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국 유권자의 선거현실
대의민주주의 선거에서 유권자의 참여행위는 대상을 전제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경쟁하는 정당과 후보가 가시화되고 그들로부터 일련의 정보가 제출되면, 유권자는 그 정보를 토대로 대상에 대한 호불호의 선호를 형성하고 다양한 형태로 찬반의사를 표명하며 최종적으로 투표결정을 내린다. 한국 유권자는 투표선택의 최종순간 이전에,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정보들을 어떻게 얻고 있는가? 한국의 법과 제도, 정치 환경은 어떤 구조 속에서 유권자에게 선거정보를 제공하고 있는가? 한국의 경쟁하는 정당과 후보는 유권자와 어떤 방식으로 선거정보를 나누고 지지를 호소하며 설득하고 있는가?
2012년 4월에 시행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한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0.7%가 정당 또는 후보자와 직·간접적인 접촉을 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투표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접촉경험이 있었다는 39.3%의 응답자들의 접촉유형으로 가장 빈도가 높았던 것은 문자메시지였고, 대면접촉, 전화, 우편이 뒤를 이었다.
문자메시지나 우편을 통한 방식은 정보제공자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기만 해야 한다. 유권자 입장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내가 표를 주면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는 방식은 대면접촉, 전화 정도일 것이다. 물론 선택형 설문조사에서 대면접촉을 했다는 응답은 전철역 출구에서 인사나 악수 한 번 했던 경험도 포괄한다. 하지만 그나마 가장 적극적인 정보제공방식으로 대면접촉을 상정해 볼 때, 응답자 1,000명 가운데 194명만이 이 경험을 가졌다고 응답했다. 이 결과가 확인시켜주는 것은, 한국 선거에서 압도적 다수 유권자의 투표선택이 경쟁하는 정당과 후보자로부터 나오는 직접적인 정보나 소통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투표결정을 위한 정보를 주로 어디에서 얻고 있을까?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들에게 선거의 정보원을 물었다. 정견방송, 홈페이지, TV광고, 유세 등 정당이나 후보자가 정보 매개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제공하는 정보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응답은 25.3%였다. 반면 응답의 41.9%는 TV, 라디오, 신문, 잡지, 인터넷 포털, SNS 등 미디어를 통해 2차 가공된 정보라고 답했다. 주지하다시피 미디어는 정보의 단순 전달자가 아니라 생산자다. 단순보도라고 하더라도 모든 정당 및 후보자의 발언과 행위를 모두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특정한 프레임 위에서 선별적 보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9대 국회의원선거 246개 지역선거구에 출마했던 후보자들의 발언과 행위는 과연 얼마나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었을까? TV, 라디오, 신문, 인터넷포털 등 우리나라 각 미디어들은 기본적으로 전국단위를 기반으로 하며, 부분적인 지역기반은 광역자치단체 수준에 그친다. 246개 선거구에서 경쟁했던 후보들은 모두 902명, 그들 각각의 정보가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었던 빈도는 전체로 혹은 개인별로 얼마나 될까?
지방선거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은 더욱 강력한 것으로 나타난다. 2010년 시행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유권자 대상으로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8%는 TV, 라디오, 신문, 잡지, 인터넷 매체로부터 후보자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5회 동시지방선거에서 개인 유권자가 행사했던 투표수는 총8개, 이 가운데 6개는 지역선거구 단위 투표였고, 6개 직위의 총 선거구는 2,061개였으며 경쟁했던 후보는 모두 8,745명이었다. 법정선거운동기간 14일 동안 8,745명의 후보 가운데 과연 몇 명이 미디어 노출기회를 얻었을까? 또 유권자는 이들 가운데 몇 명의 정보를 각종 미디어를 통해 얻을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 선거에서 유권자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정보에는 ‘누가 경쟁하는가?’, ‘경쟁하는 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투표선택으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가 포함된다. 물론 아무리 민주주의 제도가 잘 정착된 나라라고 해도 마지막 단 1명의 유권자에게까지 이 모든 정보를 전달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 나라의 평균적인 유권자-평균적인 공교육 과정을 거치고 정치관심을 가진 유권자 수준에서는 위 세 가지 정보를 향유할 수 있어야만 정상적인 선거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유권자의 현실은 그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경쟁하는 정당과 후보들이 ‘무엇’을 주장하는가를 알기 이전에 ‘누가’경쟁하는가에 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획득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한국 선거에서 유권자가 처한 이러한 불합리하고 불충분한 정보환경을 만들어내는 요인들을 생각해보려 한다.
