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60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 모색

2013. 7. 29. 11:09정치, 정책/통일, 평화, 세계화

정전 60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 모색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  |  webmaster@selfg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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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28  11: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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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정전체제는 정전협정에 의해 법률적으로 담보되는 체제이다.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라는 경계표시와 완충지대,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단이라는 감독기구로 구성되며 그리고 정전상태 유지, 신무기 반입금지, 평화협정 체결, 외국군 철수,포로송환 등의 조치를 통해서 유지된다.

정전(truce)협정은 교전 당사국이 합의하여 적대행위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휴전협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유엔 기관의 중재에 의해 분쟁이 중지될 경우를 관행적으로 정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 정전체제는 91년에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되는 것을 북한이 거부한 것을 계기로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정전협정이 전쟁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행위의 계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문에는 평화정착을 위한 안전핀이 마련되어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안전핀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평화가 위협받아 왔다.

평화체제란 평화협정에 의해서 법률적으로 담보되는 체제이다. 평화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분계선과 완충지대, 감독기구가 필요하며, 평화체제의 유지를 위한 군비억제와 군축, 외국군 철수나 역할의 재조정과 평화유지를 위한 장치 확보 등의 역할이 필요하다.

평화협정은 전쟁을 실질적으로 종료시키는 법률적인 행위로서 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명칭에 상관없이 국제법적으로 평화조약의 효력을 지닌다. 한반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현재의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는 평화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감독기구에 의해서 관장될 것이다.

이글에서는 주어진 제목과 같이 ‘정전 60년’을 살펴보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정전 60년에 대한 진단은 정전체제의 불완전성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래야만이 모색을 위한 필요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색’을 위해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북미관계와 미국의 대북정책을 중요하게 살필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서 진행하고 있는 NLL논란 역시 정전체제의 산물이므로 현실진단의 대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DMZ 국제평화공원은 실현가능성에 대한 논란보다는 미국과 북한이 근본문제를 가지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출구로서 위상을 부여해볼 것이다.

이 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모색’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남북대화의 필요성, 한국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평화체제와 비핵화의 복합적 추진,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6자회담 병행추진이라는 4가지 방향을 살펴볼 것이다.


2. 과거 - 정전협정의 불완전성

1) 정전체제 불완전성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뒤부터 정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의제는 당연히 군사분계선을 확정하는 것이다. 당시 유엔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반도 주변수역과 공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는 경계선을 만들 기준인 유엔군과 공산세력의 군사력이 만나는 접촉선(line of contact)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영해설정과 관련해서 유엔군측은 3해리를 주장했고 북측은 12해리를 주장했는데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당시 워싱턴은 정전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당면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엔군측은 상대방이 본래 통제하던 후방의 도서로 철수하고 특별히 합의된 도서로부터도 모든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를 근거로 유엔군은 서해에서는 압록강 하구로부터, 동해에서는 나진 연해로부터 상대방의 지상구역을 봉쇄하지 않는 선까지 전면 철수하였다. 유엔군이 서해에서 철수하면서 서해 5도를 제외하고 점령도서들을 모두 북한에 양보하였다. 한국전쟁 이전에 한국의 관할 아래 있던 섬들조차 휴전 당시 북한이 점령한 황해도 남북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에 북측에 양보했다.

이런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에서는 서해 섬들에 대한 관할권만을 명시하였지 해상 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았다.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해상에 대해서는 교전 쌍방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둘째, 유엔은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휴전을 유지하기 위한 적대행위의 중단과 재발, 그리고 유엔군의 안전에만 주력하였고, 셋째, 한국전쟁 당시 해양은 유엔군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공산측은 바다나 섬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를 피하였던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아울러 정전협정 4조 60항에서는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정전협정 조인 후 3개월 이내에 ‘한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기로 명시하고 있다.

서해에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못했지만 정전협정 조인 3개월 이내에 한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해서 미확정된 해상분계선을 설정하는 것이 정전협정에 담긴 취지이다. 그런데 1954년 제네바에서 한차례의 정치회담이 소집된 이래 단 한 차례도 추가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정전체제의 불완전성은 정전협정으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급 높은 정치회담’이 열리지 못했기 때문에 정전협정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탱하는 버거운 역할을 지난 60년간 해왔던 것이다.

