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환경운동의 역사 -환경운동연합 중심으로
주요 활동
Ⅰ. 한국 환경운동단체의 태동 및 대중화를 위한 노력 Ⅱ. 온산병 규명 및 민간 환경조 사활동의 정착 Ⅲ.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백지 화 및 반핵운동의 승리 Ⅳ. 동강댐 백지화를 통한 생태 계보전운동의 국민적 확산 V. 인류의 자산 새만금 갯벌 살 리기 운동을 통한 생명평화운동의 확산 VI. 환경문제에 대한 지구적 연대운동 의 구축 활동 요약 Ⅰ. 한국 환경운동단체의 태동 및 대중화를 위한 노력 독재정권이 사회·정치적으로 민 주화운동을 탄압하고, 대규모 공해산업과 개발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던 1970년대, 현 환경 운동연합 사무총장 최열 씨를 비롯한 소수 몇 사람에 의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민운동 차원의 공해문제가 제기되었 다. 특히 당시에는 공해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반정부투쟁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던 시기라 정부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 야 했다. 이러한 출발배경 때문에 한국의 환경운동은 사회전체의 민주화 운동과 그 궤를 같 이 하며 발전해왔고 실제로 낙천낙선운동으로 한국사회를 크게 바꿔놓은 <총선시민연대> 에서 환경운동연합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의 조직체가 구성된 것은 1982년 5월이었다. 환경운동에 뜻 을 둔 몇몇 청년들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5공화국 최초의 재야단체이자, 한국 최초의 환경운동단체인 <공해 문제연구소>를 창립한 것이다. 물론 정부당국은 이 단체를 불순단체로 간주하여 각종 정보기관을 통해 해체할 것 을 종용하며 협박을 해왔다. 하지만 공해문제연구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온산·여천지역 공해조사를 통해 공해 문제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호소했고 중금속복합오염의 고유명사화한 <온산병>은 한국사회에 공해를 본격적으로 사회문제화한 계기 가 되었다. 1988년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와 <공해문제연구소>의 의 세 단체의 대표자를 중심으로 통합, <공해추방운동연합>이라는 보다 큰 연대조직을 만들고 대중주의를 표방하는 등한국의 환경운동사에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은 쓰레기 적게 버리기, 합성세제안쓰기 등 일상생활에까지 환경운동의 영역을 넓힌 최초의 시민에 기반을 둔 민간환경단 체였다. < 공해추방운동연합> 활동가들은 전국을 돌며 적극적인 환경감시운동을 펼쳤고 그들의 활동상은 거의 매일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해 보도, 국민들의 환경의식 바꾸어 놓았다. 반공해운동을 펼쳤던 1980년대를 지나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 발회의는 세계환경운동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리우회의를 기점으로 한국의 환경운동 또한 새조운 전환 점을 맞이한다. 반공해운동에서 환경운동으로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93년 4월 지역에서 활동하던 8개의 단체 와 함께 <환경운동연합>이라는 전국적인 연대조직을 만들었다. <환경운동연합>은 환경문제의 발화점인 현 장성을 강조해 지역환경운동에 집중하는 한편 지구적 차원의 환경문제에도 적극 대처하기 위해 해외 환경단체들과도 국경 을 넘어서 연대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해서 90년대에 <녹색연합>, <환경정의시민연 대>등 환경단체들도 속속 구성되어 한국의 환경운동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환경운동연합은 2002년 3월 현재 일반회원 8만5천여 명과 50개 지역조직을 갖춘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환경단체로 성장했다. <공해추방운동연합>에 이은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운동가 들의 헌신적인 활동의 결과로 국민들도 환경의 중요성을 차츰 인식하게 되었고, 폭넓은 대중활동은 개발지상주 의에 길들여져 있던 국민들에게 환경오염이 개발이익보다 더 많은 건강과 재산상의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자각케 하였다. 현 재는 ‘새만금갯벌 간척사업백지화’를 위해 5년째 개발론자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현 환경연합 최 열 공동대표 등 몇몇 주요인사는 이러한 한국의 환경운동 변천사 중심에서 발전단계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1년 최 열 대표가 밝힌 “가장 진보적 인 이론보다 구체적인 현장이 중심”소신은 현재 한국환경운동가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연 도별 정리 1982년 –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한국 최초의 환경운동단체이자 민간연구 소) 1988년 – <공해추방운동연합> 창립(대중성을 지향하는 본격적인 환경운 동단체) 1993년 – <환경운동연합> 창립(8개 지역조직이 참가한 전국적인 환경운 동단체) 1995년 – <한국환경센터건립추진위원회> 설립 2000년 – <환경운동연합> 회원 7만명 돌파 및 전국 47개 지역조직 건설 2002년 – <환경운동연합>회원 8만6천명 /전국 50개 지역조직 건설 Ⅱ. 