Ⅱ. 불합리한 정보환경의 요소들
1. 정당(후보자)과 유권자가 만나면 부패한다?
필자가 보기에,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제도에서 정당(후보자)-유권자 관계를 다루는 제1규범은 공정경쟁이나 참여의 자유 보장 등이 아니라 ‘반(反)부패’다. ‘정당(후보자)과 유권자가 자주 만나면 필연적으로 부패하므로, 접촉의 빈도·방법·기간을 가능한 한 제약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민주화 이후 최초로 구체화된 것은 1994년 기존 선거법을 폐지하고 제정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법률 5262호)이다. ‘선거부정방지’는 법명에까지 이름을 올림으로써 공직선거의 제1원리로 명시화되었고, 이 명칭은 2005년 개정 선거법(법률 제7681호)에서 「공직선거법」으로 개정되었지만 그 원리는 정당법, 정치자금법까지 포괄하면서 존속·확대 적용되어 왔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정치관계법제는 1)정당조직을 축소하고 정당조직운영에 선거관리위원회의 관여나 개입을 확대하며, 2)정당의 정치자금 모금 기능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선거공영제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며, 3)매체환경이나 유권자 정치인식의 변화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규제할 방법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왔다. 개개의 제도변화는 상황적 맥락이나 이를 주도했던 주체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기본방향은 정당(정치인)과 유권자의 접촉면을 조직, 자금, 정치활동 전반을 아울러 포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부패방지’라는 정책목표를 달성하는데 맞추어져 왔다. 민주화 이후 오랫동안 한국의 여론은, 한국정치가 ‘지나치게 부패’했기 때문에 반부패를 위한 규제위주의 정치관계법이 현실적으로 타당성을 갖는다거나 불가피한 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정당(정치인)-유권자 관계를 접근하는 키워드가 민주정치 기반을 확장하는 참여와 소통이 아니라 ‘부패’로 자리 잡게 된 것이, 민주화 이후 정치주체들의 창작물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치로부터 빌려온 것이라는 점이다. 이승만 정부에서부터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기존 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의 필요나 권력부패가 발각될 때마다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당(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제한해 왔고, 그 오래된 기원은 이승만 정부였다. 이승만 정부가 아직 등장하기 이전 시점에 만들어진 제헌국회 선거법은 유권자의 기본권 조항과 선거관리 관련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다른 민주주의 국가 선거법과 유사한 형태를 띠었다.
이를 현재와 같은 독특한 원리에 기초한 선거법으로 전환시킨 것은, 1952년 발췌개헌 직후부터 1950년대 내도록 선거법 개정을 시도하여 1958년 결국 목적을 달성했던 이승만 정권과 그에 굴복했던 당시 민주당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1934년 군국주의 하 일본 선거법제를 모방하여 선거운동의 기간제한, 인적제한, 방식제한을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을 7차례나 시도했는데, 그 때마다 명분은 ‘반부패’였다. 선거운동기간이 길고 선거운동참여자가 많으며 다양한 선거운동이 가능할수록 정당-유권자 관계는 부패하므로 최소한의 참여와 정치활동으로 선거공간을 축소하는 것이 정치부패를 막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그의 끈질긴 시도는 1958년 결실을 맺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의 정책목표는 영구집권이었고 ‘반부패’는 명분에 불과했다. 사실관계에 기초하더라도, 법으로 규제되어야만 했던 권력형 비리나 부패는 집권세력과 거대기업집단 사이에 발생했던 것이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야당(정치인)과 평범한 유권자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쿠데타 직후 ‘정치활동 정화’를 명분으로 정당-유권자 관계의 단절시켰을 때도 명분은 ‘반부패’였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과거 야당(정치인)-유권자 관계를 불법화했을 때도 ‘반부패’는 위력을 발휘했다.