2) 안전장치 제거된 정전협정

1957년 6월 21일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담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리젠버그 미해병소장은 “정전 이래 공산측의 계속적인 휴전협정 위반으로 유엔군은 정전협정의 일부조항인 제13조 d항을 더이상 준수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또 무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남한에 있는 노후무기를 대체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정전협정 체결이후 미국의 지상군 병력의 일부가 한반도에서 철수되는 등 남쪽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반면에 북한은 군비증강을 계속하여 군사력의 불균형이 심해졌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전협정 13조 d항은 [한국 국경 밖으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륜, 무기 및 탄약의 반입을 정지한다]고 되어있다. 13조 d항은 신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조항이므로 정전체제를 유지하는 핵심으로써, 정전체제 아래서 평화를 보장하는 안전핀과도 같은 조항이다.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의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새로운 무기가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감시하고 검증하기 위하여 중립국 감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몇 년간 이 위원회는 남북한에서 실질적으로 무기가 반입되는지를 검사하였다. 이 기간에는 한반도에 핵무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위원회가 무기반입을 검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7년 6월 이후 정전협정의 신무기반입금지조항은 무시되어 버린다. 1958년 1월 28 유엔 사령부는 미국의 280미리 핵포탄과 어네스트 존 핵미사일이 한국에 도착한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전략으로 명시적으로 채택한 것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취한 대량보복전략이 처음이었다. 소련의 경제적 정치적 성장, 중국혁명의 승리,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의 공고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프리카에서 민족운동의 고양 등으로 말미암아 소련의 힘과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트루만의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핵무기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대량보복 전략을 채택한다. 대량보복전략은 [적의 침략에는 대량보복의 응징이 따른다는 사실을 인식시킴으로서 전쟁을 억지한다]는 이론이다. 즉 소련의 지상군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대량보복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소련이 핵공격을 해올 경우는 물론이고 재래식 군사력으로 공격해 올 경우에도 미국은 미국이 선택한 장소 즉 소련 본토의 인구가 집중된 도시나 군사 및 산업시설에 대하여 핵공격을 감행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분쟁발생시에 소련에 대하여 핵을 선제 사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대량보복전략은 당시 소련의 핵전쟁 수행능력이 미국에 비해 현저히 뒤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에 1950년대 중반과 후반에 핵무기가 배치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핵배치에 관한 미국의 정책은 원래는 어떤 지역에 얼마만큼 배치했는지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비밀을 유지하고 그런 가운데 핵의 배치와 증강을 자유로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공의 함락으로 세계에 대한 미국지배력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심리적 정치적 지도력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이 아시아의 주요지역에 엄청난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이를 사용할 결정권을 갖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75년 5월 슐레진져 국방장관이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경우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더 많은 지상군을 투입한다고 발언한 사실이다. 이 발언은 미국이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확인한 공식발언이다.

1957년경에 한국에 배치된 것으로 알려진 핵무기는 1991년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전술핵폐기선언으로 완전히 철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협정의 신무기 반입금지조항이 사문화되고 한반도에 핵무기가 배치되었으며 이후 한반도는 지속적으로 군비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3)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

1990년대 북한은 미국과 핵협상을 목적으로 ‘정전체제 흔들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정전협정을 차근차근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정전협정은 △기구, △선과 구역,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협정을 관리하는 기구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이다. 선과 구역이란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이다. 규칙이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전협정에서 명시하고 있는 각종 조항들이다.

1990년대에 북한의 정전협정 흔들기는 먼저 ‘기구’를 무력화하는데서 시작했다. 북한은 먼저 군사정전위원회를 부정하고 1994년 5월에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했다. 1995년까지 중립국감독위원회를 철수시키는 등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전협력을 무력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다음단계로 ‘선’과 ‘구역’을 부정했다. 1996년 4월 4일에는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에 의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및 관리와 관련한 임무를 포기하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비무장지대(DMZ)를 출입하는 인원과 차량의 식별표지를 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DMZ 불인정’을 선언했다. 이후 1996년 4월 5일부터 7일 사이에는 무장병력 총 470여명을 판문점 지역에 투입하여 무력시위를 했다. 정전협정의 ‘규칙’을 무시한 것이다.

북한이 2013년 한반도 위기고조시에 정전체제 백지화를 선언한 것은 이러한 90년대 정전체제 흔들기의 재판이다. 북한은 이미 그들이 만든 판문점 대표부의 기능을 중지시켰다. 90년대처럼 먼저 ‘기구’를 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90년대처럼 정전을 유지하는 ‘선’(군사분계선)과 ‘영역’(비무장지대)를 부정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무시하는 도발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정전협정은 한국전쟁이 종료되지 않는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장치이다. 정전협정을 백지화한다는 것은 안전핀을 뽑아내고 규칙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전협정의 백지화는 전시상태로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3. 현실 –오바마의 2가지 트라우마와 NLL 논란

1) 트라우마 1 –핵없는 세계와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2009.4)

북핵문제가 발생한 이후 20여년 동안 북한은 NPT 탈퇴(1993.4.13), 4차례의 장거리로켓 발사(1998.8.31, 2009.4.5, 2012.4.12, 2012.12.12), 1차례의 중단거리 미사일발사(2006.7.5), 3차례의 핵실험 (2006.10.9, 2009.5, 2013.2.12) 등 수차례의 위기 고조 조치를 취하였다.

