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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쿠바] ② 더 이상 구걸하지 않는 쿠바 사람들

세계와 여행이야기/쿠바

by 소나무맨 2015. 6. 28.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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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하는 쿠바] ② 더 이상 구걸하지 않는 쿠바 사람들
    • 입력2015.03.10 (06:02)
    • 수정2015.03.11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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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011년, 1년의 미국 연수 기간 동안 나는 두 차례나 쿠바에 갔었다. 그리 길지 않았던 첫 방문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한 번 더 갔다. 두번째 방문길에서 공항에 내렸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마치 시골 고속버스터미널처럼 낡고 작은 공항이(지금은 리모델링돼있음), 그리 편안할 수가 없었다. 첫 방문 때의 낯설음, 긴장감은 사라진 채 그저 늘 오던 곳에 온 듯한 기분! 무작정 택시를 타고, 아바나 시내의, 전에 묵었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온 나를 보고 민박집 아주머니가 깜짝 놀랐다. 대체 그 근거없는 편안함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나는 내가 쿠바 사람들을 잘 안다고 믿었다. 쿠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래서 쿠바가 결코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는 걸 잘 안다고 믿었다. 나를 두번째 방문 만에 대책없는 편안함에 빠뜨렸던 그 이유가, 취재를 위한 세번째 방문에서는 흔들렸다. 물론 여행객으로서의 방문과, 취재를 위한 방문은 분명 성격이 다르고, 그래서 다른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터이지만, 이 세 번째 방문 뒤, ‘나는 쿠바 사람들을 잘 알아’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나는 쿠바 사람들을 아직 잘 모르겠어’라는, 차라리 꽤 합리적인 불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사는 어떤 사람이,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는 어떤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 자본주의식 합리적 사기를 배우는 쿠바 사람들

      2011년, 아바나 거리를 걷던 첫날, 내가 가장 많이 마주친 사람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내게, 이른바 ‘삥’을 뜯으려는 이들이었다. 괜히 다가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나왔던 까페를 알고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니?” “저기 괜찮은 음식점이 있는데, 괜찮은 라이브쇼 하는 데가 있는데, 내가 소개해 줄께” 나는 얇은 귀로 몇 차례나 그들을 따라가 그들의 소박한 사기에 속곤 했다. 막상 가보면 과연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나왔던 곳인가 의심스러웠지만 할 수없이 그들에게 모히또라도 한 잔씩 사주면 그들은 금새 흥겨워져 떠들었다. 음식점을 예약하고 나중에 보면 음식점 주인이 그들에게 소개비조로 푸드 스탬프를 찍어준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래봐야 돈 몇 천원짜리 사기였다. 모히또 한 잔에 몇 달러, 음식으로 바꿀 수 있는 푸드스탬프라야 몇 달러,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이랑 관련 있다는 음반 한 장 사봐야 몇 달러... . 그 몇 달러를,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식으로 ‘삥’ 뜯으려는 그들은, 내가 사는 체제에서 합리적으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에 비하면, 되레 순진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공무원 월급이 30달러 수준인 그 곳에서 그 몇 달러는 그들에게 큰돈이었을 게다. 하지만 쿠바 최대의 도시 아바나에서 만난, 이른바 ‘도시인’들이 돈 몇 달러 삥 뜯는 것을 업으로 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생각해보자, ‘쿠바’라는 사회주의 국가에 들어간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들에게, 그들은 얼마든지 체계적으로 사기를 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곳에서 관광객으로 어떤 걸 경험하려면, 뭔가 추가의 돈을 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는, 그래서 실상은 사기이나 마치 합리적으로 꼭 줘야 할 돈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일반화된 합리적 사기를 얼마든지 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영리한 방법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돈 버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4년만에 다시 찾은 아바나에서 나는 내게 달라붙는 현지인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차라리 길거리 가판에서 음료수를 팔고, 전통 공예품, 오래된 책들, 음반 등 관광객이 좋아할 만한 것들, 하다못해 전화카드라도 팔지언정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나온 까페에 갈래’ 하고 말을 거는 사람들은 없었다. 마차 투어, 배 투어 등 나름 다양한 길거리 투어 상품들이 팔리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건, 엄청나게 늘어난 민간 식당이다. 4년 전 외국인인 내가 갈 수 있었던, 아바나의 국영식당들, 서비스든 음식의 질이든, 그저 주는 대로 만족해야 했던, 그 곳 공무원 한 달 월급을 주고도 최고의 대접을 받은 듯 느끼지 못했던 그때와는 다른, 민간식당들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식당 등 종류도 다양하고, 말레꼰의 바람을 맞거나, 고층 빌딩의 테라스에서 야경을 감상하거나, 아늑한 정원을 보면서 촛불을 켜거나, 맛도 분위기도 나의 마음을 흔드는 민간식당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바나에 확실히 ‘체계적으로 돈을 버는’ 장삿꾼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쿠바에 부는 개혁개방의 바람’속 변화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 자영업·사유재산·대자본…변화하는 쿠바

