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국부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학교,,자유학교 ---

2016. 9. 23. 14:55교육, 도서 정보/교육혁신 자치의 길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학교’

     
기사입력 2014.09.19 20:36
최종수정 2014.09.19 20:43                                                         
안데르센을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를 알면 둘을 아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 셋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와 실존주의 철학자, 선진적 낙농업. 이것이 그간 내게 각인되어 있던 덴마크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최근 <삶을 위한 학교>(시미즈 미츠루 지음, 김경인·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를 접하고 덴마크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일천했는지 절감했다. 덴마크는 먼 나라가 아니었고, 그룬트비는 전근대의 교육자가 아니었다.

[사유와 성찰]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학교’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 패망한 북구의 한 작은 나라가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자”는 내발적 발전론을 내걸고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내며 ‘강소국’의 대표적 모델로 떠올랐다. 누구를 뒤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낸 것이다. 그 중심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실천적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 상류사회를 지배하던 라틴어를 거부하고 지역 언어로 밀려났던 덴마크어를 회복시켰다. 신화와 역사를 시로 엮어내 이를 농민(민중)과 함께 노래했다.

민중이 스스로 각성해야 국가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그룬트비의 신념을 구체화한 것이 덴마크 자유학교, 즉 폴케호이스콜레였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민중의 대학’이란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자유학교’로 표기한다. 시험이 없으며 졸업장도 없다.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국적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다. 전교생은 수십 명을 넘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독서보다는 대화를 우선하고, 지식보다는 경험을 강조한다.

교과 과정은 덴마크 전통을 현재화하는 전통적 과목, 취미와 실용 과목, 생태-환경과 같은 지구적 이슈를 다루는 현대적 과제 등 크게 세 분야를 자체적으로 조합한다. 150년 전 탄생한 자유학교는 현재 덴마크 전역에 8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자유초등학고, 자유중학교, 예술·공예학교,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이 있는가 하면, 교원양성대학도 있다. 엄연한 사립학교인데도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교육 내용에 관해서는 일절 간섭을 받지 않는다.

대안사회에 대한 창의적, 자율적, 협동적 실천. 이것이 덴마크 자유학교를 지탱하는 정신이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자유학교는 무엇보다도 ‘대화와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그룬트비는 “좋은 귀를 통해서만 정신의 귀가 열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중이 자각에 이르도록 하는 매개물 중 하나가 역사와 시였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그룬트비에게 문자가 아니고 말로 전승된 문학은 민중에게 생의 신비와 존엄을 일깨우는 빼어난 공유재였다.

자국 역사와 언어를 강조한 그룬트비의 교육관은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덴마크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을 내치지 않은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의 종교적 관용이 이토록 남다를 수 있던 것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덴마크 자유학교가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나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을 통해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자유학교의 개방성, 보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산실인 자유학교의 어제와 오늘을 따라가다 보니, 감탄이 탄식으로 변했다. 우리의 교육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교사와 학생은 있지만 ‘상호작용’은 없는 학교. 그래서 학교만 있고 교육은 없는 나라, 그래서 제도교육이 민주주의의 성숙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나라, 그래서 ‘세월호 이후’를 상상하기 힘든 나라… 문제의 원인 중 하나를 <삶을 위한 교육>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화 모델이 애초에 잘못 설정되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었다.

땅과 농민,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해온 덴마크와 같은 강소국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룬트비의 자유학교는 우리가 척추를 곧추세우고 집중해야 할 ‘오래된 미래’다. 덴마크 자유학교는 시민의 힘으로 교육을 사회적 공통자본으로 정착시킨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국가와 (초국적)기업이 손을 잡고 무서운 속도로 사회의 공통재산을 사유화하는 이때, 교육만이라도, 아니 교육부터 공유재로 만들어내야 한다. ‘교육이 미래’라는 데 동의한다면, 교육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기획은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시민운동, 사회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원문보기:
http://m.khan.co.kr/view.html?category=2&med_id=khan&artid=201409192036505&code=990100#csidx2bad3ed26cceef39e620d8636aafbe6



그룬트비


요약 테이블
출생일 덴마크 우드비, 1783. 9. 8
사망일1872. 9. 2, 코펜하겐
국적 덴마크

     덴마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신학운동(그룬트비주의)의 선구자였으며, 찬송가 작가, 역사가,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 교육이론가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초기 그룬트비는 1803년 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은 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에다〉와 아이슬란드의 전설들을 연구했다. 1811년에는 영적·정서적 갈등을 거쳐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을 얻었으며, 루터 정신의 부활을 부르짓고, 낭만주의 철학자들을 반대하여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교육이론가로서, 라틴어 학자들과는 달리 모국어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자기 나라와 성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찬송가 작가, 역사가,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 교육이론가로도 뛰어났다. 1803년 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은 뒤 〈에다 Eddas〉와 아이슬란드의 전설들을 연구했다. 그룬트비의 저서인 〈북구의 신화 Nordens mythologi〉(1808)는 그의 초기 시들처럼, 낭만주의 운동으로 고무된 것으로 그의 연구에 전환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영적·정서적 갈등을 거쳐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을 얻은 후, 목사인 부친을 도왔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려는 그룬트비의 첫 시도인 〈세계사 연대기 Verdens Krønike〉(1812)는 많은 주목을 끌었으나 덴마크 교회의 합리주의적 경향을 비판했기 때문에 1813~21년에 목사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로스킬데 리임 Roskilde-riim〉(1814)과 그밖의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 및 〈성서의 교훈 Bibel-ske proedikener〉(1816)에서 루터 정신의 부활을 요구했으며, 낭만주의 철학자들을 반대하여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이 기간에 〈베어울프 Beo- wulf〉를 번역하여 앵글로색슨 문학 연구의 길을 열 었다(1820).

1825년에 그는 한 교회의 논쟁에서 중심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저서 〈교회의 답변 Kirkens gienmoele〉을 통해 신학자 H. N. 클라우젠이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취급한다고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세례식과 성찬식, 즉 살아 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적 계시라고 주장했다. 그의 글들은 검열을 받았으며, 1826년에는 목사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러 신학 저술들과 〈그리스도교의 교훈 Christelige proedikener〉(3권, 1827~30)에서 계속 발전해 나갔다. 새로 쓴 〈북구의 신화〉(1832)와 〈세계사 편람 Haandbog i verdenshistorien〉(전3권, 1833~43)에서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상세히 설명했다.

