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 시대 ‘협동와 자치’의 의미

본문

월간 ‘어젠다(AGENDA)’ 창간호에 쓴 글입니다. 


이 시대 ‘협동와 자치’의 의미

하승수(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우리는 흔히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처럼 살아온 것같이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가 이런 물질적 풍요를 누린 지는 오래 되지 않았다.

석탄을 이용한 산업혁명이 일어난 지는 불과 300년도 되지 않았다. 석유를 이용한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도 불과 150년이 되지 않은 일이다. 원전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한 것은 불과 60년도 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도 그렇다. 1960년에는 도시보다 농촌에 사는 인구가 많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화된 지역에서 살고 있다. 불과 50여년 동안 일어난 변화가 지난 수천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큰 셈이다. 자동차가 이렇게 많아진 것도 불과 20년이 되지 않았다. 경부ㆍ호남ㆍ영동ㆍ남해고속도로 정도만 있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전 국토가 바둑판처럼 가로세로로 휘젓는 고속도로들로 덮여 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많다. 이런 변화들은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타는 것, 쓰는 것 모두를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 1970년에 비해 지금의 사람들은 평균 8배나 많은 육류를 섭취하고 있다. 그만큼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졌나?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그래서 과연 우리는 행복해졌나? 이 질문은 우리나라에서만 던지는 질문은 아니다. 요즘 세계적으로도 이 질문이 화두가 되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는데,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미국 정치학계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달(Robert Dahl)’이라는 학자가 있다. 1915년에 태어나 아직까지도 살아 있으니, 100살이 다 된 노지식인이다. 이 로버트 달이 91세에 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됐다.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로버트 달은 ‘우리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 보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과연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로버트 달이 보기에 미국사람들은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럽에 비해 ‘삶의 질’도 낮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세배로 증가했지만, 삶의 만족도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국민소득(GDP)의 증가인 ‘경제성장’이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난 수십년간 경제성장을 경험한 후에 내려진 경험적 결론이다. 그래서 ‘로버트 달’은 정치학자로서의 입장을 떠나 미국사회를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동안 국민소득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적해 왔다. 환경오염이 되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일들이 많아져도 국민소득은 증가한다. 범죄가 많아져서 교도소를 많이 짓어도 국민소득은 증가한다. 원전을 많이 지어도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원전사고가 나서 사고수습을 위해 일하는 것도 국민소득에 포함된다. 결국 국민소득의 증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행복과는 무관한 허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 허구에 빠져서 살아 왔다. 그러나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2012년 발표된 유엔 세계행복보고서(UN World Happiness Report)에서는 ‘행복을 위해 기초적인 생활수준의 보장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면 소득과 행복은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이 보고서에서는 건강한 공동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개인의 정신적ㆍ육체적 건강, 가치관 등을 행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꼽았다. 예를 들면, 고용이 안정되고 기초적인 사회보장이 되어 있으며, 정부나 기업이 투명하게 운영되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잘 보장되는 사회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가치관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얘기가 나왔다.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돈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분석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런 유엔 세계행복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그동안 우리 사회가 믿어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환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더 많은 성장과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은 완전히 허구였다. 경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런 사회에서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 이겨야 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도 존재하기 어렵다. ‘배려’나 ‘공생’같은 단어도 설 자리가 없다.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구조이다.

한국적 특수성
한편 한국사회가 가진 특수성도 존재한다. 한국사회는 중앙집중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사회이다. 한국의 수도권 집중현상은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다. 이것은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도 떨어뜨리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큰 문제를 낳고 있다. 우선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높은 주거비용, 오랜 출ㆍ퇴근시간, 심각한 환경문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여전히 과밀학급 문제가 있을 정도로 교육환경도 열악하다.

반면에 비수도권, 특히 농촌지역은 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다. 그 핵심적인 원인 중 하나는 수출대기업 중심으로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농업을 포기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경제의 중심이었던 농업이 포기되면서 농촌지역의 공동화는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역내에서 순환하는 경제가 아니라 모든 산업과 상업, 금융구조가 서울을 중심으로 짜여지면서 수도권 집중현상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수도권집중 사회가 된 또다른 원인은 정치ㆍ행정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권력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서울에 주재사무소를 두고 있고, 대부분 기업들의 본사가 서울에 몰려 있는 이유는 그곳에 정치ㆍ행정적인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 때문에 정부부처를 인위적으로 분산시키고 있지만, 그 정도로는 서울 중심의 권력구조가 변하기 어렵다.

물론 의식이나 문화의 문제도 있다. 우리 사회는 매우 획일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교육, 문화 등의 이유를 들어서도 서울로 몰린다. 지방에 사는 청소년, 청년들은 서울에 가서 팍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에도 서울을 동경한다. 그러나 이렇게 집중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란 더 힘들다.

지속불가능한 사회
한편 지금과 같은 구조가 지속가능하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스템은 지속불가능하다.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는 기후변화는 이제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의 온도는 0.8도 남짓 올랐지만, 우리는 홍수, 가뭄, 사막화, 해수면 상승 등의 현상을 눈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지구의 온도는 계속 올라갈 것이다.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2도, 3도 올라갈 날도 멀지 않았다.