다소 긴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 ‘반부패’논리의 기원을 추적한 데에는, 현행 정치관계법제의 ‘반부패’우선성의 역사적 기원이 오래되고 뿌리가 깊다는 판단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정치는 정당-유권자 관계를 최소화하고 정치활동 규제를 우선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당-유권자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반부패’목표를 달성하는 다른 경로를 만들 수도 있었다. 더 많은 평범한 유권자가 더 다양한 정치세력과 정책, 정치자금, 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수의 권력과 이권 거래를 무력화시키고 정치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안도 가능했다. 하지만 오래되고 익숙한 논리와 규제로 정치의 공간을 더욱 협소하게 만든 데에는 이러한 인식론적 기반이 자리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2. 선거정치의 소통과 일상정치의 소통은 달라야 한다?
우리 선거법제에서 정당(정치인)과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선거운동인 것과 아닌 것’으로 이분화하는 논리는, 이승만 정부가 일본 군국주의 하 선거법 조항을 모방해 온 것으로 1958년 「민의원의원선거법」에 최초로 도입되었고, 그 핵심조항이 현행 선거법 제58조와 제59조, 제254조에 그대로 남아있다.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인 선거운동은, 정해진 기간에만 가능하며 이 기간 외에 선거운동에 해당되는 정치활동을 하면 벌금이나 징역형을 선고받게 되어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이 세 조항을 근간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정당법 및 정치자금법 역시 이 기간제한규정을 기본으로 구성된다. 정당의 정치활동 내용과 방식, 정치자금의 모금 및 지출 관련 모든 사항은 이 기간제한 위에 구성되기 때문이다.
유권자가 대상을 특정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정치활동, 후보자나 정당이 지지를 얻기 위해 진행하는 일련의 대유권자 정치활동을 정해진 기간 안에만 할 수 있도록 해 놓은 현행 제도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비(非)현실적이고 반(反)정치적인 제도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는 선거는 4년 혹은 5년 동안 정당(정치인)-유권자가 정치활동을 매개로 맺어온 일상 관계의 한 매듭일 뿐, 선거 정치와 선거가 아닌 시기의 정치가 구분될 수 있다는 발상은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에 반하는 것이다. 유권자는 정당이나 후보자와의 관계 속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해석정보를 얻고 정책적 필요를 구체화한다. 정당(후보자)은 지지와 표를 구하는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유권자와 소통하게 된다. 민주정치의 이러한 자연스런 과정을 비현실적인 이분법 논리로 구분할 수는 없으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 구분의 비현실성은 우리 선거법을 평범한 유권자들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와 조항들로 가득 차도록 만든 주범이다.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라는 선거운동의 정의 자체부터 일상용어와 거리가 멀다. 또한 현실에서 이러한 비현실적인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선거운동인 것과 아닌 것, 선거운동기간에 할 수 있는 행위와 할 수 없는 행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주체와 할 수 없는 주체들에 잡다한 예외조항 목록을 점점 길게 만들어 왔다. 예컨대 ‘선거운동이 아닌 것’에 대한 예외조항들로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의견개진 및 의사표시,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관한 ‘단순한’지지·반대의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 ‘통상적인’ 정당 활동,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 없이’ 투표참여를 권유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서 대상의 행위가 ‘단순한’ 것인지 아닌지, ‘통상적인’ 것인지 아닌지,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모두 유권해석자들의 재량적 판단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나 유권자가 선거법 해석을 위해 선거법의 문구만이 아니라 법원의 판례와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 사례를 끊임없이 뒤져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정상적인 정치활동과 정당(정치인)-유권자의 안정적인 상호관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3.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소통은 부패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민주화 이후 유권자의 세금으로 정당의 정치자금을 충당하는 국고보조금 제도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온 반면, 당비·후원금 등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정당(정치인)-유권자의 직접적 관계는 계속 축소되어 왔다. 정당의 부패유인을 줄이고 ‘깨끗한 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책이나 이권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은 이름 없는 세금으로 비용을 충당하는 게 낫다는 논리다. 과연 그러한가?