오바마 행정부 이전의 수차례의 위기고조 조치는 발생요인과 해결방안이 모두 비슷하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핵문제 해결과정에서 의견 대립이 생길 경우 상황돌파를 위해 북한이 선제적으로 조치를 취하였다. 해결방안으로서 NPT 탈퇴는 94년 제네바 합의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광명성 1호 발사 이후 페리 방북, 미사일 회담, 조명록 방미, 울브라이트 방북, 북미공동선언 발표 등으로 위기를 완화시켰다.

2006년 핵실험 이후에는 북미직접대화를 시작하여 이후 4개월 만에 2.13합의로 이어졌다. 이 사례들은 냉각기를 거친 이후 어떻게 북미관계가 재정립 되는가를 보여주는 패턴이었다. 북미 직접대화를 시작하여 합의문 채택으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 이후 이런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 북한은 오바마 정부 취임 직후인 2009년 4월에 장거리로켓을 발사하였다. 이날은 오바마 대통령이 체코 프라하에서 ‘핵없는 세계’에 대한 구상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오바마 정부는 북한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고 판단했다. 이후 오바마 정부는 북한과 대화를 중단하고 이명박 정부와 함께 기나긴 ‘기다리기’에 들어갔다.

오바마 대통령이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북한에 대해 사실상 무시정책을 펼친 것은 프라하 연설 직적에 북한이 감행한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북한은 로켓 발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오바마의 프라하 연설을 D-Day로 잡았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오바마의 가슴속 깊이 북한이 오바마 정부를 테스트한다고 새겨졌다. 오바마의 북한에 대한 불쾌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불쾌감이 북한에 대한 불신을 낳고 오바마 정부의 소극적 대북정책으로 이어졌다.

그 사이에 북한은 핵능력을 강화했다. 2010년 12월에는 북한은 미국과 협상이 지리멸멸한 시점을 틈타서 핵무기 보유와 우라늄 농축을 공표하였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미국의 협상에 대한 무관심이 한계에 달할 때에 맞춰서 위기를 조성해온 것이다.

2) 트라우마 2 - 북미 2.29 합의

오바마 정부가 연평도 포격이라는 북한의 나쁜 행동에도 불구하고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남북대화를 촉구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의 전략을 ‘도발→ 대화 → 경제지원 요구’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청와대는 북한의 연평도 도발 이후 대화를 재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북미대화를 추구한다. 한국등 동맹국과 관계 증진을 중요한 외교과제로 삼고 있었던 오바마 정부가 대화에 대한 한국정부의 소극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대화로 선회한 것은 그만큼 미국 내부의 절실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2010년 8월에 힐러리 장관이 제재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재검토 하는 전문가 검토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정책전환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는 2010년 하반기부터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일부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2011년부터는 게이츠 국방장관이나 주한미군사령관 등은 북한의 위협에 대해 부쩍 강조하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 주석에게 “북한의 잠재적 공격으로부터 ‘미국의 국토’(American soil)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우라늄 농축시설, 플루노늄 핵폭탄 생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세 가지 위협으로 꼽았다. 오바마 정부은 과거와 달리 북한의 위협을 분명 상향 평가했다.

핵무기는 통상 ‘플루토늄 재처리/우라늄 농축 → 실험 → 무기화 → 실전배치’의 단계를 거쳐서 무기화된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에 시작한 북한 핵무기에 대한 논란은 플루토늄 재처리의 단계에 대한 논쟁이었다. 2000년대에는 논란이 ‘우라늄 농축과 실험’으로 확장되었다. 오바마 대통령, 게이츠 국방장관, 윌터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은 이제 북한 핵능력의 ‘무기화’ 단계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상향평가하고 대화로 전환한 이유이다.

이후 로버트 킹 미국 대북 인권대사가 2011년 5월말에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의 존 브라우스 부국장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인도지원 방법에 대해 협상한다. 그리고 그해 8월, 10월, 12월 세차례에 걸쳐서 비빌접촉을 가진다. 김정일 위원장 서거 하루 전인 2011년 12월 16일에 킹 인권대사 이근 북한 외무성의 미주국장은 북미 대화 재개에 합의했다. 그리고 2012년에 2.29 합의에 도달한다. 북한 위협에 대해 재평가가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대북 대화를 회피하던 오바마 정부로 하여금 대북협상에 나서게 만들었다.