      2008년, 피델 카스트로가 물러나고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한 2년 뒤, 2010년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쿠바는 경제 정책의 큰 궤도 수정을 결정한다. 가장 큰 골자는 ‘공공 부문 축소와 민간 자영업 활성화’다. 라울 카스트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국가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공무원 100만명을 줄이겠다고 발표한다.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경제사회 시스템 대부분이 국영으로 운영되는 쿠바에서는 엄청난 변화다. 이후 2011년부터 시작된 공무원 100만명 줄이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쿠바 정부는 그렇게 해고된 공무원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자영업으로 유도했다. 약 200가지의 자영업 즉 식당, 건설, 교통, 이미용 등을 허용하고,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자영업을 하려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원래 사회주의에서 이른바 ‘부동산의 개인 소유’는 안되는 거다. 그럼 어디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집의 소유와 사고팔기를 허용했다. 정부에서 공급하고 배정해줘서 개인들이 살던 집을 그대로 개인의 소유로 등록하도록 했다. 식당, 미용실 등 자영업이 대부분 자신의 집 한 켠에서 시작된다. 또 자영업을 활성화하려면 물류가 가능해야 하기에 자동차의 소유와 사고팔기도 허용했다. 그렇게 ‘사유 재산’의 개념이 생겨난 것이다.

      이른바 대규모 자본도 형성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은, 대형 식당, 마치 자본주의 국가의 밤문화를 보는 듯한 인기 나이트클럽 등, 쿠바에서 돈을 쓸어모으는 곳들에는, ‘외부 자본’이 들어가 있다고 했다. 미국에 정착해서 큰 돈을 번 쿠바계 미국인들이, 쿠바의 가족이나 친척을 통해, 대규모 자본을 공급해, 대형 식당, 대형 나이트클럽 등을 운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쿠바인들은 바지사장, 진짜 주인은 미국에 있는 셈이다.

      농업 분야의 변화도 크다. 1990년대 구소련의 붕괴 뒤 소련에서의 비료 지원이 끊기고, 미국의 경제 제재로 비료, 농기계 등의 수입이 봉쇄되고, 최대 수출작물이었던 사탕수수, 설탕의 수출길도 끊기면서 쿠바 농업이 빈사상태에 치달았었다. 계속된 농업의 쇠락을 보다 못한 쿠바 정부는 결국 민간 협동농장을 허용했다. 공산주의 국가의 상징 중 하나인 국영 협동농장 체제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간 협동농장은 개인이 국가에서 땅만 빌려서 마음대로 운영하는 형태다. 처음 민간 협동농장을 허용할 때는, 땅의 규모, 농작물의 종류 등 제한이 많았다. 대형화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가격 체계였다. 쿠바 국가 공급 농산물의 가격은 매우 싸다. 공식적 월급이 30달러 수준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민간 협동농장들은, 도시의 호텔과 식당 등에서 요구하는 고품질의 작물을 생산해 비싸게 팔고 싶었지만, 가격을 국가 공급가에 맞춰야 하니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농산물 가격을 자율화했다. 이른바 ‘시장 가격 형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수요가 많으면 비싸게, 더 좋은 물건은 비싸게 팔 수 있게 됐다. 땅에 대한 규제도 풀어 대규모화가 가능해졌다. 민간 협동농장이 최근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초기 민간협동농장시기에 시작된 아바나 근교의, 나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기농 농장’을 방문했다. 지렁이 유기농법, 유럽에서까지 관심을 갖는다는 기술이다. 농업부 공무원을 그만두고 이 농장을 시작한 농장 지배인은(민간협동농장도 땅은 국가 소유이기에 ‘농장주’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냥 ‘농장 지배인’이다), 사실은 소련에서 비료 지원이 끊겨 비료가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유기농법을 개발했다고 했다. 비료 없이 품질 좋은 작물을 생산할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지렁이 유기농법이, 웰빙 바람 속에 이제는 유럽에서 연구 투자를 받을 정도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 바로가기 <뉴스9> [쿠바에 부는 변혁의 바람] 사유재산 일부 허용…사회주의 ‘수술’


