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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 :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 | 평화주의와 한미동맹 60주년
이경주 / 인하대학교
I. 한미동맹 60주년
2013년은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정전협정 60주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 헌정사를 통하여 평화주의와 한미동맹의 관계를 되돌이켜 보고, 이에 기초하여 평화주의에 기초한 한미동맹의 미래에 전망하여 보기로 한다.
II. 헌정사속의 평화주의와 한미안보
1. 1948년 헌법제정과 평화주의 원리의 제한적 수용
1) 평화주의의 수용
1948년 헌법은 전문에서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할 것을 선언하고, 제6조에서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국토방위를 임무로 하는 군대라고 하더라도 군대를 용인한 이상 이에 따른 여러 가지 헌법적 제약이 가하여졌다. 대통령은 선전포고와 강화에 대한 권리를 갖고(59조), 국군 통수권을 갖되 국군의 조직권과 편성권을 대통령 등의 명령으로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는 없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정하는 법률에 정한 바에 따르도록 하였다(61조). 또한 선전포고와 강화의 경우에도 대통령의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고 국무회의의 의결과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하여 문민통제의 길을 열어 두었다.
또한 1948년 헌법은 외국군의 주둔 또는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실체적 절차적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각종 조약에 대한 국회동의권을 규정한 42조의 경우에도 ‘국회는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통상조약, 국가 또는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비준과 선전포고에 대하여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2) 1948년 헌법제정과 평화 및 안보구상
(1) 자위를 위한 자생적 군대 창설 움직임 ‘조선임시군사위원회’(1945년 8월 말)와 학병단- ‘조선임시군사위원회’는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출신자가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국군편성을 위한 초안을 미군정청에 제출하는 등의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 ‘조선국군준비대’는 조직력과 인원면에서 상당한 규모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경우도 ‘국방군의 즉시 편성’을 주요한 시정방침의 하나로 내걸고 있었다.
(2) 조선의 국방계획과 미군정에 의한 군사력의 정비
「조선의 국방계획」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의 요지는 ‘미군정청이 하여야 할 우선적인 임무의 하나가 (조선의)국방을 위한 준비작업’이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경찰력을 지원하기 위한 군대를 발전시킬 것을 권고하면서 육군∙공군은 4만 5천명, 해군∙해안경비대는 5천명으로 하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육군·공군은 3개의 보병사단으로 구성되는 1개의 군단으로 할 것, 1개의 항공수송대와 2개의 전투비행중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에 공감한 하지는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28호를 공포하였다. 여기에는 국방사령부(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Defense)의 설치(제1조), 군무국(Bureau of Armed Forces) 및 육해군부(Army and Navy Department)의 설치(제2조)가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들에 의한 사설군사단체의 해체(제3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1945년 12월 5일에는 간부양성을 위한 군사영어학교가 설치되었으며, 1946년 6월에는 조선경비대(Korean Constabulary)가 발족하였다.
미군이 군대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대내적으로는 경찰력만으로는 사설 군사단체들을 제압할 수 없었고, 대외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소련에 대항하는 전초기지로서의 한국군의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3) 한국군의 창설과 군사법제
미군정의 종료와 더불어 1945년 8월 15일 남한 단독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남조선과도정부하의 통위부는 새로운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로,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각각 국방군으로 개칭 발족되었다. 그리고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에 따라 육군과 해군으로 정식 편입 법제화되었다. 당시 육군은 장교를 합하여 약 5만 여 명, 해군은 지상병력과 해상병력을 모두 합하여 2500여 명의 규모였다. 국방부에 산하에 참모총장을 두고 각 군은 정규군과 예비군의 전신인 호국군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육군중심의 한국군 구상에 따라 공군에 관해서는 ‘육군에 속한 항공군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국군조직법 23조)는 형태로 유보조치를 취했다가 1949년 10월1일에 이르러서야 1600명 규모의 소규모 공군을 만들었다.
1949년 8월6일 병역법 공포되어 이듬해인 1950년1월6일 제1회 전국 일제 징병검사가 실시되었으나 미국의 한국군 10만 명 동결계획에 따라 1950년 3월 징병제가 폐지되고 지원병제가 실시되었다. 대규모 병력증원이 이루어진 것은 6.25 발발 이후였다. 1950년9월15일 이후 전시동원체제 하의 병역법과 임시법령조치에 따라 제2국민병을 소집하였으며, 1950년 12월21일(법률 제172호) 민방위군 설치법에 따라 민방위군이 설치되었다. 나아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한국군 10만 명 동결정책이 폐지되고 1951년 5월25일의 병역법 개정에 따라 오늘날과 같은 징병제가 부활하였다.
징병제에 따라 국가가 무제한적으로 군대에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었는데,1952년 10월말에는 규모가 25만에 이르렀으며, 한미간에 정원을 46만 3천명으로 증원 합의함에 따라 더욱 급격한 증원이 징병제 하에서 이루어져 1954년에는 65만명이 되었다.
3) 1948년 헌법상 평화주의의 의의와 한계
침략전쟁 부인의 법리가 주목받지 못하는 오늘날과 달리, 1948년 헌법 제6조가 침략전쟁의 부인을 규정한 것은 사실은 당시로서는 특필할 만한 사항이었다. 이에 대하여 헌법초안의 기초위원이었던 유 진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6조에서 침략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현재 세계의 중요한 국가가 ‘전쟁포기에 관한 조약’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쟁포기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헌법초안은 그 기본정신을 승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 “군대는 침략전쟁을 행하는 군대가 아니고 국토방위의 수행을 사명으로 하는 방위적인 군대입니다.”
이와 같이 1948년 헌법의 평화주의는 침략전쟁의 부인, 개별적 자위권의 용인,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의 동북아군사전략과도 배치되지 않았다.
2. 평화주의원리의 잠식과 1962년헌법
1) 안보조약을 등장시킨 1962년 헌법
제56조 2항에서는 ‘국군의 외국에의 파견 또는 외국 군대의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의 주류에 대하여도 국회는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는 한편 제56조1항에서는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외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1954년 헌법이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의 국회동의권만 규정한데 비하여, 1962년 헌법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은 외국과의 군사동맹을 염두에 둔 규정들을 두었으며, 군사조약의 국회동의권이 최초로 헌법에 명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박정희의 군대를 동원한 정권찬탈은 당시의 매그루더(C.B. Magruder)유엔군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을 이탈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1962년 헌법 하의 한미관계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안보조약의 헌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 이외에도 1966년에는 그동안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주한 미주둔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 즉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으며,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1965년 7월에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되기도 하였다.
