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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8) 마키아벨리와 ‘비(非)지배--’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11. 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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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8) 마키아벨리와 ‘비(非)지배’
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ㆍ‘무능한 정치’에 절망…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시민적 자유’ 열망

<강론> 1권 47장에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축출한 바로 그 시점부터 피렌체가 ‘심각한 방종’(licenza ambiziosa)에 빠지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그는 분명 피렌체가 ‘야망이 초래한 무질서’ 상태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야망’이나 ‘욕망’이 ‘무질서’와 ‘방종’을 가져왔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대중 정치인들’(popolari)의 무능력이다. 광장에서는 그토록 목소리를 높여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약속하더니, 권력을 잡은 뒤에는 모든 문제에 침묵해버린 대중 정치인의 무책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바로 이들이 피렌체 시민들을 노예 상태에 빠뜨렸고, 바로 이들이 ‘정치’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켰다고 한탄한다.

어쩌면 지금 지구촌 곳곳이 마키아벨리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메디치 가문의 축출 이후에 닥친 위기에 갈피를 못 잡던 피렌체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보편화 시대’의 일상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스스로를 관리하기에 급급한 생활 속에서 점차 개인화되어 가는 시민, 무한경쟁과 극도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절망만 안겨주는 시장, 사건마다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여론이 시민적 열정을 제도의 개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소진시켜 버리는 광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도덕률만을 고집하며 회랑과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대중 정치인, 이 모든 것이 피렌체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제도에 대한 열망은 정치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맞물려 ‘정치적 신중함’이 작용할 작은 공간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가 그러했듯이, 시민들이 목도하는 것은 단지 무능력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절망적 ‘대치’(deinon)일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런 절망의 시대에 도전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등장하는 티몬(Timon)의 독백을 읽을 수 없다. 그의 글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인간에 대한 실망이 없는 것이다. 대신 인간의 흠결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의견과 인간적 욕망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통해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한 명의 철학자를 만나게 된다. 악마의 굴레를 재치로 벗어난 <벨파고르>의 농부 잔마테오처럼,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마키아벨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마당에 있는 마키아벨리 동상(1846). 이탈리아 신고전주의 조각가 로렌초 바르톨리니가 2년에 걸쳐 조각해 완성한 것이다. 산티 디 티토의 초상화에 기초했지만, 정치 철학자로서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더 강조하고자 했다. 인물의 특성과 시대의 열망이 작가적 상상력을 통해 절묘하게 조화된 작품으로,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시기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 “다수는 지배를 꿈꾸기보다 지배받지 않으려 할 때 가장 건강하다…
소수 정치인은 다수의 비지배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 새로운 사회 정의의 틀: 비(非)지배 자유

마키아벨리의 <강론>에서 특이한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다수’와 ‘소수’는 주목하지만 ‘약자’와 ‘강자’에 대해서는 주의를 환기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함’ 또는 ‘약한’과 관련되는 용어들을 모두 살펴보더라도, 이 단어들은 국가 사이의 힘의 관계나 군주 또는 지도자의 역량을 지칭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특히 ‘시민적 자유’와 관련될 때, 마키아벨리가 ‘다수’ 또는 ‘시민’을 ‘약자’로 묘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구태여 있다면, <강론> 1권 57장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도 ‘함께하면 강하지만 스스로는 약하다(debole)’는 전제에서 ‘우두머리가 없는 고삐 풀린 군중(moltitudine)’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이지, ‘다수’나 ‘시민’이 원래 ‘약자’라는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가 ‘강자’와 ‘약자’로 시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가 꿈꾸던 공화정이 자유를 향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이라든지,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상대적이기에 ‘다수’가 꼭 ‘약자’가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든지,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변동과 관련된 그의 기술들을 읽다보면, 한 가지 유독 강조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민’ 또는 ‘다수’는 지배하려 하기보다 지배받지 않으려 할 때 가장 건강하고, ‘가진 자’와 ‘소수’는 ‘다수’ 또는 ‘시민’이 지배받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에 헌신할 때 가장 훌륭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마키아벨리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강자’와 ‘약자’의 관계보다 ‘지배’와 ‘비지배’의 역학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 ‘다수’가 비지배를 꿈꿀 때 :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품위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의 ‘다수’가 비지배를 꿈꿀 때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품위가 함께 보장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여기에는 개개인은 한 사회에서 특정 역할이 있다는 ‘유기체’론도, 자연은 몇몇 사람들이 무리 중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자연 귀족’론도 없다. 다만 냉혹하리만큼 차분한 정치적 현실주의, 그리고 욕망과 실수가 버무려진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만이 번득일 뿐이다. 그리고 ‘다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배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어야하고, ‘다수’가 지배를 꿈꿀 때에는 ‘다수’가 이미 ‘소수’의 선동과 야망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찰이 내재되었을 뿐이다.