교육이론가로서, 예컨대 〈평생학교 Skolen for livet〉(1838)에서처럼 라틴어 학자들과는 달리 모국어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자기 나라와 성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18세가 지나면 인생에 눈을 뜨게 된다는 생각을 발표하여 1844년 이후 자원제 기숙국민고등학교들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기숙학교들에서는 모든 계층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도록 장려되었다.

1839년 그룬트비는 코펜하겐에 있는 바르토프의 성직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1861년에는 감독이 되었다. 그의 자유주의적 견해는 1849년 의회 정치를 도입하게 만든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룬트비는 특히 가장 위대한 스칸디나비아의 찬송가 작가로서 위대한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덴마크 교회용 찬송가 Sang-voerk til den danske Kirke〉(5권, 1837~81)에는 많은 창작된 찬송가들뿐 아니라 번역된 전 그리스도교 교회의 찬송가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찬송가들이 노르웨이어·스웨덴어·독일어·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영어로 번역된 〈그룬트비 선집〉은 1976년에 발행되었다.



 




---그룬투비---


 


 


● 그룬투비(Nikolai Grundtvig)의 생애와 업적


 


그룬투비는 코펜하겐 대학의 신학과를 수석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공부는 워낙 잘했고 졸업 마지막 시험인 설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 "라는 설교 제목으로 여러 교회 목사와 지도자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그러자 교회 목회자들은 그를 교만히 여겨 목사 안수도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원망하며 불평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룬트비는 1812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세계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당시 합리주의 경향에 기울었던 덴마크 교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룬트비는 이후 10년 동안 덴마크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시골의 교회를 떠돌아다니며 찬송시를 쓰고 문학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기독교는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세례식과 성찬식, 즉 살아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계시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교회가 루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그룬트비는 목사직을 그만둬야 했고 7년간 설교를 금지 당했다.


 


또한 후에 그룬트비는 조그만 섬에 목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는 섬에서 우울증을 겪으며 생활하다가 42살의 나이에 성령을 체험하고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나서 그 이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달라졌다. 불모의 땅, 가진 것이 없는 나라를 생각하며 그룬트비 목사는 민족의 앞날을 환상을 통해 보면서 세 가지를 선포했다.


첫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덴마크(땅)를 사랑하자.


셋째, 덴마크 사람들이여, 백성(이웃)을 사랑하자.


 



 


 


말씀으로 일어나 나라를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 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사상과 설교를 접한 달가스(Dalgas, 덴마크 공병대 대령)는 그룬트비와 함께 덴마크의 불모지를 경작지로 일구며 덴마크의 녹화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 의식개혁운동을 주창했다. 그 바탕은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이념이었다. 그룬트비는 또 덴마크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스칸디나비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새로운 낙농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성인기숙교육학교 설립을 주장했고 마침내 국민고등학교를 세웠다. 기숙학교는 자발적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통해 소극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갖도록 가르쳤다. 국민고등학교는 덴마크 전역으로 확산돼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고등학교를 마친 사람들의 변화된 삶을 목격한 덴마크 국민 사이에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룬트비는 낙농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목사들을 먼저 설득했다. 그는 목사들이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전령이 돼야 한다며 3애정신과 함께 낙농기술을 가르쳤다. 각 지역의 교회는 낙농기술을 가르치는 주민 센터가 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농업운동이 확산됐다. 덴마크의 위대한 중흥이 시작됐던 것이다.


 


1848년 그룬트비는 의회정치 도입을 요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코펜하겐 제11구에서 56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다시 보궐선거가 실시돼 무투표로 당선된다. 국회의원이 된 그룬트비는 국방의 의무와 신앙·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주창하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룬트비는 국회에서 “덴마크 국민은 누구나 덴마크 안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역설해 덴마크 특유의 소농제도를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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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잘 사는 나라’라고 말할 때 ‘어느 정도 잘 사는 나라인가’라고 하는 것을 정하는 잣대는 첫째, 의료보험제 둘째, 퇴직수당, 셋째. 교육제도라고 할 수 있다.


1.덴마크는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의료보험제도가 발달되어서 누구든지 병이 나면 한 푼의 돈도 지불하지 않고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며 약을 먹는다. 그 나라는 몇 년 전에 의료보험제도를 폐지해 버리고 나라에서 그 제도를 인수하여 덴마크 국민이면 누구나 다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고 한다.


 


2.퇴직수당이나 실업보험도 국가에서 인수하여 국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직장에서 퇴직한 후에는 어떤 종류의 보험 불입 여부를 막론하고 65세 이후부터 연금을 타서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3.이 나라의 교육제도는 유치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등록금, 수업료를 내는 것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고, 모든 교육은 국가에서 담당을 하고 있다. 외국 유학생이 그 나라의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에도 역시 등록금, 수업료를 안 내는 것은 물론이며 오히려 대학교로부터 한 달에 300달러 정도씩 용돈까지 지급되고 있다고 한다.


 


덴마크는 9세기 초에 복음을 접한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되었는데 교회는 국가에서 설립하며 목사의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나 발령을 내는 것도 국가에서 한다. 현재 덴마크 국공립학교의 50%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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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으로 다가 온 그룬트비의 업적


 


1. 교육 천국


 


세계의 국가수가 약 230개국이 넘는다. 일본, 중국, 미국, 한국, 영국, 소련, 독일 등등... 무수히 많은 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오직 덴마크만 대학까지 의무교육이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릴 정도의 위대한 교육 유산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 나라 국민이면 대학까지 의무교육을 누구든 받아야 한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체험하겠는가? 수없는 분야에서 자신만이 가진 독특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성경 잠언서에 보면 < 감추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라고 나와 있다. 이 말은 숨긴 것을 찾아내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라는 말이다. 모든 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대학까지의 의무교육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인류를 향한 축복이다. 이와 같이 감춰놓은 것을 드러내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지하자원을 한번 보라. 금, 은, 다이아몬드 등의 각종 보석들, 특히 석유와 같은 귀중한 자원일수록 모두 하나님이 깊은 땅속에 감춰 놓으셨다. 이것을 캐내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의 보물 중, 보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학까지의 의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왜 중요한가? 그것은 교육제도가 사회전반을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 1-2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대학원 2년, 박사코스 3년이다. 20~23년을 학생으로 보낸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공부하며 다 보낸다. 그만큼 교육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을 대학까지 의무로 교육받도록 제도화 했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덴마크는 개신교 기독정신에 입각해서 이룬 것이다. 기독정신의 핵심은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 핵심정신에서 이런 것이 이뤄진 것이다.


