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7. 11:49ㆍ경제/대안사회경제, 협동조합
공유의 경제 발상지 '파벨라스' |
사랑이 가져온 결실 브라질의 화벨라스라 불리 우는 빈민촌에서는 포콜라레 운동의 회원들의 도움으로 이곳 주민들이 생활 환경을 개선해 가고 있다. 브라질의 산 파올로, 레씨피, 벨로 오리존테, 리오데 자네이로 및 다른 큰 도시 근방에는 "평화의 주님"이라든지 "말가렛의 정원"이라든지 하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름을 지닌 부락들이 있는데, 사실은 이곳에 악취가 나는 판자집들이 집결해 있으며, 악덕, 빈곤, 실망이 범람하여 사회의 암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판자 집, 천막 혹은 불결한 작은 집들이 모인 빈민촌을 정의하여 모캄보스 또는 화벨라스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 사이에는 악이 성황 하여 상자 속에 악이 가득 차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면 이 곳에 살고 있는 주민은 누구인가? 빈민, 극빈자, 가뭄이 심할 때 내륙에서 굶주림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도시 가장자리에는 쓰레기 소각장이 있다 궁지에 빠진 주민들은 주로 이 쓰레기 소각장 가까이에 야영하면서 쓰레기 틈에서 아직 이용 가능성이 있는 것, 고쳐서 쓸 수 있는 것들을 골라 모은다. 그들은 주어 모은 것, 훔친 것, 구걸한 것,간혹 막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이의 거부를 받고 있으므로 제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도시의 주민들은 교외의 이러한 지역을 일종의 병폐와도 같이 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 모른 체하려 한다. 18년 전 포콜라레 운동에 속해 있는 몇 몇 사람들이 이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들 중에는 남자. 여자, 젊은이, 가정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이곳 빈민들은 지극히 무관심하고 적대적이었으며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포콜라레 운동의 회원들은 즉시 평범한 사회사업의 방식으로는 일을 계속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초기에 이 주민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던 포콜라레 운동의 한 회원은 말한다. "우리는 미개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이러한 환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지 막연한 박애주의와 인본주의 이상 혹은 막연한 종교적 이상만을 가지고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복음이 그들의 생황을 뿌리로부터 뒤엎을 수 있도록 호응한 새 사람들, 각 사람의 존엄성을 인정하면서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는 새 사람들로써 이곳에 하나의 새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이냐고요?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황열병, 장질부사, 상피병(象皮病), 나병 등 각종 질병에 대항하여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날 때에는 독사와 각 가지 해충이 있음을 알면서도 사람들과 물건들을 구제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 용기가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 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식과 미신, 악습과 타락, 장신이상 등을 직시하면서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 모든 것을 끝까지 함께 나눔으로써 모든 저항을 녹일 수 있어야 하니까요." "나는 레시피 근처에 있는 산 아마로의 빈민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곳은 그 당시 "지옥의 섬"이라고 불렸으나 현재는 "소화 데레사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나는 이발사가 되어 도시로 나가서 돈벌이를 해보려 했지만 도시 주민들은 모캄보스에 머무는 사람들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무도 내게 이발을 하려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나의 판자집 앞에 이발도구를 내 놓고 일을 시작해 보았지만 결국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나도 위대한 일을 해 보겠다는 포부를 지녔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처럼 비참하게 사회의 문제 거리인 쩨닌겜(사회의 배척을 받는 무가치한 사나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나의 판자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옷을 잘 입고 있었고, 여기 저기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살피면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동냥까지도 주었습니다. 내가 이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진을 찍어 갔습니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일을 계속하면서 모른 척 하려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강한 저항을 느꼈었습니다. 나는 아무도 나의 비천한 모습을 보지 말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프란치스코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는 결혼을 하여 네 자녀를 두고 있으며 고통스러운 긴 사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재능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인데, 알콜중독, 도박, 질병으로 이성을 잃고 파산지경에 이르러 모든 희망을 잃게 된 마지막 순간, 온 가족과 함께 이 곳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날 두 처녀가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사진을 찍지 않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선물 꾸러미를 주지도 않았고 모두와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마치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오던 사람들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내게도 말을 건네었습니다. 