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산 점거농성

2013. 5. 10. 09:45전북 소식/새만금에 대하여

 해창산 결코 내줄 수 없다-점거농성 돌입

  기구한 운명의 해창

                 해창산 점거농성 화보


부안읍에서 격포 방면으로 20여킬로쯤 가면 해창(海倉)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부안에는 특산물을 거둬들여 저장해두는 창고가 5곳이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 그 하나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안읍에서 격포행 직행버스를 타면 다음 정거장으로 해창에서 한번 서고 다음에 변산면(옛날에는 산내면)사무소가 있는 지서리에서 또 한번 서고 마지막으로 종점인 격포에 당도했었다. 그만큼 요지였던 것이다.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내변산의 수백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백천내로 합수되어 바로 이 해창을 통해 바다로 들어갔다. 이 물줄기를 막은 것이 오늘의 부안댐이다.

그래서 해창 다리는 변산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왜정 때 만든 그 다리는 지금도 있다. 이 해창다리를 건너 바로 오른 편에 신석정 시인의 시비가 있다. 조금 더 가서 대항리는 새만금간척사업의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는 기점이다.

내변산에서 나오는 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던 해창포구의 뻘에서는 아주 맛이 좋고 깨끗한 바지락이 지천으로 묻혀있었다. 양식이 아니고 자연산이다. 아무리 파내어도 그 속도는 바지락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동네는 20여 가호 되었는데 논밭이 없어도 이 바지락을 채취하여 아들 딸 다 도회지에서 대학까지 가르칠 정도였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동네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새만금 사업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운명을 바꾼 사람들이다. 이유는 바로 동네 뒷산을 허물어 그 토석을 물막이 공사에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산 허무는 소리에 사람들은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2, 3년 더 버티며 사람들이 살았는데 산이 절반쯤 허물어지면서 먼지가 온통 동네를 뒤덮기 시작하자 더 이상 못 버티고 빈집들만 남더니 이젠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은 오늘의 해창을 보고 이렇게 절망했다.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항도 아닌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
   바닷속으로 비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
   영당(靈堂)자리에 비 

   수십킬로 뻘을 질러 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
   타는 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온통 환하게 몸 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갈 뿐이다.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박영근 '해창에서' 전문/ 현대문학 2001년 6월호

 

토석채취 허가를 얻은 농업기반공사가 올 5월 중순부터 해창산 토석채취를 위해 발파작업등을 서둘러 채취작업을 준비하자 우리 <부안사람들>을 비롯한 반대운동 단체에서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모두는 5월 24일 정오를 기해 해창산에 올라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언론은 월드컵을 보도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국민들은 축구경기 보느라 우리 해창산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겠지만 우리는 기필코 해창산을 지켜내어 새만금사업을 끝내는 저지시키고 말 것이다.


5월 24일 해창산에 올라 깃발을 꽂았다.


걸개그림을 도로에서 볼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


해창산 정상의 농성천막을 꾸렸다.


27일에는 계화도 주민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오셔서 격려해주었습니다.


계화도 주민들의 방문을 농기공 직원들이 막자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조대여고학생들'과 '어린이나비생태탐사단'에 이어 담양 한빛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도교사의 인솔로 농성장을 찾았습니다.


29일 아침 7시 덤프트럭이 들이닥쳐 돌을 실어내가려 하였습니다.

온몸을 던져 결국 이를 막아내었습니다.

새만금사업단 관리소장이 와서 경고를 하고 갑니다. 이제는 법으로 대응하겠으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재산을 모두 압류할 것이라며....


갯벌만 보면 막으려 덤비는 농업기반공사의 불도져는 더 이상 해창 석산을 헐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국립공원을 채석장으로 내준 환경부


해창산 토석채취는 해당지역이 국립공원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 7월 28일 농림수산부 장관이 건설부장관의 협의를 거쳐 92년 6월부터 토석채취를 실시한 이래 7년동안 계속돼왔다. 뒤늦게서야 한  언론이 이 문제를 보도하였다. 그 기사를 보자.

