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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6) 체사레 보르지아--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11. 5.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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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6) 체사레 보르지아
                    

     

             

ㆍ‘적대적 소수’의 말과 ‘타인의 힘’을 믿어버린 체사레의 잘못된 선택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1475~1507)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인물이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큰아들로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를 모두 장악했고, 그 기세를 몰아 피렌체가 있는 토스카나까지 지배하려 했던 마키아벨리 시대의 가장 주목받던 군주다. 발렌티노 공작, 로마 교회군 총사령관, 그리고 추기경이라는 화려한 경력에서 보듯 그는 당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갖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권력자이기도 했다. 한 손에는 냉혹하리만큼 교활했던 교황 알렉산더 6세의 후원, 다른 손에는 그 누구보다 기민하고 잔인했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용병대장들이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체사레가 ‘새로운 군주’(principe nuove)의 전형으로 제시된 <군주> 7장은 수많은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군주’에 대한 이야기가 천박한 용병대장 정도의 생존방식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주>에서 마키아벨리가 묘사한 ‘새로운 군주’의 잔인함과 기만술이 그가 꿈꾸던 ‘자유로운 삶’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군주>에서 ‘새로운 군주’의 전형으로 소개된 인물들은 우리에게 큰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보다 더한 잔인함과 천박함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악당들을 제거하겠냐는 질문이 떠나지 않고, 그런 방식으로 ‘자유로운 삶’을 건설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 “제왕의 평판은 도덕적 태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만을 통해서든 공포를 통해서든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주세페 로렌초 가테리(Giuseppe Lorenzo Gatteri)가 그린 ‘바티칸을 떠나는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abbandona il Vaticano, 1877). 마키아벨리가 <군주>에서 묘사한 체사레 보르지아의 이미지가 근대인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역사적 사건 묘사에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가테리가 줄리아노 로베레 추기경(이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기만술에 속은 체사레 보르지아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타고난 운’과 ‘타인의 무력’ : 철인정치 콤플렉스 벗기

엄밀하게 보면, 마키아벨리는 <군주> 7장에서 체사레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내린다. 한편 체사레는 ‘새로운 군주’의 전형으로 모두가 모방해야 할 대상이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마키아벨리는 그를 ‘새로운 군주’의 모범이라고 말한다. 그의 행적보다 더 나은 새로운 군주의 수칙을 일러줄 수 없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행동에서 비판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과분한 칭찬을 더하고, 마지막으로는 새로 권력을 잡은 군주라면 누구나 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까지 부언한 것이다. 반면 우리는 마키아벨리로부터 체사레가 실패한 군주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비록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측하지 못한 불운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 같지만,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자기의 몰락을 자초한 실패한 군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될 사실이 있다. 체사레가 아버지 교황 알렉산더 6세의 후원과 프랑스의 군대를 통해 이탈리아의 맹주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군주’는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자기의 능력으로 권력을 잡은 인물로 대표된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더라도, 최소한 시라쿠사의 히에론(Hieron)처럼 자기의 힘으로 일어선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체사레는 우리의 일반적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그가 최초로 이탈리아 권력의 판도에 뛰어들게 된 것도 알렉산더 6세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고, 그가 중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게 된 것도 프랑스 군대의 원조가 없었다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따져보면 알렉산더 6세가 오히려 더 위대해 보인다. 왜냐하면 ‘기만’과 ‘외세’만으로 아들을 이탈리아의 맹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타인의 도움’으로 권력을 장악한 체사레로부터 무엇을 부각시키고 싶었을까? ‘다른 사람의 무력과 운’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자기의 역량으로 군주로서의 권위를 성공적으로 확립했다는 평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대답으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능력의 소유자를 기다리는 헛된 열망으로부터 자기의 시대를 해방시키려던 마키아벨리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 이후 지속되어온 ‘철인 왕’에 대한 논의로부터, 그리고 ‘신을 닮아가기’(homoiosis theoi)를 정치가의 목표로 앞세운 지식인들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체사레의 ‘타고난 운’도 실제로는 교황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아버지의 ‘기만’이 가져다준 선물이었을 뿐이라는 설명 속에, ‘외세’도 잘만 이용하면 자기의 역량이 될 수 있다는 역설 속에, 마키아벨리는 철인 왕의 콤플렉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다수’가 만드는 ‘평판’… 잔인했던 심복을 공개 처형