2) 안보관련법제의 체계화
(1)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동북아 군사동맹의 대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통하여 전쟁위법화의 법리가 헌법에 명문화되는 흐름과는 반대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재편되어가고 있는 세계 질서의 군사적 기초는 지역적인 집단군사동맹체제와 개별적인 군사동맹체제였다. 일부의 주장처럼 우리가 원해서 체결된 조약이 아니고 미국이 우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체결된 조약도 아니고 미국의 대외 군사외교전략의 큰 흐름 속에서 한미 간의 군사동맹의 법제가 형성된 것이다.
지역적 군사동맹의 구축은 미일안보조약과 한일국교정상화로 나타났다. 미국과 일본은 일본국 헌법 9조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를 증강하고 1960년에는 구안보조약을 개정하여 신안보조약을 체결하였다.
신안보조약은 구안보조약(1951년 9월 8일)상의 미군의 임무를 극동에 한정하지 않고 태평양(제1조)으로 확장함으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과 제3조의 태평양 조항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쌍무적인 방위를 약속한 군사조약인데 반하여 미일 신안보조약이 일본의 침략상황에 대한 미국의 편무적 방위를 약속한 군사조약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을 통한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단초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군사적 협력의 매개 고리는 유엔군사령부이다. 주한미군사령부와 별도로 존재하는 유엔군사령부는 미국을 비롯한 캐나다, 호주 등 16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는 한반도의 정정협정을 감시하고, 정전상태가 깨졌을 때 유엔군의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을 주임무로 하고 있다. 하지만, 나아가 후방군사지원 역할도 추가적으로 하고 있다. 즉 유엔군사령부는 유사시 한반도로 출동하는 미군이 일본기지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통로이다. 이를 위하여 유엔군과 일본 사이에는 유엔군의 일본 주둔에 따른 지위협정을 1954년에 체결하였다. 이 유엔군 주둔 지위협정 제5조2항에는 ‘유엔군은......일본과 미국 간의 안전보장에 기초하여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시설과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유엔군 사령부는 전투 병력은 갖지 않고, 용산에 사령부만을 두고 있는데 약300명이 근무하고 있다. 원래 유엔군사령부는 일본의 동경인근 가나가와현 자마(座間)라는 곳에 있었는데, 1957년 용산으로 옮겨왔다. 일본의 자마에는 유엔군사령부 후방지휘소가 있었는데, 현재는 동경부근의 요코타기지로 옮겨와 있다. 이 요코타 후방지휘소에는 4명의 상근요원과 7명의 비상근 요원이 근무하고 있다. 7명의 비상근요권은 7개국의 주일대사관의 무관이 겸임하고 있다. 그 밖에는 주일 미군기지 중 핵심적인 7개소(자마기지, 요코스카 군항, 사사세군항, 요코타기지, 오키나와의 가데나 항공기지와 후테마 공군기지)가 유엔군의 기지로 지정되어 유엔기를 걸고 출입하고 있다.
나아가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의 다른 변에 해당하는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하여 미국의 압력과 지원 하에 한일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965.6.22)이 체결되었다.
(2) 안보관련 법제의 체계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에 이은 후속조치로서 헌법에 안보관련 근거가 등장한데 이어 대외적인 안보관련법제의 정비의 물꼬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하여 트이기 시작하였음을 이상에서 살펴보았는데, 이에 탄력을 받자 대내외적 안보관련법제의 정비도 더욱 급속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우선 주둔군지위협정체결이 이루어졌다. 사실 미군은 1948년 주둔 이래 미군은 오랫동안 특권을 누렸다. 1948년 8월24일 미국이 한국과 체결한 ‘과도기의 잠정적 군사 및 안보에 관한 행정협정’에 의거하여 주한 미군은 ‘중요한 지역과 시설에 대한 통제권과 인원에 대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주둔하면서 한국정부는 미군에게 1950년 7월12일의 소위 ‘대전협정’(‘주한미군의 범법행위의 관할권에 관한 협정‘)을 통해 미군에게 특권적 지위를 다시 부여하였다.
그러나 정작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체결에 따른 주둔과 주둔에 따른 후속조치로 당연히 체결되어야 할 주둔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체 13년만인 1966년 7월9일 최종 확정되었다. 13년 동안 미군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린 셈이다. 안보조약 및 그에 따른 주둔군의 지위협정 등 대외적인 안보관련 법제만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대내적으로는 전쟁을 위한 기본적인 인적 물적 조달의 법체계가 갖추어졌다.
1963년에 제정된 징발법은 전쟁에 대비한 물적 조달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즉 징발법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긴요한 물자와 시설을 총체적으로 징발하기 위한 물적 동원법제이다. 이 법에 따르면 징발관은 시도지사 등 자치단체장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군작전을 이유로 현역장교가 될 수 있었으며, 또 자치단체장이 되더라도 국무총리의 명령으로 현역장교 등에게 다시 위임할 수 있어 군인이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개인의 동산, 부동산 및 특허권 등 재산에 관한 각종 권리마저 징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나아가 징발법은 미군기지를 위한 토지징발 기능도 톡톡히 담당하였다. 주한미군 사용면적 전제 7천3만평 가운데 20%를 차지하는 토지가 징발법에 의해 징발되어 미군이 사용하고 있다.
