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데이아’ 배움은 놀이였다…생각을 늘 깨어있게 하는

2016. 10. 10. 11:32교육, 도서 정보/교육혁신 자치의 길




‘파이데이아’ 배움은 놀이였다…생각을 늘 깨어있게 하는

ㆍ잘 노는 것이 진짜 공부다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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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보고 있다.” 어느 고3 교실에 걸린 급훈이라고 한다. 참으로 ‘웃픈’ 현실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안의 자기를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고, 그 발견은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때에 가능하다. 그런데 엄마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서는 일이 가능할까? 자립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스스로 가릴 줄 아는 자기 판단능력을 갖출 때에 가능한 것인데. 또 “다음 중 아닌 것?”을 골라내는 연습을 통해서는 판단능력이 생겨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휴대폰을 검색해 보면 다 나오는 답을 외우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은 ‘오답 분석’을 가르치는 학원으로 간다.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지금의 교육 방법과 입시 방식에 대해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서 차라리 입시 공부는 학원이 맡고, 학교는 잘 노는 법이나 가르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입시 경쟁력에서 학교가 학원에 밀린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잖은가.

이런 비아냥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에서 소크라테스(가운데 흰옷)는 오른손으로 독배를 잡으려 하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것을 암기했더라도 머리가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지식의 공동묘지’일 뿐이라는 뜻을 강조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에서 소크라테스(가운데 흰옷)는 오른손으로 독배를 잡으려 하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것을 암기했더라도 머리가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지식의 공동묘지’일 뿐이라는 뜻을 강조했다.

“엄마가 보고 있다.” 어느 고3 교실에 걸린 급훈이라고 한다. 참으로 ‘웃픈’ 현실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안의 자기를 발견할 때부터 시작되고, 그 발견은 스스로 설 수 있게 될 때에 가능하다. 그런데 엄마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서는 일이 가능할까? 자립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스스로 가릴 줄 아는 자기 판단능력을 갖출 때에 가능한 것인데. 또 “다음 중 아닌 것?”을 골라내는 연습을 통해서는 판단능력이 생겨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휴대폰을 검색해 보면 다 나오는 답을 외우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은 ‘오답 분석’을 가르치는 학원으로 간다.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지금의 교육 방법과 입시 방식에 대해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해서 차라리 입시 공부는 학원이 맡고, 학교는 잘 노는 법이나 가르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입시 경쟁력에서 학교가 학원에 밀린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잖은가.

이런 비아냥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짜 공부는 결국 잘 노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단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시험을 잘 쳐야 한다는, 공자가 과거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이유로 공부하라고 설파한 적이 없다. 물론 그 시절에는 대학 입시도, 과거 시험도 없었다.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말이 결국은 좋은 사람이 되라는 소리일 텐데, 이와 관련해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잘 노는 법이 중요하다는 김월회 선생의 지난 글(10월1일자 22면)은 설득력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잘 노는 법을 배우는 것이 그리 손해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금수저’로 태어나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잘 노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들이다. 잘 노는 법만 알아도 본전은 지킨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공부가 시험준비를 지칭하는 행위로 축소되었다. 적어도 서양 문헌에서는 공부가 시험준비는 아니었고, 더 넓은 의미의 배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히려 공부의 반대 뜻인 놀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우리 말 ‘공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파이데이아(paedeia)이다. 파이데이아라는 말을 배움 혹은 교육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틀린 옮김은 아니지만 아쉬운 번역이다. 파이데이아는 원래 놀이였기 때문이다. 이를 보증하는 증인을 모셔보자.

■좀 놀아본 사람, 소크라테스

진지하기로 소문난 사람, 바로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이는 소문에 불과하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유머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 놀 줄 아는 사람, 좀 놀아본, 아니 심하게 놀아본, 진짜 잘 논 사람이었다. 후대의 신봉자들은 그를 이데아 세계에만 올려놓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는 번잡한 시내를 피해 교외로 놀러도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플라톤의 묘사이다.

공부는 생각이 늘 깨어 있게 하는 돌봄이라는 <파이드로스>의 내용 등을 싣고 있는 2세기경의 파피루스.

공부는 생각이 늘 깨어 있게 하는 돌봄이라는 <파이드로스>의 내용 등을 싣고 있는 2세기경의 파피루스.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가 나눈 대화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여보게 파이드로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케팔로스의 아들 뤼시아스에게서 옵니다. 성벽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길이지요. 아침부터 그 집에서 내내 시간을 보냈거든요. 성벽 밖으로 나가는 참이지요. 실은 거리를 걷는 것보다 이게 훨씬 덜 피곤하다는 말을 선생님과 제 친구인 아쿠메노스에게서 들었거든요.” “맞는 소리네. 한데, 뤼시아스는 시내에 있나 보지.” “네, 에피크라테스의 집에 머물고 있지요. 그 집은 첫 번째 소유자였던 모뤼코스의 올림피온 근처에 있지요.” “무슨 말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나? 십중팔구 뤼시아스가 이야기 잔치를 풀어 놓았겠지.” “여유가 있으시면 길을 걷지요. 말씀을 다 해드리지요.” “아니, 무슨 말인가? 내가 뤼시아스와 자네가 나눈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어하는지를 자넨 모른단 말인가? 핀다로스의 노래대로, 돈 버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아닌가?” “그럼, 가시지요.”(<파이드로스>에서)

