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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내려가자, 마을이 되자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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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로 내려가자, 마을이 되자 1화

서울은 거대한
난민촌이 되었다

도시의 삶 정리하기

연재일 : 2016.03.02 by 정기석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귀농 또는 자발적 하방을 결행해서, 농사를 짓든, 농사를 짓지 않든 예측가능하고 지속가능하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공동체 생활과 사회적경제의 생업을 능히 꾸려가는 '귀농의 경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후원금은 <귀농의 진실>이라는 이름의 책을 위한 콘텐츠 제작비용과 취재비용 그리고 무주 초리넝쿨마을의 '마을공동체Café'를 여는 데 필요한 집기와 장비를 준비하고 문화상품을 개발하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귀농의 터전, 무주 초리넝쿨마을

쉰이 되자
아무 짓도 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무위(無爲)로서
일상을 진종일 탕진하기로 했다
차라리 불한당들과 어울리는 도시의 자영업자가 되거나
짖궂게도 사보타지를 즐기는 철의 노동자가 되거나
심지어 잡초를 농사짓는 초보농부가 되기로 했다
처자식과 채권자들은 당황했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그 순간, 새로운 숙명이 돌연 나타나
날개 빠진 어깻죽지를 서둘러 수선하기 시작했다

졸시 '쉰에 하게 된 일' 전문이다. 수년전 지천명의 고개를 넘으면서 지난 귀농 여정의 소회를 고밀도로 응축해 한숨처럼 내뱉은 것이다. 어느새 도시를 벗어나 마을로 내려와 깃든지 십수 년이 지났다.

도시난민에서
귀농인으로 

나는 1963년 가을, 남녘 진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바라던 민주공화국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재수 좋은 팔자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은 먹고살려고 서울로 몰려들었다. 재산도, 가장의 일자리도, 미래의 희망도, 그리고 재수까지 없던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전국에서 꾸역꾸역 모여든 난민들로 서울은 거대한 난민촌이 되었다.

생활과 생업이 하나되는 '마을연구소'

그 난민촌의 일개 난민으로 병영과 감옥 같던 각급 학교를 그냥, 무조건 다녔다. 당면 목표는 졸업장이었다. 사회에서는 말단 은행원, 비민주노조 간부, 군소언론 기자, 소호벤처 경영자 노릇을 맡았다. 밥벌이는 늘 어렵고 두려웠고 처자식은 늘 무겁고 버거웠다. 과로나 스트레스보다 수치심이나 모멸감이 더 힘들었다.

도시의 뿌리 깊은 부조리나 거대한 구조악에 홀로 맞서 보려다 낭만적인 이방인이나 철없는 혁명가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도시난민 생활은 늘 역부족이거나 불가항력이었다. 서서히 국가나 도시의 진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4%의 도시 주거지역에
91.66%의 인구가

일단 도시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은 도시민이다. 도시민이 거주하는 2.4%의 주거지역에 91.66%의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거꾸로 농촌에는 사람이 너무 없다. 다 먹고살려고 도시로 떠났다.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채 1명도 농촌에 살지 않는다. 농부 10명 중 7명은 환갑을 넘은 노인이다.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 수도 없다.

무엇보다 과밀한 도시에서는 인간적인 공동체생활이 어렵다. 도시의 동네에서는 생활과 생업이 철저히 분리되고 격절되어 있다. 국가와 자본의 설계도에 따른 것이다. 생활보다 생업이 우선이고 집보다 직장이 우선이다. '먹고사는 일'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가장의 책무' 때문에 삶과 쉼과 놀이는 뒷전이다. 날로 육체는 지치고 정신은 메마른다. 무심코 뒤돌아보면 인생의 황혼이다. 가진 건 빚이 남아있는 아파트 한 채 뿐이다.

'마을Cafe초리'의 문화상품 '이야기가 있는 그림문패' -놀고 먹고 베풀고 나누는 정성례 할머니

그래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도시의 '동네(quartier)'를 '기계적 연대와 배제의 공간'으로 규정했다. 어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비정한 생활공간이라고 탄식했다. 도시의 동네에 사는 주민들은 서로 보살피고 챙겨주는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내기 쉽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도시의 공동체 정책은
진통제나 신경안정제

물론 도시의 행정, 전문가, 주민들도 협동하고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들려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 사업이나 운동은 어쩌면 진통제나 신경안정제 수준의 기대효과에 그치는 건 아닐까. 도시생활의 고질적인 민생고를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또는 망각하는 약효뿐이지 않은가. 도시의 구조악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자면 그런 약물 처방이 아니라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건 아닌가.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고 했던 마하트마 간디는 도시를 증오했다. 마을의 물질과 영혼을 다 빼앗은 게 도시라며 도시 때문에 피해를 입은 마을에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고발했다.

천만명이 모여사는 서울을 보면 간디의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현대의 도시는 돈과 자원, 기회와 희망을 독과점하고 있다. 원래 다 농촌마을에 있던 것이므로 마땅히 주인인 농촌에 돌려줘야 하는 장물과 같은 것이다.

가령 '서울특별난민 최소한 5백만 명 자발적 하방 추진위원회' 같은 게 필요하다. 일단 너무 좁은 도시에 너무 많이 몰려들어 사는 도시 난민들부터 제 고향으로, 정처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너무 많이 살아서 생기는 도시의 문제, 사람이 너무 적게 살아서 생기는 농촌의 문제가 함께 해결할 수 있다. 농촌을 걱정하고 돕자는 얘기가 아니다. 농촌을 위하는 게 곧 도시를 위하고 국가 전체를 위하는 일이 된다.

간디는 인도가 몇 안 되는 도시가 아니라 70만 마을에서 발견돼야 한다고 믿었다. 대한민국의 진가도 역시 3만 6천여 개 달하는 마을마다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을에 살아야 작고 낮고 느리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살아야 사람 구실을 하며, 사람 꼴을 하고 살 수 있다. 우리, 마을로 내려가자. 마을로 내려가서 삶과 일과 쉼과 놀이가 하나 되는 마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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