문제는 2.29 합의 발표 보름만에 북한이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약속위반이라면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북한의 위성발사를 사실상 미사일로 간주하면서 2.29 합의에 따른 북한에 대한 영양지원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2.29 합의 직후에 위성발사를 선포함으로써 2.29합의에 대한 의문이 늘어났다. 북한이 2011년 8월부터 북미대화를 할 때마다 위성발사계획을 미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그때마다 위성발사는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미 사이에 ‘위성발사’에 대한 의견의 접근 없이 어떻게 2.29 합의가 가능했을까? 2.29 합의는 북한의 위성발사를 두 달도 채 안남겨 둔 시점에서 발표되었다. 그런데도 2.29 합의에는 위성발사에 대한 언급이 없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지’만 명시되어 있다. 위성발사에 대한 명료한 합의없이 2.29 합의를 발표한 것은 북미 양국이 대화의 모멘텀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성발사계획 발표 이후 북한은 미사일과 위성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주장은 미사일 발사중지에는 위성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명료한 합의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자기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한 해석만 가지고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2.29 합의 이후 북한이 위성발사를 선포하고 4월에 위성발사를 강행하여 미국 의회와 미국 여론은 북한을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여기며 지금까지 북미대화를 강력히 반대하는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3) 미국의 대북 정책 - 도닐런 4원칙

2013년 3월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연이어서 대북정책 원칙을 밝혔다. 3월 7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나선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다섯가지 대북 정책의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둘째 미국은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하지 않을 것이며, 셋째 미국은 북한이 단순히 대화에 복귀하는 것에 보상하지 않을 것이며, 넷째 남북관계와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북한과의 근본적인 관계개선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다섯째 북한이 주변국을 도발할 경우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13년 3월 아시아소사이어티 연설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에 4가지 원칙이 있다고 밝혔다. △한미일 3국협력과 미중공조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나쁜 행동에 보상 금지 △ 북한의 핵무기, 핵물질 수출시 적극 대응 △ 북한이 의미 있는 행동을 하면 북한과 협상을 시작하고 북한의 경제개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의 핵 보유를 수용할 수도 없고 핵미사일 개발을 방관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입장에 따른 것이다.

도닐런과 데이비스가 밝힌 대북원칙은 2012년 2.29 합의가 무산된 이후 미국내부의 대북강경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근본문제를 내걸고 충돌하는 상황에서 두 나라가 협상테이블이 앉는 것은 쉽지 않다. 존 케리는 의회를 설득하고 북한과 대화를 시도할 할 수단으로 중국의 중재를 택했다. 그는 중국방문 이후 미국 의회청문회에서 북한핵에 대해 “중국도 미국과 협조할 의지를 내비쳤다”고 밝혔다.

여기서 한국의 역할이 필요하다. 한국이 미국 중국과 협력하고 남북접촉을 시도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의 전환을 부드럽게 유도할 수 있다. 여기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미국과 중국의 협조속에서 남북관계를 주도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4) NLL 논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서해의 해상분계선이 없다. 정전협정에서는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못한 것이다.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서해에 북방한계선(NLL)을 선포했다. 북방한계선은 서해에 해상분계선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의 통제아래 있는 배들의 북상을 가로막는 선이었다.

1953년에 클라크 유엔사령관이 NLL을 선포한 작전명령서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클라크 사령관의 NLL 선포를 확인하는 문서인 '해군본부 작전기밀 제1235호'(3급 비밀)도 폐기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전협정에서 서해 해상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NLL은 실질적 분계선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약속대로 앞으로 남과 북이 해상분계선을 합의하기 이전까지는 NLL이 해상분계선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이 지난 7월 10일 NLL을 무력화시키는데 악용될 수도 있는 성명을 냈다.

국가정보원의 성명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주장하는 공동어로구역에 동의를 해줬다는 것이다. NLL과 북한이 1999년 9월 2일에 선포한 해상군사경계선 사이가 이때 합의한 공동어로구역이라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이를 설명하는 지도까지 성명에 첨부했다.

국정원이 이런 성명을 발표한 바로 다음날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으로 본 북방한계선(NLL)’ 이라는 자료집을 배포하였다. 정문헌 의원이 배포한 자료집에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NLL과 북한의 주장해온 해상군사분계선 사이에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NLL포기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문헌 의원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북한은 2006년부터 ‘새 경계선’을 주장해왔고, 이를 나중에 ‘경비계선’이라 불렀다. 2007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말한 군사경계선이란 이 경비계선을 말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이 경비계선을 중심으로 하는 경계선 변경 주장을 요구했지만 ‘평화협력지대’라는 큰 틀로 설득하였다. 결국 NLL의 변경이 없는 상태에서 ‘서해평화협력지대’를 합의해냈던 것이다.