◎새만금사업 방조제 돌 캐려 파헤쳐… 국립공원 크게 훼손
해방 이후 최대 역사라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겨레의 재산 국립공원이 파괴되고 있다.
전북 부안에서 계화도를 거쳐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서해안에서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하서면 백운리로 가다보면 해안도로 왼편으로 ‘발파 주의’라는 푯말을 이마에 붙인 채 허옇게 민머리를 드러낸 산과 마주친다. 산의 왼쪽 기슭을 따라 소광마을로 난 좁은 길을 지나 산비탈을 오르자 쇠파이프 철책 너머로 마구 파헤쳐져 거의 산의 모습을 잃은
해창석산의 잔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앙상한 거죽 안에는 작은 바위들과 나무들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고, 기암괴석이 뜯겨나가 움푹 팬 자리에는 더러운 물이 고여 있다.
산 건너편 변산면 중계리 불무동마을에서 바라다본 개발의 상처는 더 끔직하다. 마을앞 개울을 건너 공사현장에 다가서자 140∼150m 높이의 석산은 지난 7년 동안 계속된 채석작업으로 마치 속 파먹힌 찐빵처럼 테두리만 앙상하게 남은 채 중심부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채석장에서 배어나온 시커먼 물줄기가 골재채취장 앞 샛강으로 쉼없이 흘러들고 있다.
지난 91년부터 시작된 새만금지구 간척지 물막이 방조제를 쌓는 흙과 돌을 파내기 위해 국립공원 구역에 자리잡은 산 하나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불무동에 사는 김아무개(44·여)씨는 “
해창석산을 파헤칠 당시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시위를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몇년 전만해도 해창마을에는 약 20가구가 살았으나 발파 때 날아드는 돌가루와 먼지, 소음을 못이겨 몇푼 되지 않는 보상금을 받고 모두 고향을 떠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대해 농어촌진흥공사 새만금사업단의 한 관계자는 “지난 90년 9월 농림수산부(현 농림부)의 협의요청으로 당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상급기관인 건설부가 합법적으로 허가한 사항”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
해창석산은 골재채취에 가장 적합한 곳이며, 공사가 끝나면 주변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조경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연을 파괴한 자리에 인위적으로 꾸며질 조경이 과연 국립공원의 자연스런 분위기에 얼마나 어울릴지 의문스럽다.
녹색연합 등 환경단체들은 “당시 농림수산부와 건설부의 국립공원 개발행위는 후손에 물려줄 귀중한 자연유산의 소중함을 외면한 채 개발논리와 편의주의만을 앞세운 것”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그 까닭으로 90년 7월18일 당시 농림수산부 장관이 건설부 장관 앞으로 보낸 ‘새만금지구 사업계획 협의’ 공문에서 처음 다른 곳으로 계획됐던 석산개발 예정지가 현재의
해창석산으로 변경된 이유를 들었다. 공문은 변경사유에서 “…석산(해창)은 방조제 축조에 최적의 암질, 운반 거리 등을 감안한 막대한 공사비 절감 및 공사기간 단축과 국립공원내 자연경관 훼손의 극소화 등 현지여건을 감안한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는 2004년까지 한반도 서해안의 지도를 새로 바꾼다는 새만금 간척사업. 서울 여의도의 140배 크기인 국토 4만100㏊를 얻는다는 개발이익 때문에 국립공원이 무관심 속에 망가지고 있다.<변산반도/정상영 기자>-<한겨레>1998년 5월30일자

이러한 보도가 있었음인지 1998년 5월 30일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토석채취 중단을 농림부에 요청하였고, 토석채취는 일단 중단되었다. 이 때까지 농업기반공사가  새만금  방조제 33㎞  중 18㎞만  완성하는데만  15t  트럭  130만대  분량의  토석  1947만4000㎥를  채취했으며  해창산 에서  채취한  것만  383만8447㎥에  달하였다.

그러나 농림부는 이미 토석채취가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로 해창산 복구. 조경계획만을 세워 놓은 채 나머지 토석을 채취하고자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던 중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은 2000년 1월28일  '국립공원  점용에  관한  심의위원회'를  열면서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에  공문을  보냈는데  이 공문에 따르면"1월22일  김명자 환경부장관이  공단  이사장에게  '채석을  중단시키면  국책 사업인  새만금사업에  지장을  초래하므로  채석량은  이미  협의된  사항으로  채석을  계속하되  채석기간과  복구계획  등의  조건을  부여해  최단시일  안에  복구하라'는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가  보낸  1월22일치  공문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공문  내용을  왜곡했다는  의혹을  샀다. 환경부는  이에  대해  "현재  국무총리실에서  간척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는  만큼  환경부는  조사결과에  따라  공식  방침을  정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농림부와 농업기반공사가 다시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를 요청하였으나 환경단체들의 강력한 반발을 만나 국립공원내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해 2001년 5월 정부가 새만금사업을 강행결정한 후 8월부터 농림부와 농업기반공사는 다시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에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를 요청하였고, 지난 2002년 4월 22일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최종적으로 변산반도국립공원내 해창산 토석채취 재게 허가를 내주고 말았다.

