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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칭응 부주석 6가지 제시-
13억 중국을 이끌 엘리트의 덕목은? 1통찰력, ~6
그 첫 번째로 중요시하게 지적한 것이 통찰력이다, 나머지 5가지는 곁가지로 모두 통찰력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다,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은 가장 쉬운 것이다, 철학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게 하므로- > 지혜에 다가서고- < 행동하게 하므로-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알고-< 행동하게 하므로- > 지식과 지혜의 균형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는 철학->만이 진정한 철학인 것이다,
(1)철학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철학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통찰하는 가치이다, 이것은 언어이고 사고이며 행위이다, 철학은 문학의 정수인 시-이며 예술이고 명상이며 정치이며 또한 종교이다, 철학은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우리의 삶에-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핵심으로 압축시키는 힘도 철학이다,
이 같이 기본정신을 뿌리에서부터 나무와 잎의 가치를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균형을 추구하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언어란 시대의 현상과 물질과 정신을- 표현하게 하고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이 같은 정신의 구조적 현상을 한마디로 압축 할 때- 철학보다 적절한 단어는 없다,
우리나라는 같은 내용에 비슷한 표현 방법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언어 문화와 지식의 혼란을 가져와 철학적 성찰의 뿌리가 내리기 힘든 것을 의미한다, 경제는 발전하였지만- 정신은 그만큼 후퇴하고 있다, 때문에 나라는 소모적 현상으로 한계에 봉착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심각한 딜레마 현상이다, 보다 발전의 균형을 추구하는 철학적 교육이 아쉽다,
철학이란- 현상과 변화와 핵심을 통찰하는 힘이고 균형감각인 것이다
(2)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치를 매겨지게 하고, 인생의 길을 설정한다, 그리고 사회의 문화 전반의 핵심을 관장하는 문학과 예술, 정치, 언론, 종교, 과학 등에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이것은 우리들 삶-의 실체를 휘어잡고 정신이 없도록 흔들어 대기도 한다,
요즈음- 요가나 파룬궁, 단 월드, 명상- 등 이와 같은 웰빙-적 문화의 종교적 색채를 띤- 단체 등에 정서적 문화적 가치를 체험하려고-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것도 과정에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결론은 마찬가지다, 나중에 보다 심층적으로 알 수 있다면- 이 같은 인간 문화의 모든 행태가 철학의 영역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쉽게 소통되는 언어의 균형적- 정신문화로 이해가 되기보다 일방적 종교 문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오해되다니,,,,, 여하튼- 현대 사회에서 정신적 불균형의 혼란으로 소화되지 못하는 문제로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자신의 성찰을 추구하기 위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직접 다가가고 느끼게 하는 것이-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기 전에 순서란 가치를 설정한다,
(3)체득한 경험이 만들어 내어야-
이들 학자와 전문가-그리고 종교인등 정신의 실체에 대한 심층적이고 핵심적인 견해는- 이들의 삶의 과정에 지식이나 역사의 기억을 눈으로 보고 알게 된 배움의 결정체이다,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전문가들도- 경험과 실체적 느낌이 없이 이루어지면 결국- 자기만이 아는 언어의 한정된- 모순 때문에 지도의 한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험으로 알게 되는 더 이상의 높은 차원의 완성을 알지 못하는 인간적 철학의 실체란- 언어상의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 가치의 현상을 자신도 모르는 채- 지식과 언어의 기계적이고 습관 된- 표피적 모순에 빠져, 말이 말에 이끌려 달리게 하고 비약의 논리로 이성을 덧칠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정신이란- 지식의 편중에 체득되는 지혜를 더하여 줌으로서 인간적 완성의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과 말과 행위가 일체가 되어 자신을 통찰하며- 경험으로 느껴야 설득력 있고 빠르게 인문학적 가치로 정립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겉도는 교육과 불신의 문화란- 필연적으로 껍데기를 추종하고 불신의 사회를 만든다,
평중된 지식교육의 이러한 후유증이란- 사회 발전의 현실적 요구와 멀어지게 하고, 매스미디어의 상업적 요구에 따라, 산만하고 편중된 껍데기 표현만이 정신에게 강요하게 된다, 사회가 정신문화로서 철학을 외면한 결과란- 사회 발전의 중요한 기능으로 발 돋음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문학적 계열의 맨 아래에 위치하지 않았는가?