정전협정에 해상분계선이 없고, 클라크 사령관이 NLL을 선포한 작전명령서도 없는 상태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서 NLL을 지키고, NLL을 기준으로 등면적의 남북공동어로구역을 북한에 제기했다. 그런데 국정원과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노태통령이 NLL을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문서를 유포한 것이다. 그들은 행위는 2012년 대선에서 자행했던 국정원의 선거부정과 정문헌 의원의 NLL 허위사실 유포가 논란이 되자 이를 물타기 하려는 것이다. 국가기관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는 허위사실을 담은 지도를 공개하고, 이 지도에 북한의 해상군사분계선을 인정한 것처럼 표시해버렸다.

만약 국제사법재판소에서 NLL에 대해 판결하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국가기관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배포한 지도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NLL을 선포한 작전명령서도 없고, 이를 접수한 한국해군의 문서도 없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 NLL을 단순한 북방정찰한계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상태에서 국가기관과 집권당 국회의원이 정략적인 목적으로 전직 대통령이 포기했다는 문서를 배포해버린 것이다. 정략에는 맞을지언정 명백히 국가이익에 배치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4. 출구 - DMZ 국제평화공원

1) 평화체제 추진력으로서 ‘DMZ 국제평화공원’

평화체제 수립은 남북 당국의 통일정책에서 현안이 되는 문제이다. 통일된 민족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정전체제라는 현상을 변경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평화체제 수립에 대한 논의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그 동안 국내학계에서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대하여 정전협정의 성격과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 문제에 대하여 주로 법리적인 차원에서 논의를 집중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은연중에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를 실용적인 관점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진행시켜왔다. 그 결과는 당연히 남북 당국 가운데 어느 한편의 정당성과 주도성 문제로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었기에 정전체제를 변경시키고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현실적인 정책논의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체제의 정통성 경쟁과 선전차원에서 평화협정 논의를 진행할 경우 그렇지 않아도 민족 내적인 문제와 국제적인 문제가 얽히면서 복잡하기만 한 평화체제 수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 된다.

‘DMZ 국제평화공원’은 이러한 복잡한 성격을 지니는 평화체제 문제를 추진해나가는 동력을 생산하는 사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속에서 ‘DMZ 국제평화공원’이 현실성을 지닐 수 있다는 뜻이다. 평화체제를 추진해나가기 위한 추진력으로서 ‘DMZ 국제평화공원’의 위상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2) DMZ 평화적 이용의 접근법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남북의 긴장완화라는 정치적 의미 이외에도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이 일대에 평화적 차원에서 청정산업공단, 생태계 보전지역지정, 민족 생태공원, 물자교류센터, 세계평화를 위한 상징적 건물을 신축하자는 의견과 함께 야외음악 공연장 등을 조성하자는 수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어 왔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수난 속의 축복’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민족 분단이라는 수난의 산물이지만, 비무장지대를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지혜에 의해서 비무장지대는 민족의 축복이 될 것이다.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란 ‘군병력과 시설을 유지하지 아니할 의무를 지니는 지역’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북 사이에는 정전협정에 따라서 동서로 약 250km의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어 있다.

이 군사분계선에서 남과 북으로 각 2km 떨어진 선이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이며 북방한계선이다.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에 있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이다. 이 비무장지대는 한반도 전체의 약 0.5%에 해당한다. 실제로는 남방한계선은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북방한계선은 남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비무장지대의 폭은 4km가 되지 못하고 면적도 더 줄었다. 비무장지대의 전 지역에서 남북의 직선거리 4km가 유지되는 곳은 거의 없고 가장 가까운 곳은 700-800m에 불과하다.