 



 


 


2. 십일조 천국


 


세계에 오직 이 나라만 십일조 세가 있다. 십일조 세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레위인(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자기 수입의 1/10을 국가에 낸다. 이것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 선교사나 목회자와 전도사들 )을 위해서 전적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이것이 복지기금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해외 입양을 보낸 곳이 바로 덴마크다. 1982년 당시 벌써 한국에서 입양 온 입양자의 수가 6만 명이었고 대부분이 벌써 성인이 다 되었다.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을 덴마크에서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자녀로 삼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십일조의 정신이다. 고아를 돕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라들을 축복한다. 실제 세계 역사를 통해 볼 때 복지국가가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지혜를 줘서 일으켰던 것을 보게 된다. 덴마크가 바로 그러한 예다. 근대 300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제일 안정을 누리는 복지국가가 어떤 나라들인가? 그 나라가 모두 복지국가들이다. 성경에 십일조를 하면 녹슬지 않고, 좀먹지 않으며, 도둑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십일조, 즉 위대한 복지법(십일조정신)을 따르면 반드시 하나님이 다음의 3가지를 축복한다.


 


1) 녹슬지 않는다.


녹슬지 않는 국가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립경제와 자주독립을 이룬 국가를 말한다. 이것은 모든 나라가 희구하는 국시다. 이것을 이룬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고 바로 강대국이다. 십일조를 하는 나라는 절대로 국가존립에 있어서 녹슬지 않는다.


 


2) 좀먹지 않는다.


좀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의 소기업, 중소기업, 대기업이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부도직전인 기업, 즉 속이 썩은 기업을 말한다. 십일조를 하는 나라는 이런 기업이 없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는다. 그래서 자동으로 경제 강국이 된다. 국가의 수입은 계속해서 늘고 지출은 계속해서 줄어든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이 아닌가?


 


3) 도둑이 들지 않는다.


이는 병충해, 태풍, 홍수, 쓰나미, 지진재해, 전쟁 피해 등등의 천재지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일이 십일조를 철저히 하는 나라에는 일어나지 않으며 설혹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철통같은 방어벽을 미연에 마련해 놓고 산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이런 나라는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겠는가?


 



 


 


3.교회 천국 / 국가가 주는 균등한 월급과 교회 장관 제도


 


덴마크에서는 목회자들이 대형 교회를 맡으려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시 중심의 대형교회나 시골 변두리의 작은 교회 목회자의 월급이 같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는 목회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도시 대형교회를 기웃거릴 필요 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현대신학을 탄생시킨 위대한 신학자 키엘케골이 바로 덴마크의 시골교회 목사였다. 현대 신학과 그 이전의 신학은 무엇이 다른가? 그 이전은 말 그대로 교리중심이었다. ‘예수가 제일이다’ 혹은 ‘성령이 제일이다’ 혹은 ‘하나님이 제일이다’ 혹은 ‘교회가 제일이다 ’등등의 주장이 있어왔던 시대를 통 털어 교리중심의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통폐합 시킨 인물이 바로 덴마크의 시골교회 목사, 키엘케골이었다. 현대 신학은 한마디로 교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인 말씀, 즉 메시지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시대적 신학의 천재가 나올 수 있었던가? 바로 국가가 교회의 크기를 묻지 않고 목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목회천국의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 준 데서 나올 수 있었던 기적이라고 본다.


 


또한 교회장관 제도다. 이것은 국무총리제나 국무장관제도와도 같다. 교회장관은 그 정신을 바로 성서에 그 뿌리를 둔다. 미국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반드시 성서에 손을 얹고 국민 앞에 서약한다. 그런데 덴마크에서는 이런 정도가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 법을 실생활에 적용하고 실행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4. 낙농 천국


 


한 나라의 부를 형성하는 요소가 많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요소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그것이 겉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 같으나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가져온다. 그 실례를 살펴본다. 덴마크는 세계 최초로 돼지축사의 기계화와 공업화를 이룬 나라다. 돼지축사가 수세식으로 기계화 되어있다. 돼지가 오줌과 인분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자동으로 정화조로 가도록 만들었고 거기서 다시 프로판 가스를 만들어낸다. 이 프로판 가스만 팔아도 우리가 돼지를 키워 판 가격보다도 더 비싼 이윤을 창출한다. 그리고 돼지를 100여 가지 이상, 부위별로 가공한다. 이것 또한 그냥 돼지를 파는 것보다 몇 배의 이익을 가져온다. 그러면 돼지에게서 버릴 부분이 무엇일까? 보통 그 꿀꿀거리는 시끄러운 목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돼지의 꿀꿀거리는 자연적인 소리와 클래식을 잘 접목시켜 전자음악으로 만들면 신경증 및 스트레스 치료 음악이 되어 음악을 통한 치료법에 사용된다고 한다. 돼지 털은 여자들이 화장할 때 사용하는 메이크업의 작은 부러쉬(솔)로 아주 귀하게 사용된다. 돼지의 발톱은 어떤가? 돼지의 발톱은 언제나 물에 잠겨져 있는데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이용하여 부러치 원료로 만들어 비싸게 판매한다고 한다. 돼지 한 마리에서 버릴 것이 없이 100% 가공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받아 일반 돼지고기로만 판매해서 받을 수 있는 수익보다 수배의 이익을 창출할 수가 있다. 무엇으로 이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다. 돼지를 키우고 가공하며 활용할 지혜를 받아 막대한 수익 창출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돼지만이 아닌, 소나 양 등 다른 가축도 이런 방법으로 키운다면 얼마나 큰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겠는가?