      쿠바의 변화는 필연

      2011년, 아바나에서 만난 한 흑인 청년, 외국어대학에 다니면서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청년을 만난 적이 있다. 쿠바에서는 공식적 직업이 없으면 불법을 저지르는 게 돼, 젊은이들이 오랫동안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가욋돈을 버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그게 30달러 월급의 공무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벌이가 낫기 때문이다. 그의 궁극적인 꿈은 자신의 이름을 건 피자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는데, 내가 그 얘기를 듣고,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의 ‘피자 체인’점에 대해 설명하자 그가 전혀 이해를 못했던 기억이 있다. “네 피자가게가 성공하면, 너는 이제 네 피자 가게의 이름만 팔 수도 있어, 네가 직접 피자를 만들지 않아도, 네 이름과 네 피자 굽는 노하우, 네 레서피에 따른 재료, 이런 것들만 팔아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거지, 아바나 시내에 00피자점 2,3호가 생길 수도 있는 거야, 너는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게 되는 거야”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그는 도무지 그 논리를 이해 못했었다. 소박하게 아바나에 자신의 이름을 건 피자가게를 차려 피자를 만들면서 돈을 벌고 싶다고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때 그 청년이 전혀 이해를 못했던 그 체인점들이 이미 아바나에 생겨나고 있다. 아바나 시내의 가장 ‘핫한’ 나이트클럽의 2호점이 생겼고, 최고 인기의 길거리 피자가게도 2호점이 들어섰다. 대부분 앞서 말한 미국 친척들의 자본이 유입되는 경우다.

      취재를 하면서 만난 민간식당 주인, 미용실 주인, 민간 협동조합 지배인의 입에서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쿠바의 자본주의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필요로 했던 증언들이 술술 튀어나왔다. “예전에 공무원으로 일할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죠, 이제는 제가 노력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미국에서 좋은 미용재료가 싸게 들어오면 저도 머리는 더 잘하면서 가격은 싸게 받을 수 있고, 손님들도 좋지 않겠어요?” “규제가 풀리고 가격이 오르고,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농장 규모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이 쿠바인들의 의식 속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바나 거리에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에 나왔던 그 까페”를 아느냐며 나를 쫓아오던 순진한 커플은 이제 추억 속의 인물들이 되어가고 있다. 다음 방문에서는 아예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명소와 마지막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는 투어상품 홍보 전단지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걸 보려면 제법 큰 돈을 내야 할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체계적 사기를 당하게 되지 않겠는가.

      쿠바의 변화는 필연이다. 더 이상 형제국가라며 쿠바를 지원해줄 부자 공산국가들이 없는 지구에서, 국민의 60%가 미국에 가족이나 친척을 두고 있어 자본주의의 영향은 끊임없이 파고드는데, 텔레비전 한 대, 핸드폰 한 대를 살래도 몇 년을 모아야 하는, 월급 30달러의 현실이, 모두에게 평등하니(실은 평등하지도 않다)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된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하는, 참으로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참으로 이상적인 인간형이 가능하겠는가?

      말레꼰을 세차게 넘어오는 거친 파도, 미칠 듯 아름답게 노을이 물드는 카리브해는 그대로였다. 1960년대의 형형색색 오래된 미국차들은 아직도 아바나 거리를 돌아다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역사지구의 오래된 스페인풍 건물들은 여전히 내 발길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낯설어졌다. 나는 ‘난 쿠바 사람들을 잘 알아’라고 생각했던 그 때도, ‘이제 변하는구나’ 하는 지금도, 쿠바인들을 잘 몰랐고, 또 모른다.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태어나 사는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단지, 그들의 일말의 모습들만 내 눈에 스쳐가고, 그것도 경험이라고 그 변화를 담담히 들여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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