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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7)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3. 11. 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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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7)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곽준혁 |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ㆍ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 편의대로 어긴’ 또 다른 형태의 참주

1498년 5월23일 아침,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와 그를 따르던 두 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지난 4년 동안 피렌체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예루살렘’(Nuova Gierusalemme)이라는 꿈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미 4월19일 사보나롤라의 재판이 있었던 날, 루카 란두치(Luca Landucci)는 자신의 일기에 ‘그토록 고생해서 쌓아올린 구조물이 무너져 내린 비통한 날’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예루살렘과 같은 피렌체인의 꿈이 한갓 거짓말(una sola bugia) 위에 세워질 수 있었느냐’고 한탄했다. 아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장의 재가 되어버린 날, 피렌체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등장한 시점부터 몰락까지 그의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강론> 1권 11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애당초 사보나롤라가 “신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che parlava con Dio)에 대해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로마의 종교를 만든 누마(Numa)처럼 요정과 이야기를 했다고 거짓말하는 것 따위는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기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신 그가 주목한 것들은 정치적인 문제들이었다. 시민들의 정의감을 ‘시민적 자유’와 ‘공동체 존속’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필요한 목적에 분출시켜 완전히 소진해버린 것, 그리고 스스로가 제정한 법을 위반함으로써 자기의 통치를 ‘정치적 권위’의 행사가 아니라 ‘물리적 힘’의 행사로 인식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는 단 한 번도 사보나롤라의 예언을 믿은 피렌체 시민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식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난도, 이렇듯 한심할 수 있느냐는 한탄도 하지 않았다. ‘허영의 소각’(Falo delle Vanita)과 같은 불필요한 집단행동, 그리고 방향도 없이 휘둘러대던 증오의 주먹질은 전적으로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정치는 결국 ‘파당적’ 이익의 관철일 뿐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고, ‘법’이 아니라 ‘힘’이 해결책이라는 인식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를 무장했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예언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렌체 산마르코 박물관이 소장 중인 ‘시뇨리아 광장에서의 화형’(Il Rogo in Piazza della Signoria, 16세기 초). 무명의 피렌체 화가가 그린 것으로, ‘사보나롤라의 처형’(L’esecuzione di Savonarola)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사보나롤라가 처형되던 때 광장은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화가는 그의 죽음이 교회와 귀족의 음모 때문이었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듯 광장을 한산하게 그려놓았다. 4세기가 지난 후, 로마 교황청은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자리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돌판을 박았다.


▲ “그의 몰락은 인민들의 변덕때문이 아니었다…
인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을
지도자 스스로가 파괴한 탓이었다”


■ 사보나롤라의 등장: 분노와 희망의 협주곡

사보나롤라의 고향은 볼로냐에서 조금 떨어진 이탈리아 동부의 페라라다. 이곳에서 사보나롤라는 일곱 명의 아이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뛰어난 인문학적 소양 때문인지 성서연구에 몰입해 결국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정통한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이런 그가 피렌체에 첫 발을 내디딘 때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강사가 된 1482년이다. 처음 그의 설교와 강의는 페라라 사투리와 학자적 언변 때문에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다만 1486년 사순절 설교에서 보듯, 이때 이미 그의 신앙고백은 ‘계시적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로마 교회의 ‘진정한 회개’에 대한 그의 요구는 도발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1487년에 신학강의를 하러 볼로냐로 돌아갔던 사보나롤라를 다시 피렌체로 끌어들인 것은 공교롭게도 로렌초 메디치였다. 1490년 로렌초가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데려왔을 때, 그는 강단을 떠나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대중 설교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고, 이를 통해 쌓은 명성이 로렌초의 보호를 받고 있던 철학자 피코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의 귀에까지 들어간 시점이었다. 피코는 사보나롤라의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을 높이 평가했고, 로렌초에게 사보나롤라를 통해 메디치 가문의 신앙심을 과시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피코의 조언과는 달리, 사보나롤라는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그 이듬해부터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난과 함께 메디치 일가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독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1492년 로렌초가 죽기 전부터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많은 청중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청중이 너무 많아서 산마르코 성당에서 산타마리아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또한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부패를 씻기 위한 ‘신의 칼’(la Spada di Dio)이 곧 내려올 것이라는 경고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고, 로렌초의 뒤를 이은 피에로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의 무능이 사보나롤라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비난에 점차 큰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1494년 8월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왔을 때, 많은 시민들이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단 말이다.