 


성경에 <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도다. >라고 한탄하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지혜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언제라도 그 지혜를 통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자산을 형성할 수가 있다. <그룬트비>는 바로 이와 같이 덴마크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한 위대한 목자며 국가를 극도로 부흥시킨 시대의 예언자로 오늘날까지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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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천국을 이룬 그룬트비의 겨자씨


 


판자촌에 사는 사람은 ‘월세 집’을 부러워하고, 월세 집에 사는 사람은 ‘전세 집’이라도 가졌으면 하며, 전세 집에 사는 사람은 ‘내 집’ 한 번 가져보는 게 소원일 것이고, 작은 집에 사는 사람은 아파트 평수 ‘넓은 집’으로 가려할 것이며, 넓은 집에 사는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저택’을 꿈꿀 것이다. 판자촌에 살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대 저택의 현관 열쇠를 건네며 ‘이곳이 당신이 살 집’이라고 말하면 그는 ‘현실 속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와 같이 일생을 종교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룬투비가 일구어 놓은 덴마크의 천국이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저택 이상의 꿈과 로망임을 본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1800여 년 그 시대에 이미 이런 복음, 교육, 치유의 천국 씨를 뿌린 것이 오늘의 천국을 이루었음을 본다. 모든 정치인이 주창하고 국가가 의도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복지 천국 지향임을 볼 때, 다시 한 번 그룬트비의 위대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가 일궈놓은 화려하고 위대한 업적 뒤편에 어둡고 칙칙했으며 외롭고 고독했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서려있음을 본다. 갓 졸업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목회에 막 뛰어들려는 그로부터 돋아나고 있는 싹을 기득권 세력들은 싹둑 도려내고 만다. 수석 인생의 두뇌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꿈틀대며 새로운 책을 써 내면 다시 ‘교계의 이단아’로 단칼에 목을 베어 교계의 사각지대로 내팽개쳐 버린다. 20대에 신학을 졸업하고 그가 42세가 되기까지 방황하고 번민하며 신음했던 그 20여년의 잿빛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토록 어둡고 암울했던 생지옥의 터널로부터 죽지 않고 살아 꿈틀대며 다시 빠져나올 수 있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한다.


 


성경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에


---“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라고 나와 있다.


 


그룬트비가 유형지와도 같은 섬에 처박혀 있으면서 정신이상이 걸릴 정도의 암담한 세월을 견뎌내며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겨자씨,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 속에 피부처럼 붙어있는 지성, 피처럼 흐르고 있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수 없게 했다. 그는 울고 또 울며, 괴로움을 끌어안고 뒹굴고 또 뒹굴며 생각하고 기도하고 다시 생각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이 땅에 왔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묻고 또 물었다. 그래서 겨자씨 같은 답을 얻어낸 것이다.


 


1. 삶과 괴리된 죽은 종교와 죽은 교육의 실상


2.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회 분위기 속 침체된 국민정신


3. 돌과 모래, 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경제


이런 거대한 어둠의 실체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과 싸워야 할 당사자가 바로 자신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금도, 은도, 돈도, 권력도, 배경도 없었다. 단지 있다면 겨자씨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믿음과 사명, 확신과 지성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백성을 사랑했던 그에게 하나님은 시대를 가로지르는 천재적 하늘의 지혜를 물 붓듯 퍼부어 주어 교육천국, 십일조 및 목회천국, 복지 천국, 낙농 천국의 겨자씨를 심을 수 있게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며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왔던 나에게조차 꿈과 영원한 로망이 되는 그런 천국이 이뤄지는 씨를 그는 19세기 때 이미 심어나갔던 것이다.


 


현실의 요구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유리되고, 일상의 삶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린, 즉 기능이 마비된 병든 기독교의 모습을 본다. 키엘케골이 주창한 대로 생명의 말씀을 기초로 확립된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한 활기차고 살아있는 기독교의 삶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회복되어져야 할 필연성을 읽는다.


 


만약 교회가 진정으로 삶에 이로움을 주는 기관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교회는 교리나 장정 등에 치중하기보다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삶 자체가필요 조건이 되어야 하고 삶을 있는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 삶의 유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믿음과 사명, 소망과 비젼을 주는 데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룬트비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전 인류적·역사적 정신 계발의 단초이자 훈련 공간으로써 제시한 교육정책과 종교정책은 2세기나 지난 21세기에서조차 전 세계에서 감히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교육 천국과 개신교 천국을 만들었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데 깊은 공감을 느껴 다시 소개한다.


 


---북유럽 국가의 역사는 교회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다. 신앙은 삶 속에서, 삶은 신앙과 더불어 북유럽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에게 복음은 구원을 전하는 기쁜 소식, 역사의 현장에서 발견한 진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초적인 힘,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복음이 되고 있다. 북유럽 국가의 국기에 담겨 있는 십자가는 북유럽의 신앙 유산이 그들의 삶과 역사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이 아름다운 북유럽에서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것, 수많은 신화와 아픈 역사를 감싸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국기와 함께 펄럭인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한 새마을 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며 새마을운동의 초기 주창자들은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활용했는데 새마을 운동의 의식개혁 및 품종개량 운동 등이 모두 그룬트비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민족 가난의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는 1등 공신이 새마을 운동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한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지만 낙농국 덴마크의 농업 정책을 그대로 본받아 새마을 운동의 기적을 이뤄냈던 것처럼 한국 기독교계 제2, 제3의 한국 그룬트비 목사가 쏟아져 나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교육, 종교, 치유의 천국을 향한 겨자씨가 심기어질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 9. 8 덴마크 우드비~1872. 9. 2 코펜하겐.
덴마크의 감독·시인, 덴마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신학운동(그룬트비주의)의 선구자.
 
