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를 위하여] -- 이남곡님

2014. 9. 29. 23:08시민, 그리고 마을/시민사회운동과 사회혁신

 

                                    

이 남곡(희망연대 지도위원,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

[진보를 위하여]
칼럼에세이

2014/09/1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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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위하여>

나라가 참 어렵다. 보수(保守)도 진보(進步)도 어렵다. 지금까지의 동력(動力)은 힘을 잃고 있다. 새로운 동력을 얻지 못하면 나라는 급속한 후퇴와 침체에 빠질 것이다. 세월호의 참극은 모처럼 한마음으로 온 국민에게 ‘거룩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거룩한 마음’은 다시 진영(편가름)의 덫에 걸려 안개 속으로 묻히고, 세월호를 새로운 사회의 분수령으로 만들고 싶어 한 국민적 여망은 다시 좌절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가 보고 실감한 모순이 상처와 편가름의 골을 더 깊게 하는데 그치고 만다면 그야말로 우리 사회는 대단히 위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란은 일어날지 모르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이다. 지금의 비세(非勢)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은 나라의 한 축이다. 더욱이 본질적으로 진보는 미래 세력이기 때문에 미래의 동력을 만드는데 보수 쪽보다 더 큰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정세와 동향을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려 한다.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은 너무 어둡다. 불의, 불평등, 차별, 억압, 비인간화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밝은 희망을 위한 것이라면, 비록 치열한 싸움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은 밝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 깊은 곳에 희망이 없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악순환이다. 분노와 증오가 커지는 것만큼, 확장성은 줄어들고, 그래서 희망이 안 보이는 것만큼 어두워진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나?

요즘 진보의 '도덕성' 또는 '컨텐츠' 등에 관해 논의들이 있다. 이런 논란들이 생산적인 작용을 하기 바란다. 내가 말하는 '인문운동'은 보통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 되자는 운동과는 다르다. 도덕적 인간이 되자는 것이 좋다든지 그렇지 않다든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진보적 인간'이 되자는 것이 인문운동의 목표에 더 가깝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 생각을 진리 또는 사실이라고 완고하게 단정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리독립된 실체'를 전제로 한 분절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사구시와 구동존이의 태도와 박애(博愛)가 진보적 인간의 덕성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의 컨텐츠는 이미 대부분 나와 있다. 물어지는 것은 실제로 정권 문제를 해결할 의지 즉 정부를 구성할 의지와 능력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구체적 준비, 일상적 삶과 사회적 실천 속에서 진보적 가치들을 얼마나 체현하고 있는 지다.

진보는 자유를 확대하고,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첫째는 물질적 생산력을 증진하는 것이다. 생태, 자원, 환경을 해치는 것은 생산력 증진이 아니다. 둘째는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제도와 규범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침범을 막는 장치를 정교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의식의 진보인데, '서로 양보하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의식의 진보가 없으면 '따뜻한 사회, 인정이 넘치는 사회'로는 되지 못한다. 이 세 가지 조건은 근대나 현대나 기본적으로 같다. 다만 그 상호관계나 상대적 중요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근대와 현대의 차이, 이 나라의 중층적 복합적 모순 때문에 이른바 우리시대의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명(正名)'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그것이 '인간화'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물질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라는 근대 이래의 진보적 목표와 그 성과를 기반으로 그것이 가져온 모순과 부자유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근대적 진보로부터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뉴턴 물리학으로부터 아인슈타인 물리학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과 같은 이치) 인간화는 '물신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과 '동물 일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물적, 사회적 기초를 인류 진화의 환경으로 보는 안목이다. 즉 ‘대긍정(大肯定)’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부정(否定)에 대한 대구(對句)로서의 긍정과는 의미가 다르다. 현실의 모순과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치열한 투쟁까지를 포함하는 받아들임(受容 또는 恕)이다. 나는 '대긍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진보적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현실적인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한 책임 있는 주체로서 당당하게 나라의 장래를 위한 대담한 제안도 할 수 있는 것이 '진보'의 호연지기라고 생각한다.

연립정부의 구상도 그 하나다. 지금 우리는 진영(편가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대한민국호가 침몰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진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낡은 논리와 정서에 지배당하는 현실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구동존이(求同尊異)의 정신, 그리고 상대가 배제하고 제거 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할 동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모델, 즉 다수결 민주주의로는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힘들다고 본다. 상대적인 진보 정권 10년과 그 후 보수정권의 현실을 통해 그것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더 적합해 보인다. 그런데 현실은 제도는 물론 의식(意識)도 너무 먼 것이 사실이다. 선거제도나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도 어렵지만, 정치문화는 더 어렵게 보인다. 이것이 근본적인 엇갈림이다. 합의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것이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푸는 결단을 ‘진보 진영’이 해보자는 것이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보가 뿌리내리고 있는 영역의 대표성 있는 정당이 출현하고, 당당하게 보수 진영에 대해서 ‘연립정부’를 제안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치공학만으로 접근해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몇 차례 실패한 경험이 있다. 애국심(愛國心)과 애민(愛民)에 바탕한 절실함과 진정성이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 수 있다. 민심의 흐름은 있다고 본다. 지난 대선 시기의 ‘안철수 현상’도 그 하나로 보인다.

연립정부를 가능케 하는 개헌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정부가 구성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의 헌법 아래서라도 시도할 수 있으면 해야 한다. 그만큼 시간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2016년 총선과정이나 2017년 대선 과정에서 연립정부를 정강으로 하는 ‘새로운 정당’ 흔히 말하는 보수와 진보의 상당한 스펙트럼을 포함하는 ‘무지개 정당’이 성립하여 선거에 임하는 방법이 있다. 이것 또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는 비아냥을 받을 수 있고, 아마도 지금까지의 정치 과정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절박한 요구와 민심의 흐름을 잘 본다면, 한 번 시도해 보아야 한다. 정치에는 백면서생인 인문운동가인 나 같은 사람이니까 이런 백일몽을 꿈꾸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으로 그러니까 이런 상상력을 이야기하고 싶다. 한번 시도해보시라! 연립정부 안에서 ‘화쟁’ 하고 ‘대화’ 하면서 나라의 역사를 새로 써가는 꿈을! 세월호의 참극이 나라의 진운을 바꾸는 분수령이 되도록! 고귀한 희생을 새로운 문명의 밑거름으로 살릴 수 있도록!

안되면 우리의 국운이 그것인 걸 어쩌랴! 이익 다툼, 권력 다툼, 그 알량한 기득권들... 나라가 망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인문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이 ‘정권’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발전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