온산병 규명 및 민간 환경조사활동의 정착 <공해문제연구소>는 출범한 이후 1983년부터 1984년까지 2년여 동안 조사단을 구성해 온산공단지역을 30여 차례 이상 방문하 며 공해 실태조사를 했다. 비철금속단지로 유명한 온산에는 당시 외국의 13개 공해업체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이들 공장에 서 내뿜는 각종 유해가스와 연기 때문에 도시는 언제나 희뿌연 상태였다. . 조사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역 주민 1만명 가운데 7백여 명이 뼈마디가 쑤 시고 눈병, 기침, 피부병 등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공장과 인접해 있는 한 초등학교 6학년 한 학급의 아동들을 대 상으로 공해 피해를 조사했는데, 52명 중 절반인 26명이 공해로 인해 뼈가 쑤시고 눈병이 나거나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잡은 물고기, 조개, 미역 등 해산물과 농작물에서는 구리, 아연, 카드뮴 등 중금속이 기준치의 10배에서 100배까지 검출됐다. 공해문제연구소는 ‘온산병’의 원인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밝히기 위해 국 내의 생화학자, 의사들과 공동으로 조사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학자와 의사들이 한결같이 참여 거부의사를 밝혀왔다. 결국 한국의 인력으로는 조사작업이 불가능해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규명한 일본 인 학자 ‘하라다 마사즈미’ 박사를 초청해 조사를 의뢰했다. 하라다 마사즈미 박사는 “공단이 들어선 지 6년 만에 발생 한 온산병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려 발병한 미나마타병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공해병”이라고 그 심각성에 우려를 표시했다. (일본에서 발생한 미나마따병과 이따이이따이병을 운동적 차원에서 국내에 소개한 것도 그였다.) 이렇게 우여곡 절 끝에 발표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조사결과는 신문과 방송에 대서특필됐고 사회문제로 비화됐다. 정부는 부랴부랴 자체 조사단을 구성하고 온산지역 주민 1만여 명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등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온산 지역뿐 아니라 울산과 전남 여천지역의 공해조사에도 착수했다. 당시 울산지역의 공해 피해도 온산만큼 심각했다. 석유화학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가스로 아이들의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그 지역 삼산평야의 벼가 여물지 않을 정도였다. 여천공단의 공해 피해도 온산이나 울산지역 못지 않았다. 여천지역에는 당시 동 양 최대의 비료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그 공장에서 내보낸 유독 물질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TV 안테나를 부러뜨릴 정도로 독 성이 강했고 견디다 못한 지역 주민 1100여명이 정든 땅을 떠나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 후로도 <공해추방연합>는 1991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낙동강 페놀 방출 관련 조사단 구성 및 현장조사와 대책활동, 1994년 1월 낙동강 식수원 오염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활동 등 현장조사 활동 뿐만 아니라 1993년 한국 최초의 민간환경연구소인 <시민환경연구소>설립, 2000년에는 <공익환경 법률센터> 및 <환경교육센터> 설립해 민간의 참여영역을 연구, 법률과 교육문제에까지 확대시켰다. 온 산병을 비롯한 조사활동 연도별 정리 1984년 – 경남 울주군 온산면 일대 공단폐수오염조사 및 대책활동 및 온산병 규명 1991년 – 낙동강 페놀 방출 관련 조사단 구성 및 현장조사와 대책활동 1993년 – 한국 최초의 민간환경연구소인 <시민환경연구소>설립 1994년 – 1월 낙동강 식수 오염해결을 위한 대책활동 1994년 – 수도권 상수원 오염도 조사 및 상수원 지키기 운동 1994년 – 상습 오염기업 실태조사 및 불매운동 전개 1998년 – 울산공단내 초등학생 중금속오염에 대한 대책활동 2000년 – <공익환경법률센터> 및 <환경교육센터> 설립 Ⅲ.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백지화 및 반핵운동의 승리 반핵운동은 한국 환경운동의 하나의 축으 로 <공해추방운동연합>떄부터 인류를 한순간에 공멸시킬 수 있는 핵의 반인류적이고 반생태적인 위험성을 경고 해왔다. 