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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유적 존재인가 공유적 존재인가? Homo donator vs. Homo oeconom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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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무맨 2014. 9. 5.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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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유적 존재인가 공유적 존재인가? Homo donator vs. Homo oeconomicus

 

   

캐나다 퀘백대학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쟈크 고붓(Jacques T. Godbout)이 쓴 ‘기부하는 인간 대 경제적 인간’을 번역해서 공유합니다.

쟈크 고붓은 지난 20년 동안 사회학자로서 고전경제학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말하는 경제적 인간모델의 한계를 비판하고 극복하기 위한 철학을 꾸준하게 연구해왔습니다. 고붓이 말하는 기부하는 인간(Homo donator, 혹은 증여하는 인간) 모델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밑줄을 표시했습니다만, 기부를 투자의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비영리조직의 성과와 기부를 당연하게 연결하는 패러다임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지적은 지금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의식과 삶이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에 사로 잡혀 있는지, 그래서 시장에 예속된 앎에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는 줄 모르고 그 안에서 뭔가 성과를 내려고 아웅바둥 하는 것이 왜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어로 된 논문인데, 불어를 공부하는 아들과 함께 공동번역(아들이 주로 번역을 하고, 그 내용을 실천적 소통을 통해서 토론하면서 감수를 했습니다.) 을 한 내용을 공유합니다.

소유적 존재를 넘어 공유적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통찰을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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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 donator vs. Homo oeconomicus

Jacques T. Godbout(2005), 양다민, 양세진 옮김.

현대 사회학은 신자유주의라는 패러다임에 의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사회 내에서의 이익, 합리성, 효용을 거래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로 설명하는데 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 말했던 <효용적 이성>은 그가 살던 시기에는 아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넓은 영향력을 끼친다. ‘효용적 이성’이라는 패러다임은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위치를 갖고 있다. 나는 인간을 ‘효용적 이성’으로 보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효용적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의 핵심 가치는 두 가지이다: ‘선호’와 ‘최적화’이다. 첫 번째는 사람은 각자의 선호에 따라서 움직이며, 선호의 계열들은 그 자신만이 알고 있다. ‘선호’라는 단어는 이익을 뜻하는 단어와도 연결되며, 같은 의미로는 ‘필요’, ‘가치’, ‘목적’, ‘열정’으로도 이해된다. 어떻게 각자는 자기 선호의 우선순위를 정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사람에게 선호가 있을 때 어떻게 선택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니다. ‘효용적 이성’이라는 인간 합리성의 핵심은 편리성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도구적 합리성으로서 ‘효용적 이성’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선택하며,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선택한다. 이러한 ‘선호’ 중심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생각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도 적용이 된다. 즉, 공동체의 편리와 효용을 위한 ‘선호’의 계열화를 가치있게 여긴다. 두 번째로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은 개인의 이익을 ‘최적화’하는 것에 의해 주장된다. 사회의 각 구성원들은 개인의 이익을 ‘최적화’하는 것을 통해 전체 사회의 집합적 웰빙을 추구한다.

시장(market)과 근대의 자유

‘선호’와 ‘최적화’라는 경제적 인간 모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이론이 매력적이지 않다. 시장(martet)에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의 선호하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핵심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의 목적과 무관하다. 즉, 선호가 경제적 인간의 핵심가치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개인의 선호를 존중하는 것은 분명 근대사회에서는 귀중한 가치이다. 한편으로,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은 원하지 않은 사회적 관계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관계를 거부하거나 단절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자유를 좋아한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재화와 서비스를 거부함에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은 시장이 제공하는 고유한 가치이다. 즉, 다른 공간에서는 얻을 수 없는 특권적 가치이다.

‘선호’와 ‘최적화’라는 가치를 자유라고 여기는 시장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시장의 자유는 ‘빚(debt)’을 즉각적이고 항구적으로 탕감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시장모델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을 없애는 것이다. 시장은 이러한 균형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법에 감사한다. 빚이 탕감된 모든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우리를 어떤 의무-규칙에 맞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우리에게 자명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은 낯선 것이다. 시장에서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사회학적으로는 최적의 설명일 수 있다. 시장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링크는 내재화된 사회적 연결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이것이 근대 자유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빚의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탕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인 사회적 관계는 ‘불의’, ‘배제’, ‘착취’ 등으로 귀결된다. 사실상 시장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들로부터 도피소가 되고 말았다. 인류가 만든 사회적 결속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통해 허물어지고 있다. 호머의 율리스(Ulysse)에는 “살인하거나 훔치거나 하더라도 시장에서 교환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시장에 관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시장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졌는가?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선, 선호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호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효용적 이성’에 의한 경제적 인간 모델은 이론적으로는 가치(value)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은 중립적인 조건이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거래할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거래를 위해서는 어떤 가치든 간에 중립적인 재화와 서비스로 전환이 되어야 한다.