또한 찬송가 작가, 역사가,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 교육이론가로도 뛰어났다. 1803년 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은 뒤 〈에다 Eddas〉와 아이슬란드의 전설들을 연구했다. 그룬트비의 저서인 〈북구의 신화 Nordens mythologi〉(1808)는 그의 초기 시(詩)들처럼, 낭만주의 운동으로 고무된 것으로 그의 연구에 전환점이 되었다.
1811년에는 영적·정서적 갈등을 거쳐 '그리스도교적 깨달음'을 얻은 후, 목사인 부친을 도왔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려는 그룬트비의 첫 시도인 〈세계사 연대기 Verdens Krønike〉(1812)는 많은 주목을 끌었으나 덴마크 교회의 합리주의적 경향을 비판했기 때문에 1813~21년에 목사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로스킬데 리임 Roskilde-riim〉(1814)과 그밖의 시집들에 수록된 시들 및 〈성서의 교훈 Bibel-ske proedikener〉(1816)에서 루터 정신의 부활을 요구했으며, 낭만주의 철학자들을 반대하여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이 기간에 〈베어울프 Beo- wulf〉를 번역하여 앵글로색슨 문학 연구의 길을 열 었다(1820).
1825년에 그는 한 교회의 논쟁에서 중심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저서 〈교회의 답변 Kirkens gienmoele〉을 통해 신학자 H. N. 클라우젠이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취급한다고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세례식과 성찬식, 즉 살아 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역사적 계시라고 주장했다. 그의 글들은 검열을 받았으며, 1826년에는 목사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여러 신학 저술들과 〈그리스도교의 교훈 Christelige proedikener〉(3권, 1827~30)에서 계속 발전해 나갔다. 새로 쓴 〈북구의 신화〉(1832)와 〈세계사 편람 Haandbog i verdenshistorien〉(전3권, 1833~43)에서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상세히 설명했다. 교육이론가로서, 예컨대 〈평생학교 Skolen for livet〉(1838)에서처럼 라틴어 학자들과는 달리 모국어에 대한 철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자기 나라와 성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18세가 지나면 인생에 눈을 뜨게 된다는 생각을 발표하여 1844년 이후 자원제 기숙국민고등학교들이 설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기숙학교들에서는 모든 계층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도록 장려되었다.
1839년 그룬트비는 코펜하겐에 있는 바르토프의 성직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1861년에는 감독이 되었다. 그의 자유주의적 견해는 1849년 의회 정치를 도입하게 만든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룬트비는 특히 가장 위대한 스칸디나비아의 찬송가 작가로서 위대한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덴마크 교회용 찬송가 Sang-voerk til den danske Kirke〉(5권, 1837~81)에는 많은 창작된 찬송가들뿐 아니라 번역된 전 그리스도교 교회의 찬송가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 많은 찬송가들이 노르웨이어·스웨덴어·독일어·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영어로 번역된 〈그룬트비 선집〉은 1976년에 발행되었다.
 
<브리태니커백과>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그룬트비
   - ‘하나님· 이웃· 땅’ 3愛정신, 번영 이끌어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는 지금도 세계 곳곳의 농촌운동가들과 신학자들이 그 이름을 외치고 있는 인물이다.

1783년 9월8일 덴마크의 우드비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힘이 아니라 국민성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국민 성격개조 운동과 농촌부흥운동을 벌여 오늘의 선진 낙농국가인 덴마크의 기초를 마련했다.

덴마크라고 하면 지금은 누구나 깨끗하고 아름다우면서 부유한 나라를 떠올리지만 그룬트비가 살던 19세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슬레스빅 홀슈타인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다. 남겨진 스칸디나비아 땅은 북해와 발트해의 바닷바람에 시달리며 돌과 모래,잡초만이 무성한 황무지였다. 국가 경제는 당연히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중앙은행이 파산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덴마크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다.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났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는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하는 의식개혁운동을 주창했다. 그 바탕은 루터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이념이었다. 그룬트비는 또 덴마크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스칸디나비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새로운 낙농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국민의식 구조가 개혁돼야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성인기숙교육학교 설립을 주장했다. 이것이 국민고등학교다. 기숙학교는 자발적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생활을 통해 소극적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갖도록 가르쳤다.

국민고등학교는 덴마크 전역으로 확산돼 덴마크 국민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국민고등학교를 마친 사람들의 삶을 목격한 덴마크 국민 사이에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룬트비가 내세운 ‘하나님을 사랑하자,이웃을 사랑하자,땅을 사랑하자’는 3애(三愛)정신은 곧 덴마크 국민의 구호가 됐다. 그 정신은 지금도 덴마크 사람들의 마음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 기적도 없고 요행도 없다. 오로지 노력하는 사람만이 거둘 수 있다는 자연의 진리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룬트비는 덴마크 국민에게 깨우쳐준 것이다.

그룬트비는 낙농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의 목사들을 먼저 설득했다. 그룬트비는 목사들이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전령이 돼야 한다며 3애정신과 함께 낙농기술을 가르쳤다. 각 지역의 교회는 낙농기술을 가르치는 주민센터가 됐다.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농업운동이 확산됐다. 덴마크의 위대한 중흥이 시작됐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말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도 그룬트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새마을운동의 초기 주창자들은 그룬트비의 사상과 그의 실천적인 성인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활용했다. 새마을운동의 의식개혁 및 품종개량 운동 등이 모두 그룬트비의 활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도 그룬트비의 3애정신과 비슷한 구호를 내걸고 있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 그룬트비였지만 그의 생애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국 덴마크로부터 배척받아 영국 등 유럽 각지를 떠도는 생활을 하기도 했다.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룬트비는 1812년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세계사 연대기’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당시 합리주의 경향에 기울었던 덴마크 교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룬트비는 이후 10년동안 덴마크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 기간에 그는 시골의 교회를 떠돌아다니며 찬송시를 쓰고 문학연구에 몰두했다. 1822년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의 구주교회에 초빙됐지만 3년 뒤 저술한 ‘교회의 대담’에서 당시의 신학이 지나친 합리주의 경향으로 신앙을 철학사상의 일종으로 취급한다고 다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기독교는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세례식과 성찬식,즉 살아있는 성례전 속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 계시라고 주장했다. 그룬트비는 교회가 루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결과 그룬트비는 목사직을 그만둬야 했고 7년간 설교를 금지당했다.

1848년 그룬트비는 의회정치 도입을 요구하는 운동에 뛰어들어 자신이 직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코펜하겐 제11구에서 56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다시 보궐선거가 실시돼 무투표로 당선된다. 국회의원이 된 그룬트비는 국방의 의무와 신앙·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주창하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역설했다.

그룬트비는 국회에서 “덴마크 국민은 누구나 덴마크 안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역설해 덴마크 특유의 소농제도를 확립했다.