비무장지대는 남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의 현주소이고 남북이 최신예무기를 동원하고 있다. 또한 백만 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대인지뢰가 떠내려 와서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경우를 해마다 보아왔다.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는 비무장지대가 결코 평화지대가 아님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신동엽 시인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 밤은’이라는 시에서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이라고 비무장지대를 노래했다. 그러나 현실의 비무장지대는 이미 ‘평화로운 논밭’이 아니다. 기관총, 박격포, 대인지뢰 등으로 중무장한 지역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대포가 쌓이면 터진다”는 서양속담과 같이 완충지역에서조차 중무장한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면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장지대는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존재’이면서도 ‘전쟁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지역’이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서는 비무장지대에서 군사역량을 철거할 것을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폭발물, 지뢰 등도 제거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에는 비무장지대의 실질적인 비무장화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에 대해서는 한국이 북한보다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북측 역시 명목상 비무장지대에서 모든 군사인원과 장비를 철수하고 군사시설물을 해체해서 민간인들에게 개방할 것을 주장해왔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사실 북한에게는 매력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비무장지대를 통한 남북 교류와 협력의 증대보다는 비무장지대라는 긴장지역의 존재가 위기관리에는 보다 효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 제12조에서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를 협의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남과 북은 이때 합의 이후에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합의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는 남북의 정치 군사적인 환경이 중요하다. 비무장지대는 적대 쌍방간에 우발적 혹은 의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을 막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설치된 완충지대이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말하기에 앞서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전히 남북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면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가 평화적 이용보다 앞서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당시보다도 오히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병력과 무기가 크게 증대하여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세계적인 군사력 밀집지역이 되어버린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비무장지대라는 강력한 무력대치로 정치 군사적인 격리기능, 완충기능을 담당해 오고 있는 것을 접촉과 교류의 기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남북관계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한편 시각을 달리해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군사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보다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군사적 대결이라는 현실 상황논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군사적 대결과 불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민간차원에서는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활용이라는 접근법이 군사대결을 완화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현실을 타개하는 적극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개발해서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된다면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완충지대가 되는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된다면 남측으로서는 북한의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막게 될 것이다. 북측으로서도 남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덜게 된다. 즉 평화적 이용은 비무장지대의 설치 목적인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무장지대의 설치 목적도 달성하고 또 평화적으로 이용하는데서 오는 여러 가지 기대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의 정부 당국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이 지니는 군사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5. 결론 : 모색

1) 대화가 있는 남북관계 - 박정희의 고등전략 복원

허브코헨에 따르면 “협상은 당신에게 무엇인가를 원하는 상대로부터 당신에 대한 호의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는 일”이다. 그것이 명성이든, 자유이든 아니면 돈이나 정의 또는 사랑, 사회적 지위, 신체적 안전 등 무엇이든 간에 누리고자 하는 온갖 것들을 협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저 피쉬와 윌리엄 유리는 “협상은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본적인 수단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협상이란 당신이 상대방과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상반된 이해관계에 처했을 대 합의를 보기 위해 밀고 당기는 대화이다”는 것이 YES를 이끌어내는 협상법 저자들의 정의인 것이다.

백학순은 그동안 남북사이의 대화와 협상이 성공하지 못한 요인들로는 △관련국들간의 불신, △북한의 국내정치적 특성과 요구, 취약성으로부터 초래된 행위들, △한미일3국의 정치체제의 특성과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재 등을 꼽고 있다. 백학순에 따르면 실패의 요인을 이러한 요인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협상’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허브코헨이나 로저 피쉬 같은 세계적인 협상이론가들에 따르면 우리는 협상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북한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백학순이 지적한 실패요인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협상 방법론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지 협상무용론이 대안이 아니다.

1970년 이전의 남북관계는 ‘대화없는 대결의 시대’였다. 1970년을 거치면서 ‘대화있는 대결’를 거쳐서 2000년에 들어와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제 남북관계는 197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냉전시기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은 북한과 대결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을 겁쟁이나 비겁한 행동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대화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1968년과 1969년은 1953년 한국전쟁 정전 이후 북한의 위협과 도발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였다. 1968년에는 북한의 124부대 소속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가 벌어졌다. 이틀뒤인 1월 23에는 북한해군함정이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불르호를 나포했다. 또 그해 10월에는 130여명의 무장 게릴라들이 울진 삼척을 침투했다. 1969년 4월에는 북한군이 미군 EC 121 정찰기 격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주도권을 잡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돌연 평화통일제안을 한다. 815 평화통일구상에는 “1995년까지 남북한이 서로 반공이니 반동이니 하는 소리하지 말고 서로 평화를 지키면서...”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청와대의 입장은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한에게 전쟁을 하지 말고 어느 체제가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가를 경쟁하자고 던져 주는 것이 전쟁억제를 위해 몇 십 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고등전략”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요지는 ‘긴장상태의 완화를 거쳐 평화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통일 이전에 긴장완화, 전쟁방지, 평화정착 등의 중간단계 설정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으로서 이후 역대 한국정부 통일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대북협상을 준비하였다. 대북협상은 남북한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에 따라서 1971년에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였다. 북한이 수락하여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대화 재개 되었다.