때문에 굴업도 및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 러시아의 동해안 핵폐기물 투기 저지운동, 대만 핵폐기물 북한반 입 반대운동 등 핵폐기물 처리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성과가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의 승리이다. 이것은 1990년도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 이후 가장 최근에 있었던 한국정부의 핵폐기장 건설 실패 사례이자 환경운동의 승 리였다. 1994년 비밀리에 굴업도 핵폐기장을 추진하던 정부의 계획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환경운동연합의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시작되었는데, 굴업도 현지 주민은 물론 인천지역의 환경·사회단체들과 함께 결사적인 반대운동 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시위 중 사망하는가 하면, 지역 주민과 환경연합 활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이 조직하는 전 국민적 반대운동이 확산되어 결국 1995년 11월 이 계획은 취소되기에 이르렀 고 ‘굴업도’란 이름은 국내외 반핵운동의 대명사로 기록되고 있다. 대만핵폐기물 북한반입 저지운동도 환경단체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승리한 사례 다. 1997년 대만과 북한간의 핵폐기물 반입계약이 알려지자 환경운동연합은 국내 250개 시민 사회 단체가 참여하는 “대만핵폐 기물 북한 반입 저지 범국민운동 본부” 결성해 한반도 반핵 평화운동의 기치를 높였으며 또한 활동가 여·야 국회의원 등 11명으로 구성된 민간대표단을 이끌고 대만현지를 방문, 대만현지환경단체와 한국환경단체들간의 시위를 주도하 기도 했다. 국제적으로도 이 이슈를 증폭시키기 위해 유엔 북한대표부를 방문하여 대만핵폐기물의 북한 반입을 반대하는 한국시민 환경단체의 강력한 의지를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그린피스(GreenPeace)와 함께 대만 핵폐기물 이동 길목인 인천, 목포, 군산, 부산 에서 4차례의 해상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대만핵폐기물반대운동은 결국 1년 동안의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 지와 참여 속에 1997년 1월 백지화되기에 이르렀다. 반핵운동 연도별 정리 1989년 – 영광핵발전소 11, 12호기 건설반대운동 1994년 – 그린피스와 공동으로 전국 순회 반핵 캠페인 1994년 – 굴업도핵폐기장건설반대운동(1995년 11월 승리) Ⅳ. 동강댐 백지화를 통한 생태계보전 운동의 국민적 확산 <공해문제연구소> 설립 후부터 80 년대 말까지 환경단체가 펼친 주요활동이 공해추방운동이었다면 현재의 <환경운동연 합>은 생태계 보호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반핵운동, 강 살리기 및 생태계보전운동, 갯벌보호운동, 야생동물 보호운동 등이 이런 차원에서 전개된 것들이다. 특히 동강댐 백지화 운동은 한국의 강 살리기 운동과 생태계보전운동의 이정표로 기록되고 있다. 2000년 6월 5일 오전10시 20분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영월 댐 건설을 백지화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표가 있자 세계환경의 날 기념식이 진행 중이던 세종문화회관 은 떠나갈 듯한 환호와 박수로 가득 찼다. 1998년부터 2년동안 싸워 온 동강댐반대운동은 33일 동안 농성을 벌이며 싸웠던 생태계보전운동의 승리이자 21세기 들어 환경운동진영의 첫 승리의 순간이었다.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한 ‘동강’은 천혜의 비경과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한국에 서도 보기 드문 생태계의 보고였다. 1999년 ‘동강을 죽이는 역사의 불행을 막자’며 각계의 대표 33인이 33일 동안(1999년 3 월 23일 – 4월 21일) 밤샘을 하면서 ‘동강 살리기’는 시민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 전국 각지에서 2천5백여 명의 시민들이 직접 농성장을 방문하였고, 5천여 만 원의 성금과 물품이 농성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강 살리기’운동은 한국 내의 환경단체, 종교계, 문화·예술계, 학 계 뿐만 아니라, 그린피스, 시에라클럽, 지구의 벗 같은 국제환경단체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이렇게 2년여 동안 전 국민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된 동강댐 백지화운동은 한 국 국민들의 생태계보존에 대한 일대 의식전환을 가져왔고, 2002년 현재 환경연합은 환경부에 동강지역생태계보전지역 설정안을 제안, 확정,추진되고있다. V. 인류의 자산, 새만금갯벌살리기를 통한 생명평화운동의 확산 새만금갯벌은 한국의 전라북도를 흐르는 만경·동진강의 하구가 남해바다와 만나면서 이루어진 생태가치가 아주 높은 하구갯벌이다. 