기업에 취직할 것 같죠. KTX 승무원의 90% 이상이 4년제 대학 졸업생인 것 아세요? 저 역시 건국대 98학번이고요. 대학 다닐 땐 돈 없고, 빽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비정규직이 되는 줄 알았어요. 노동운동의 ‘노’자도, 여성문제의 ‘여’자도 몰랐어요. 스타크래프트나 DDR, 소개팅 그리고 내 앞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죠.”

지난 7일 서강대의 한 여성학개론 강의실. 강단에 선 오미선씨(27·여)의 이 말에 다소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학생들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오씨는 불과 2년 반 전 ‘지상의 스튜어디스’ ‘KTX의 꽃’ 등 화려한 찬사를 받으며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KTX 승무원이었다. 노조를 조직해 해직된 300여명의 비정규직 승무원들이 차가운 길거리로 나와 파업을 한 지 300일이 다 된 지금 그는 “당신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대학 강의실에서 전하고 있다. 오씨는 10월30일 중앙대를 시작으로 한달 남짓 동안 벌써 20여차례 대학 강의를 한 베테랑 강사다. 서울대와 성공회대, 이화여대, 전남대 등에서 특강 요청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온다.

오씨는 주로 정치학 또는 여성학 개론 수업 등에서 특강을 한다. KTX 승무원의 예를 들어 ‘비정규직’ 또는 ‘간접고용 노동자’(하청노동자)들이 어떻게 노동시장에 자리매김되고 있는지, 그 가운데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 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른바 ‘서울소재 주요 4년제 대학’ 학생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는 아직도 남의 일만 같다. 하지만 오씨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생각은 조금씩 바뀐다.

“꿈 많은 20대의 여자 승무원들이 아직도 100명이나 남아 추운 날씨 속에 300일 동안 농성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셨어요?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지배하고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오씨는 철도공사의 자회사(외주하청)인 KTX관광레저에 정규직(간접고용)으로 취업해서 승무원 일을 하는 것이 왜 철도공사 비정규직(직접고용)보다 못한지를 설명한다.

“KTX 승무원들은 입사 당시 1년간 근무하면 정규직 전환이 보장되는 철도공사 비정규직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홍익회라는 자회사의 비정규직이었어요. 성희롱을 당해도, 생리휴가를 못챙겨도, 정당한 수당을 못받아도 어느 쪽도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없었던 거죠. 이번에 통과된 비정규직 법안도 사실 하청노동자를 늘림으로써 비정규직 수를 줄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이에요.”

오씨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한번 쓰고 버리는 ‘티슈’와 같은 존재”라며 “안타깝게도 티슈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의는 끝났다. 강의 도중 오씨가 틀어준 승무원의 투쟁을 담은 영상물에 눈물을 훔쳤던 몇몇 학생들이 남아 매주 금요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리는 KTX승무원 문화제 행사에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

서강대 4학년 김이슬씨(23·여)는 “지금까지 비정규직 문제라고 하면 나와 무관한 일로 생각했는데 이 강의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며 “KTX 승무원들의 직접고용 복직이 갖는 상징성이 크고 그것이 곧 나의 일일 수도 있는 만큼 나도 이 분들께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스펀지 공장 노동자에서 웹마스터로’

13일 저녁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한국도 알고보니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은 곳인 것 같아요.”

5인조 록그룹 ‘스탑 크랙다운(그만 좀 탄압해요)’의 멤버로 이날 키보드를 연주한 해리 켄 아흐마드(33)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다. 5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처음 와 경기 파주의 한 스펀지 공장에서 일하다 지금은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라는 시민단체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스탑 크랙다운’은 해리를 비롯해 네팔, 미얀마, 한국 등 혼성 국적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이주노동자 그룹사운드다.

“한국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차별’이에요. 언젠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친구랑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다들 피하는 거예요. ‘사장님’들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못난놈들’이라며 욕만 하고.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차별이 있을 수 있구나 느꼈어요. 인도네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한국의 차별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어 보겠다고.”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무슨 일이든 잘 배웠다. 그는 요즘 노동운동 관련 뉴스를 올리는 노동네트워크의 웹마스터 일과 한국에 온 인도네시아 출신 3만 이주노동자들의 공동체에서 미디어팀장을 맡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과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홈페이지를 만드는 법과 동영상 찍는 법도 교육한다.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모국으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이 90%가 넘는다고 해요. 5년 넘게 한국에 살아 제2의 고향으로 느끼는 저로서는 무척 안타까워요. 저 같은 사람이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제는 내가 가진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해리가 만들어 운영 중인 웹사이트 ‘인도네시아 커뮤니티-삶, 사랑 그리고 평화’(http://tkikorea.com)에는 ‘고용허가제’ 등 한국의 이주노동자 관련 새 법들에 대한 소개와 ‘한국어 한마디-우리들이 쓰는 글’이라는 생활 한국어 코너 등이 있다. 많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정보를 공유한다.