다른 면에서 보면,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인)과 유권자가 소통하는 핵심 매개는 표와 돈이다. 정당은 정책을 표방하고 유권자는 그 약속에 대한 기대로 표와 돈을 제공한다. 표를 얻고 자금을 지원받은 정당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다음 선거에서 표를 얻지 못하고 정치자금을 충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약속이행의 압력을 받는다. 정치자금은 단지 부패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적 책임을 강제하는 유력한 수단이다.
물론 어느 민주주의 체제에서나 정치자금에 대한 규제는 필요하며 일정 수준의 선거공영제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정치자금을 둘러싼 이러한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대표성을 위한 기회를 균등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런 목적에서 개인이나 단체가 제공할 수 있는 정치자금의 상한선이 규제되며, 정치자금의 모금과 지출정보는 공개된다. 사회적 약자들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거경쟁에 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재정적 조건을 확보해주는 선거공영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넘는 정치자금 규제는 민주주의의 작동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지금처럼 정당이 정치자금의 모금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태는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각종 선거에서 정당들은 개별 후보자가 아닌 정당 자체의 정책을 표방하고 비례대표 의원을 당선시킨다. 집단으로 정당이 표방하는 정책은 그 정책을 필요로 하는 사회집단과 연계될 수 있어야 하며, 그 유력한 수단은 정치자금이다. 유권자로부터 직접 모금하는 정치자금은 정당(정치인)의 입장에서 정책을 구체화해야만 하는 유인을 제공하고 민의를 가늠하게 만드는 촉수 역할을 한다. 반면 국고보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정당(정치인)은 점점 더 민의에 둔감해지며, 당선 후 당선 전의 약속이행의 압박에서 훨씬 자유롭게 된다. 정치자금을 매개로 한 정당(정치인)-유권자 관계의 핵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정치자금을 규제하고 국가재정지원의 수준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인데, 현재는 선후가 바뀌어 있다.
4. 미디어를 통한 정보소통은 효율적, 대면 정보소통은 비효율적?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에는 정당이나 후보자가 직접 유권자를 대면하는 공간을 최소화하는 대신 미디어를 통한 정보전달을 선호하는 논리가 팽배하게 되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2004년 정치관계법 개정 과정이었다. 당시 논의과정을 돌이켜 보면, 미디어를 통한 정보전달은 돈 들이지 않고 대량의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대안으로 각광을 받았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미디어를 통한 선거정보 소통과 대면선거운동의 축소는 후보자와 유권자에게 기대했던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가?