<군주> 7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로부터 11가지나 모방하라고 주문한다.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것, 그 자신을 위해 친구들을 확보하는 것, 힘으로든 기만으로든 정복하는 것, 인민들이 자기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 병사들이 자기를 따르고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 당신을 공격할 수 있거나 공격할 만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것, 새로운 방식들을 통해 옛 질서들을 새롭게 하는 것, 가혹하면서도 상냥하고 위압적이면서도 관대해지는 것, 불손한 군대를 제거하는 것,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는 것, 왕들과 군주들과의 동맹을 유지해 그들이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아니면 당신을 공격하기를 주저하도록 유지하는 것”에서 체사레의 행동보다 “더 새로운 사례”(piu freschi esempli)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군주> 3장의 정복군주를 연상시키는 목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병대장의 천박함이 묻어나는 생존방식이다.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군주와 신민들의 관계다. 마키아벨리는 매우 상반된 행동을 동시에 연출하도록 조언한다. ‘사랑받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잔인함에 치를 떨게 하면서도 관대한 평판을 유지하라’고 주문한다. 아마도 당시 이탈리아 참주들은 ‘두려움’과 ‘잔인함’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은 이해했겠지만, ‘군대’와 ‘외세’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을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인민의 지지를 통해서라기보다 정복군주처럼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잔인함’이라는 단어가 불쾌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참주들은 기만을 통해서든 공포를 통해서든 인민이 자기들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이 의아했을 것이다. ‘자애로운 군주’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나쁜 행동양식을 가지고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라는 이야기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 7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라미로(Ramiro de Lorqua)의 처형’은 새로운 군주가 어떻게 상반된 평판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우선 체사레가 평판을 얻는 과정이 전통적이지 않다. 마키아벨리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판’(reputazione)을 얻은 대표적 사례는 프랑스의 루이 12세다. <군주> 3장에서 보듯,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합병한 후 다수 인민보다 소수 귀족을 만족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단지 알렉산더 6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체사레에게 군대를 빌려주는 실수를 범한다. 반면 체사레는 모든 면에서 정반대다. 그는 ‘소수’가 아니라 늘 ‘다수’의 편에 선다. 로마냐 지방의 무질서를 폭력으로 잠재우려는 의도도 ‘좋은 정부’(buon governo)를 만들어주려는 것이었고, ‘제왕적 힘’(braccio regio)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도 귀족들의 파벌싸움에 희생된 시민들의 비참한 삶 때문이었다. 이런 취지의 행동을 하면서도, 체사레는 자신의 야망을 도덕이나 이타심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잔인한 방식이나 기만적인 행동도 주저하지 않는다. ‘평판’이 곧 ‘정치적 힘’이라는 등식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체사레는 평판이 ‘도덕적 태도’를 통해 구성되지도 구성되어서도 안된다고 본 것이다.

■ ‘다수’의 정치 : 결과를 본다 (si guarda al fine)

궁극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체사레는 ‘좋은 평판’의 잣대를 ‘다수의 지지’에서 찾는다. 자기의 심복들 중 가장 ‘잔인하고 재빠른 인물’이었던 라미로의 통치가 인민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자, 체사레는 인민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을 전적으로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라미로의 몸을 두 동강 내어 피 묻은 칼과 함께 광장에 보란듯이 전시한다. 라미로의 혹독함과 체사레의 잔인함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전자가 다수의 분개를 초래했다면, 후자는 다수에게 큰 만족을 가져왔다. 동시에 전자의 ‘과도한 권위’가 ‘자의적’이라는 평판을 불러일으켰다면, 시민법정을 설치해서 라미로의 죄를 공개적으로 물음으로써 후자의 ‘제왕적 권위’는 공정하다는 인상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체사레는 <군주> 18장에서 마키아벨리가 충고한 ‘결과를 본다’(si guarda al fine)는 말을 가장 잘 이해한 군주였던 셈이다. 분열을 일으킨 ‘소수’에게 잔인하게 하는 대신, 지배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하는 ‘다수’를 만족시켜야 할 이유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존속과 다수의 행복을 가져올 때, 그리고 이러한 결과가 지속적으로 그 목적들을 위해 소용될 때, ‘잔인함’도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이 광경을 <군주> 7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인민들은 “만족을 느끼면서도 멍해졌다”(satisfatti e stupidi)고 말이다. 인민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충족되었다는 만족감만큼이나 정치적 권위의 엄중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뜻이다.

<군주>를 읽다보면 체사레가 마치 질병으로 죽은 것처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군주>에서는 체사레가 율리우스 2세에게 감금당했다가 탈출해서 처남이 다스리는 북스페인의 나바라 왕국으로 간 것, 그곳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사령관이 된 것, 그리고 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복병에게 공격을 당해 참혹하게 숨졌다는 것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의 몰락을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소수’의 말을 믿어버린 ‘잘못된 선택’(mala elezione)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체사레는 산안젤라 성에서 요양하고 있었지만,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군대로 충분히 추기경들을 자기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대의 위협 때문에 교황을 선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추기경들의 탄원을 받아들였고,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후원 약속을 믿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타인의 운’으로 권력을 잡은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체사레가 또다시 ‘타인의 힘’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선택을 했다고 한탄한다. 마키아벨리의 생략은 또 다른 의미의 웅변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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