남북 적십자회담을 거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선 인도주의 회담 → 후 남북당국자 회담’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대화의 패턴은 이미 박정희 시절 그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존심 경쟁이 아닌 ‘고등전략’을 사용하기 위해 남북대화를 시작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박정희가 구상한 대북 고등전략은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꽃을 피웠다. 박근혜 시대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고등전략을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북미 당사자론의 허점과 한국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평화협정 체결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당사자 문제이다. 당사자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은 74년부터 북미당사자를 주장하고 있고, 남한 정부는 실질적인 남북 당사자를 주장해왔다. 평화협정 논의과정에서 제기되는 북미 당사자론의 논거는 대략 1)정전협정의 서명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체결해야 한다, 2)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할 일이 있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 할 일이 있으므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남북 기본합의서의 불가침조항을 이행하면 된다, 3)남북은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므로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 4) 남한 정부는 작전통제권이 없으므로 평화협정 체결의 능력이 없다.

하지만 북미 당사자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제적인 사례를 보더라도 정전협정의 당사자와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전협정의 당사자 문제를 따지면 미국이 당사자가 아니라 유엔이 당사자라는 복잡한 법리논쟁에 휘말릴 수 있다.

둘째, 정전협정 제60조에 명시된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한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기 위한 회담에 미국뿐만 아니라 남한정부도 참가하였다. 53년 10월의 판문점 회담에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 국가가 참가하였다. 정전협정 제 60조에 근거한 정치회의인 제네바 회담에도 남한은 참가한다.

정전협정 당사자에 대한 해석에서 평화협정 당사자를 찾으려는 그동안의 시도는 정전협정 60조와 이에 근거하여 열린 1953년의 판문점 예비회담과 1954년의 제네바회담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 보더라도 실천적인 논쟁이 아닌 것이다. 정전협정 60조에는 '관련 당사국'이 정치회담의 주체라고 명기하고 있다. 이에 따라 판문점 예비회담에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이 참가했고, 제네바 회담에는 남한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제외한 한국전쟁 참전15개국 그리고 북한, 중국, 소련 등 19개국이 참가했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경험을 무시한 채 진행된 평화협정 당사자 논란은 정치공세 차원에서 유용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진전시키지는 못한다.

셋째, 74년 이전에 북한은 남한을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인정하고 남북 평화협정을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 합의서도 국제법적으로 조약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국회비준을 촉구하였다. 국제법적으로 조약의 성격을 지니는 남북 합의서를 채택하고 이행한다고 그것이 두 개의 국가로 고착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남한이 평화협정에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이 남북한을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전협정에 남한이 서명하지 않은 것은 남북한이 협정을 체결해서는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남한 정부가 정전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남한 정부도 90년대에 4자회담을 통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하였으므로 평화협정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여섯째, 남한 정부도 전쟁 참전국가이고 70만의 대군을 보유하면서 남북군사대치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평시작전통제권을 반환받았고, 비무장지대 일대에서 빈번하게 북한과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정부를 제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

일곱째, 남한정부를 제외한 북미 평화협정은 현실적 가능성이 없다. 남한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평화회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북미 당사자론은 설득력이 약하다. 북한은 74년부터 북미 당사자를 주장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김영삼정부 시절부터 실질적인 남북 당사자를 기초로 하여 4자회담, 4개국포럼에서 논의 등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10.4 선언의 공통점은 남북미중 4자가 평화체제를 협의한 다는 것이므로 이를 존중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4자가 평화체제를 협의할 경우 그 틀속에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진행되는 이원적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4자회담의 틀속에서 남북한과 북미 사이에 신뢰를 구축하는 절차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4자 회담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사안이다.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4자회담 운영을 이원화해서 기존에 북미 사이에서 진행된 양자회담을 4자회담 틀속으로 끌어들이고, 남북회담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 5조에서 명시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 남북기본합의서 제2장에서 약속한 불가침문제, 10.4 선언에서 약속한 평화체제 문제 등 남북 사이에 군사적인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평화체제를 추진해나가기 위한 추진력으로서 ‘DMZ 국제평화공원’의 위상을 설정할 수 있다.

3) 한반도 평화체제와 비핵화 복합적 병행추진

북한은 6자회담 보다는 북미 직접대화를 선호하고 있다. 6자회담의 동력이 소진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6자회담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9.19 공동선언과 2.13 합의를 채택했던 6자회담이 이대로 실종되는 것은 대화를 통한 협상에 회의감을 증폭시키게 될 뿐이다.