19대 총선 유권자 조사 자료에 따르면, 유권자의 입장에서 정당이 직접 제공하는 정보를 전달받았던 경로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은 정당과 후보자 유세로 전체 응답 가운데 12.2%를 차지했다. 반면 TV정견방송, 인터넷, SNS 모바일 등을 통해 제공받은 정보는 모두 5% 미만에 불과했다. 정당-유권자의 직접적인 정보소통 매개로 미디어는 여전히 전통적인 대면선거운동방식인 거리유세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선거구별로 의무적으로 진행하기 되어 있는 후보자 TV토론 및 연설회는 전국 유권자 10명 가운데 4.5명 정도가 시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246개 선거구별로 1회 이상 토론회 및 연설회가 개최되었는데, 수도권과 지방의 환경과 현황은 현저히 달랐다. 서울·인천·경기의 TV토론은 케이블방송으로 진행된 반면, 다른 지방에서는 모두 지상파방송을 통해 진행되었다. 13일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권역별 지상파방송들은 그 내에 속한 선거구 후보자들 간의 토론 및 연설회를 모두 편성·방송해야 했기 때문에, 선거구별 1회 의무요건을 간신히 충족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상파방송이었으므로 프라임시간대인 오후 7시∼11시에는 정규방송을 진행해야 했고, 후보자 토론은 오후 6시 이전이거나 밤 11시 이후 시간대에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간대에 시청이 가능한 유권자들은 연령대 및 직업군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것은 국회의원 선거 246개 선거구의 상황이며, 각급 단위 지방선거가 동시에 실시되는 조건에서는 TV토론이 정보전달 기능을 거의 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후보자의 입장에서도 13일의 선거운동 짧은 기간 안에 TV토론 준비와 참여가 얼마나 효율적인 정보소통 수단인지에 대해서도 고려가 필요하다. 19대 총선의 경우, 참여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의무적 토론 참여를 거부한 후보가 7명에 이른다. 이 중 한 명인 부산 남구을 선거구 서용교 후보는 “토론회를 하고 싶지만 준비 시간에 유권자 1명이라도 더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한겨레신문, 2012년 4월 3일자). 후보등록일에 임박해서야 결정되는 정당의 공천과 13일의 짧은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한국정치의 조건을 고려할 때, TV토론 준비와 참여에 투자하는 시간보다 직접 대면 선거운동을 하는 게 더 낫다는 후보자의 판단을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
물론 TV, 라디오, 인터넷, SNS 매체들이 2차 가공한 정보를 얻은 사람들의 숫자는 직접 정보를 얻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각 매체의 정보가공 효과와 정보전달 효과의 판별문제, 그와 별개로 각종 매체가 노출할 수 있는 총 정보량과 개별 유권자들이 이들 매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총 정보량의 한계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지방선거에서 미디어를 주 매체로 하는 선거운동을 하라는 것은, 후보자와 유권자에게 모두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 정당을 통한 소통은 악, 정책을 통한 소통은 선이다?
한국정치에서 소위 ‘줄 투표’는 ‘정당 투표’의 다른 이름이다. 개별 후보자들의 정책을 꼼꼼히 살펴 비교하지 않은 채 소속정당만을 기준으로 투표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 부정적 함의가 보편화된 지는 오래되었다. 이는 바람직하다고 가정되는 정책투표와 대조되면서 비합리적 투표행위로 해석되었고, 특히 특정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배타적으로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든 폐해의 주범으로 지목받아 왔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비난 자체가 한국정치의 잘못된 병폐로 보인다. 잘못된 법·제도 환경과 정치구조를 갖추어 놓고 그 결과를 유권자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지방선거를 예로 보면, 14일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총 8개의 투표권을 행사하라는 요구를 받고 유권자가 정당투표를 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2개의 정당투표를 제외할 때, 6개의 각급 선거구에 후보자는 평균 4.2명이 출마했다. 유권자는 6개 선거구에 출마한 평균 25.2명의 후보와 그들의 정책에 관한 정보가 필요했다. 게다가 그 25.2명의 후보들은 광역단체장 및 광역의회,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회, 교육감 및 교육위원이라는 각기 다른 단위의 공직을 위해 경쟁했고, 각각의 의제나 정책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선거운동 기간인 14일 동안 유권자는 매일매일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그 많은 정보를 취합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라는 요구가, 한국의 평범한 유권자들에게 과연 합리적인 제도 환경으로 볼 수 있는가?