이처럼 격동의 삶을 살았지만 그룬트비 개인은 교육과 문학에 높은 관심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북구의 신화’와 ‘세계사편람’은 청소년들에게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서 북유럽의 역사와 언어,성서를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됐다. 그룬트비가 지은 시들은 찬송가의 가사로 사용돼 당시 ‘덴마크 교회용 찬송가’ 60% 이상이 그의 작품이기도 했다. 이들 찬송가중 많은 작품이 노르웨이 스웨덴 독일 영국어로 번역돼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목회자이자 시인이며 교육가,정치인이었던 그룬트비는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861년에는 감독의 직위를 받았으며 11년뒤인 1872년 9월2일 코펜하겐에서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오늘날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많은 나라에서는 그룬트비의 생애와 이념을 이야기하며 그에게서 희망을 찾고 있다.그가 남긴 족적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자료: 네이버백과>
 
 
 
 
영원의 시인 그룬트비

스웨덴 사람은 그룬트비를 "대화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덴마크의 풍토와 역사에서 자란 "인간생활"과 "중생"의 큰 스승, 인류에게 희망과 구원을 선포하고 "영원한 삶"을 실천한 모든 사람의 종교인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어떤 작가의 노래나 찬송가 보다 그룬트비의 것이 더 많이 불리어진다. 그의 노래는 모든 음악책에 실려 있고, 고등학교 음악교과서, 덴마크 국립교회의 찬송가책에서 수없이 볼 수 있고, 자유교회의 찬송가책에서는 더 많이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매주 일요일, 교회의 축제에서, 그리고 결혼식, 장례식 때는 언제나 그의 찬송가를 부른다.

사람들이 그룬트비의 노래를 온 나라에서 많이 부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말과 시, 행동이 바로 자기들의 영혼, 사랑, 한의 절실한 표현으로 생각하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국민들이 즐기는 풍부한 말과 좋은 노래가 많은 나라와 개인들은 그만큼 잘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룬트비는 루터교회의 회개하는 기독교의 설교자로써 크게 청중을 끌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그의 힘 있는 목소리, 수난의 덴마크 역사에 대한 사색, 풍부한 지식과 경험, 모국어 존중의 열정, '활력'과 대화중심의 교육철학 등으로 사람들 마음에 큰 강물을 이루었고, 그와 동조하는 자발적 모임을 형성해 갔다.

민중들은 1960년대에 '국민고등학교' 운동의 표어가 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표어로 국민고등학교운동을 전개하였고, 또한 새 교육의 선봉 크리스텐 콜(Kristen Kold)의 영향력으로 확대되었으며 종교적인 그룬트비주의(Grudtivism)가 하나의 운동으로 통합되었다.

애국심의 발로

1807년, 영국군의 덴마크 공격은 그룬트비에게 고뇌와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덴마크의 가장 무도회(1808)"에서 그를 속박하고 있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화해를 요구하였다. "강한 오딘(북유럽 신화의 신)과 순수한 그리스도! 당신의 갈등은 끝나게 되어졌다. 우주 아버지의 쌍둥이 아이들이여!"

1848~1850년의 전쟁 중에 그가 발간한 "덴마크 사람"의 잡지에서 군대의 투쟁정신을 북돋았고 그의 아들들은 지원군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조국을, 그리고 모국어를 더 좋아한다는데 동의할 것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기독교는 인간 삶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삶으로부터 인간을 유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고등학교'란 말조차도 실제로는 "대학교"를 의미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자신의 교육 형태를 "대중의 고등학교"라고 불렀다. 그는 그것을 "인문 고등학교" 즉 종교대학의 복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의 이익을 위한 특별한 행위란 국가자체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 고상함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적인 과목을 위한 고등학교는 그와 위배되는 대학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고국에 대한 사랑을 고무시켰으며 조국에 대한 자연스런 권리를 확정했다. 덴마크법률, 조직, 역사, 문학과 덴마크 민요에 대한 지식이 고등학교의 주춧돌이 되었다.

"인생이란 것이 풀밭에 있는 꽃의 삶보다 더 신비하고 자유롭고 훌륭한 것이 못되는 구나!" 그는 깨달아야 하는 것이 이 인생이며, 모든 나라에 있어서 그것은 그 나라의 모국어를 통해서 만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인간 자체가 오직 국민적인 배경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찬 8세와 특히 그의 왕비는 그 구상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지만 왕의 사후에 국회에서 그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유명한 라틴어 학자인 종교원장이 그 소문을 듣고 애국심을 독점할 계획이라고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입속의 말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의 표현이며 인류 상호간의 동료의 표시이다. 인간의 생활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기독교는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 특별한 인간적인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자만이 기독교를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인생 자체를 위해 우리자신을 인간존재로서 의식하여야만 한다.

자유정신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는 정신은 자유로울 때만 활동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정신의 요소이다." 그룬트비는 불란서 혁명의 개인주의적인 자유개념을 배격하고 타인들의 존중에 기초를 두는 북유럽인의 견해를 환영하였다.
자유는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이다. 공공정신은 개인 편에서는 희생을 요구한다. 모든 생활의 계몽은 온화하고 유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루소 등)은 활력이 개인의 본성보다 더욱 고귀한 어떤 것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생활은 티끌과 영의 신적인 실험물이다. 그룬트비는 조물주를 생활의 구세주로 주장치 아니했다. 국민고등학교(Folk High School)는 "생활을 위한 학교"이어야 했다.
배움이 그것 자체를 위해서나 생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학교들과 대조함으로서, 책들이 생활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학교들과 대조함으로서, 그 개념이 파악된다.

그는 청춘을 한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수용력이 있는 기간으로 간주했다. 청춘기에 나머지 과정을 결정지우는 "분위기"가 발생하고, 경험들의 음향과 생활의 사건을 기록할 안목이 생긴다. 즉 생활 자체의 발생이 살아있는 교육과 죽은 교육의 차이를 경정하는 핵심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생들 마음속에서 죽고, 부정적이고, 생활 자체의 연관 속에서 생활의 약동이 없는 죽은 교육에 반대하여 활기를 만드는 그러한 계몽을 아는 산 교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훌륭한 교사의 필수 요건으로서 풍부하고, 내면성 있고, 영혼의 생활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일이 발생하는 교실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교실 사이에 존재하는 무형의 뚜렷한 차이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사실상 많은 것이 일어날지라도 그의 시대에는 "죽은" 교실에서도 많은 활동이 있을 수 있었다. 왜냐면 사물들이란 교사와 학생의 마음속에서 어떤 종류의 중요한 의미를 띄지 않고도 완전히 암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교실

"생활의 계몽"에 관한 그룬트비의 사상에 있어 열쇠가 되는 단어는 "상호작용"(Interplqy)이었다. 그는 특히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이것은 수업이 단지 첫째 교사와 학생 간, 둘째 학생들 간의 대화에 들어갈 때 성취될 수 있다고 했다.

