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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AIIB' 해법, '고슴도치의 나라'-- 한국외교의 해법

정치, 정책/미래정책과 정치 전략

by 소나무맨 2015. 3. 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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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AIIB' 해법, '고슴도치의 나라'

  • 시간 2015-03-2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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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도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일명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이 동북아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적어도 한반도에선 국방과 금융이라는 전혀 다른 조건이 서로 엉키듯 맞붙으면서, G2인 미국과 중국의 자존심 대결로까지 번지는 모양새입니다.

우선 AIIB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 주요국들이 가입을 속속 밝힘으로써 중국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기는 한데, 이 싸움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로선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닙니다.

지정학적 위치를 애초에 잘못 고른 선조들을 탓해야 할까요? 매번 우리 땅을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내줘버린 스스로를 나무라야 할까요?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 우린 또 다시 토끼가 되어버렸습니다. 눈앞에서 맹수 두 마리가 서로 먹겠다고 으르렁대고 있는 가운데 말입니다.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시대(BC 770~ BC 403). 패권을 두고 다투던 두 강대국 진(晉)과 초(楚). 그 사이에 끼어 우리 못지않게 수없이 토끼가 되었던 국가인 정(鄭)나라는 어느 쪽에 붙는 게 유리한지 항상 고민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정나라에 다행스럽게도 작은 나라가 나아가야할 길을 슬기롭게 제시해 준 이가 있었으니, 정자산(鄭子産, 정나라 재상 BC 547~BC 522)이란 인물입니다. 자산이 정치가로 활동하던 때는 진과 초가 오랜 전쟁을 휴전하고, 과점체제로 각자의 영향력을 키우던 시기였습니다. 창칼로 싸우던 전쟁이 정치로 대치된 것입니다.

원래 열전보다 냉전이 복잡한 법. 눈에 보이질 않으니, 이합집산의 셈이 더욱 까다로워졌습니다. 공자(孔子, BC 551~ BC 479)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 정치가들이 삶의 지표로 삼았던 자산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조국 정나라를 강대국의 표적이 아닌, 오히려 대우 받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재상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정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부의 부화뇌동으로 외교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또한 강대국에 예는 갖추되, 그들이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변국과 합심하여 국제적 기준을 만들어냈죠. 이는 패권국이라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국제정세가 힘의 논리에서 정치의 논리로 이동한 것입니다.

자산은 이론가이자 행동가였습니다. 대개의 위정자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 우왕좌왕 합니다. 현실과 이론의 괴리 때문이죠.

그렇다고 이론을 버리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정책이 임시방편으로 흐르게 됩니다. 임시방편의 결과는 거의 예외 없이 외침과 굴복으로 귀결됐죠. 수많은 역사가 이를 방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 이론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요?

예리한 행동가인 자산은 전략적 목표를 명확히 세웠습니다. 약소국의 경우 대외전략의 본질은 국가의 생존입니다. 강대국의 침략은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죠. 때문에 제1 목표는 침략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강대국의 착취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겠죠.

최종 목표는 뭐였을까요? 기존 구조에 조금씩 파열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강대국이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강소국이 되어 그 안에 새 판을 그리는 것. '호랑이와 곰 같은 나라'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고슴도치와 같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어떨까요? 정나라와 매우 비슷한 조건이긴 한데, 국가 생존을 걱정할 정도로 약소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존 국제질서에 파열을 낼 정도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죠. 이 때문에 우린 여전히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의 선택은 어느 쪽이 돼야 할까요? 자산은 선택이 아닌, 설득을 하라고 말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내건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최선인 것을 그들에게 다시 설득하는 작업. 그것이 '고슴도치의 나라'를 지향했던 자산이 우리에게 해주고픈 말일 것입니다.

이상엽 [sylee24@ytn.co.kr]

 

 

자산(子産) "불처럼 이글거리만 해선 안돼"

입력 2011-04-22 17:25:19 | 수정 2011-04-23 03:55:14

 

 

 

'물의 겸허'를 배운 名재상
춘추시대의 약소국 가운데에 정(鄭)나라가 있었다. 강대국인 북방의 진(晋)나라와 남방의 초(楚)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데다 군사와 경제,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26년간 별다른 무리없이 나라를 잘 다스린 재상이 있었으니 바로 자산(子産)이다.

자산이 정나라 재상이 된 과정은 《사기》의 '순리열전'에 나와 있다. 정나라 소군(昭君)이 총애하던 서지(徐摯)를 재상으로 삼았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져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친하지 못하고,아버지와 아들이 화합하지 못해 자산을 재상으로 삼게 됐다. 물론 자산이 순탄하게 재상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당시 정나라는 칠목(七穆)이란 문벌이 다스리고 있었다. 자산은 이 칠목 중의 하나인 자국(子國)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산은 아버지로부터 무술을 배웠고 천문과 역법도 익혔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나랏일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좌전》 양공 8년 조 기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자산의 아버지 자국이 다른 칠목의 하나인 자이(子耳)와 함께 채(蔡)나라를 침범해 마공자섭(馬公子燮)을 포로로 잡아와 의기양양했는데 신중한 성품의 자산은 오히려 근심을 표하며 아버지에게 은밀히 말했다.

"작은 나라가 문치(文治)를 하지 않고 무력만 숭상하면 이보다 더 큰 환란은 없습니다. 초나라가 성토하기 위해 쳐들어오면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나라에 복종하면 진나라 군대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진과 초 두 호랑이가 협공해올 것이니 지금부터 최소한 4~5년간은 편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 말을 들은 자국은 아들에게 화만 낼 뿐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예언대로 흘러갔다. 그해 겨울 초나라가 쳐들어왔고 진나라 또한 이의 견제를 목적으로 쳐들어왔다. 정나라는 몇 년간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어린 자산의 통찰력은 곳곳에서 번득였다. 또 다른 사건은 기원전 563년에 있었던 정나라 내란이다. 자사(子駟)가 일을 주모해서 노(魯)나라 임금 희공(僖公)을 독살하고 군주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사에 반발하는 사람이 많아졌고,이런 와중에 자사를 제거하기 위한 자공(子孔)의 반란이 일어났다.

자공은 간계를 써서 반란세력을 부추겼고,급습을 당한 자산의 아버지 자국을 비롯해 자사와 자이가 죽음을 맞게 됐다. 이런 위급한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본 자산은 자교와 힘을 합쳐 군대를 동원,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래도 남은 세력을 갖고 있던 자공은 9년 동안이나 국정을 농단하다 살해됐다.

경(卿)에 임명된 자산은 겸허하게 처신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우(子羽)나 비심(裨諶) 같은 인재를 등용해 정치를 논했고,그들의 의견이 타당하면 정책에 반영했다. 국제적인 문제에 적극 나서 예로써 명분 있는 외교를 펼친 그는 국가 간의 신의를 쌓고 정나라의 내란을 평정한 공으로 마침내 상경(上卿)에 올랐다.

누구나 훌륭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참다운 정치가는 드문 것이 현실이다. 재 · 보궐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다. 물의 덕성을 본받으려 한 자산처럼 스스로를 낮추며 백성을 하늘같이 여기는 참 정치인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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