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입는 옷 있습니까? 입을 옷이 없습니까?-* 공유경제 - 열린옷장

2013. 9. 8. 17:52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안입는 옷 있습니까? 입을 옷이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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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유경제 - 열린옷장
한만일 열린옷장 대표는 대한민국의 공유 경제를 개척하는 선구자이다. 헌 옷을 기증받아 여럿이 공유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가 하면, 자동차와 집, 책을 나누는 공유의 삶에도 적극 참여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정장에서 구두까지 기증받아
취업준비생 등에게 싼값에 대여
방 한칸·책 한권… 공유 확산

포털에서 ‘정장 처리’를 검색하던 골프장 직원 유주성(34)씨는 흥미로운 사이트를 발견했다. 기증한 옷을 취업준비생 등 필요한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빌려주는 곳이었다. “내가 기증한 정장을 입고 누군가가 면접을 보고 또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괜찮더라고요.” 남아도는 양복 8벌을 박스에 넣어 택배를 부쳤다. 도착지는 서울시 광진구 화양동 48-3, ‘열린옷장’이었다.

열린옷장의 한만일(32) 대표는 지난해 3월 ‘사람들이 옷장을 열어 서로 공유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실행에 옮겼다. 카피라이터, 모바일 개발자 등 직장인 4명이 의기투합했다. 페이스북에 ‘공간이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더니, 한 아이티(IT) 회사에서 직원 휴게실로 쓰던 곳을 ‘공유 공간’으로 내놓았다. 83㎡ 규모로 제법 꼴을 갖춘 ‘열린 옷장’이 탄생했다.

조금씩 기증받은 옷이 쌓이더니, 지난달에는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한꺼번에 500여벌의 옷을 가져왔다. 단번에 옷장이 가득 찼다. 한 대표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우리 옷을 입고 면접을 본 대학생들이 ‘합격했다, 고맙다’고 연락해오니 보람이 생기더군요.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옷장 속에 잠자던 양복이 좋은 ‘공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한 대표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 각자 소유한 물건이나 공간을 나눠쓰는 협력적 소비)의 삶에 푹 빠져 산다. 경기도 하남의 세탁소로 옷을 싣고 갈 때도 카셰어링으로 경차를 공유한다. 30분에 3000원(기름값 별도)이면 된다. 옷 세탁도 공유의 덕을 본다. 열린옷장 기사를 본 세탁소 사장님이 무료로 세탁을 ‘공유’해 주고 있다.

식사 자리를 공유하는 ‘소셜 다이닝’에도 종종 참석한다. 최근엔 버스정류장 노선표에 스티커를 붙인 활동으로 유명한 ‘화살표 청년’ 이민호씨와 함께 하는 ‘저녁 공유’ 자리를 마련했다. 서울 북촌에서 한옥 방을 빌려주는 ‘코자자’와 남아도는 책을 기증받아 나누는 ‘책꽃이’도 한 대표가 즐겨 찾는 공유의 공간이 됐다.

‘열린 옷장’ 사업은 1년여 만에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벌써 400여명이 이용했다. 교생실습 나가는 대학생, 졸업앨범 찍는 대학 졸업반 학생, 기업 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 등 고객층도 다양해졌다. 5일간 빌리는 데 정장 1벌에 2만원, 셔츠와 넥타이, 블라우스는 각 5000원, 구두는 3000원이다. “‘면접 같은 중요한 자리에 누가 빌려입을까?’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죠. 일단 목표는 1000벌까지 갖추는 거예요. 제대로 골라 입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용보(24)씨는 2011년 상경해 강남구 선릉역 근처의 한 고시원에서 지내면서 하루 10시간 레스토랑의 주방 일을 하고 있다. 최근 ‘웨딩플래너’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넣었지만, 면접 때 입고 갈 정장 한벌이 없었다. “양복을 준비해야 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잖아요. ‘정장 대여’라고 검색하니 열린옷장이 뜨더라고요. 이런 곳이 있다니 감사했죠.” 지난달 29일 화양동 열린옷장을 찾은 이씨는 남색 정장과 녹색 넥타이, 검은 구두를 골랐다. 2만8000원으로 충분했다. 이씨가 집어든 정장은 인생 10년 선배 유주성씨가 기증한 품이 넉넉한 남색 양복이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