나의 아내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고개를 숙인 채로 일을 계속하면서 아이가 막 병석에서 일어났으나 지금은 외출 중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나의 아내는 낯선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의 비천한 상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문을 닫아버리곤 했으므로 이번에도 나는 그렇게 답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처녀들은 또 다른 이들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자유스럽게 행동했으며 평범하고 안정된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프란체스꼬의 아내는 그들과 친숙해졌고 그들에 관하여 계속 남편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 것일까? 그리던 어느 날 홍수가 났다. 이 때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프란치스코도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내 눈으로 한 의사가 홍수로부터 나의 가족을 구해 내기 위해 진흙탕 물 속으로 달려오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프란치스코는 차츰 차츰 인간에 대한 신뢰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그는 혼인신고를 하고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원기를 되찾았고 다시 도시로 나가서 일을 시작했으며 이번에는 성공을 하였다. 현재는 아담한 집을 한 채 가지고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려는 큰 포부를 지니고 있다. 그는 "무가치한 사나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는데 이 때 그의 마음은 이미 안정되어 있었고 평화와 낙관에 차 있었다. 그 후 그는 모캄보스에 있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지독한 고독과 천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이 곳 주민들과 접촉하게 되는 동기는 매우 다양하다. 어느 날 저녁. 피라치카바 지역에 폭포수와도 같은 비가 내렸다. 한 부부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다리 밑을 지나다가 몇몇 사람들이 서로 꼭 부둥켜 안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며칠 전 동북부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모두 6명의 식구였다. 오랜 여행을 하고 난 후였으므로 매우 지쳐있었다. 그들은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면서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으나 더 나은 생활은 커녕 보잘 것 없는 판자집 한 채도 구하지 못해 이 다리 밑으로 와서 다리를 지붕 삼아 비를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이 부부는 다른 많은 부부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으므로, 함께 돈을 모아 작은 집 한 채를 세로 얻어서 우선 석 달 간 그곳에서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가정에서는 이들을 위해 이부자리를 가져오고, 어떤 집에서는 보름 전에 태어난 아기를 위해 요람을 가져 오고, 또 어떤 이는 의자, 책상 그리고 식기와 의복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 며칠동안은 부인들이 당번을 정하여 번갈아 가며 그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남편의 직장을 구해 주었다. 차츰 형편이 풀리어 갔다. 성탄 저녁에는 새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온 가족이 함께 축하를 할 수 있었다. 모캄보스의 큰 문제 중 또 하나는 문맹이라 하겠다. 이곳 주민들 중에는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서명이 필요한 경우 십자표를 하는 수도 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글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더 천대를 받고있다. 산 파올로 근처의 "말가렛의 정원"이란 곳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청년은 트럭 운전사가 되고 싶어했다. 여행도 하고 돈도 벌고 어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일은 그의 마음에 퍽 들었다. 그러나 그는 글을 몰랐기 때문에 면허를 받을 수 없었다. 이처럼 글을 모르는 탓으로 적당한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문맹퇴치를 위한 성인 야간학교를 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강의를 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여러 명 되었다. 도청에 가서 대지사용허가와 작은 학교를 짓기 위한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도청에서는 건축은 허가해 주었으나 대지사용은 허가해 주지 않았고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대지를 구입할 수 있는 자본도 대출해 주지 않았다. 그럴 때 싼타 부인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는 세 자녀의 어머니인데 중병에 걸려 오래 동안 입원했던 일이 있었다. 그가 집을 비우고 있는 동안 이 도시에 있는 어머니들과 처녀들이 번갈아 가며 그의 집을 찾아가서 아이들을 보살펴 주고 음식을 준비해 주었으며, 집안을 청소하고 정돈해 주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아버지는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다. 학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싼타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편과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는 부로크 집을 한 채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토끼를 치고 있지만 집이 매우 커요. 토끼를 한 편으로 모으고 다른 쪽을 학교로 사용할 수 있겠어요?" 독지가들과 뜻이 있는 이들이 모임을 열고 일을 진행시켰다. 어떤 사람은 "내 아들은 벽돌공이에요. 벽을 뚫고 창문을 낼 수 있을 것이에요."라고 말했다. 피루노씨도 노동자인데 그는 문을 넓히겠다고 나섰다. "나는 벽돌이 좀 있는데 이것으로 담을 두를 수 있을 거에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석회를 좀 낼 수 있어요." 라고 했다. 다 떨어진 의자가 선물로 들어오자 어린 아이들이 정성껏 손질을 하고 페인트칠을 하여 쓸만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볼 때 눈물겨울 정도였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학생들이 감격할 나머지 손이 떨려 연필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계속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놀라운 진보를 보이고 있다. 얼마나 큰 지능과 직감력과 관심이 그들 안에 잠재해 있는 것인지! 