뿌리는 잎을 설정하듯- 이 같은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4)근저에 깔린 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으로, 언어의 모순과 정신의 기본적 바탕에 깔리는 인식에 대하여 제대로 핵심을 헤아려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한 가지 가장 간단하면서 중요한 지표가 되는, 세계 철학의 대가인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로서 명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인간의 정신과 사고를 이해하고 관조하는 철학의 관점에서는 처음에 단추를 잘못 끼우면 이어짐이 잘못 되듯이- 처음부터, 지식, 스승, 책, 질서, 종교 등의 이미지 등이 사고에 먼저 개입되면, 선입견과 편견의 우위를 점한 가치 체계에 이끌리어, 처음에는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끝까지 가도 오답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것은 보다 깊은 정신적 차원으로 들어가서 심신의 일체를 추구해야 의미와 가치가 나오는- 문학의 시, 예술 종교 등을 관통하는 기본 정신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경험 없는 인문학적 지식이란 이해와 발전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발견 할 수 없듯이- 우리들이 배워서 아는 지식의 앎-이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진리란 세월이 흐른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다,
(5)철학은 분명한 것을 선택하게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한사람의 위대한 철학자가 한 문장으로 핵심을 압축하여 한 말이 변함없는 진리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게 하고, 정신적 가치의 현실을 헤아려 보게 하는- 마력이 있다니,,,,,그러나 아무리 나은 현대 문명과 정신문화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좋은 진리, 즉- 보다 나은 설득력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인간은 그래야 하는 가-에 대하여 처음에는 간단하게 알듯 하면서 생각이 길어-질수록 결론이 모호하게 되어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 언어란- 대화로서 소통은 되면서 정신의 깊은 곳에서는 일체가 되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의 현상은 과연 종이 한 장의 차이 인가?
마치- 밖을 볼 때 유리가 있는 것을 모르고 창밖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게 펼쳐지는 마술처럼- 우리가 모르는 그 이상의 무엇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인간의 사회 언어 문화적 양식의 가치를 간단한 그 한마디로 설정 하였는가-
인생을 자신도 모르는 소모성으로 버려야 하겠는가?,
(6)철학은 논쟁이 아니고 성찰이다,
이에 대한 반론이나 결론을 제시하고 싶다면- 대응을 하거나 수동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든 어떤 논리이든 논쟁을 불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입견과 편견의 기우이며, 소위- 100이라면 99에 언제나 1의 부족에서 이해되는 경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철학의 핵심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논쟁과 대립이란 매우 사치하고, 시간 소모적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팔 벌려 자신의 사고에 정수를 알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녹녹하지 않으며, 여러 번의 인식의 경험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아 가기에- 처음에는 그것이 모두 인 것 같지만, 비슷한 경험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여러 가지 형태, 예를 들면 지식을 통하여 배움이나 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또는 개인적으로 산에 들어가 깨달음을 위한 수양을 하거나, 명상이나 종교 등에 인도 되거나 하는 것 등은- 일시적인 의문에 대하여 간접적 도움은 되지만- 본질적 철학 정신의 핵심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러한 방법은 제자리를 맴돌아 지치게 하고 시간적 경제적 인간적 손실과 후유증을 동반하게 되는 것을 적지 않게 보았다, 그러한 경험은 일시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이어서 일상과는 반복적 간접 효과만 있을 뿐- 보다 비능률적이고 비효과적이기에 인생의 핵심 문제의 길에서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본질적 철학의 핵심으로 다가서야 한다,
(7)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걷어야-
배워서 익히거나 눈으로 보고 알게 되는 일반적인 앎- 그것은 수동적이며 기계적으로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과 지식의 체득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 받아 들여도 100의 99까지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풀리지 않는 비밀의 나머지 1의 숫자라는 것은- 중요한 삶의 길에서 혼자 서게 하지 못하고, 인생의 문제를 아리송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회자되는 간화선, 중국의 파룬궁이라든가- 인도의 위빳사나, 단- 월드, 명상, 참선, 등 등은 방법과 표현만이 다를 뿐- 자신의 자아를 찾는 범주에 들어간다, 이러한 종교의 문화적 종류는 어떻게 철학의 가치와 발전을 어떻게 막아 왔는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따라 가야만 할까?
