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 펀드매니저는 대평댁 아주머니다. 1936년생 쥐띠, 전남 구례군 산동면 대평마을 출신이다. 뇌쇄적인 눈웃음의 소유자다. 하지만 만만히 보고 농을 걸었다간 거칠고 원색적인 ‘돌직구’에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대평댁은 파전을 지나치게 크게 구워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차멀미가 심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고향 마을에도 가지 못한다.
바로 그 밑에 펀드매니저 지정댁 아주머니가 있다.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출신. 대평댁보다 일곱 살 아래다. 집 앞에 감나무가 10여그루 있어 ‘감나무댁’이라고도 불린다. 대평댁과는 ‘정치적 동지’인 동시에 톰과 제리의 관계다.
또 한 명의 펀드매니저로 대구댁이 있다. 택호 그대로 대구 출신이다. 60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본인 입으로는 절대 나이를 밝히지 않는 ‘신비 마케팅’의 달인이다. 대구 말투와 전라도 사투리가 짬뽕이 된 ‘오묘한 언어’를 구사한다.
마지막 펀드매니저는 갑동댁이다. 기본 정보에 대한 접근이 아예 힘든 인물이다.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우리 마을은 원래 남의 말을 잘 안한당께”라는 답변만 돌아온다. 60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다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펀드 지도위원 김종옥과 서순덕 부부. 과수 부문 기술영농의 달인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한 명의 지도위원 홍순영은 13년 전 농약으로 쓰러진 뒤부터 친환경 농사에 몰입했다. 펀드에 참여하고 있는 농부들 중에는 이른바 ‘학출’(學出)로 불리는 이들도 있다.
광주에서 대학을 나온 지리산노을 언니는 2002년 남편의 고향 구례로 귀촌했다. 아흔아홉칸 집 운조루의 셋째아들 류정수는 건축을 전공하고 도시에서 잠시 생활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2010년에 서울에서 구례로 이사온 박과장 부부는 펀드 실무자였지만 중간에 잘렸다. 박과장은 농사에 통 소질이 없는 ‘저질 체력’의 소유자다. ‘무얼까?’와 ‘일탈’로 불리는 또 한 쌍의 부부는 마을의 인터넷 사이트를 관리하면서 이집 저집의 수도, 전기, 세탁기 등을 손보고 다닌다.
책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만 일별해도 흥미가 솟는다. 그렇다고 소설은 아니다. 2012년 ‘지리산닷컴’에서 진행한 ‘맨땅에 펀드’ 프로젝트의 기록이다. 일종의 ‘농촌공동체’라고 불러야 할 이곳은 2012년 3월에 ‘땅, 농부, 이야기에 투자한다’라는 뜬구름 잡는 카피로 1계좌당 30만원씩 100명의 투자자를 모집했다. 한데 이 고위험 펀드는 출시되자마자 완판됐다. 이후 지리산닷컴은 그 돈으로 땅을 빌려 친환경 농사에 돌입했다. 물론 “약을 치지 않고 농사짓는 것을 상상도 해보지 않은 마을 엄니들”을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이 책은 그 1년간의 보고서다.
사실 ‘맨땅에 펀드’를 뭐라고 딱히 규정하긴 애매하다. 농산물 펀드라고 하기도 그렇고, 유기농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는 운동단체라고 하기도 그렇다. 최근 유행하는 꾸러미 사업(농촌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를 연결하는 소규모 직거래)인지, 아니면 요즘 관공서에서 강조하는 CSA(공동체 지원농업)인지, 그것도 아니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협동조합의 다른 이름인지 도무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맨땅에 펀드’는 그 다양한 성격을 모두 지닌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가입한 투자자들에게 임의의 작물을 박스에 담아 보내면서, 상업적 유통에서 벗어나 소비자를 직접 만난다. 또 “관공서의 마구잡이 예산 지원에서 벗어나” 상부상조로 마을의 자립을 꿈꾼다.
그래서 다소 두루뭉술하게 ‘농촌공동체’라 칭하면서, 이른바 그들의 ‘강령’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밝히고 있다. “1. 우리 농업에 꼭 필요한 작물과 그 작물들의 토종 종자를 보전하고, 진짜 친환경 유기농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2. 위기에 빠진 농부를 구하고 착한 농부의 작물을 널리 알린다. 3. 작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마을이 자본과 관의 개입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다.”
책에는 ‘맨땅에 펀드’가 지난 1년간 겪은 농사의 과정들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예컨대 어떤 작물을 어떻게 파종하고 수확했는지, 그 작물들이 언제 꽃을 피웠고 가뭄과 태풍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 작물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사람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지어는 어떻게 도둑을 맞았는지까지도 기록돼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의견 대립과 갈등도 존재했다.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완벽한 유기농업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할 수 없이 포클레인이 수로를 정비하고 트랙터가 밭을 가는 일이 벌어졌다. 멀칭비닐로 하우스를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마을 사람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밖의 인간적인 희로애락들, 예컨대 인선 파동과 마을 엄니들 간의 계파 경쟁, 아찔한 교통사고의 기억까지도 담겼다. 그래서 이 책은 일종의 ‘농촌 드라마’처럼 읽히기도 한다.
‘맨땅의 펀드’가 겪은 지난 1년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한 이는 ‘지리산닷컴’에서 ‘이장’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권산(50)이다.
그는 이 책에 대해 “농사짓는 바보들과 농사도 모르는 바보들의 좌충우돌 스토리”라고 말했다. ‘맨땅의 펀드’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는 “예산 지원이나 관의 개입 없이 하나의 마을이 운영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아주 턱없는 출발”이라고 설명했다. ‘무모하지만 대찬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오미마을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