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클라라의 체 게바라 >

2015. 9. 28. 11:13세계와 여행이야기/쿠바

 

 

<산타 클라라의 체 게바라 >

 

 

 

 

 

 

 

 

 

 

 

 

 

 

 

 

체 게바라 기념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1)체 게바라와 추모관, 2)체 게바라 박물관, 그리고 3)체 게바라 동상과 공원이다.  추모관과 박물관은 지하에 있으며, 동상과 공원은 널찍한 대지 위에 조성되어 있다.  

 

 

1) 체 게바라 추모관: 모든 소지품은 보관소에 맡기고 일정한 인원(약 20명)을 입장시킨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숙한 분위기에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을 상징하는 불꽃이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가 볼리비아에서 최후의 전투를 할 때, 함께 싸우다가 사망한 혁명군들을 추모하는 불이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감시하는 여직원은 독수리의 눈을 번득이며 관람객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핀다.

 

 

2) 체 게바라 박물관: 교실 2-3개 정도의 넓이인 박물관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 그가 사용한 무기, 전쟁 중에 쓴 편지와 갖가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무도 사진을 찍을 수 없으므로,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희미한 기억에 의존할 도리밖에 없다. 전시된 유물에서 그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한숨과 번뇌가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체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심한 천식 증세를 보이자, 아버지는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갔으나,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천식 증상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체 게바라는 문학적 재능과 운동 신경이 뛰어났고, 사진, 영상, 바둑, 그리고 축구를 좋아했다.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이때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정치 이야기는 체 게바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1년 체 게바라는 23살의 나이로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떠나 쿠바, 콜롬비아, 베네수웰라를 거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 8개월 간의 긴 여행을 한다. 그는 안데스 산맥 고원의 고대 문명 유적지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다.  산지에서 가난한 원주민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꼈으며, 나병원의 나환자들을 보고 인도주의적 관념이 싹 텄다. 이것은 그가 쓴 일기를 기초로 제작된 영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에 잘 나타나 있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음>

 

 

 

1954년 그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그 당시 미국의 대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와 CIA가 연합하여 아르벤스 정권을 정복시키려 하였다. 아르벤스 정권이 공산화 되었으므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그를 쫓아내야한다는 것이 미국이 침략한 이유였다. 미국의 P47 전투기가 과테말라를 폭격하는 순간, 체의 마음 속에 의사로서의 편안한 생활보다는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심하고 반미주의의 길로 나선다. 

 

1955년 과테말라에서 그에게 암살령이 내려지자, 그는 멕시코로 피신하였다. 멕시코에 도착하여 카스트로를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된다.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은 미국을 등에 업고 독재를 했기 때문에 타도의 대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체 게바라는 알베르트 바요 중령으로부터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하였다.

 

1956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포함한 82명이 "그란마"라는 배를 타고 쿠바로 출발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고 열악한 위생 등의 영향으로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그들은 크게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또한 이들의 도착 사실이 이미 쿠바 정부군에 유출되어, 매복 중인 정부군에 패하여, 이들 82명 중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등 12명만이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들어가서 마을에 있는 반군과 힘을 합쳐 세력을 불려나갔다. 도착 후 1년, 체 게바라는 사령관에 임명되어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이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이들은 산타 클라라에 입성한다. 이들은 잠복해 있다가 불도저를 이용해 22량의 정부군 장갑 열차를 탈선시키고 화염병으로 무장한 자살 특공대가 투입되어 마침내 정부군을 물리치게 된다. 이를 근거로 산타 클라라는 혁명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는다.