인적동원법제인 병역법은 1948년 8월6일 제정되어 이미 실시되고 있었다. 징병제에 기초한 1948년 병역법은 미국의 군정원 동결정책으로 인하여 1950년 3월 지원병제로 전환되었다가 1951년 5월25일의 병역법 개정으로 징병제로 다시 전환되어 1954년부터 이미 65만 대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65만대군의 유지가 적정한가에 대해서는 한미 간의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1960년대 초의 케네디 정권은 제3세계 국가의 개발을 위해서는 군사부문보다는 경제부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고 오히려 한국군의 감군계획을 구체화했다. 사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경제적으로는 징병제의 실시로 인해 늘어난 65만 대군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군의 유지를 위한 물적 자원은 전적으로 미군의 원조에 의존하던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감군의 논리는 한반도의 군사전략적 위상과는 관계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물적 인적 동원체계의 정비뿐만이 아니라, 박정희정권은 평화적 통일보다는 대결을 고취하는 ‘2대 안보형사법’을 정비하였는데 1961년 7월3일의 반공법 제정과 1962년 9월24일의 국가보안법 개정이 그것이다. 반공법은 그동안 악명 높았던 국가보안법보다 그 처벌범위나 대상, 형량 등에 있어 훨씬 확대되고 강화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첫째, 북한과 이에 연관된 반국가단체뿐만 아니라 공산계열 전체가 처벌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둘째, 반국가단체의 목적수행과 관계없는 찬양, 고무, 동조 등의 행위가 처벌받게 되어 표현의 자유 등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될 여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반공법은 북한의 침략에 대한 소극적 자기방어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공체제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반평화적인 법률이었다.
3) 안보법체계의 평화주의 원리의 잠식과 1962년 헌법
박정희정권의 불법적인 정권탈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정부가 미국에 의해 승인되고 박정희정권을 출범시킨 1962년, 헌법 제56조 제2항에서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외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우리 헌법상 안전보장 관련조약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이러한 미국에 의한 전후체제(Pax Americana)의 군사적 재편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이 군사조약에 대한 실체적 규정인지 절차적 규정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전후체제 즉 냉전체제의 특징은 첫째 사회주의 봉쇄(containment policy), 둘째, 한국과 같은 구식민지의 재편, 셋째, 독일과 일본의 재건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전후 자본주의질서의 재편은 미국을 중심으로 주도되었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1949.4), 미필리핀상호방위조약(1951.8.30.), 미오스레일리아, 뉴질랜드조약기구(ANZUS,1951.9.8),미일안보조약(1951.9.8),동남아조약기구(SEATO,1954.9.8),중동조약기구(CENTO,1954.2.24) 등이 그것이다. 특히 태평양지역에서는 미국과 캐나다, 미국과 일본, 미국과 한국 간 개별동맹과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 간 다각 동맹으로 나타났다.
태평양지역의 군사동맹체제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미일 군사동맹체제이다. 이는 미국을 정점으로 일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한국이 주변부를 차지하게 짜여진 것으로 태평양지역에서 구현되는 주요한 기반이다.
이러한 대외적 조건을 기반으로 1962년 헌법 하에서는 이른바 안보법체계가 본격적인 틀을 형성되게 되었다. 물론 개별 분산적으로 1962년 헌법 이전에도 한미상호방위조약, 국가보안법, 병역법 등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경우 헌법적 근거가 명확치 않았으며, 전쟁을 위한 인적동원체계로서의 병역법은 존재하였으나 물적 동원체계로서의 징발법도 성립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62년 헌법 하에서는 헌법원리로서의 평화주의가 포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잠식하는 안보관련 법체계가 체계를 갖추게 됨으로서 헌법체계를 잠식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안보법체계에 의해 잠식당하면서도 평화주의원리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맹맥 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에 관한 명문의 문구가 헌법에 등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체적 규정이라기 보다는 절차적 규정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국회의 동의가 없더라도 주둔할 수 있다는 실체적 규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회의 동의가 없으면 인정될 수 없다는 절차적인 규정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경우 ‘미 필리핀 안보조약’의 10년 연장과 관련하여 상원의 승인을 얻지 못하여 결국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만 해군기지를 필리핀에 반환하기도 하였다.
3. 평화주의 원리의 형해화와 1972년 헌법
1) 안보이데올로기의 헌법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을 새로운 헌법의 기조로 삼음으로써 북한과의 평화공존보다는 대결을 제1의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도 유보될 수 있음을 헌법에 명확히 하였는데 인권 제한의 목적으로 국가의 안전보장이 명문으로 규정된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제까지 헌법 특히 1962년 헌법에서조차도 인권제한의 목적은 질서유지나 공공복리에 한정되고 자의적 판단이 가능한 추상개념인 국가안전보장은 헌법상의 개념이 아니라 국가정책상의 개념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정권은 질서유지개념을 대외적인 질서유지와 대내적인 질서유지로 나누고 대외적인 질서유지를 국가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값도 못하고 실지로는 정부에 반대하는 국내정치세력들을 옭아매는데 악용되었다.
또한 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금지할 수 없다고 하는 내용을 삭제함으로써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인권의 본질적인 내용까지 침해하였던 인권암흑기를 열었으며 국가안보를 이유로 국민들의 평화적 생존은 오히려 백척간두에 서게 되었다.
2) 국가안보의 법제화
평화주의 원리의 헌법전상의 변질은 국가정책과 입법에 있어서도 봇물을 이루었다. 입법의 측면에서 보면 우선, 1973년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방위산업육성이 적극 추진되었다.1974년부터 시작된 율곡사업은 지금까지 주로 해외에서 수입되던 주요무기나 장비의 구입을 국내생산으로 충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4월19일부터는 ‘을지훈련73’이 실시되었으며, 군사력 증강을 위해 첫째, 자주국방을 위한 군사전략 수립, 둘째 중화학공업 발전에 따라 고성능 전투기와 미사일 등을 제외한 장비의 국산화, 셋째 독자적인 군사전략과 전력증강계획의 발전과 같은 지침이 하달되었다. 율곡사업의 진행에 따라 노후장비의 교체, 전방지역 축성, 고속정 건조, 항공기(F4팬텀)구매 등의 전력증강 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에는 이른바 안보4법이 유신국회를 통과하였다. 우선 민방위기본법(7월25일)은 ‘적의 침공이나 전국 또는 일부지방의 안녕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제정되었는데 군사작전상 필요한 노력지원 등 일체의 자위적 활동(제2조)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중앙정부차원에서는 국무총리 산하에 중앙민방위협의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역민방위협의회를 두었다. 그리고 국무총리를 보필하여 민방위업무를 총괄하는 내무부장관에게는 민방위 업무 ‘협조’(제8조)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동원권한을 부여하였다. 협조요청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중앙관서뿐만 아니라 공공단체 및 사회단체는 물론이고 민간사업체에 이르렀다.
이로서 박정희 정부는 병역법에 따라서 인적 자원을 동원하고, 징발법에 따라서 필요한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토지 및 각종시설에 대한 사용권을 획득하였으며,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 ‘민방위기본법’ 등 안보관련법을 통하여 사기업의 영역은 물론 국민개개인의 정신영역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를 이유로 인권을 제한하고 동원할 수 있는 총체적 법제를 마련하였다.