유권자가 투표결정의 판단근거로 활용하는 정치정보는, 매 선거마다 선관위에서 제공하는 규격화된 1∼2장의 선거홍보물이나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명함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정보에 노출되면서 인지되고, 경쟁자들 사이의 차별적 정보로서 판별되며, 나의 삶에 미치는 효과를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투표선택과 연계가 만들어진다. 각 선거에서 경쟁하는 개별 후보자나 그들의 정책에 대해 충분히 인지할 수 없고 후보자의 이름조차 생경한 정보환경에서, 그 후보자들을 공천했거나 선거운동 기간 이전에 일상 정치활동을 통해 대략의 정책방향을 제시해 왔던 정당을 통해 선택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 유권자와 선거 후보자의 열악한 정보환경은 비단 지방선거뿐 아니며 국회의원 선거도 마찬가지다. 후보등록일에 임박해서야 정당의 후보공천결과가 가시화되는데, 14일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대한민국 유권자 10명 가운데 6명은 후보자나 후보자의 선거운동 사무실로부터 아무런 직접적인 정보를 얻지 못한다. 간혹 미디어에 노출되는 정보와 선관위 홍보물 정보만으로 투표결정을 해야 하는 환경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정당투표는 비난받아야 할 일이 아니며, 더 풍부한 정책정보가 전제된 투표결정을 원한다면 제도와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Ⅲ. 정당 및 후보자-유권자 관계 정상화를 위하여
1. 부패는 정치활동 규제가 아니라 정치자금 규제로 해결해야 한다
자유로운 정치활동과 공정한 정치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부패방지장치가 필요한 것이지, ‘반(反)부패’를 위해 정치활동과 정치경쟁이 제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反)부패’는 권위주의 체제에서도,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어느 체제에서도 그것이 제1목표는 아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그것은 정당과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억압하기 위한 보조적 명분이었다면,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당과 유권자의 자유로운 소통과 공정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보조적 장치로서 존재해야 한다. 정치자금의 모금 및 지출에 관한 투명한 정보공개원리를 토대를 두어 정치자금 규제를 하되, 정치활동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2. 정당(정치인)-유권자 정치활동에 대한 자의적 규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58조와 제59조, 제254조 및 제93조의 1항은 폐지하고, 이들 조항이 없는 선거법을 재구성해야 한다. 아무리 예외규정들을 길게 늘어놓아도, 후보자와 유권자의 정치활동을 ‘선거운동인 것과 아닌 것’으로 나누고 기간제한을 두는 체제의 근간이 유지되는 한, 정당(후보자)-유권자 관계는 정상화되기 어렵다.
언제든 선거에서 당선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인의 입장에서 일상의 모든 시기 정치활동은 ‘당선되기 위한 활동’일 수밖에 없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유권자의 정치선호는 정당 및 정치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정치인의 말과 행위에 동의하고 비판하면서 지지정당과 투표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민주주의 정치과정이다. 그런데 ‘당선되기 위한’후보자의 활동과, 대상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반대를 정해진 시기에만 할 수 있도록 한 선거법 체제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권위주의의 유산이다.
정당과 후보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이 보장되어야 유권자들에게 충분한 정치정보가 제공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정치참여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후보자와 유권자가 서로에 대한 정치활동을 할 때마다 기간과 방식과 정치언어에 대해 유권해석을 얻어야 하는 현행 체제는, 서로 간의 정치소통을 협애하게 만드는 핵심요인이다.
3. 정당을 통한 자유로운 소통을 보장하되, 정치적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정당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정치결사체가 될 수 있도록 보장받고, 그에 합당한 정치적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정당의 조직, 자금운영, 후보공천방식 등은 그 결사체 구성원들의 자율적 결정으로 운영하되, 최종적으로 선거에서 지지를 얻거나 잃음으로써 그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정당의 조직과 운영, 정책과 노선, 후보공천과 선거캠페인 방식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것들을 성문화된 법으로 규제하는 현행 체제는 유권자와 소통할 수 없는 무능한 정당(정치인)을 만들어낸다. 어떤 조직과 정책노선을 택하든, 어떤 선거운동 방식을 택하든 자유롭게 하되, 일상적으로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게 만듦으로서 정치적 생존을 모색하게 만들고 정치적으로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집단적 주체로서 정당의 정치자금 모금은 허용되어야 한다. 단 거대이익에 포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별주체나 단체로부터 받는 모금액의 상한을 정하고, 모금과 지출정보를 모두 공개하게 만들어 유권자가 그 정당의 정체성을 판단하는데 정보로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선거공영제는 현 수준에서 더 이상 확대하지 말아야 하며, 이름 없는 세금이 아니라 이름 있는 유권자의 정치자금 모금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자금이 소통과 책임을 강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정당은 미래 정치엘리트들을 위한 정치학교다. 스스로의 당내 선거도 관리하지 못하는 정당이 민주주의와 국가를 운영하기는 어렵다. 정당의 당내 선거까지 선관위의 공적 인력과 자금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무능한 정당을 만드는 대표적 사례다. 문제가 생기면 정당 구성원들이 해결하게 해야 하고, 정당 스스로 내부의 결정절차를 만들고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 자체로 유권자의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선출직·임명직 공직자가 될 새로운 정치엘리트를 충원하는 핵심경로다. 정당의 공직후보 선출은 그 정당이 표방하는 이념, 정책과 사회적 대표성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국민참여경선을 하든, 당내 경선을 하든, 전략공천을 하든 그것은 자발적으로 결사한 그 정치집단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세운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되거나 낙선함으로써 평가받으면 된다. 한국의 모든 정치집단이 동일한 방식으로 공직후보를 선출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다양한 대표성을 구현함으로써 유권자와 소통해야 하는 정당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된다.