해리는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문화 차이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부모님이라도 나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와선 사장님이 머리를 툭툭 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별안간 화가 났죠. 사장님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라며 저를 더 미워했죠.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한국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이주노동자들도 문제가 있어요.”

해리와 함께 일해온 이용근 노동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홈페이지 관리에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언어 감각이 뛰어나 국제연대와 관련된 일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를 평가했다. 해리는 “서로 조금씩만 더 알면 진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며 “내가 하는 작업이 아주 작은 것이지만 한국사회를 문화적으로 더 풍요롭고 따뜻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상에서 주체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스탑 크랙다운(그만 좀 탄압해요)’의 멤버들이 지난 6월 서울 상도동의 청운노인복지센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 해리 켄 아흐마드(맨 오른쪽)는 이 그룹에서 키보드를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 주변부의 한 끝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겨웠던 이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보호’ 받아야 할 대상 또는 ‘관리’돼야 할 대상으로 더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사회의 주요 구성원이고 생산자이다.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많은 차별과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왜 이들이 진보운동의 동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최근 이들을 진보운동의 활력을 불어넣을 잠재적 에너지로 흡수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2006년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54.8%(8백41만4천여명)가 비정규직(장기임시노동자 포함)이다. 지난해보다 2만명이 늘었다. 이 비율은 OECD 국가 평균의 2.5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이 받는 차별도 OECD 국가들 중 최악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 차이는 2000년 73만원에서 올해 1백10만원(정규직 2백26만원, 비정규직 1백16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해 정규직 임금의 90%까지 받는 구미 선진국들의 비정규직에 비해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1%의 임금을 받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한다. 여기에 한국의 비정규직이 세계 어느 나라의 비정규직보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복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사회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불만과 이익을 표출할 통로는 없다. 노조를 통한 의사 표현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정규직은 특성상 노조를 조직해도 금방 와해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을 2.8%(정규직은 21.6%)로 추정했다. 이들이 가진 잠재적 에너지는 올초 프랑스 전역을 달궜던 최초고용계약법(CPE) 파동에서 읽을 수 있다. ‘26세 미만 취업자에 관한 한 정당한 설명 없이 2년 내 해고 가능’이라는 조항이 포함된 CPE안이 의회에 상정되자 프랑스 대학생과 젊은이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들의 ‘젊은’ 물결은 ‘늙은’ 거대 노조단체들을 각성시켰고 한바탕 프랑스를 ‘거리의 정치’가 휩쓸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 불어닥친 노동시장 유연화의 상징이던 CPE는 철회됐다.

한국의 경우 지난달 불만족스러운 ‘비정규직법’이 통과됐어도 프랑스 같은 불길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비정규직’이 바로 ‘나의 일’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무국장은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도 느린 속도로나마 변하고 있다. 최근 대부분의 노동관련 문제가 비정규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는 비정규직 문제가 한국사회의 모순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사회가 매달려야 할 심각한 사회문제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제2, 제3의 오미선’이 나타나 “당신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확산되면 사회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비정규직이 한국사회 진보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자기권리를 찾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 역시 차별과 소외 속에 한국사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집단이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가 지난 9월 현재 41만5천여명. 이들이 일손을 놓는다면 한국에는 ‘3D 업종 대란’이 온다. 2003년 11월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때 건설현장에서 일할 사람이 40%나 격감해 인력대란이 일어났다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분석이 있었다. 이들이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이 이 사회의 가장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집단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발언을 한다면 한국사회를 진보적 사회로 이끌어가는 새로운 힘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의 소지자로 특히 한국과 같은 문화적 획일주의에 갇힌 사회에 남다른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근 몇년간의 이주노동자 급증은 한국적인 법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순기능을 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사회에 만연한 민족주의, 단일민족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도 제공했다. 우리 사회 내에 가득 찬 ‘다름’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을 자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또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을 제어해 낼 수 있는 ‘사람의 힘’을 갖고 있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웹사이트 ‘레이버아시아넷’(http://laborasia.net)이 좋은 사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25개국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웹사이트에는 25개의 다른 언어로 해당 국가와 관련한 소식들이 올라와 있다. 인도네시아인 해리와 같은 각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자국 관련 소식 또는 한국 소식을 자국어로 이 곳에 올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의, 자유무역협정(FTA), 해당 국가의 노동인권 문제 등이 주로 다뤄진다.

올3월 홍콩 WTO 회의장 주변에서 열렸던 반세계화 시위장에서 이들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그동안 교환하며 쌓아온 우정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반대시위를 조직해 냈다. 해리는 “각국에서 온 시민운동가들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줌으로써 반세계화 운동의 조직화에 앞장선 것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홍콩에 와 있던 가사노동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제2, 제3의 해리’가 아시아 곳곳에서 네트워크를 만들며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힘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장창원 목사는 “자본은 국경 없이 넘나들고 있지만 노동은 국경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할이 엄청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노동자·민중 중심의 현장 교류 방문이 지역 평화와 상호 발전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세기 반 전에 칼 마르크스가 변혁 주체로 내세운 ‘노동자’가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로 재정의되고 있는 현상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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