3) 적대적 의존관계의 제도화와 평화주의의 형해화
남한에 있어서의 유신체체제의 등장은 북한의 유일체제의 등장과 대칭을 이루었다. 1972년 남북한에는 각각 기존 헌법이 폐지되고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는 남북한이 서로 상대방과의 적당한 긴장과 대결국면을 조성하여 이를 대내적 단결과 통합 혹은 정권 안정에 이용하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체제에 대응하는 1972년 헌법은 평화주의 원리가 형해화되어 변질된 헌법으로 기록될 만하다. 우선 1972년 헌법도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하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 등 계속되는 해외파병 때문에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할 수 없었을 것이며, 주한미군 감축에 따른 대응방안으로 해외파병책을 구사하고 있던 박정희정부에서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로 제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국가안전보장이라는 추상개념이 기본권제한 사유로 헌법에 등장함으로서 주권자를 위한 헌법이 아니라 국민을 통치하기 위한 헌법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제32조 2항에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보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 한다’고 하는 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 이외의 사유 즉 국가안보라는 사유로도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할 것이다.
안전보장이라는 추상개념은 사실은 질서유지에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다. 즉 대내적인 질서유지와 대외적인 질서유지의 개념을 분리하여 대외적인 개념을 국가안전보장이라는 개념으로 포장한 것이라 할 것이다. 결국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사표현은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다의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개념아래 금압되었다. 평화주의 원리의 헌법전상의 변질은 국가정책과 입법에 있어서도 봇물을 이루었다.
4. 평화주의 원리의 괴리와 1980년 헌법
1) 평화주의 원리의 장식적 복원
1980년 헌법은 1962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군사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인이 주도하여 만든 헌법이면서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침략전쟁 부인의 법리를 유지하면서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하는 규정을 다시 삽입한 점이다.
그러나 1980년 헌법이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로 한정하였다고 하여 그것이 그저 수사적인 복원으로만 그친 것은 아니고 현실은 오히려 뒷걸음친 흔적도 엿보인다. 다름 아니라 제4조 2항에서는 ‘국군은 국가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하여 국가안전보장이라는 추상개념을 국군의 사명에 슬그머니 밀어 넣고 있다는 점이다.
2) 반평화세력의 집권과 비수평적 한미동맹
이러한 1980년 헌법의 일련의 제정과정은 반평화주의적 세력의 집권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른바 한미동맹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구성에 관한 협정’에서는 “1950년 조인된 UN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이 연합사령부 설치 이후에도 폐기되지 않는다”고 확인함으로서 작전통제권이 미국이 있음이 확인된 바 있는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5.18진압군의 이동을 용인 방관함으로써 반평화적인 집권과정에 미국이 개입하였음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작전통제권의 역사는 이른바 한미동맹의 수직적인 구조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문제이기도 하다. 1950년 이승만은 ‘현재의 적대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이라는 단서를 달아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인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 지휘권은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작전계획수립 및 명령시달 등 전쟁임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에 해당하는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으로 조정됐다. 이후 1974년 9월 주한 유엔군사령부, 주한 미군사령부 및 주한 미군 제 8군사령부가 합쳐서 통합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유엔군 작전명령권이 한.미 합참의장회의로 이전되었다. 그리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CFC)가 창설되어, 한국군에 대한 전시, 평시의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연합사사령관으로 위임되었다.
3) 평화주의원리의 현실괴리와 1980년 헌법
1980년 헌법에서 평화주의 원리가 장식적으로 복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평화세력의 집권과정이 보여주는 역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평화주의 원리를 실천할 헌법주체의 말상과정 및 부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0년 12월 26일 국가보위입법회의 법제사법위원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통합한 국가보안법 개정 법률안을 제안하고 가결하였다. 제안이유서에 의하면, (구)국가보안법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제정된 반공법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양 법률상의 유사 또는 동일규정을 단일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법상의 독소조항인 찬양고무 등의 조항이 아무런 비판 없이 국가보안법에 통합됨으로써 비판적인 정치논의는 물론 건전한 평화담론이 형성될 수 없었다.
제도권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경우에도 평화주의원리에 관한 한 무지의 경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신민당의 헌법안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유신정부에 대한 대항세력으로서 새로운 흐름의 창조자여야 할 신민당의 헌법안은 베트남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유신헌법과 마찬가지로 군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하는 조항을 두고 있지 않다. 인권제한의 목적에서 국가안전보장을 삭제하고 질서유지로 일원화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볼거리였을 뿐이다. 신민당뿐만이 아니라 대한변협의 헌법안에는 아예 침략전쟁의 부인의 법리를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평화담론의 질식 상태는 1980년 헌법 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각종 사회활동단체 등을 통하여 공론화되고 있는 비핵문제, 전쟁반대의 문제는 용공이적으로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았다. ‘한반도의 핵기지화, 대리전쟁터화’에 반대하는 전국 대학의 이른바 ‘삼민투위’소속의 대학생들의 평화담론은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행위로 엄단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삼민투위’자체가 이적단체로 규정당하고 그 활동이 이적행위로 매도되었다.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이념이 보급되면서 이 계열의 대학생들이 주장하던 반전반핵 평화운동, 전쟁분위기를 고취시키는 한미 간 군사합동훈련반대도 반미주장의 의심이 있다고 하여 일고의 가치 없이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었다.
III. 기로에 선 평화주의
1. 평화주의의 지체와 현행 헌법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1987년 헌법은 참으로 무심한 헌법이다. 정치군인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규정하였다고 하나, 다음과 같이 1980년 헌법의 후퇴한 평화주의 관련 규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즉 ‘제5조 1항 :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2항: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심을 이유로 한 대체복무요구자들이 군사재판을 받고 그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의 인권문제, 그리고 그들의 주장 등이 헌법차원에서 논의되기란 참으로 힘든 노릇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70년대 들어서면서 입영률 100% 달성이라는 병무청의 실적주의와 당시의 사회분위기가 맞물리면서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일단 군부대로 입영대상자를 연행한 후 거기에서 영장을 발부하는 식으로 강제입영을 시도하였었다. 이에 어쩔수 없이 여호와의 증인들은 병역거부 입장을 군부대에 가서 밝히게 되고 이것이 관행이 되어 여호와의 증인들의 경우 매년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도 이러한 헌법현실이 개헌시에 반영이 되기는커녕 논란조차도 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비록 여호와의 증인이 다수라고는 하더라도 양심을 이유로 한 대체복무요구자들이 매해 500-700여명에 이르렀는데도 병역법의 인권조화적 해석을 통한 적용문제, 종교적 양심과 병역의무를 조화시킬 수 대체복무 논의가 평화담론 영역의 언저리에도 발을 붙이지 못한 상황이었다.