정당은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자발적인 정치결사체다. 누가, 어떤 이념과 정책으로 집권기획을 갖느냐에 따라 조직노선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다른 게 정상이다. 조직으로서 지구당을 두든, 시·도당만 두든, 중앙당만 두든 그것은 그 구성원들이 결정할 문제다. 그 정당의 집권기획에 정책연구소가 얼마만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지, 각 지역조직의 구성과 운영이 또 어떤 지위를 갖는지 역시 그 집단이 판단할 문제다. 그 집단의 집권기획이 잘못되었다면 유권자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고, 정당은 실패를 평가하면서 다른 정책과 조직, 재정노선을 수립하게 될 것이다. 혹은 해산하게 될 수도 있다.
정치자금은 국가재정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당내선거는 선관위에 위탁하며, 정책은 전문가나 시민단체가 대신 생산해주고, 선거캠페인 전략은 법원과 선관위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며, 후보공천방식까지 외부전문가들이 결정해주는 정당을 가진 나라에서, 능력 있는 정당과 정치인을 길러내기란 어렵다. 자율과 그에 따르는 책임 원리 하에서 정당과 정치인이 경쟁적으로 훈련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가능한 한 많은 정치집단들이 유권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만들고, 유권자는 표와 정치자금으로 실질적인 포상과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4. 후보자와 유권자가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해당 선거에서 후보가 확정된 후 유권자가 후보와 그의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 기간을 정하는 문제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겠지만, 현행 대통령 선거 24일, 국회의원 선거와 각급 지방선거 13일은 후보자 입장에서도, 유권자 입장에서도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유권자는 미디어를 통해 가공된 간헐적 2차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유권자가 후보와 정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정당과 후보가 직접 생산하고 전달하는 1차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1차 정보란 정당과 후보자가 생산한 정보를 후보자 및 선거운동원과의 대면접촉, 전화, 우편, 인터넷 등을 통해 직접 유권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를 말한다. 19대 총선의 경우 유권자의 39.3%만이 1차 정보를 제공받았고, 그 중 문자메시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데 이런 환경은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1인 2표제를 시행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지역선거구 후보의 등록은 선거일 69일 전까지, 정당명부 후보의 등록은 선거일 79일 전까지 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의 한 지역선거구당 유권자수가 우리보다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는 국회의원선거의 경우 최소 50일 정도는 보장하는 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후보등록을 완료한 후 50일 정도의 선거운동 기간을 갖는 것이다. 선거운동기간은 선거구의 크기를 고려하여 후보자와 유권자가 최소한의 1차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을 기준으로 삼고, 각급 지방선거의 선거운동기간도 선거구 크기에 따라 기간을 정해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구보다 선거구가 큰 광역자치단체장장 선거운동기간은 더 길게 하고, 더 좁은 기초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회 선거운동기간은 50일 기준 더 짧게 책정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때 선거운동기간이란, 지금처럼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아니라, 후보자와 유권자가 해당 선거의 의제와 정책정보를 집중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행 지방 동시선거는 분리되어야 한다. 의제와 정책의 범위와 성격을 고려한다면 광역자치단체장과 광역의회,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회, 교육감선거를 각각 분리·실시하는 안을 고려할 수 있다. 