다른 부서도 아닌 환경부가 새만금 간척사업이 단지 국책사업이므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더구나 자연생태계 마지막 보루로 국가차원에서 법적으로 지정하고 환경부가 보호관리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국립공원 내에서 석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환경파괴가 자행되고 있음에도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공식적으로 허가까지 내주는 것을 보면 환경부의 책임 포기라 할 것이다. 환경부는 더 이상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육상생태계도 궤멸시키는 농업기반공사


토석을 가장 많이 채취해 쓴 국책사업은 농업기반공사가 추진하는 새만금 사업으로 33km 규모의 방조제를 만들기 위해 3개 지역(해창석산, 신시석산(사진), 비응석산)의 토취장 1,309,000㎡를 허가 받아 99년까지 15톤 트럭 1백30만대 분의 토석 19,474,000㎥를 채취하였다.

그 중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해창산에서 채취한 양만 하여도 3,838,447㎥이나 된다. 현재 22km 방조제 건설을 위하여 현재까지 약 23,801,556㎥의 토석을 채취하였다면 향후 33km의 방조제 완성을 위해서는 약 11,900,778㎥ 이상의 토석이 더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방조제 건설과정과 내부개발 과정에서 호수와 육지의 경계인 138km의 방수제를 쌓아야 하는데 여기에 얼마가 될 지 알 수 없는 더 많은 토석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보았을 때 새만금 간척사업은 해양생태계 뿐만 아니라 육상 생태계까지 파괴시키는 세계 최대 생태계 파괴 사업이라 할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사업으로 살찌는 자들은 건설업체와 농업기반공사 직원 외에 누가 또 있는가. 농업기반공사는 오늘도 새만금사업의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사대행기관에 불과한 농업기반공사가 이러한 홍보 일선에 나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해창산 토석채취 사업개요

 변산반도 국립공원 지정일 : 1988년 6월 11일
 새만금 간척사업 토취장 : 해창산, 신시산, 비응산 3곳 토취장 1,309,000㎡를 허가
 해창석산 위치 :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 해창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위치
 면적 : 297,266㎡
 매장량 : 4,452,908㎥
 채취량 : 3,838,447㎥(98년 말까지 86% 채취) : 15톤 트럭 255,897대 분량
 미채취량 : 614,461㎥(14%)
 용도지구 : 자연환경지구
 채취목적 : 새만금간척사업 방파제 축조용
 사용기간 : 91. 12 ∼ 준공시까지
 

해창산 토석채취 경과

  90. 7. 28 토석채취 협의요청(농림수산부장관→건설부장관)
  90. 9. 4  토석채취 협의(건설부장관→농림수산부장관)
  92. 6     토석채취 개시
  98. 5. 30 언론보도(한겨레신문)
  98. 5. 30 토석채취 중단요청(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농림수산부장관)
  98. 7. 6  토석채취협의건 취소의견 제출(이사장→환경부장관)
  98. 8. 17 전주지방환경관리청이 환경연향평가 협의내용 이행여부 점검결과 해창산 식생복구 지연 지적
  99. 1. 22 해창산 복구, 조경계획 제출(새만금사업단장→ 변산반도국립공원관리소장)
  99. 3. 4  해창산 복구, 조경계획 보완제출(새만금사업단장→ 변산반도국립공원관리소장)
      <보완사항 : (당초)완전채취후 복구조경공사→(보완)미채취 부분을 존치시키고 복구조경>
  99. 3. 22 해창산 조경계획 제출에 대한 회신(소장→새만금사업단장)
      <공원계획 반영절차 조속이행, 조성후 시설관리권을 공단에 이관>
  99. 4. 6  복구, 조경계획 조치요구에 대한 회신(새만금사업단장→소장)
      <시설관리권 이관문제는 향후 외곽시설 마무리단계에서 검토할 사항임.>
  99. 4. 24 복구, 조경계획 관련 조치 촉구(소장→새만금사업단장)
  99. 5. 31 복구, 조경계획 관련 조치 재촉구(소장→새만금사업단장)
  99. 12. 30 새만금방조제 축조를 위한 토석채취 협조요청(농림부장관→환경부장관)
  2000. 1. 22 의견조회(환경부장관→이사장)
  2000. 3월 환경단체의 강력한 반발로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 무산
  2001. 8월 농림부가 환경부에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 협의요청
  2002. 4. 22 환경부가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 최종 허가
  2002. 5. 중순 농업기반공사 해창산 토석채취 재개
  2002. 5. 24 해창산 공사저지를 위한 주민 현장농성 돌입
 

국립공원관리공단 업무이관 역사

  1987년 7월
  건설부 산하 국립공원관리공단 발족
  1988년 6월
  변산반도 국립공원 지정
  1991년 4월
  국립공원관리공단 내무부 이관
  1998년 2월
  국립공원관리공단 환경부 이관

문의: 새만금갯벌 생명평화연대 장지영팀장 02-735-7000, 018-730-7775,
             새만금사업 즉각 중단을 위한 전북사람들 이민영 국장 011-9647-0679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김화선 국장 011-675-7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