2. 급변하는 한미관계와 약진하는 평화운동
1) 급변하는 미국의 군사전략과 한미관계
평화주의에 무심한 헌법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을 둘러싼 대내외적인 상황은 매우 급변하고 있다. 우선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군사외교전략의 발본적인 변화에 따라 평화주의 원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도 뚜렷하다.
변화의 동력은 역설적이게도 부시행정부의 새로운 안보정책과 국방정책이다. 미국은 일방적 패권을 공고화하기 위하여 과거와 같은 봉쇄전략으로부터 탈피하여 개입전략으로 궤도를 수정하는 한편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해외주둔군의 재배치를 시도하고 있다. 소위 GPR(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이라고 불리는 국방전략검토에 기초하여 전방배치군 중심의 고정지역방어개념에서 벗어나 초국가적이고 비대칭적인 새로운 위협 즉 테러 등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신속기동군 위주의 주둔군배치를 꽤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Joint Vision 2020”이라 명명되는 군사변환(Military Transformation)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군사변환은 효과위주와 신속결정작전, 비선형전투, 초점화된 군수지원, C41SR을 통한 첨단상황인식체계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전쟁 패러다임에 맞추어 군사혁신을 이룩하고 군사작전의 전영역에서의 압도적 우세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미군의 해외주둔 정책은 군사혁신과 맞물려 대규모의 상시주둔에서 유사시 중장거리 투사능력을 중시하고, 예방적 선제공격 및 주둔지역 방어 외에 다목적 활용성을 중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전반적인 미군의 정책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전력규모와 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한국 내 산재한 기지들의 효율적 통폐합을 비롯한 주한미군의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용산기지의 이전과 평택미군기지의 확대재편이 그 단적인 모습이다. 또한 2003년 11월17일의 제35차 한미연례안보회의 공동성명 제4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전략적 유연성에 한미당국이 합의하게 이르렀다.
이에 따른 유사시입법의 정비도 속도를 더해가고 있는데, 비상대비 자원관리법(2004년 일부개정), 통합방위법(2006년 3월 일부 개정)의 개정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통합방위법은 테러 등 이른바 비정규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민관군 통합방위체제를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서 적의 침투나 도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등을 군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거나 남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2) 약진하는 평화운동
미국의 군사전략의 공세적인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한반도의 평화운동의 대항력과 다양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종래의 평화운동이 주한미군철수를 애둘러 표현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거나, 평화운동이 친북운동으로 매도되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현재의 평화운동은 핵문제, 군축문제, 이라크파병문제, 미사일방어시스템 문제, 기지문제, 환경오염문제 등 다기 다양한 형태로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다종다기한 평화운동이 헌법의 평화주의 원리를 적극 원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이라크파병금지 운동의 경우 미국에 의한 이라크전쟁이 침략전쟁이며 침략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헌법 제5조 1항 침략전쟁 부인의 법리에 어긋나고,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한 제5조2항에도 어긋난다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평화주의에 기초한 헌법실천운동은 인권영역에까지 그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평화적 양심에 기초한 대체복무자의 등장 및 평택 미군기지 투쟁에서 주창되고 있는 평화적 생존권 논의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평화적 생존권에 기초한 평화운동은 헌법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이 발표한 ‘해외미군재배치계획(GPR=Global Posture Review)'에 의해 미군기지의 공격적 재편이 이루어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협정‘(정식명칙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미합중국군대의 서울지역으로부터의 이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자 평택주민들은 이 조약이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2005년에는 평택미군기지이전 위헌소송(2005헌마268)이 제기되었다. 헌법재판소는 2006년 2월23일,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협정‘이 미군기지 이전에 불과하여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기각하였다. 그러나 사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생존권이 권리라고 언급하여 평화운동진영을 오히려 놀라게 하였다.
이에 고무된 평화운동 진영에서 매년 실시되고 있던 전시증원(RSOI)훈련이야말로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2007년 전시증원훈련이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평택미군기지이전 위헌소송으로부터 불과 3년만인 2009년 5월28일, 입장을 180도 바꾸었다. ‘평화적 생존권은 구체적 권리가 아니며’따라서 한미전시증원연습에 의해 침해된 기본권도 없으므로 각하한다는 것이었다. 평화적 생존권이 외교안보정책에 미치는 실천적 성격에 대해 에 대해 미처 신중히 생각하지 못했던 헌법재판소의 회군명령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평화적 생존권을 주장한 이 두 개의 헌법소송을 통해서 평화적 생존권은 평화운동은 물론이고 헌법학계의 논의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비록 헌법재판소에 의해 재판규범으로서의 성격은 거부당하였다고는 하나, 주권자인 국민들에게는 평화주의원리에 기초한 기본권의 하나로서 그리고 정치규범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3) 기로에 선 평화주의
평화주의 원리를 위협하는 이러한 대외적인 정세에 대한 대항담론의 구축은 평화주의원리에 입각한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평화국가 만들기라는 실천프로그램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침략전쟁 부인의 법리를 실효화 할 수 있는 길을 강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결정과 국회의 비준동의 과정에 주권자인 국민과 그들의 대표인 국회의 참여가 적극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러지 못하였다.
이라크파병의 경우, 전후복구와 의료지원명분으로 2003년 5월 파병(서희부대 573명, 제마부대 100명)이 시작된 바 있다. 파병 후에도 전쟁시작의 근거가 허위임이 영국의 버틀러보고서, 유엔사찰단의 보고서 등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많은 참여국가들이 철수를 이미 단행하고 있는 마당에도 이를 주저하여 민간인 김선일씨가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둘째, 국군의 사명이 방어적인 것임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이는 현행 헌법의 국군의 사명을 국토방위에 한정하고 국군의 사명으로 되어 있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삭제하거나 국토방위와 동일한 개념으로 한정축소 하여야 한다.