확연히 들어나는 선호의 중립성

시장에는 거래할 자유가 있다. 모든 가치, 모든 믿음, 모든 열정 등을 재화나 서비스로 소비할 수 있다. 경제적 인간은 ‘우리는 중립적으로 소비를 해야하며 생산자로 혹은 소비자로 이러한 모델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경제적 인간은 이러한 주장을 우선적인 가치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시장에서의 선호에 따른 선택은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만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면 경제적 인간은 왜 이러한 조건을 요구하는가? 왜냐하면, 사회가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토대와 근거를 사회 전체의 부의 증대와 성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자유를 성취할 수 있을지라도, GNP의 성장에 기여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할 수는 없다. 비록 현대 사회가 우리를 관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지라도, 엄밀하게 보면 재화와 서비스로 얽혀 있기에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재화와 서비스는 단순히 나의 필요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나의 필요에 의해 도구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재화와 서비스가 사실상 그것이 없이는 내가 생존할 수 없게 만드는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는 사실상 중립적이지 않고 우리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도구적 합리성에 기반한 경제적 인간이라는 모델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학에서는 ‘전체론(holism)’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했다. 전체론(holism)이란 사회의 각 구성주체들이 분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즉, 사회적 행위자들은 사회적 관계라는 맥락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전체론은 사회적 행위자들을 개체로서가 아니라 유기적 관계로서만 존재하게 한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지만은 않고 그들의 윤리와 가치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윤리적인 행동들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와 의무로 보이기도 한다. 전체론의 패러다임에서는 경제적 인간과 시장의 자유라는 패러다임을 즉각적으로 허물고자 한다.

도대체 왜! 우리는 주는가?

사회학은 두 가지의 패러다임 앞에 서있게 된다. 먼저 행동은 자유롭지만,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모델에 갇혀있는 패러다임이다. 다른 패러다임은 윤리와 규칙에 의해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익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패러다임에 따르면 ‘증여(불: don, 영: gift or donation)’라는 현상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익을 위해서 얻기 위해서 증여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증여하는 것을 습관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설명은 모두 증여라는 행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주는 것일까?

우리는 주는 것 이상으로 더 받는다.

증여의 첫 번째 특성은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는 것은 증여의 본질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증여에서는 무언가를 되돌려 받는다. 대부분의 증여는 내가 준 것보다 상대로부터 더 돌려받는다. 그러나 되돌려 받는 것은 증여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증여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증여는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증여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그는 무언가를 상대에게 준 후에 받았고, 받은 후에 주었다, 그렇다면 그는 받기 위해서 준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목적은 받는 것이였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증여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증여는 이런식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받지만, 증여로 연결된 두 사람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적이라는 도구적 합리성의 모델로 이해할 수 없다. 시장이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증여는 반대로 빚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 되고 관리되는 빚은 증여에 있어서 핵심적이다. 증여의 시스템에 참여한 자들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빚진 상태로 있다. 만약에 빚이 긍정적인 상태라면 그것은 각자 서로가 서로에게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진 상태이다. 증여라는 시스템은 시장의 시스템에 반대된다. 그것은 증여가 일방적이거나 무료여서가 아니라, 빚의 탕감과 거래의 자유라는 시장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증여는 이와 다른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받기 위해서 주는 게 아니다.

만약에 이 시스템이 빚진 관계와 의무라는 규칙아래 있다면 그것은 전체론 모델이다. 증여라는 시스템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서로간의 관계가 특별한 규칙안에 있다. 첫번째로 증여의 규칙들은 확실히 암묵적이다. 마음을 담아 증여하는 물건에 가격표를 남기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증여물의 가격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증여라는 행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주로 증여의 규칙을 어기려고 한다. 진정한 증여는 사회적 회심에 있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증여의 중요성 자체를 잊게 만들기도 한다. 증여하는 사람이 자신의 증여행위의 중요성을 없앤다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 수 있다. 증여하는 사람은 받는 사람에게 빚을 갚을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증여 시스템의 본질적인 규칙이다. 그래야만, 받을 때에도 그것이 진정한 증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받기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는 이유는 타인이 자발적으로 다시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증여하는 행위자들은 의도적으로 상대가 되돌려 주는 것에 대해 혹시나 다른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과 의심을 한다.