한국 의 정부는 1991년부터 이 두 강의 하구 인근의 바다와 갯벌 40,100 ha를 막아서 28,300 ha의 농지와 11,800ha를 담수호 를 조성하려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하였다. 2011년 완성계획인 이 사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경제적 타 당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대규모 생명살상과 회복할 수 없는 환경파괴를 낳을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1998년 사업이 중단되 었다가 2001년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사가 재개되었다. 환경운동연합이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항하여 새만금갯벌 살리기운동을 펼쳐온 지 난 98년부터 2001년까지, 갯벌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하던 한국 사회에 ‘갯벌’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중요한 시간이었 다. 새만금사업 진행여부로 논란을 벌이던 4년동안 환경운동연합은 갯벌의 중요성에 대한 현장교육과 조사활동, 새만금갯벌 살리기 33일 밤샘농성과 대국민서명운동 등 각종 홍보활동을 통해 새만금갯벌의 가치를 널리 알려냈다. 이러한 활동 결 과, 갯벌을 ‘쓸모없는 땅’으로 인식하던 한국 국민들은 2001년 갤럽조사에서 83%의 국민이 새만금간척사업 반대하는 놀라 운 인식의 변화를 보였다. 새만금갯벌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일본을 거쳐 시베리아까지 이 동하는 철새들이 휴식을 취하고 먹이 얻는 곳이 바로 새만금 갯벌이고 새만금 갯벌을 잃게 되면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철새들의 생태계에 큰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새만금살리기운동은 크게 공명을 얻었다. 지구의 벗, 독일자연환경보호연합(BUND), 미국친우봉사회(AFSC) 등 국제사회가 새만금갯벌은 전 세계 생태환경을 보전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어 있으므로 새만금갯벌을 살려야한다고 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한국내서도 반향은 컸다. 새만금갯벌살리기운동은 종교계 로 퍼져 대규모 생명을 살상하는 새만금사업의 실체를 접한 종교인들이 새만금 생명평화선언(범종교인 2000인 선언), 새만금갯 벌 살리기 기도회, 새만금간척반대 기자회견, 또 천주교 문규현신부와 불교계 수경스님이 도심에서 3보1배(3km를 3보 걷고 1번 절함.)의 고행 등 각계각층에서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헌신적인 활동이 진행되었다. 더불어 2001년 3월에는 환경 ·시민단체, 종교단체로 구성된 “새만금갯벌 생명평화연대”라는 연대기구 발족을 통해 더욱 새만금간척사업반대운동에 박 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2001년 5월 새만금사업을 계속한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결국 오랜 세월 정치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새만금사업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부처이기주의 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채 강행되고야만 것이다. 하지만 환경운동연합은 새만금사업이 재개된 것에 굴하지 않고 지역주민 과 함께 더욱 새만금갯벌살리기운동의 기치를 높이고 있으며, 새만금이라는 단일사안에 대응하기 위해 모인 최초의 실천적 각 분야 학자그룹인 새만금 생명학회와 더불어, 새만금갯벌이 본연의 모습으로 그 곳에 넓게 펼쳐져 무수한 생명의 터전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워 나갈 것이다. 생태계 보호 운동 연도별 정리 1996년 – LG 시프림스호 해상기름유출(700톤)사고 대책 활동 1996년 – 야생동물보호와지리산 반달곰 살리기 운동 1998년 – 동강댐건설백지화운동(2000년 6월 승리, 2002년 현재 동강지역 생태 계보전지역 설정 관련 강원도 환경부 지역주민과 협의중) 1998년 – 도심숲 그린벨트 살리기 국민행동 출범, 그린벨트해제 반대운동 1998년 – 새만금갯벌 간척사업 백지화운동 시작(현재 진행 중 1999년 – 지리산 댐 반대 및 국립공원 살리기 운동(현재 진행 중) VI. 환경문제에 대한 지구적 연대운동 의 구축 19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에 참가한 것 을 계기로 그린피스(Greenpeace International)와 함께 현대그룹 시베리아 산림파괴 실태조 사 및 반대운동, 동아시아 협력을 위한 한국환경단체와 그린피스 워크삽 개최, 일본 플루토늄해상 수송저지 등을 위해 치열한 운동을 벌여왔고, 특히 대만핵폐기물 북한반입 저지를 위한 범국민운동, 국제 환경NGO 심포지엄 ‘댐 건 설 문제점과 21세기 대안’개최 등 활발한 국제연대 활동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도 <환경운동연합>은 <그린피스>와 독일 최대 환경단체인 <분트(Bund)>, 인도네시아 환경과 개발(WALHI), 네덜란드 보스엔즈(Both ends), 미국 시에라클럽 (Sierra Club), 말레이시아 제3세계 네트워크(Third