북한에 대한 유엔제재가 효과가 없는 것은 중국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을 참여시키기 위한 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중국이 참여하는 대화틀 속에서 ‘더 큰 당근’을 제공했는데도 북한이 도발을 계속할 경우이다. 둘째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비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국의 국익에 맞을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주한미군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중국은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국이 중립화되는 통일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중국의 지식인들도 이를 중국의 국익으로 보지 않는 사람을 없다. 이 경우에 주한미군이 안고 있는 이중적 딜레마를 푸는 방식으로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첫째는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서 중국의 반발이 심화되어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워지는 안보딜레마이다. 둘째는 이 안보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라는 방법을 사용할 경우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여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이에 따라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있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남북이 합의하고 미중이 보장하는 것이 이중적인 안보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된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6자회담의 틀속에서 중국과 함께 비핵화의 방법과 평화통일 전망을 협의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 해결과정에서 중국의 참여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결국 중국의 역할을 높이는 통로인 6자회담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핵확산은 일본과 동북아 군비경쟁으로 이어져서 중국의 국익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중국은 북핵폐기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대북지원이 북한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동력이면서도 북한의 급변이 가져올 혼란을 방지하는 안전핀이라는 긍정적 사고가 필요하다. 즉 중국의 안전핀이 중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가져오는 발판이 되는 것이다.

중국이 제재에 동참하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지는 것이다. 중국은 어차피 북한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중국의 입장을 변화시킬 수 없을 바에야 중국을 참여시키는 장기적인 북한 변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은 냉전이 해체되자마자 중국과 국교수립을 했다. 한국외교가 중국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북한에게 대북지원을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인지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6자회담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었을 때 한국이 개입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은 운영과정에서 비효율성을 보였다. 따라서 과거 6자회담이 비효율적일 때마다 운영의 묘를 살려서 윤활유가 되었던 북미회담과 남북대화가 6자회담과 병행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4자회담이 개최되어야 한다. 남북대화, 북미대화, 4자회담, 6자회담 같은 다양한 대화채널이 형성되어서 각기 기능에 따른 접촉과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남북대화를 통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북과 함께 만들어 나고, 북미관계는 각종 대화의 윤활유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4자회담에서는 평화체제를 논의하고 6자회담에서는 비핵화를 논의한다.

평화체제와 비핵화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병렬해서 진행해 나가되 세부 합의사항들은 상호 연계시켜나가면서 평화체제 논의나 비핵화 회담의 상호 순기능의 역할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6자회담과 4자회담을 연계해서 진행하지 않을 경우 북한은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을 정전체제 무력화라는 꽃놀이패로 활용하면서 각종회담의 속도를 조절해 나가려고 할 것이다.

4)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6자회담

동북아에서 평화체제를 형성하다는 것은 이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실존해 있는 여섯 개 나라들, 일, 중, 미, 러, 남북한이 이 지역의 평화와 안보에 관련된 문제들을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정치외교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인 틀을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와 북한, 한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 등 쌍무적 동맹관계를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와 조화시키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검토되어야 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이와 같은 쌍무적 동맹관계의 정치적 틀은 유지시키되, 그것들이 내포한 군사 중심적 성격들을 최소화해나가는 데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프로세스라고 일컫는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비사군적인 요소에서 출발하므로 군사중심적 성격을 최소화해 나가는 틀을 만들 맹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 성공하려면 북한 핵과 군사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의 성공을 위해서는 첫째, 북미대화를 지원해서 6자회담과 4자회담의 촉매제를 만들어내고, 둘째 6자회담을 통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하며, 4자회담을 통해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미국, 중국 등 강대국가들이 유사시 관련 국가를 지원하는 자동개입, 군사력의 전진배치 등에 대해 상대 역내 국가들에게 신뢰를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조치들이 이루어질 때 다자적 틀과 쌍무적 동맹체제가 공존할 수 있고, 보다 실질적인 다자간 대화와 협상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쌍무적 동맹체제는 동북아 평화협력의 틀을 통해 다자간 대화와 협상의 구조가 확고해지는 과정에서 역내 국가들에게 신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비무장지대 국제평화공원 조성은 한반도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동아시아의 평화정착과정 속에서 추진할 과제이다. 한반도에서 남북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공동의 인식이 갖춰져야 국제평화공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남북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한반도의 평화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상호관련성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주변국가들의 개입으로 확대될 수 있는 한국전쟁의 재발을 예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는 아시아에서 강대국들의 힘의 완충지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문제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세계 4대 강대국이 개입해 왔다. 한반도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유일하게 4대 강대국을 마주 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4대강대국들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온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평화가 정착되는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이들 4대 강대국들의 힘의 완충지대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군사력 밀집지역이다. 휴전선을 경계로 하여 한미양국과 북한은 200만을 병력을 대치시키고 있다. 미국은 2만여명이 넘는 주한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다. 한반도와 같은 군사력 밀집지대에서 분쟁의 가능성이 약화되고 평화가 정착된다면 그 자체로써 동북아시아 평화를 이룩하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는 아시아에서 군비경쟁의 악순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 군비경쟁의 악순환은 한반도의 분단을 명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