그룬트비의 "생활을 위한 학교"는 소년다운 자만심과 교활, 또는 허영의 양태,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려는 욕망, 이른바 생계의 안전한 방법을 구하기 위한 탐욕을 발전시키고 육성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로는 국민고등학교에서 실제로 가르치는 과목은 한 교사가 그 자신이 아주 절실히 관심을 두고 있는 어떤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사실만큼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일은 항상 상호간의 살아있는 과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룬트비는 아주 놀랍게도 아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곧 유용하고 진실한 인간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은 진실로 책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훌륭하고 정직한 마음, 건전한 상식, 상당히 좋은 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주목했다. 그리고 태양이 생활에 비출 때 생활이 무엇과 같이 보이는가 보여 질 수 있고, 그들의 주의를 일으킬 수 있는 적당히 계몽된 사람에게 말해질 수 있는 충분한 생동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생활의 계몽이라고 규정된 개념의 목표이었다.

그룬트비는 방랑시인, 국가적 나무줄기로부터 자라나고 잎과 꽃에서 삶과 활력, 생기를 얻은 시인, 그들에게선 진실한 자연과 모국어가 말의 살아있는 날개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생활을 위한 학교는 역사적이며 시적인 학교라 할 수 있었다.
시는 절망에서 일으키고, 감옥에서나 안전하게 이끄는 인간마음의 의심을 가라앉히고 해소하는데 삶과 전달방식의 사적해석이 필요한 현실세계와 관련을 가졌던 것이다. 결국 시란 단어는 창조를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에시스(Poiesis)에서 유래한 것이다. 창조는 "생활력"(life force)과 생명력인 삶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렇게 시대와 창조력의 요구가 한나라의 방랑시인을 국민들, 젊은이들과 "상호작용"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그들의 활력과 모국어에서 풍요와 힘을 얻었고, 의미 있는 모든 색조와 선율을 타고 가슴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모국어의 권리

그룬트비시대에서 덴마크 언어는 밀려나고 경멸되는 경향이 있었다. 학자들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지식층에선 독일어, 불어가 사용되었다. 그는 "모국어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노골적으로 그는 교묘히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학구적 문화"를 민속 문화와 대조시켰다. 아무도 전에 그런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소박한 덴마크 사고방식은 덴마크의 소박한 언어예절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모든 국민들을 연결하고 단결시켰다.

기독교신앙은 "자연적이고 인간의 삶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빈약한 신학과 기독교적인 신앙생활에서 처량한 모습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의 진실한 생명에 대한 참여의 빈약과 무엇보다도 우리자신의 인간의 삶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 때문이다. 루터교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영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성령이며 또 하나는 이 세상의 영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삶 가운데서 영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성령에 대한 모든 것을 반드시 무효화하고 만다.
인간의 삶 자체가 없는 구원은 없다. 새로운 생명이란 그것의 원수인 어두움, 거짓,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진 옛 생명이다. 우리들은 마귀를 버리고 그의 모든 일과 그의 모든 존재를 버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창조물이 충분한 빛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되어"져야하고 분명한 구별이 있어야 하며 영원까지 있어야 한다.

"먼저 사람이 되고 그러고 난 다음에 기독교인이 되라".

그룬트비주의 교육은 권위주의가 아니다. 개인은 자발적인 인간의 친교와 상호간의 자유와 자연스러운 감각에 기초하고 있다. 국민고등학교와 가정에서의 요소는 대화하며 항상 상상력을 자극하고 인간의 시계(視界)를 확대하며 인생에 대한 긴밀감을 불어 넣어, 자유와 밀접한 교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룬트비주의는 덴마크의 민주적 전통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국민고등학교에서 교구의 목사의 아내는 그 학교를 학생들의 안식처로 만들고 일반적인 가풍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순수한 인간

자유로워지려는 사람은 그의 동료도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한다. 그룬트비는 "여성은 아름답고 영원히 젊고, 모성적이며 결실의 본질이라는 모든 신의 찬사에 해당할 수 있는 유일한 가시의 인간이다"고 확신하였다.

그룬트비는 영국의 어느 저녁 부군이 의사인 아름다운 부인과 추억의 대화를 가졌다. 다음날 아침 부군은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는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클라라의 모습은 나의 입을 열었으며 바위는 부서지고 시냇물은 흘렀다." 그룬트비는 그때 그 자신이 자유로웠고, 영감이 있었던 것을 느꼈다.
(그룬트비, 카이다아닝(Kaj Thaning) 저, 정원식 역, 성광문화사, 1980: pp. 37, 106, 116, 126, 131-5, 144-9, 151-4, 156-7, 206-7, 244)

"먼저 참된 덴마크 사람이 되라. 그다음에 크리스천이 되라. 조국 덴마크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인간에게는 신의 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룬트비는 말한다. "교육은 인생에 대한 열과 흥미를 일으켜서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 높은 교육과 문화의 향상을 목표로 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인생의 공통된 갈망이어야 한다. 간판을 얻기 위한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청년들의 마음에 미덕과 여유가 있는 진실한 애국심을 길러주려면 교육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시의 기초'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

그는 1866년(84세)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여 교육, 종교, 산업, 토지정책의 개선에 진력하였다. 그는 진리를 위할 뿐 일신의 영욕을 돌봄이 없었고 정부부패의 권세와 싸워 사회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현명하고 용기 있는 국회의원이 있는 나라에 부패한 정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룬트비가 66세 때에 코펜하겐에서 첫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을 때의 일이다. 연설과 수단이 능수능란한 세무관리 출신자와 대결하였는데 불과 56표의 차로 낙선되어 전국의 큰 화제 거리가 되었다. 그때에 2천여 명의 애국자들이 연서하여 그를 칙선의원(勅選議員)으로 임명하도록 국왕께 호소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프레스조 선거구에서 당선된 한센은 스스로 사퇴하고 그룬트비를 보선시키기에 열성을 다했다. 이것은 덴마크 정치사에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유산이 된 것이다.
그는 1872년 10월 3일에 89세로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더 많은 덴마크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 위대한 애국의 지성이 살아 움직이어 정치도, 산업도, 교육도 원활히 발전되어 그의 이상이 꽃피어갔다.
 
<새 역사를 위하여, 유달영 저, 삼화출판사, 1972: pp. 147-8, 151-5>
<자료출처: 전남여고39회>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지금 덴마크는 잘사는 나라 중에서도 잘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소득이 높은 점보다 각종 복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에 국민들의 삶의 질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음으로 인해서다.