셋째, 평화국가는 군축국가여야 한다. 방어적인 개별적 자위권을 인정하여 군대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적정 규모로의 군축을 동반하여야 한다. 현재 국군의 규모나 주한미군의 규모 그리고 그 배치형태 등은 사실은 1954년 체제를 60년 동안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열전과 다름없는 극심한 냉전기의 대결구도에 대응하기 위한 규모 및 배치이다. 이를 교류와 평화의 시대에 맞게 적정화해가는 프로세스를 동반하여야 한다. 서울주변 미군기지의 양적 축소와 평택의 미군확대재배치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탈냉전기에 적합한 것인지, 우리 헌법의 평화주의에 맞는 배치형태인지 고민되어야 한다. 미군의 재배치문제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군사규모도 적정한지 징병제만이 자위를 위한 유일한 길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넷째, 병역 의무를 당장 삭제하기 힘들다면 병역의무와 인권을 조화시켜 양심적 대체복무의 길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독일의 1949년 본기본법 제정당시부터 병역의무에 대한 결부조항으로 대체복무 조항을 둔 바 있다. 현행 헌법 하에서도 굳이 개헌을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병역법 88조의 징집거부의 ‘정당한 사유’에 평화주의적 양심 등 내면적 사유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고, 이들에 대해서는 대체복무법을 합리적인 선에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다섯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은 집단적 자위권이 우리 헌법의 평화주의 원리와 정합적인지 논의하여야 한다. 나아가 전략적 유연성 개념과 같은 평화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개념이 공론화 과정 없이 정부 간에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여섯째, 평화국가는 비핵국가여야 한다. 중앙정부차원의 비핵선언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차원에서도 비핵자치체 선언을 하여야 한다.
IV. 평화주의적 한미동맹을 위하여
1. 파병과 평화권
1) 파병은 헌법적으로 정당했었는가
지난 2003년 5월 이라크 파병이 시작되었었다. 많은 국민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후복구와 의료지원을 명분으로 파병을 하였다. 서희부대 573명, 제마부대 100명이 1차로 파병되었다. 2004년 8월에는 자이툰 부대가 추가파병되었다.
더구나 대량살상무기의 제거라는 미국의 애초의 발표와 달리 이렇다할 대량살상무기의 흔적조차 없는 이라크의 모습에서 우리는 국제법과 우리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침략전쟁의 상흔만을 발견할 뿐이다. 더군다나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정보가 허위임이 영국의 버틀러보고서, 유엔사찰단의 보고서 등을 통하여 드러나고, 진흙탕 상황이 계속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철수를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정부는 오히려 2004년 2월 추가파병을 국회에서 결의함으로서 무고한 김선일씨가 2004년 6월 22일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 희생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한국군의 해외파병은 이라크 파병뿐만이 아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도 군대(오쉬노부대)가 논란 끝에 2010년부터 바그람 지역 등에 파병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역사도 짧지 않다. 2001년 12월 해군수송지원단의 일원으로 해성부대가 파견되어 2003년 9월까지 활동하였으며, 2002년 2월부터는 동의부대가 의료지원단으로 파병되어 2007년 12월까지 활동하였다. 2003년 3월에는 다산부대가 건설공병지원단으로 파병되어 2007년 12월까지 활동하였다. 레바논에도 동명부대가 정전감시 등의 목적으로 2007년 7월부터 파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평화주의의 헌법규범화
(1) 평화주의와 국제법
국제법에서는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위법화라는 평화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을 국제규범화 한 바 있다. “조약체결국은 국제분쟁 해결을 위해 전쟁에 호소하지 말 것이며, 또한 상호관계에서 국가정책의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할 것을 각자 인민의 이름으로 엄숙히 선언한다(제1조)”고 시작되는 부전조약(不戰條約 Kellogg-Briand Pact,1928)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것이었다.
무력행사의 전형으로서의 침략전쟁은 그 개념이 폭이 넓다. 유엔총회의 결의(3314-XXIV)에 따르면 침략은 다른 나라의 주권, 영토보전 혹은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유엔헌장과 일치하지 않는 방법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제3국을 침략하는데 자국영토를 이용하도록 허락하는 행위, 심지어 비정규군을 파견하는 것도 침략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동 유엔총회의 결의에서는 침략전쟁은 평화에 대한 범죄이며, 침략으로 확보되는 영토의 취득이나 이익도 합법적으로 승인되지 않는다(제5조)고 강조하였다.
(2) 전쟁위법화의 헌법규범화
전쟁의 수행방식에 대하여서도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나아가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전쟁위법화의 정신이 국제법적 원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헌법규범화하기 시작하였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침략전쟁의 소재를 없애기 위해 무력마저 포기하는 헌법을 제정한 바 있다.
4) 현행 헌법과 평화주의의 규범구조
(1) 침략전쟁의 부인
(2) 개별적 자위권의 인정과 군사력에 의한 자위권
① 헌법상의 자위권/ 국제법상의 자위권
국토방위를 위해 국회와 대통령이 어떠한 권한을 갖고 ,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의 인권을 어떻게 제약할 수 있는가에 대한 헌법상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② 개별적 자위권과 집단적 자위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외국에의 군대 파견 및 외국군대의 국내 주류에 대한 동의여부에 대한 권한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동의하는 경우에도 헌법원리의 하나인 평화주의 원리와 이의 최소한의 표현인 헌법 제6조에 적합한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여야 할 것이다.
③ 자의적 자위권 행사의 금지
입헌적 통제에 의하도록 하였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의적 판단에 의한 자위권행사를 하여서는 아니되며 평화주의 조항과 같은 헌법 및 국민의 대표기관에서 정한 법률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였다(제74조 1항). 또한 국토방위를 위한 자위군으로서의 군대의 조직과 편성도 국민의 대표기관에서 정한 법률로 통제(제74조 제2항)한다고 하여 집행권에 의한 자의적인 자위권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④ 안전보장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문구는 평화주의 원리에 비추어 보다 명확하고 구체성 있는 개념으로 제한축소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2. 외교안보의 민주화와 평화권
1) 외교안보의 왕따 국민
(1) 대통령도 기망한 전략적 유연성 합의과정
2003년 10월과 2004년 1월에 양국의 외교안보라인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지지하는 외교각서를 교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이를 모른 채, 2005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며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다.
