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이라 했던가? 봄이 가까이 왔지만 국민 살림살이에 봄은 멀기만 하다. 2010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4%를 넘지 못한 채 계속 낮아진다. 수출은 미국 트럼프의 민족주의와 중국의 사드 경계령 사이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투자 위축으로 고용도 늘지 못해 닫힌 취업문이 언제 열릴지 알기 힘들다. 부족한 생계비와 치솟는 전세금 때문에 늘어난 가계빚에 대한 위험신호가 연일 켜지고 있다. 암담한 미래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헬조선 탈출을 꿈꿀 때 외롭고 힘든 삶을 견디는 노인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꿈꾼다.
그런데 경제가 나빠지기 전부터도 우리의 삶이 썩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연 평균 노동시간이 1700시간 무렵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2000시간 넘게 일하는 나라는 한국 외에 멕시코, 그리스, 코스타리카뿐이다. 기대수명이 가장 긴 편에 속하는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들 중에서 선두였던 헝가리를 2003년부터 앞서기 시작해 최근까지도 연간 10만명당 30명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한다. 소득분배는 세전소득 기준 지니계수가 2000년대에 OECD 중간 수준인 0.30 정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1990년대에 줄곧 하위 수준인 0.26이었던 것에 비하면 급격히 높아졌다.
국민들 삶의 질과 행복도 수준도 낮아지고 있다. 객관적 지표와 주관적 만족도를 합쳐 계산하는 OECD의 ‘더 나은 삶(BLI) 지수’에서 한국은 38개국 중에서 2011년 26위, 2012년 24위에 이어 2016년 발표에서 28위에 그쳤다. 주관적 만족도만을 비교한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에서는 전 세계 158개국 중 2010~2012년 평균 41위로 이웃 일본이나 대만보다 앞섰다. 하지만 2012~2014년 평균 47위, 2013~2015년 평균 58위로 계속 낮아지며 일본과 대만에 비해 뒤처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순위가 2013년에 31위였고, 2016년 29위였던 것에 비한다면 우리 삶의 질은 경제적 수준에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나선 1950년대 말 국민들이 빈곤을 벗어난 삶을, “독재타도”를 외친 1980년대 말 국민들이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면, 지금 국민들은 어떤 삶을 원할까? 아마도 행복한 삶, 질 높은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인생의 주인임을 느낄 수 있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앞날에 대한 걱정을 덜하고 현재의 삶을 즐길 여유를 갖는, 주변 사람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서로 믿으며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삶을 바랄 것이다. 불안, 불공정, 불신으로부터 벗어난 삶 말이다.
행복한 삶을 향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경제와 국정 운영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국정 평가의 기준과 선거 공약, 정책결정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의 대화, 토론, 발표에서 국내총생산(GDP) 수치보다 지니계수, 노동시간, 삶의 만족도, 신뢰 수준이 더 자주 등장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과거처럼 경제가 성장하고 GDP가 늘어나면 국민들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더 행복해져야 경제도 성장하고 GDP도 늘어난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택이 부족하고 도로가 없던 시절에 주택 건설하고 도로 확장하는 것은 GDP와 삶의 질을 모두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택 건설이나 도로 확장, 그 밖의 어떤 투자이건 GDP 증가에는 기여할지 모르지만 투기나 환경훼손에 따른 문제도 함께 따져봐야 삶의 질도 높이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보다 삶의 질과 행복도가 높은 나라들은 대부분 1960년대 후반 이후 더 많은 GDP가 더 나은 삶의 질로 직결되지 못한다는 자각에서 삶의 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위협에 직면해서 삶의 질과 GDP를 양대 축으로 삼고 삶의 질 향상에 노력한 결과 이들은 경제발전과 삶의 질 향상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됐다. 반면 이러한 노력을 등한시한 나라들은 심각한 경제위기와 사회위기를 함께 겪어야 했다. OECD를 중심으로 ‘GDP를 넘어서’ 삶의 질 향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것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GDP 정체와 삶의 질 하락이라는 이중의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