World Network), 태국 테라(TERRA), <월드 워치연구소>와의 조직적인 교류는 물론, <일본습지네트워크(JAWAN)>와는 1999년부터 갯벌과 철새보존을 위한 ‘한·일 갯벌공동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한 1998년 6월에는 한국의 환경단체로는 처음으 로 ‘유엔경제사회이사회(UNECOSOC)’의 ‘특정분야협의자격’을 획득해 미국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국제 환경문제에도 적극 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 환경운동연합>은 또 아태지역 및 해외 단체들과의 교류프로그램(몽고, 인 도네시아 등), 신자유주의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WTO 대응, 다국적기업 감시활동, 환경과 인권 환경과 평화를 위한 연대활동, 지구의 날 국제 캠페인(Earth Day), 사회개발정상회담(WSSD), 아시아유럽정상회담(ASEM), 아태지역경제협력개발 기구(APEC) 관련 활동,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 활동,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국제회의 개최(연간) 및 유엔 활동 등 단지 환경현안 만이 아니라 평화, 인권 등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추구 활 동, 신자유주의로 인한 환경권 파괴 대응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 환경운동연합>의 꾸준하면서도 강력한 활동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의 결과 로 1994년 최열 사무총장은 유엔 환경계획(UNEP) ‘글로벌 500’인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1995년에는 미국 골드만재 단이 가장 헌신적인 현장 환경운동가에게 수여하는 <골드만환경상> 수상을 수상했다. 국제연대 연도별 정리 1992년 – UNCED 한국위원회 결성 및 브라질 리우회의 글로벌 포럼에 참가 1994년 – 현대그룹 시베리아 산림파괴 실태조사 및 반대운동 1995년 – 미나마따병을 규명한 하라다박사 초청강연회 1995년 – 그린피스 배 레인보우 워리호 초청, 핵발전소 지역 순회방문 1995년 – 동아시아 협력을 위한 한국환경단체 및 그린피스 워크샾 개최 (필리핀, 대만, 홍콩, 일본 및 국내의 환경활동가 80여명 참가) 1995년 – 세계사회개발정상회담 한국대표단으로 참가 1996년 – 체르노빌 어린이 한국 초청 1996년 – 이스탄불 세계 인간정주회의 참가 1997년 – 제3차 기후변화협약(일본 교토)에서 선진국의 약속이행을 요구하는 항의 캠페인 주도 1997년 – 대만핵폐기물 북한 반입 저지를 위한 범국민운동 1998년 – 몽고환경단체, 인도네시아 환경단체와의 교류 프로그램 시작 – 국제환경NGO 심포지움 “기후변화방지를 위한 개도국 NGO의 역할 ” 1999년 – 국제환경NGO 댐 심포지엄 개최(주제: ‘댐 건설의 문제점과 21세기 대안’) 1999년 – 영국왕실 퀸 엘리자베스 여왕 초청 영국습지방문 2000년 – 중국 삼림국 초청 사막화지역방문 및 조림사업 2000년 – 아시아유럽정상회담(ASEM) 민간 포럼 개최 2000년 – 국제환경NGO 토지 심포지움 “생명의 땅 땅의 생명” 2001년 – 한중일국제웹사이트 구축 한중일 회의 2001년 – 지속가능한 발전 정상 회담 동북아 및 아태지역 회의 참가 2001년 – 동아시아환경협력회의 중 NGO회의 개최 2001년 – 지구의 벗 국제본부 의장 리카르도 나바로 의장 초청사업 2001년 – 두만강지역 주민이 조사하는 두루미조사사업 (연변대학과 함께) 2001년 – 국제환경교육심포지움 개최 2002년 – 한반도 환경협력실현을 위한 DMZ 포럼 개최 활동의 영향 Ⅰ. 환경문제 및 환경운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참여 확산 80년대 초 <공해문제연 구소>를 창립한 이래 20여년 동안 한국의 환경운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1990년 대 들어서면서 많은 환경단체들이 생겨났고, 일반 시민단체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참여도 일반화되었다. 특히 <환경운동연합>은 52개 지역조직과 8만7천여 명이라는 회원 규모도 그 렇거니와 이들의 정부 및 일반 국민들에 대한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한국사회에 의제설정집단으로 그 역할을 톡톡 히 하고 있다. 또한 전문성을 갖추고 시민에게 다가가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환경정보센터가 1991년, 1993년 시민환경연구 소, 2000년 시민환경교육센터, 2000년 공익환경법률센터가 각각 설립되었다. 동강댐 반대운동의 경우 그동안 환경문제를 막연하게만 인식했던 국민들에게 ‘동 강과 생태계보존’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를 던짐으로써 직접적인 참여의 계기를 이끌어 내었다. 현재 진행중인 ‘새만금간척사 업 백지화’ 및 ‘갯벌살리기 운동’도 이런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2000년 7월 1일부터 1박 2일 동안 2천여명 의 시민 및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새만금 갯벌 현장에 모여 갯벌보호를 위한 대규모 캠페인 등이 그런 예 들이다. 