(2) 국민을 왕따 시키는데 협조하는 헌법재판소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2006년 1월 19일 한미 양국정부는 '동맹,동반자 관계를 위한 전략대화 출범에 관한 공동성명'을 워싱턴에서 발표하고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박아무개 등은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합의가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한다고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과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2006. 1. 19. 워싱턴에서 양국 간 제1차 ‘한ㆍ미 동맹 동반자 관계를 위한 전략대화’를 갖고 발표하였다는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을 확인하면서도 이것이 ‘양국의 외교관계 당국자간의 동맹국에 대한 양해 내지 존중의 정치적 선언의 의미를 가지는 데 불과하다’고 하면서 본안에 대한 판단도 하지 않은 체 문전박대 하였다.
(3) 한일군사보호협정 사건
군사정보보호협정(General Security of Military Information Agreement:GSOMIA)이란 국가 간 군사기밀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맺는 협정을 의미하는데 협정당사자간에 정보제공의 방법, 정보의 보호와 이용방법 등을 규정한 것으로 현재 24개국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맺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부는 북의 핵개발과 미사일발사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사정보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특히 일본의 경우 이지스함과 조기경보의 수와 질에서 우리보다 앞서 양질의 군사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여기에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군사정보(HUMINT)를 결합하면 한일 간에 군사정보에 있어서의 상생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일 간의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우리나라가 맺은 다른 나라 예를 들어, 러시아나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와의 단순한 군사정보보호협정과 의미가 다르다. 첫째 북한 또는 중국과 같은 가상 적국을 염두에 두고 추진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전략 하에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다르다. 둘째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우리나라가 맺은 다른 나라와의 군사정보보호협정과도 의미가 다르다.
미국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하는 등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농후한 이 협정은 동북아의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여 분쟁에 휩쓸릴 가능성을 오히려 높이는 조약이다. 군사정보보호협정은 군사정보를 제공받는 나라가 지켜야할 정보보호 원칙과 절차를 정한 것으로서 정보를 제공한 나라가 해당 정보를 보호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정보 제공을 받은 나라가 정보를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는 측면에서 자칫하면 군사기밀보호법의 적용 제한을 통한 정보주권의 제약에도 이를 수 있다. 또한 미국과 일본 간에 체결한 정보보호협정에 의거하여 일본에서는 비밀정보의 범위가 확대되고 처벌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는데, 이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군사외교에 관한 알권리 제약에도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권에 충돌한다.
(4) 위협 해석, 군사정책 수립의 군 독점
국가안위에 관련되는 것인지 아닌지 국가안보가 위협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한 해석, 그리고 그에 기초한 군사정책의 수립을 군이 독점한다는 것이다. 군정권 행사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군인의 정원책정은 국방장관의 품신과 대통령 승인으로 끝이 난다. 다시 말하여 주권자인 국민은 물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중장기 국방계획은 대통령의 승인으로 끝이 난다. 남북 간의 긴장을 유발하는 군의 작전계획은 포괄적 위임에 기초하여 군이 작성한다.
주권자인 국민의 외교안보문제 그리고 위협인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국가보안법 등으로 처벌하기도 한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고 이와 관련하여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진상규명과 관련한 서한을 안보리에 보낸 사건에서 검찰을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하였다. 비정부기관에서 안보위협에 대해 조사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정부기관 특히 군에서 이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2) 국회도 외교안보의 왕따 상황
(1) 전략적 유연성과 평화
유연성이라는 부드러운 표현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강경하고 공세적이다. 즉 종래의 해외주둔 미군이 해당 주둔지역에 대한 외부의 침략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자위적인 방위나 봉쇄를 그 주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었던데 비하여, 유연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 해당 주둔지역이 아닌 곳에도 적극적이거나 공격적인 목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것으로 군의 역할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한미군이 한국에 대한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만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중동에도 파견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에 대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군대로 그 성격을 탈바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방배치군 형태의 군대를 신속기동군 형태의 군대로 재배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략적 유연성은 주변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미국 군사전략상의 일대 대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외교안보와 국회의 소수파
국회가 외교안보분야에서 왕따가 된 것은 국회소수파가 심의표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는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 태도도 일조를 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정부는 국회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이를 추진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하여 국회의 소수파가 국회에서 이의제기를 하기 위하여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의 입장은 국회의 의사가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되었음에도 다수결의 결과에 반대하는 소수의 국회의원에게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리와 의회주의의 본질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이 기관 내부에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토론과 대화에 의하여 기관의 의사를 결정하려는 노력 대신 모든 문제를 사법적 수단에 의해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남용될 우려도 있다고 하였다. 결국 국가기관의 부분 기관이 자신의 이름으로 소속기관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는 ‘제3자 소송담당’을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법률의 규정이 없는 현행법 체계 하에서는 국회의 구성원인 국회의원이 국회의 조약에 대한 체결·비준 동의권의 침해를 주장하는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국회에 의한 통제
외교안보분야에서 국민과 국회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헌법 제60조 국회의 동의권을 실질화시키기 위한 정부의 태도변화와 이를 견인하기 위한 헌법해석이 절실하다. 우리 헌법 제 60조에는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 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조약의 체결 비준에 대한 동의권은 조약체결과정 전반에 관한 국회의 참여권을 내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때의 동의권이 실질화되기 위해서는 조약체결에 대한 동의권을 조약체결과정 전반에 대한 동의 및 그 체결과정 전반에 대한 정보제공, 그리고 이에 대한 국회의 의견진술 청취권의 보장을 통한 실질적인 동의권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도 조약에 관한 법을 만들어 이를 구체화한 바 있다. 1980년 발표되고 한국도 가입한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에서는 ‘국제관습법을 성문화하였는데, 조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대표자에 의한 협상, 조약문의 채택, 확정, 조약의 서명 비준 또는 조약 가입, 비준서의 교환 또는 기탁이라는 절차에 의해서 체결된다’고 하여 조약체결 전반에 대한 동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외교안보에 관한 조약에 있어서도 국제법의 이러한 법리가 적용되어 국회가 조약체결 전반에 대한 동의권을 가져야 하며, 정부는 조약체결과정 전반에 대한 정보제공, 그리고 이에 대한 국회의 의견진술 청취권의 보장을 통한 실질적인 동의권한을 가져야 할 것이다.