여느 점심 시간에 볼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우연히 길에서 아는 친구를 만났고, 어제 벌어진 술판에서 무슨 이야기가 벌어졌는지를 묻는 장면이다. 조금 피곤하고 번잡하니 도심을 벗어나 성벽 밖으로 나가서 잠시 쉬면서 어제 이야기를 나누자는 대목이다. 얼핏 보기에 평범하다. 뭐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면 파이드로스와 소크라테스가 나눈 대화에서는 ‘공부가 놀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선, ‘성벽 밖으로 나가는 산책’을 들 수 있다. 이건 놀러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아테네 근교를 흐르는 일리소스 강변에 위치한 북풍의 신인 보레아스의 제단이었다. 이곳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감탄이다. “헤라에게 맹세컨대, 매혹적인 쉼터일세. 플라타너스 나무는 높고 넓게 뻗어 있고, 키 큰 버드나무의 그늘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드네. 꽃은 만발하여 향기로 그윽하고,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너무도 사랑스러운 샘이 흐르며, 그 물은 너무도 시원하네. 내 발이 그 증거일세. 조그만 석상과 신상들을 보니, 어떤 님프들 혹은 아켈라오스를 모시는 성소 같군. 이런 말을 해도 좋다면, 이곳의 바람은 참으로 ‘심쿵스럽고’ 참으로 상큼하네.”(<파이드로스>)

공자가 했다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는 바로 그 일을 소크라테스가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대한 플라톤의 묘사는 마치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Sappho, 기원전 6세기)의 ‘아프로디테 찬가’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의 말재주 덕분이겠지만, 소크라테스가 놀러 간 쉼터는 그야말로 매력적이다. 쉼터를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성적인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심쿵스럽다”고 옮긴 그리스 원어는 “agapeton”이다. 이 단어는 원래 욕정을 드러내는, 실은 늑대가 양들을 덮치듯이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쓰는 표현이다(<파이드로스>). 따라서 “심쿵스럽다”는 말도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사랑스러운 쉼터가 오늘날의 시험준비에 해당하는 암기 훈련을 하기에는 적합한 장소가 아님은 분명하다.

■암기, 시험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가 <수학의 정석>을 푸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지적한다. 다름 아닌 파이드로스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파이드로스여, 내가 자네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나를 속이는 걸세. 그 어느 것도 아닐세. 내가 잘 알고 있는 파이드로스는 이렇다네. 일단 뤼시아스의 연설을 경청한다네. 한 번 듣고 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반복해서 연설을 해 달라고 간청한다네. 하지만 파이드로스에게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 종국에는 뤼시아스에게서 책을 빌리고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것을 뚫어지게 읽지.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아침을 보내지. 그러다가 지치면 산책을 나가지. 내가 알기로, 개를 걸고 맹세하건대, 연설이 길지 않으면 통으로 외워버리지. 이 연습을 하기 위해서 성벽 밖으로 나가지.”(<파이드로스>)

반전이다. 성벽의 산책길은 독서실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이에 멋쩍은 파이드로스의 어설픈 반박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사실, 소크라테스여, 저는 표현을 구구절절 다 외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해서,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을, 뤼시아스가 어떤 점들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한 바에 대해서 처음부터 하나씩 순서대로 요약하겠습니다.”(<파이드로스>)

파이드로스가 한 방 먹은 것이 분명하다. 연설을 통으로 암기했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일침이다. “친구여, 왼쪽 소매 아래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먼저 보여주게. 바로 그 연설 같구먼.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아주 아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이지만, 뤼시아스가 여기에 있는 마당에, 내가 굳이 자네의 ‘암기’ 연습을 위해서 귀를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네. 자. 꺼내보게.”(<파이드로스>)

소크라테스는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암기가 공부는 아니라고 한다. 플라톤의 말솜씨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플라톤의 장면 묘사와 심리 묘사의 섬세함이 기가 막히게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파이드로스를 가지고 노는 소크라테스의 짓궂음이 정말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이 장면의 역할이 말장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작품 전체에 걸쳐 진행되게 될 책에 대한 비판을 위한 전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부, 생각을 늘 깨어있게 하는 돌봄

소크라테스는 장난과 유머를 즐길 줄 아는, 놀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공부란 당연히 놀이였다. 그에게 공부란 억지로 암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플라톤이 심지어 책까지도 비판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게 말했다. “공부하는 자의 영혼에 앎과 함께 쓰여진 말은 그 자신을 지킬 힘을 갖추고 있고, 어떤 이에게 말을 해야만 하고 어떤 이에게 침묵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네.” “그러니까 선생의 말씀은 아는 사람의 말은 살아 있고 영혼이 깃들어 있지만, 글로 적혀 있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겠지요.”(<파이드로스>)

아무리 머릿속에 많이 암기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깨어 있지 않으면 머리는 ‘지식의 공동묘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늘 깨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플라톤의 묘사이다. 파이드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말했다. “싸구려 놀이가 아니라 말을 가지고 놀 줄 아는 놀이를 말씀하시는군요. 소크라테스! 정의(正義)나 선생께서 언급하시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놀이를 말씀하시는거군요.” “그렇네. 소중한 친구인 파이드로스, 바로 그거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진지함이 곁들인다면 더욱 고상한 것이 되겠지. 만약 어떤 이가 변증술을 사용해서 영혼을 붙잡아 귀 기울이게 하고 앎이 살아있는 말의 씨앗들을 심고 뿌린다면 말일세. 이런 말들은 자신을 비롯해서 그 말들을 기른 사람을 도울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실을 맺고 씨를 낼 것이네. 그로부터 또 다른 말들이 다른 습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자라나고 이를 통해서 영원히 불멸하면서 이어지도록 만들게 할 것이네. 이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힘이네.”(<파이드로스>)


잘 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란 결국 놀이라는 얘기다. 원천적으로 생각을 늘 깨어있게 돌보는 일이 바로 공부인데, 그것은 적어도 암기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핀다로스의 말대로 노는 일이 ‘돈 버는 일’보다 더 귀한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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