그러나 150여 년 전의 덴마크는 그야말로 바닥을 헤매는 나라였다. 영국과의 명분 없는 오랜 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고 나라 안에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상이군인들만 그득한 처지였다. 국토 중의 좋은 부분은 빼앗기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만 남겨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면 번성하는 것이 도박과 싸움판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덴마크를 일으킨 정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바로 그룬트비히 목사의 삼애 운동(三愛運動)이다. 삼애 운동이라 함은 그룬트비히 목사가 주창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겨레 사랑의 세 가지 사랑 운동을 일컫는다. 덴마크란 나라가 그렇게 거덜 나게 되었을 때에 선각자 그룬트비히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일으키려면 먼저 종교와 교육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른 신앙 운동으로 백성들의 혼을 깨우쳐 나가는 교육 운동을 일으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그 유명한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 운동이다.
 
새 교육 운동

그룬드비히(Nikolaj Grundvig, 1783~1872) 목사가 삼애 운동(三愛運動)을 바탕으로 삼아 종교와 교육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에 감명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다.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 1816~1870)이란 이 젊은이는 18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자 그룬드비히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감명을 받은 바대로 자신이 맡은 교실에서 교육 개혁을 실천하려 하였다. 살아 있는 말을 살아 있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산 교육을 실천하자는 뜻에서 그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교과서로 학생들에게 생생한 대화식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의 반 학생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로 받아들였으나 교육청 당국으로부터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2년 만에 교직에서 해임 당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기를 15년을 거듭하다가 35세가 되던 때에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덴마크 교육을 살리고 나라까지 살리는 새 교육 운동, 새 나라 건설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헌 농가 건물 한 동을 빌려 15명의 학생들을 모아 5개월 기간으로 실시하였던 첫 번째 학기부터 그는 학생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살고 함께 뒹굴며 산 교육을 베풀었다.
 
크리스텐 콜이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던 때에 1851년 11월 1일을 개교일로 잡고는 첫 입학생 15명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던 전날인 10월 31일까지 단 한 명만이 등록하였다. 난감하여진 그는 11월 1일에 개학식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학교 뒤 숲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시작하는 이 학교에 학생이 겨우 한 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14명의 학생을 더 보내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숲에서 나온즉 마차 소리가 덜커덩거리며 나더니 한 마차에 14명의 이웃 마을 젊은이들이 타고 와 학교에 등록하겠다며 교정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에서 크리스텐 콜은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뒹굴며 가슴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첫 학기인 5개월이 지난 뒤에는 15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들이 졸업을 앞두고 남긴 소감문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크리스텐 콜 선생이 그들에게 삶의 방향을 깨우쳐 주었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조국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고 적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게 매력을 느꼈던 철학자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有神論的 實存主義)의 원조 격으로 인정받는 철학자로 그룬트비히 목사와 동시대에 활약하였던 분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는 동안에 상급반이 되면서 한 가지 고민하였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장래에 어느 분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때 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선각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두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와 그룬트비히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순수 철학자다.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약혼녀까지 포기한 채 순전히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전념하였던 분이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코펜하겐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자신을 실현하여 나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룬트비히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후 일반 성직자들처럼 교회 안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겨레와 백성을 살리는 운동에 헌신하였던 분이다. 말하자면 사회 개혁자로 활약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개혁자다. 특히 자신이 속한 덴마크 교회와 교육을 개혁하여 새로운 덴마크 국민정신을 일으키는 데 헌신하였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였던 대학생 시절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따라 순수 문학으로서의 철학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그룬트비히 목사와 같이 사회 개혁자의 길을 가느냐의 문제로 갈등을 겪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룬트비히 목사의 길을 선택하였던 셈인데 그간에 이루어 놓은 열매로써 평가한다면 그룬트비히의 그림자만 밟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룬트비히 목사의 혼을 깨우는 설교에 감동을 받은 크리스텐 콜이 세운 국민고등학교는 헛간 같은 허름한 집에서 15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다섯 달 만에 첫 학기를 끝낸 후에 학생 중의 한명이 남긴 글이 있다.

“나는 일반 국민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높고 깊은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공허함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의 고민을 콜이 해결해 주었다. 욕망과 회의에 차 있었던 때에 나는 그의 두 손에 쥐어진 양초 토막과도 같았다. 그는 마치 조각가가 흙덩이를 빚어 작품을 만들 듯이 같은 방식으로 나를 만들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에게는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혼 속에 깃들어 있는 고귀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젊은이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채워졌다.

이런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교사인 콜의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혼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말이 살아 있는 젊은 혼에게 전하여졌을 때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힘이었다. 이런 힘이 참 교육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룬트비히가 활약하였던 때의 덴마크는 독일의 침범을 막으려고 10여 년간 싸우다가 지치고 쓰러져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때였다. 국토 중에 아름답고 쓸모 있는 부분은 빼앗기고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그룬트비히 목사는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향하여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토하였다. 삼애 운동(三愛運動)으로 알려진 운동이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백성들을 도우신다. 살고자 땀 흘려 일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둘째, 땅을 사랑하라! 좋은 땅은 독일에 빼앗기고 황무지 모래땅만 남았으나 그렇다고 낙망하여선 안 된다. 황무지 땅도, 모래땅도 땀 흘리고 정성들여 갈고 가꾸면 옥토로 바뀐다.
셋째, 동포를 사랑하라! 건장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강대국과의 1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서 전사하고 약자들만 남았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들도 뭉치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룬트비히의 심금을 울리는 애국 설교에 뜻있는 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삼애 운동을 실천하여 병든 겨레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

1864년이 덴마크에게는 망국의 해였다.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덴마크가 희망을 잃어버린 해였다. 개인도 국가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됨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희망을 잃어버림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개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개인이 망하고, 한 민족이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민족이 망하게 된다. 1864년에 덴마크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덴마크는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10년을 끌어왔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최후로 항복하게 된 해였다. 항복하게 되면서 덴마크는 국토 중의 곡창지대였던 남쪽 땅을 독일에 빼앗기게 되고 쓸모없는 황무지나 모래밭만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실망에 빠진 젊은이들은 댄스나 당구치기로 세월을 보냈다. 어른들은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때에 구국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이가 그룬트비히였다.

이미 65세이 이른 그는 율랜드 반도 남쪽에 있는 스캄링스뺑컨(Skamlingsbanken)이란 곳에서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 아래 날마다 강연회를 열어 백성들의 혼을 깨우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