요한씨는 기쁨에 넘쳐 "드디어 나도 내 자녀들이 숙제를 할 때 거들어 줄 수 있게 되었답니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낮 시간을 이용해서는 부인네들과 처녀들이 여기서 양재를 배우게 된다. 제일 어린 9살 난 엘프리다가 가장 성적이 좋다.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이미 와이샤쓰, 치마, 바지 등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이 여인네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어 낸 상품을 높이 들고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을 음미하듯 응시하는 것을 볼 때 하나의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말가렛의 정원"에는 또 하나의 학교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서는 산아제한에 관한 강의가 이루어진다.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도 출산은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식구 하나가 더 는다는 것이 곧 재난이며 악운이다. 할 수만 있으면 피임약을 사다가 복용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면 어린아이들을 수효도 헤아리지 않은 채 한 방안에 몰아 재우게 되며 아이들은 병이 들고 고통을 겪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방법을 써서 낙태를 시키려 하다가 산모는 죽고 아기들은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길거리에 버려지는 수도 있다. 그런데 몇 몇 어머니들이 이곳 부인들과 친하게 되었고 아주 단순한 태도로 산아제한을 위한 자연 주기법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것이 무슨 효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런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몇 달 전부터 자연 주기법 학교를 열었으며 점점 더 많은 수효의 부인들이 와서 설명을 듣고는 이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만족 할 만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그들에게 남편들도 데리고 오라고 슬며시 말한 결과 의외로 많은 남편들이 부인들의 초대에 응하여 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 자신이 이 학교를 선전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실시하고 있는 매우 인도적인 이 피임방법에 관한 좋은 경험담들을 들려 주고 있다. 이 외에도 수도시설을 갖추기로 하여 극빈자들에게 물질적 원조를 보내기 위해 바자회를 열기도 하는 등 아름다운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마리엘레 |
공유의 경제의 출현 | |
소유의 문화에 바탕을 둔 소비주의 경제와는 달리, 공유의 경제는 주는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려워 보이거나 야심적이고 모험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 속에서, 남에게 내어주는 것에서 그들의 실현됨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그들이 신앙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들 존재의 가장 깊숙한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공유의 경제가 보편적으로 널리 확산되리라는 희망이 세워 집니다. 1991년 5월 브라질에서 끼아라 루빅 | |
공유의 경제 출현 1991년 끼아라는 브라질 포콜라레 운동의 소도시인 아라첼리를 방문했습니다. 상파울로 시가지를 가로질러 가면서, 끼아라는 거대한 빈민가로 둘러 쌓여있는 도심의 빽빽한 초 고층 건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근심에 싸였습니다. 그녀는 그때까지 포콜라레 운동에서 실행되어 왔던 것과 같은 재산의 공유가 거대한 빈곤 앞에서는 충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
그녀는 식량과 잠자리와 의료 제공의 긴급함과, 최소한 브라질의 포콜라레 운동 회원들에게 만이라도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끼아라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사회정의 교서 '백 주년'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공유의 경제를 출범시켰습니다. 끼아라는 아라첼리 소도시 부근에 고용과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생산적인 기업체들을 세우자고 브라질의 포콜라레 회원 20만 명에게 제안하였습니다. 끼아라는 이 일을 이 지역의 유능한 회원들에게 맡겼습니다. 끼아라는 이 기업체들의 주주로 선발된 사람들에게 이익의 3분의 1은 기업에 재투자하고 3분의 2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고 '주는 문화'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양성할 기관을 위하여 할당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공유의 경제 기업 공유경제 즉 '주는 문화'에 속한 기업가들은 시중의 기업들이 하고 있는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사업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유의 경제의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 형태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기업을 이끌어 가는 방식을 통해서, 그들이 주식회사 이든 협동조합이나 다른 형태의 기업이든 간에 기존의 관습적 사업 방법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공유경제 기업들은 법률을 엄격히 준수하고 근로자들의 권리는 물론 소비자, 경쟁산업, 사회, 그리고 환경의 권리를 존중하는 생산활동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공유의 경제 기업은 고용주와 피고용자들 사이에 태어난 일치로 인하여 성공적입니다. 이것이 기업 내부와 외부 양측에 매우 긍정적인 상호 인간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상호 인간관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기울여지는 모든 노력들은 창의력의 증진과 생산 기법 및 기술혁신 시스템의 개발역량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공유의 경제 기업의 존재와 발전은 그들의 근본 원칙이 사업비용 절감과 경제효율 증진방법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공유경제는 요 몇 년 사이 경제학자와 여러 분야의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습니다. 