현재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있다는 비판들도, 지방정부 단위별로 필요한 정책의제가 소통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과 선거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일정한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선거비용 지출상한 범위에서 후보자는 자유롭게 정치활동 방식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에 정당 및 후보자가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은 선거법을 통한 선험적 규제나 선관위의 유권해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매체환경이나 여론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표와 정치자금을 구하는 정당과 후보가 찾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후보자의 정치활동을 정치자금 지출이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일일이 규제하고 있는 현행 선거법은 접근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총괄적 수준에서 정치자금의 모금과 지출을 규제하되, 지출상한액 범위 안에서 어떤 정치활동을 택할 것인가는 후보자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예컨대 대통령선거 선거운동과 기초의회 선거운동에서 동일한 방법이 같은 효과를 낼 수는 없다. 전국선거구를 대상으로 하는 대통령선거에서는 미디어 활용전략이 효과적일 수 있겠지만, 기초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회 선거에서는 대면선거운동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또한 선거구의 조건에 따라 홍보매체는 현수막이 효과적일 수도 있고 명함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선거구 범위는 넓고 유권자 밀집도는 낮은 선거구와 그 반대인 지역에서 동일한 캠페인 방식을 사용하라는 규제는, 후보자의 정치활동 자유를 가로막고 후보자-유권자의 원활한 정보소통을 제약하는 것이다. 후보자가 해당선거와 선거구 조건을 고려해 더 많은 유권자를 만나고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다양한 정치활동 방식을 개발하면, 유권자는 더 많은 정보를 얻고 더 필요한 정보를 가질 수 있다.
6. 매체기반 정치활동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
현행 선거 관련 정치활동 규제는 선거기사, 선거방송, 인터넷보도, SNS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매체기반 규제기구와 규제기준을 만들고, 오프라인 선거부정감시단, 사이버선거부정감시단 등을 운영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런데 공직선거법 제58조와 제59조를 폐지하고 각종 선거 관련 정치활동 규제를 최소화하면 이런 형태의 사회적 비용도 최소화할 수 있다.
현행 선거법은‘선거운동인 정치활동’을 선거운동기간 외에 진행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상설기구를 설치·운영해 왔는데, ‘당선되거나 당선되게 하거나 당선되지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을 일상적으로 허용하면 이런 형태의 상설기구를 운용할 필요가 줄어든다. 또한 정해진 예산범위 내에서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게 되면 선거운동 기간 가능한 정치활동과 그렇지 않은 정치활동을 감독하기 위한 인력과 예산도 줄어들 수 있다. 예컨대 명함을 돌리는 선거운동원이 후보자로부터 몇 미터 떨어져 있는가, 정해진 사람 이외에 어깨띠를 착용했는가 아닌가 등을 감시하는데 대규모의 인력과 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선거 관련 정치활동이 타인의 명예훼손을 하거나, 모욕 및 비방행위를 하는가를 감독하는 것인데, 이는 일반 사법체계에서도 규제가 가능한 문제다. 선거운동기간에 적용되는 명예훼손죄와 그렇지 않은 기간에 적용되는 명예훼손죄의 기준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에 문제가 있다면 일상시기에 언론보도의 위법성을 규제하는 기관에서 담당하고, 인터넷 상의 기사나 댓글이 문제가 되면 역시 일상기관에서 담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활동 규제는 가능한 한 기준이 단순해서 모든 정치인과 후보자가 쉽게 인지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특정 매체 유형별 기준을 각각 만들 필요가 없이, 일반적 기준을 설정하고 후보자와 유권자의 정치활동이 어떤 매체와 방식을 통하든 그 일반원리를 위배하지 않으면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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