 

 

 

 

 

<평양을 방문한 체 게바라: 인터넷에서 내려받음>

 

 

 

1959년 1월 혁명군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아바나에 입성한다. 이후 그는 혁명의 2인자로서 중앙은행 총재와 상업부 장관 등을 역임한다. 그 당시 카스트로는 "누구 경제에 정통한 사람이 없나?"라고 묻자, 꾸벅꾸벅 졸던 체 게바라가 에코노미스타(경제통)를 코무니스타(공산주의자)로 잘못 알아듣고 손을 들어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그는 "술은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를 핀다.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면 남자를 포기한다."라는 말도 남긴다. 그후 그는 일본 북한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1965년 그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피델, 나는 지금 많은 것을 회고하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작별 편지를 남기고 콩고로 게릴라 전을 수행하기 위해 떠난다. 콩고에서 9개월간 게릴라 전을 펼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피델 카스트로 에게 보내는 체의 작별 편지 번역문<위의 비문 번역>

 

피델:

 

지금 이 순간 나는 많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집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 나와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의 긴장감들을. 우리의 죽음을 누구에게 알려야 하는지 생각하고 얘기했을 때,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혁명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진실 말입니다.

<중략>

나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혁명의 승리를 굳건히 하기 위한 충분한 진실성과 헌신으로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잘못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처음 시작했던 때보다 당신에게 더 많은 신뢰를 갖지 못한 것과,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의 당신의 자질을 더 빨리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훌륭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곁에서 카리브해의 위태로운 날들 속에서도 아직까지 민중들과 함께 해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중략>

나는 당신이 내게 알려준 신념을 갖고 새로운 전장으로 떠납니다. 또한 나의 민중들의 혁명정신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가장 고결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기쁨을 간직하겠습니다. 이것은 힘의 원천이며, 깊은 상처를 치유해줍니다.

<중략>.

내 아내와 아이에게 어떤 물질적인 것도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 슬프게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쁩니다. 나는 가족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가 생활하기에 충분한 것들을 줄 것이며 교육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 조국이냐 죽음이냐.

내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 당신을 껴안습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의 그날까지 영원히!)>

 

 

 

1966년 그는 11월 볼리비아에 잠입한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게릴라전은 고전의 연속이었다. 이 당시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는 이렇다. "아빠는 머나먼 곳에서 몹시 급하게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단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아빠의 최근 모험담을 너희에게 들려줄 수 없구나. 아빠는 어떤 아저씨 소개로 매우 재미있는 친구들은 만났거든. 다음에 꼭 얘기해 줄게. 지금 이 순간 아빠가 너희들과 엄마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늘 생각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구나. 알리우사, 너는 공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도와야 한다. 카밀로, 너는 말을 너무 맹서하듯이 하지 말아야 한다. 셀리타, 너는 할머니가 집안일 하시는 것을 되도록 많이 도와야 한다. 타티코, 너는 자라서 사나이가 되어야 해. 나중에 네가 자라서 무엇이 될지 지켜보고 싶구나. 그때가 되어도 제국주의가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가 멸망한다면, 카밀로랑 아빠랑 달나라로 여행을 떠나자!"

 

 

1967년 그는 한 계곡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추격하는 정부군에 사로 잡혔다. 게릴라 진압을 지휘했던 미국의 CIA는 곧 바로 사격을 명령했고, 이튿날 그는 사형을 당했다. 그의 일기와 함께 잘린 체 게바라의 두 손이 쿠바에 도착하자 전세계는 경악했다.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으나,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오히려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나이 39세의 일이다.

 

 

 

 

 

 

 

 

1997년 쿠바인들은 볼리비아로 가서 체와 그의 동료들의 시체가 묻힌 구덩이를 찾아 냈다. 이들의 시신은 쿠바로 가져와 바로 여기 산타 클라라에 안장되었다.

 

 

그는 갔지만, 그를 추앙하는 쿠바인들의 사랑은 바로 여기 추모관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훨훨 타오르고 있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비명이 새겨진 비석과 함께, 평소에 즐겨 썼던 베레모에 총을 들고 군복 입은 체의 동상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산타 클라라를 빛내고 있다. 그 옆에 펄럭이는 대형 쿠바기와 샤베스의 사진이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시위라도 하는 양 뜨거운 오후의 태양 아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절규하고 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Forever until victory!)

 

*이 글 중, 체 게바라에 관한 부분은 1) 요시다 사유리: 작은 나라 큰 기적, 2)사석원: 황홀한 큐바, 3)천샤오추에: 잔혹의 역사 매혹의 문화 쿠바, 4)박지민 옮김: 체 게바라 자서전(황매출판사), 및 인터넷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