4) 외교안보분야 시민통제 입법운동
외교안보분야에서 국민과 국회가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대책의 하나는 헌법 제60조 국회의 동의권을 실질화시키기 위한 절차법의 마련이다. 외교안보문제가 국민의 안위와 평화적 생존에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헌법 제70조가 규정하고 있는 국민투표권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헌법의 국민주권의 원리가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배제하고 있지 아니하고, 국민투표권을 제도화하고 있는 이상 헌법원리적으로 불가능할 것도 없다. 게다가 우리 헌법 제70조는 ‘외교, 국방, 통일 등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당면한 외교 국방 현안에 대한 쟁점이 공론화되고 국민적 관심이 극대화될 것은 분명하다. 다만, 국민투표를 실시의 경제적 비효율성 등을 고려한다면, 외교안보관련 조약 체결에 관한 절차법의 제정과 국민참여 방식도 차선으로 고려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헌법은 제12조 적법절차의 원칙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는데, 적법절차의 원칙이라는 것은 형사절차의 진행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행정절차는 물론이고 국가권력의 행사 일반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1996년에 제정되고 그 후 수창에 걸쳐 개정된 행정절차법은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행정절차법은 일반행정절차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을 뿐인데, 그 외연을 확대하여 외교안보분야 특히 외교안보관련 조약의 절차법의 제정에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 정부는 FTA와 관련한 사회적 홍역을 치루면서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여 '통상조약의 제정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이하 통상조약절차법)'을 2012년 1월 17일 제정하여 7월18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이 발의하고 여당인 한나라당이 합의한 이 절차법에 따르면 통상조약의 체결단계를 체결계획의 수립단계, 통상협상의 진행과정, 통상협상의 결과의 단계로 나누고, 개별과정에서의 보고 및 의견제시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통상조약절차법을 원용하자면 외교안보관련조약 절차법도 협상 전 절차와 협상 중 절차, 그리고 협상 후 절차로 나누어 규정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국민과 국회의원의 의견개진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의견개진이 단순한 의견나열에 그치지 않고 외교안보관조약체결을 견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회가 협상개시에 대한 동의권이라든가 협상에 조건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안보조약체결과 관련한 정보공개 청구가 내실화되어야 할 것이다. 정보공개의 청구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현행 정보공개법(‘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등이 참고 될 수 있을 것이다.
외교안보분야 조약에 관한 절차법은 헌법의 평화주의 및 평화권의 절차적 내용을 보장하는 것이다. 개별 인권의 보장에 있어서도 당해 인권의 실체적 보장뿐만 아니라 절차적 보장도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군사외교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는 상황, 즉 전략적 유연성 개념의 도입에 따라 한반도가 전쟁에 휩쓸릴 위험성이 증대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평화권에서는 평권침해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과 진실한 정보의 요구권을 중요한 권리내용으로 하고 있다. 평화권에 관한 루아르카선언은 제15조에서 평화에 대한 요구한 진실한 정보청구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평화권을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할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갈등과 관련한 객관적 정보를 얻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제8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참여의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즉 ‘모든 이들은 그들의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평화와 관련된 집단적 관심과 요구에 대하여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하는 특정한 매커니즘이나 기구를 설립할 권한을 갖는다.’
5) 국방안보정책과 사회적 합의
(1) 견제와 균형
안보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의 안전이며, 외교안보정책은 주권자의 평화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위협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예산배정의 우선순위 등에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관련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은 국민주권국가에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기 힘든 경우에는 국가기관 상호간의 견제와 균형, 국가기관 내에서의 견제와 균형, 국가기관 내에서의 자기통제 등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국방부는 북한의 붕괴를 대비하는 작전계획을 국방부가 단독으로 발전시키거나, “NLL 대비계획‘을 단독으로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지난 이명박정부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같은 안보정책 조정기구를 폐지하고, 통일부는 대북압박정책을 집행하는 부서로 전락시켰으며, 외교통상부는 냉전적인 대미편중외교의 첨병으로 내세웠다.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의 평화권 선언초안 제2조제8항도 국방안보정책의 민주 통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각국은 군사력 및 관련 예산의 민주적 통제를 보장하고, 국가 및 인간의 안전보장의 필요성과 인간 안보정책, 그리고 위 및 안전보장예산에 관한 공개토론을 보장하여야 하며 또한 의사결정자가 민주적 감독기관에 대하여 설명책임을 지도록 하여야 한다."
(2) 평화외교
한국정부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 미국의 요청에 따라 국민적 합의 없이 해외파병을 강행함으로써 오히려 분쟁과 갈등을 유발하는데 일조하여 왔다. 국제분쟁에 대한 외교적 예방과 노력 대신에 군사적 개입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전개하여 해외파병이 일상화되었으며,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동의권을 침해하는 형태로 PKO법 등을 제정하기 에 이르렀다.
역대정부는 무기산업을 국가전략 산업 혹은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육성해왔고 특히 이명박정부는 무기수출 세계 7위 국가 진입을 목표로 하여 무기 산업을 진흥 한 바 있다. 또한 지뢰, 집속탄 등 비인도적인 살상무기를 분쟁지역에 수출하는 한편,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속탄금지협약과 대인지뢰금지협약에는 가입하고 있지도 않다.
공적개발원조(ODA)와 관련하여 한국정부는 지난 몇 년 동안 예산을 확대하고, 법체제를 정비(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정)하였으나, 단기적 이익, 가시적 성과 위주로 원조정책을 펼침으로서 원조를 받는 나라의 복지증진과 원조의 효과성 증진이라는 국제규범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30여개의 정부부처와 각 기관들이 각기 공적개발원조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함으로서 분절적이고 파편적인 원조를 시행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실질적인 심의와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지도 못하다.
한국 정부의 외교가 평화주의를 실천하고 평화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갈등유발적 외교를 탈피하여 갈등예방적인 평화외교를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대다수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이익에 부합하도록 외교의 윤리성, 투명성, 국제적 책임성을 강화하고 외교정책결정에서의 민주주의를 확대하여야 할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의 평화권선언 초안도 "국제개발협력을 위한 자원의 촉진과 제공이 평화권 달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제13조2항)고 하면서, 개별 국가들도 평화권 침해를 예방하고 유엔의 유효성을 강화하여야 한다(제13조 5항)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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