특히 <강론> 1권에서 마키아벨리는 ‘다수’가 지배하려 할 때 건강했던 로마 공화정조차도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거듭 경고한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일관되게 매 ‘7’로 끝나는 장에서 이런 충고가 반복된다. 7장에서는 한 사람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 17장에서는 참주에 저항한 인민의 영웅, 27장에서는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용병대장, 37장에서는 로마 공화정을 구하려다 몰락을 재촉한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 형제, 47장에서는 대중 정치인, 57장에서는 ‘대장’(capo)이 없는 무력한 군중, 이 모든 사례는 ‘다수’의 정치가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준다. 행운의 숫자로 받아들여졌던 ‘7’, 여기에 그는 ‘다수’의 실패를 막을 지혜를 숨겨놓은 것이다.

유독 마키아벨리가 냉정함을 잃은 곳이 있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강론>을 헌정한 두 유력가문의 젊은이들에게 조언하듯, 1권 37장의 구절들은 정의감에 불탄 젊은이들의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이 흠뻑 배어 있다. 우선 그는 당시 지식인들과는 달리 그라쿠스 형제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에 아낌없는 칭찬을 보낸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병들에게 닥친 가난, 법을 어기면서까지 공유지를 차지한 부자들의 만용, 그리고 노예로 전락한 빈민들의 설움에 분노한 두 젊은이의 정의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를 언급할 때, 그들이 인민들에게 심어준 잘못된 신념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눈가에 맺힌 이슬을 숨기지 못한다. ‘지배’를 통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시민들이 더 ‘강한’ 참주를 찾는다는 사실을 왜 몰랐냐고 통탄하는 것이다.

일면 마키아벨리의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가 그가 실현하려던 ‘소란스러운 공화정’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다수’의 실패에 대한 한탄과 ‘갈등’의 순기능에 대한 확신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비지배를 위한 집단행동에 대해서만큼은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에도 거리낌 없는 찬사를 보내기 때문이다. 설사 인민의 비지배를 위한 집단행동이 소요로 귀결되더라도, 그는 그 이유를 인민의 무모함보다 귀족의 오만함으로 돌린다. <강론> 1권 5장에서 보듯, 귀족의 횡포와 거만함이 지배해서라도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을 인민에게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는 ‘소수’에게 무엇보다 ‘비지배’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비지배’를 위해서라면, <강론> 1권 47장의 파쿠비우스(Pacuvius Calavus)처럼 파당적 이익도 과감하게 버릴 것을 주문한다. 그의 해석을 따르면, 카푸아의 파쿠비우스는 안으로는 혁명의 기운이 만연하고 밖으로는 한니발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신중한 지도자며, 귀족과 인민의 첨예한 갈등을 제도적 합의로 귀결시킨 탁월한 지도자다. 특히 귀족들에게는 그들의 오만함이 불러올 위험이 무엇인지를 직시하도록 강제하고, 인민들에게는 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받아들이도록 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여기에 파쿠비우스가 ‘기만’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인민이 스스로의 ‘비지배’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낸 지도자만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파당적 이익’과 ‘개인적 야망’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잡고자 하는 ‘소수’에게 ‘비지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당적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의사로부터 출발하는 태도, 시민들이 설득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설득’을 통해 가능한 최선을 획득해 나갈 수 있는 믿음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부단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공화정의 개혁을 위한 ‘제왕적 권력’(podesta regia)만큼이나, ‘적절한 시점’에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영민함’(astuzia)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시민적 자유를 상실하면, ‘다수’뿐만 아니라 ‘소수’조차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 마키아벨리의 죽음 : ‘내 영혼보다 조국’이라던 애국자

1527년 6월, 마키아벨리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수십일 전만 해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의 군대에 굴복하자 복원된 공화정에서 그는 마지막 꿈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사보나롤라를 따르던 공화파 인사들이 그에게 붙인 ‘메디치의 하수인’이라는 평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527년 4월 그가 친구 베토리(Vettori)에게 보낸 편지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의 조국(patria)을 내 영혼(anima)보다 사랑하네. 내 육십 평생의 경험으로 자네에게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들(articuli)은 없었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평화든 전쟁이든 어떤 것도 잘할 수 없는 군주를 우리가 모시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 속에서, 바로 그 ‘군주’가 클레멘스 7세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메디치의 하수인’이 아니라 ‘피렌체 애국자’의 절규를 읽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 편지를 쓴 때, 피렌체는 이미 시민적 자유를 회복한다 하더라도 그 자유를 지킬 수 없는 무능한 ‘대중 정치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클레멘스 7세의 거듭된 실수로 그가 사실상 지배하던 피렌체도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이때 라구사(Ragusa)의 서기장직도, 용병대장 콜론나(Prospero Colonna)의 고문직도 마다했던 마키아벨리가 나섰던 것이다. 보잘것없는 직책이지만 클레멘스 7세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도 조국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어쩌면 공화파의 냉대가 아니라 회복된 공화정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낙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자주 사용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nondimanco)라는 말처럼, 그는 죽기까지 자유로운 시민들이 만들어갈 정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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