유럽, 남미, 호주 등지의 대학들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경험이 진전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세미나와 학술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몇 몇 학자들은 '공유'의 원리가 요즈음 주류를 이루고있는 경제이론의 근본인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을 뛰어 넘어 주도적 공헌을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은 사회 정치적 생활에 있어서 분명히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공유의 경제는 또한 세계 각지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 졸업논문의 주제로 선택되어지고 있습니다. 1998년 말까지 41편의 공유경제에 대한 논문이 제출되었으며 많은 다른 학생들이 준비 단계에 있습니다. 공유의 경제 기업의 발전 초기에 공유경제의 원리에 따라 그들의 경영방식을 혁신했던 기존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남미와 유럽의 수많은 공유경제 기업들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 운동의 소도시에 소속된 공업단지에 위치해 있으나 소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기업들도 공유경제의 이상을 통해 그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998년 말까지 654개의 기업들과 91개의 소기업들이 이 이상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들은 30개국 이상의 나라에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164개 기업은 제조 분야에서, 189개 기업은 산업 분야에서, 그리고 301개 기업은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남미에는 200개 이상의 기업이, 유럽에는 300개 이상의 기업이 있습니다. 이태리에 150개, 독일에 50개의 기업이 있고 동유럽에도 약간의 기업이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도 몇몇의 기업이 있고, 아시아(주로 필리핀), 아프리카, 호주에도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연간매출 2천만 불 미만의 중소기업들입니다.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3명의 기능공이 일하던 작은 기업이 불과 몇 년 사이에 260명을 고용하는 대규모 기업으로 발전한 예도 있습니다. 유럽의 어떤 지역과 남미에서는 공유경제 기업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판매촉진 출판물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솔링겐 출신의 23개 기업의 사람들이 "협력기금"을 세웠으며, 한 상업은행은 동유럽과, 개발투자가 필요한 세계의 다른 지역의 공유경제 기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 |
시범도시 '아라첼리' 브라질 상파울로 교외에 있는 아라첼리 소도시 가까이에 '스파르타코' 공업단지가 개발되었습니다. 5만 평방미터의 이 단지는 합자회사인 ESPRI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2천명 이상의 주주들이 있는데 대부분 브라질 사람들입니다. 이 회사는 단지를 개발하여 1998년 말까지 12개의 사업체를 입주시켰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
공유의 경제를 통해 도움 받은 이들의 이야기 |
필리핀.......................... "돼지고기 식품을 팔던 우리 식료품가게는 돼지 질병파동으로 부도가 났습니다. 우리는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공유의 경제로부터 정기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필요한 식료품은 충당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나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함을 느꼈습니다. 우리 이웃 한 사람이 암에 걸렸는데, 그녀는 매우 고통스러워 했고 또 매우 가난했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끝내 천국으로 떠났을 때 우리는 그의 다섯째 아들을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과거의 우리보다 더 가난해서 그 아이들을 다 키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나는 8살과 10살 된 두 손주가 있는 할머니입니다. 러시아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손주들이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굶주렸으므로 작은 아이는 빈혈이었고 큰애는 매우 병약했습니다. 공유의 경제의 도움으로 지금 아이들은 건강은 많이 좋아졌으며 나도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브라질........................... "30년 전 나의 부모님은 빈민가에 한 오두막을 짓고 아홉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부모님의 소유가 아니었는데 이는 빈민마을의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아주 최근에, 우리는 다른 많은 가족들과 같이 두려워했던 퇴거통지를 받았습니다. 해결책은 역시 다른 가난한 지역이지만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좀더 나은 환경의 한 작은 집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항상 마약과 알콜의 위험이 있는 빈민가의 환경은 나의 형제 자매들이 자라기에 좋은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주택 구입자금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자금을 모았고, 부족했던 1,000 달러를 공유의 경제가 보태줬습니다. 이로서 방과 문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던 어머니의 소박한 꿈이 이루어 졌습니다. 공유의 경제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족은 가능한 한 빨리 받았던 금액을 갚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도............................... "나는 네 아이를 가진 환경 미화원이었습니다. 내가 병이 나서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공유의 경제가 정기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나는 빈민가에 있는 우리 집 밑에 작은 가게를 낼 수 있었고 장사에 필요한 조각얼음을 만들 수 있는 냉장고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배려들이 나보다 더 가난한 이들에게도 나누어져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겨우 알맞은 양식이지만 종종 나는 먹을 것이 없는 이웃에게 나의 양식을 나누어주곤 합니다. 언젠가는 병든 아이를 돈이 없어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이웃에게 그날 번 돈을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회복되었고 나는 다음날 그 돈의 두 배만큼 벌 수 있었습니다." |
공유의 경제 기본 이론 | |||||
끼아라 루빅 공유 경제의 이론 정립의 단계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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