이제 국민들은 환경의 심각성에 대한 막연한 관심이 아니라, ‘강 살리기’, ‘생태 계 보전’, ‘갯벌 살리기’ 등 구체적인 사안마다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Ⅱ. 반핵과 에너지대안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 한국 정부는 지금도 핵폐기장 건설을 추 진하고 있지만, 이를 찬성하는 지역주민들은 어디에도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현재 핵폐기장의 부지선정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그동안 환경단체들과 환경운동연합이 함께 벌여온 반핵운동의 결과이자 중요한 영 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원자력발전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 대안체계에 대한 논의와 캠페 인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환경연합이 입주해 있는 <환경센터>는 태양광을 이용한 에너지자립형 솔라하우스로 건 립되었으며, 전국의 환경사회단체들이 참여하는 <에너지절약시민연대>가 결성되어 에너지절약에 대한 범국민적인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Ⅲ. 생태계보존운동에 대한 각계의 참여 유도 동강댐 반대운동에는 문화예술계, 학계, 종교계, 여성계, 각 분야의 시민단체 등 한국의 모든 계층에서 참여했다. 이는 그동안 개 별적인 관심에 머물렀던 인사들이 ‘동강댐 반대운동’을 계기로 하나의 조직적인 힘으로 뭉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 험은 환경·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새만금생명평화연대>, 실천적인 전문가 및 학자들로 구성된 <새만금생명학회>등을 조직하는데 밑 거름이 되었고 이들은 정부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거대한 새만금간척을 중단하기 위한 중요한 동력이 되어 환경단 체, 시민, 지역주민들과 함께 새만금간척중단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또한 종교계는 한국의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에 댐을 건설한다는 정부의 계획에 맞서 ‘지리산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처럼 동강댐 반대운동을 벌이며 뜻을 같이했던 인사들이 이제는 주도적으로 환 경운동을 펼치며 푸른 지구를 위한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된 것이다. Ⅳ. 국내 및 국제연대운동의 일상화를 이끌어내다 사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의 환 경 및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국내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최열 환경연합 공동대표가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브라질 리우환경회의에 한국민간대표단이 참가하 면서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국제연대에 대한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환경운동연합>을 비롯 해 국제연대 사업이 중요한 일상사업이 되어 있으며, 특히 갯벌과 철새보존을 위한 일본 영국과의 연대운동이 활발하다. 1999년부터 1년에 두 번씩 환경운동연합과 일본습지네트워크(JAWAN)의 전문가 및 활동가들이 양국의 갯벌을 직접 방문해 갯 벌조사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영국의 경우, 1999년 영국 퀸 엘리자베스 여왕, 2000년 영국 외무성 후원으로 영국의 WWT, RSPB 등의 단체들과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 및 철새 보호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그린피스 인터내셔날과 함께 반핵운동을 펼치는 한편 2001년에는 지구의 벗 국제본부 리카르도 나바로 의장이 방한해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1인 시위를 벌이는 등 구체적인 연대와 활동을 함께 하고있 다. 더우기 올해에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상회담(World Summit for Sustainable Development)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있을 예정이다. 〈환경운동연합〉은 한국의 노동, 농민, 환경단체, 시민단체, 여 성단체들과 함께 『리우+10 한국민간위원회』를 결성하여 한국사회의 지난 10년을 평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See more at: http://kfem.or.kr/?p=24430#sthash.3EUGuX1C.dpu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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