■ 사보나롤라의 정계입문: 공화정의 회복과 시민들의 믿음

피렌체 시민들은 피에로 메디치가 나폴리로 향하는 길을 내어달라는 샤를 8세의 요구에 굴복한 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샤를 8세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지만, 피에로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피렌체에 복속되어있던 항구도시 피사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1494년 10월 샤를 8세의 군대가 피사로 진군하자, 피렌체 귀족들은 프랑스파와 교황파로 분열되었고, 피렌체에는 표면적인 반(反)프랑스 정책과는 달리 피에로가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26일 피에로가 샤를 8세의 군영을 찾아갔다가 붙잡혀 항복에 가까운 조건에 동의했을 때, 메디치 가문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는 되돌릴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기 시작했다.

11월5일 수천 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피렌체로 밀려들어와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행패를 부리자, 피렌체 시민들은 피에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급기야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체인 시뇨리아(Signoria)는 원로들의 ‘회합’(pratica)을 소집해서 메디치 독재의 종식을 알렸고, 상원격인 100인 위원회는 피렌체가 공화정을 회복했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사보나롤라를 필두로 한 특사를 샤를 8세에게 파견해 메디치 가문이 취해온 반(反)프랑스 정책을 비난하고, 피렌체에서 자행되고 있는 약탈을 멈춰달라는 요구를 전달한다. 이때부터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11월9일 피렌체로 돌아온 피에로 메디치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인민과 자유’(Popolo e Liberta)라는 구호에 둘러싸여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시민들의 사보나롤라에 대한 믿음은 11월17일 샤를 8세의 피렌체 입성 이후 더 강화된다. 시민들은 샤를 8세를 열렬히 환영했지만, 두려운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샤를 8세는 시민들보다 메디치 가문을 조종하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피에로의 아내인 알폰시나 오르시니(Alfonsina Orsini)가 왕의 고문관들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성과를 이루어 낸다. 11월21일 샤를 8세와 피렌체 시민들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을 때, 사보나롤라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잊지 말라’는 말로 샤를 8세를 설득해낸 것이다. 피사의 회복, 성채의 복원, 보조금 삭감, 프랑스 군대의 이동 등 피렌체 시민들이 갈급하던 내용들이 모두 담긴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 사보나롤라의 도덕정치와 시민들의 이탈

11월28일 샤를 8세가 피렌체를 떠나고,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손쉽게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정치 개혁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가 약속한 ‘새로운 예루살렘’은 보편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담고 있었던 반면, 피렌체 시민들이 원하던 바는 ‘시민적 자유’의 회복이라는 피렌체만의 특수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회개’를 통한 도덕의 회복이었지만, 시민들이 진정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것은 하루하루 먹고 살 ‘빵’이었다. 따라서 ‘신이 피렌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려 한다’는 설교가 큰 감동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민들이 더 보고 싶었던 것은 ‘피렌체가 더 부유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영광스러워질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시간이 갈수록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점점 격렬해지고,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시민들은 점차 무료해져 갔다. 1494년 12월 사보나롤라가 자신이 주도한 정치개혁을 ‘신의 작품’이라고 말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로 만들어진 ‘인민 정부’(governo popolare)를 메디치 가문의 하수인이었다가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로 변신한 피에로 카포니(Piero Capponi)와 프란체스코 발로리(Francesco Valori)의 정치적 야심이 빚어낸 결과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495년 알렉산더 6세를 중심으로 샤를 8세에 대항한 동맹이 결성되고, 놀란 프랑스 군대가 나폴리에서 철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신의 약속은 멀어졌고, 믿었던 프랑스가 도망가자 사보나롤라의 권위도 시민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냐 ‘또 다른 참주’냐

마키아벨리는 <군주> 6장에서 사보나롤라를 두고 “무장한 모든 예언자들(tutti e’ profeti armati)은 획득했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파멸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득하기란 쉽지만,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란 어렵다’는 말,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강제로’(per forza) 믿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충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세도 자기를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도륙했다는 예를 덧붙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는 왜 피렌체 시민들이 더 이상 사보나롤라를 믿지 못했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피렌체 시민들이 더 이상 사보나롤라의 통치를 신뢰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강론>을 살펴봐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강론> 1권 45장에서, 사보나롤라의 몰락은 ‘통치’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사보나롤라의 거듭된 권고로, 의회는 국사범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죄인들에게도 인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법안을 오랜 진통 끝에 통과시킨다. 그러나 이 법이 승인되고 얼마 후 사보나롤라의 정적들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의 수족과 같은 발로리가 이들의 소청 요구를 묵살한 채 사형을 집행해버린다. 이 사건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침묵은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의 편의대로 어겼다’는 인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몰락한 이유를 인민들의 변덕이 아니라 인민들이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지도자 스스로가 파괴한 신중하지 못한 행위에서 찾는다. 사보나롤라의 정치도 파당적 이익의 관철에 불과하다는 체념, 이로부터 사보나롤라의 도덕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증오가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키아벨리에게 사보나롤라는 선동으로 집권한 후 인민을 억압한 또 다른 형태의 ‘참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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