그에 따라 10년, 20년 안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게 여러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부분이다. 이미 2010년 러시아를 덮쳤던 가뭄과 작년 여름 미국의 곡창지대를 덮쳤던 가뭄은 세계적인 곡물 가격 상승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유엔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는 지구의 온도가 2.5도에서 3.5도가 오르면 생물종의 40-70%가 멸종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는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전세계의 해수면 상승률은 연 평균 1.8밀리미터라고 하는데, 한반도의 남해는 해마다 3.4밀리미터가 상승하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 동해의 수온상승은 세계 평균 수온상승의 1.5배였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온도는 0.7도 오른 데 비해 한반도는 1.5도 상승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1년에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이 9.8%(2010년)에 달할 정도로 무감각하다.

기후변화는 단지 날씨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식량위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곡물자급률이 22.6%(2011년 기준)에 불과한 실정이다. 쌀자급률조차 83% 수준으로 추락했다. 농업기반의 붕괴현상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지면적은 1990년 210만 8,00ha에서 2011년 169만 8,000ha로 줄어들었다. 20년 동안 20%의 농지가 사라진 것이다. 농민의 수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가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5% 남짓한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60대 이상의 고령자 비중이 높다.

대한민국은 원전의 위협에도 노출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원전밀집도가 가장 높은 나라이다. 좁은 국토에 23개나 되는 원전을 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보여주듯이 원전사고가 나면 그 사회공동체는 붕괴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15만명이 아직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최소 121조원 이상의 복구비용이 들어가도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배와 같다. 이대로 가면 난파될 수 있는데도, 배가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누가 이 방향을 돌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 ‘누가’는 결국 시민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영웅이 나타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헛된 기대이다.

왜 ‘협동’과 ‘자치’인가?
우리 사회가 ‘협동’과 ‘자치’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얘기들 때문이다. 경제성장 중심, 물질 중심, 경쟁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고 불행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중앙집중적이고 집권적인 구조가 낳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동’과 ‘자치’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 지구가 부딪히고 있는 생태ㆍ환경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대안이 ‘협동’과 ‘자치’이기에 여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복지문제만 하더라도 단순히 시장논리에 맡겨서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일본의 ‘복지클럽 생협’이 보여주는 것처럼, 복지 문제도 협동의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교육문제, 육아문제도 협동적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그런 대안을 추구해 온 사람들이 있다. 

에너지 문제를 푸는 데에도 협동조합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태양광발전을 하더라도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대기업이 임야나 농지를 훼손해가며 대규모로 할 수도 있고, 시민들이 만든 협동조합이 건물지붕을 활용하여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전자는 또다른 환경파괴를 낳을 뿐만 아니라, 태양광 발전으로 인한 수익도 대기업이 독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후자의 길이 중요하다. 독일이 탈원전을 하는 과정에서는 에너지협동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독일의 에너지협동조합 수는 2001년 66개에서 2010년 586개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의 사회에서 소수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추구해 본들 좋은 일자리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출대기업들이 몇 조원의 순이익을 낸 지가 오래 됐지만, 좋은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다. ‘좋은 일자리’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는 아니다. 예를 들어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전쟁무기를 만드는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에 기여하면서도 기본적인 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야 말로 ‘좋은 일자리’이다. 이런 일자리는 협동의 경제를 통해서, 지역사회에 기반한 여러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에너지와 먹거리, 농업이 될 것이다. 기후변화, 원전의 위협, 식량위기 등을 감안할 때에 에너지와 먹거리 문제를 지역에서 풀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농업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이런 문제들을 지역사회에서 풀어가는 과정에서 일자리도 많이 생길 것이다. 독일이 원전을 중단하기로 하고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과정에서 36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치’를 강조하는 것도 중앙집중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사회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꿈꿔보자는 것이다. 국가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지역에서부터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을 가장 많이 하면서도 기후변화에 가장 미온적인 국가인 미국에서도 지역에서부터 에너지효율성을 높이고 재생에너지를 늘려나가려는 도시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가 농촌ㆍ농업을 포기할 때에 지역에서 농업을 살리려고 노력해 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형식을 많이 본다. 협동조합만 하더라도 ‘협동조합’이라는 법적 형식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 협동조합이 아닌 기업이라도 그 내부에서 ‘협동’의 정신을 살려 운영할 수도 있다. 반면에 ‘협동조합’이라는 법적 형식을 택한다고 해도, 그 조직이 ‘협동’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도 기업 못지 않게, 경쟁논리를 추구하고 성장주의에 빠질 수 있다.

‘자치’도 마찬가지이다. ‘자치’는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그에 대해 책임도 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지방자치’를 실시한다고 해서 이런 ‘자치’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자치라는 단어도 남발되는 경향이 있는 나라이다. ‘주민자치위원회’도 있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치’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정부나 관료조직은 ‘자치’를 할 수 있는 권한도 주려고 하지 않고,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자치 의식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중요한 것은 왜 ‘협동’을 하고 왜 ‘자치’를 하느냐이다. 여기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는 것이 진정한 ‘협동’의 사회, ‘자치’의 기반을 만드는 길일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