이런 참선, 명상 등 기타 종교적 방법들은 간접적이고 일시적 효과를 보는 것처럼 중독되어- 사고의 발전을 기약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철학적 정신의 가치에 직접적인 효과란- 반드시 현실적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공염불이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포장되는 지식만을 머리에 요구하고 있기에- 여기에 맞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인식의 그릇은 스스로 청소하고 비워야 한다,
(8)길은 바로 들어가야 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본적 정신문화에 질서와 답이란 철학적 성찰을 배제한채 늘-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이렇다- 는 결론을 정하거나 한계를 정하여 줌으로서 창조적 앎을-시작하는 순서가 잘못 되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발전에 대한 적응력이란- 언제나 사고가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열려 있어야 조화로 협력하고, 자연스럽게 발전의 일체가 되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입적인 교육 체계와 인문학적 교육과 문화. 종교적 논리의 지식은- 후진국의 사회 발전적인 기능적 요구에는 일정 부문 기여 할 수 있지만- 사회 구조와 정신문화가 일류국가로 나아가야 할 철학적 관점에서는 방법상의 오류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 문화는 사회의 발전 과정에 결과적인 차이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처럼 사회 발전 과정에 종이 한 장의 차이처럼 치부 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인 자신의 정신문화를 알지 못하면 첫 단추를 잘못-끼워 놓고 균형 없이 결론을 향하여 가는 모순처럼, 끝임 없이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른 채 끌려가기 때문에, 개인은 물론-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밀하고 진지하게 추구해야 발전으로 간다,
(9)작은 변화가 핵심을 불러 온다,
정신발달에 대한 발전을 추구하려면 무한한 사고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깨달음을 터득하게 되고,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서 분별력이 명료하게 생성이 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인문학 분야에 족적을 남기는 대가들도 경험으로 체득한 결과론적 가치인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세계의 어느 곳이나 다양하게 추구한다, 그러나 왜 그리 찾아가기 어려운 방법으로 하는가- 그것은 언어의 모순이고 방법의 결함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리 자세한 설명을 해도-통하지 않는 비밀의 문인 것이다, 처음에는 얼핏- 머리에서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가슴의 일체로 받아주지 않는다.
한국에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삶과 정점의 철학, 배꼽의 오즈라즈니시의 이야기처럼, 현실 속에 마술처럼 하나의 트릭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글들이 언제나 99는 이해가 되지만 1이 부족하여 100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이 나머지 1이라는 비중은 상황 변화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최악의 상황을 설정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을 푸는 열쇠는 누구에게나 있다,
(10)철학의 실체는 간단하게 하는 것이다,
철학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와 설득력은 개략적인 것으로 한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직접적으로 체득한 자가 아니면, 가치란 없다고 밖에 볼 수 있다, 이것은 학문적, 종교적 전문가의 해석과 견해도 그들이 알고 배운 지식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핵심이란 거창하거나 난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간단한 한-문장의 말이외에 어떠한 고도의 지식과 멋진 이미지를 덧칠을 하더라도 결코- 철학적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이다, 우리가 철학에 대하여 가장 바르게 알아야할 문제는 많은 책이나 전문가 또는 종교가들의 설명과 논리들처럼 심층적으로 난해하고, 수동적인 지식에 얽매여 따라오게 하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에 맞는 이해처럼- 인식의 그릇에 맞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대한 대답은 나는 누구인가에 것이며, 그에 대답은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데카르트의 “나는 인식한다, 고로 존재 한다” 로 철학을 정리 한다, 따라서 철학이란-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가 되면서- 인간적 과정을 느끼고 결과에 대한 것이 무엇이든 자기 성찰의 발전이 되는 것이다,
철학에 대하여 멀리서 헤매지 말라-
(11) 왜-라는 의문이 철학이다,
이러한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철학의 명제를 가장 빠르고 쉬운 이해의 지름길로 유도하기 위하여-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미리 발설하여 철학적 성찰의 혼란을 초래하는 오해를 막기 위하여 개략적인 설명을 한 것이다, 철학에서 불-필요하게 어렵고 많은 추상적 언어란 결국- 우물 안의 답에서 흙탕물만 일으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고의 혼란이 뭐라고 하는지 알수 없다, 아무리 귀를 기우리고 철학의 명제를 풀려 해도 아까운 시간만 축낼 뿐이다, 따라서 철학에 핵심의 정수인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성인이나 현자들의 성찰로 한가지 화두 이외에 집착 할 것이 없다, 따라서 그 어떤 설명과 설득력도 배척해야 하고 행위로서 알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다시금 말하고 싶은 것은 간접적인 방법은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또한 철학을 연역적이니 귀납적 방법이니 하는 것 등으로- 자신도 모르는 삼천리로 끌려 다니며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가치를 평가하는 반응- 즉“나는 누구인가” 란 화두가 철학의 핵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주의하라! 위대한 시인들이 지식으로 배워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 어떠한 위대한 철학자도 지식으로 배우지 않았다, 어떠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종교와 종교의 신도 하나의 이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진실로- 나는 누구이며 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외형적인 것을 믿고- 맹목적인 편견과 선입견과 그에 따른 설명에 집착하지 않는가,
인간적 성찰에 눈을 뜨고 깨달아- 진리를 바로 알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