자유와 의무사이에서의 끊임없는 작용

증여에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자유는 증여의 자유와는 성격이 다르다. 증여의 자유는 빚을 탕감하는 데에서 발생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를 쉽게 단절할 수 있는 자유, 혹은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유도 아니다. 증여의 자유는 또한 사회적 관계에 내면화되어 있는 의무의 무게에 의한 관계를 더욱 더 자유롭게 하기도 한다. 증여라는 사회적 시스템은 앞서 말한 ‘경제적 인간’과 ‘전체론’이라는 두 가지 패러다임에 속해 있지 않다. 불안정 상태, 반응 즉각성, 빚, 의심은 증여라는 시스템을 반대하는 사람들 가슴안에 있다. 증여는 시장의 자유, 전체론적인 의무에 모두 반대하며, 증여는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증여의 패러다임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한 경제적 인간의 패러다임으로도 사회적 관계의 의무라는 전체론의 패러다임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증여의 패러다임은 기존 패러다임의 특권적 위치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 행동의 동등한 동기

효용과 이익, 그리고 규칙의 내면화로서 전체론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인간 행동의 원칙인가? 왜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면, 규칙의 내면화가 습관화되어서 행동하는 것으로만 생각 해야 하는가? 인간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본성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인간 행동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이익만큼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인간 행동의 이익 추구 동기는 동일한 차원에서 규칙의 내면화에 의한 습관이라는 인간 행동의 동기와 함께 공존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익만이 인간 본성에 자연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증여는 이익과 전체론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 증여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던질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의 동기에 대한 새로운 사회학적인 패러다임을 설명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있는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모든 증여 행동은 배움의 결과이고, 내면화된 규칙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동기에는 이윤의 유혹이 있고, 증여의 행동을 하는 인간의 동기에는 증여의 유혹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인간과 함께 기부하는 인간이 있다.

증여의 유혹 그리고 이윤의 유혹이 아닌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증여의 유혹이라는 가설을 인간행동의 동기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이 가설을 보충하는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근대의 증여를 분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한가지를 빼먹을 수 없다. 되돌려 받는다는 전제 아래 행해지는 증여는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되돌려 받는 가치가 높을수록 효율적인 증여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애심으로 자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증여의 유혹이라는 가설을 따른다면, 이들의 순수한 행동은 매번 속임을 당하거나, 이용당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행동은 결국 소멸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우리는 끊임없이 물질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물질적인 이익을 더 많이 얻는 것이 사람들 행동의 동기를 압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경우 반대의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준다는 행위로서 증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우리가 증여한 것보다 더 큰 것을 되돌려받기 위함이라는 것인데, 그렇게되면 진정한 증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증여가 무언가의 이익을 만드는 것이라는 가설은 이타주의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증여가 그 본래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온전하게 증명 하지 못한다. 따라서 경제적 인간의 효용 논리가 증여의 행동에 반영되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야만 증여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또는 그러한 이익에 따라 증여하는 것이 바람직한 증여의 행동인 것처럼 왜곡되는 현상에 대해 자기반성적인 성찰이 강력하게 요구된다.

기부하는 인간 그리고 증여의 본능

증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들의 협동과 이타주의적인 행동을 이야기한 많은 학자들이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많은 심리학 연구들은 인간들 상호간에 증여 해야 하는 행위가 태어날때부터 인간의 몸에 본능으로서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미국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증여하는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초콜릿을 먹었을때의 뇌파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협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반면 현대의 경제적 인간이라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은 왜 줘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요구한다. 즉, 왜 나에게 이익이 없는데 줘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증여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현상이며 존재방식임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아담 스미스가 말하듯 인간에게 이익을 위해 교환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증여의 본능이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증여의 본능이 존재한다는 가설의 선택은 우리가 주로 던지는 질문의 기준을 뒤바꿀것을 요구한다. 만약 증여의 본능이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무엇이 증여를 방해하는가?’, ‘증여하지 않아야 할 올바른 이유가 존재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관점을 뒤집기

비유를 들자면 물리학에 있어서 우리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질문을 그만둔것과 같다.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어떤 힘이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연구해 왔다. 그리고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이러한 방식으로 질문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날 한 물리학자(뉴튼, 1642~1727)가 몸이 운동을 시작했을 때 어느 한 힘이 그 몸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면, 그 운동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리고 질문을 되바꾸어서 ‘무엇이 운동을 멈추게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되바꿈 덕분에 인류는 중력(gravitation)을 발견하고 운동 물리학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익의 유혹이라는 가설 대신 증여의 유혹이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우리는 위와 같이 기존의 질문을 뒤바꾸는 행동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증여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본능으로서 증여의 유혹을 멈추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증여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질문을 캐묻는다면,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자연현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증여의 유혹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출처 : Jacques T. Godbout(2005). Homo donator vs. Homo oeconomicus, Finance & The Common Good, Summer 2005: 3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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